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2: 상고기 그리스(서기전 800~480년)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3장 그리스의 실험 2: 상고기 그리스(서기전 800~480년)
새샘 2022. 5. 21. 21:05
폴리스 polis가 등장하고 읽고 쓰기 능력이 회복되면서 서기전 800년 무렵부터 서기전 480년까지 약 300년 동안의 상고기上古期 그리스 Archaic Greece가 시작된다.
그리스는 서기전 1150년부터 350년에 달하는 암흑시대 Greek Dark Age 동안 어둠 속의 퇴보를 겪은 후 그리스 문명은 깜짝 놀랄 만한 역동성과 에너지를 분출했다.
상고기 그리스는 그 성취 때문만이 아니랄, 종교·사회·정치 등 다방면에서 적극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모색했다는 점에서도 탁월하다.
그러므로 이 시기를 실험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식민지 개척과 범그리스주의
에게해 Aegean Sea 전역에서 행해진 그리스인의 소규모 모험 상업과 이주는, 서기전 8세기와 7세기에 이르러 대대적인 식민지 개척 노력으로 발전되었다.
각각의 식민지는 하나의 독립된 조직으로서, 모母도시에 정서적 유대는 있었지만 정치적 의무는 없었다.
서기전 6세기 말까지 그리스인은 흑해 Black Sea에서 서부 지중해에 이르는 지역에 몇 백 개의 새로운 식민지를 건설함으로써 지중해 세계의 문화 지도를 영구히 변화시켰다.'
그 후 아나톨리아 Anatolia[지금의 터키 반도] 서부 해안은 중세 말기까지 그리스 문화의 보루로 남게 되었다.
많은 그리스인이 남부 이탈리아 southern Italy와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에 거주했고, 로마인은 그 지역을 '마그나 그레키아 Magna Graecia' 즉 '위대한 그리스'라고 불렀다.
서기전 4세기에 이르면 마그나 그레키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이 그리스 본토 거주 그리스인보다 더 많아졌다.
당시 그리스 식민지는 서쪽으로 프랑스 France와 에스파냐 Spain 남부 해안에도 있었다.
식민지 개척의 동기는 다양했다.
코린토스 Korinthos(영어 Corinth) 등 폴리스는 지리적 위치로는 축복을 받은 땅이었지만 빈약한 토지 생산성으로 저주를 받았다.
따라서 상업이 상고기 그리스인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서기전 8세기 코린토스를 지배한 귀족 가문들은 상업 활성화 방안으로서 아드리아해 Adriatic Sea와 시칠리아 해안에까지 식민지를 건설하는 등 야심만만한 식민지 개척 방안을 밀어붙였다.
인구 압력과 정치 혼란에 직면한 다른 폴리스들은 과잉 인구와 정치 불만세력의 배출구로서 식민지 정책을 활용했다.
식민지 팽창은 그리스인에게 다른 문화—특히 이집트 Egypt 및 페니키아 Phoenician 문화—와 접촉할 기회를 제공했다.
페니키아 도자기는 새로운 예술 주제와 신화 인물을 그리스에 소개해주었다.
이집트는 인체에 대한 초기 그리스인의 조각 표현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와 동시에 다른 문화와의 접촉은 그리스인으로 하여금 그들 공통의 정체성과 헬라인 Greek[그리스인은 스스로를 이렇게 불렀다]으로서의 독자성에 대한 예민한 의식을 갖도록 만들었다.
강한 자의식의 그리스 정신이 있기는 했지만, 지극히 독립적이었던 폴리스들 사이에서 더 큰 단위의 유대관계는 도출되지 않았다.
수메르인 Sumerian이 그랬듯이 그리스인 또한 배타적이고 개별적이었다.
그들은 개별 폴리스보다 더 큰 단위의 항구적 정치연합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언어적으로 이오니아계 Ionic 방언과 도리아계 Doric 방언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처럼 까다로운 정치 성향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인은 점차 공통의 문화와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다.
그리스 정신은 '델포이 신탁소 Delphi Trustee' 같은 범그리스적인 제의 장소, 올림픽 경기 같은 범그리스적 축제를 발달시켰다.
델포이에서는 그리스 세계 전역에서 온 사람들이 아폴론 Apollon의 여사제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그녀는 땅바닥의 갈라진 틈 위에 앉아서 유칼립투스 Eucalyptus[그리스어로 '둘러싸여 있다'란 뜻의 늘푸른 큰키나무. 처음엔 꽃받침으로 둘러싸여 있어 꽃이 보이지 않다가 꽃받침을 뚫고 나오면서 꽃이 피기 때문에 붙은 이름. 보통 높이가 40~50미터이지만 100미터 이상까지 자람] 잎을 씹고 있었다.무아의 경지에 든 아폴론 여사제의 입에서 나오는 난해한 답변은 곁에서 시중드는 사제들에 의해 완벽한 시로 옮겨졌다.
이런 답변은 대단히 애매모호해서 시일이 흐른 뒤에도 신탁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가 어려웠다.
올림픽 경기 Olympic Games를 통해 그리스인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 Zeus에게 경의를 표했는데, 경기장은 올림피아 Olympia의 거대한 제우스 신전 부근에 있었다.
그리스인은 올림픽 경기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리스 역사가들은 4년 주기의 올림픽 경기를 기준으로 연대기를 기록할 정도였다.
첫 올림픽 경기는 서기전 776년에 치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오직 그리스인만이 경기에 참가할 수 있었고, 경기가 치러지는 동안에는 그리스인들 사이의 모든 전쟁은 중단되었다.
경기의 우승자는 어마어마한 명성을 얻었으며, 소속 폴리스 안에서 사회적 지위는 물론 정치 권력마저 얻었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와 같은 경쟁은 폴리스 사이의 다툼과 대립을 멈추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스인에게 정치적·언어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같은 문화를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을 강화시켜준 것만은 사실이다.
○중장비 보병 전투
암흑시대 동안 그리스 공동체의 군사력은 시간적·경제적 여유가 있고 호메로스 Homeros(영어 Homer)의 전사 영웅이 되기 위한 훈련을 받은 엘리트에 의존하고 있었다.
평민 보병은 전투에서 일대일 결투를 벌인 귀족 전사의 추종자로서 부차적 역할만을 수행했다.
군사적 무용을 귀족이 독점함으로써 귀족계급은 초기의 폴리스에서 엄청난 정치적·사회적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 결과 귀족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적 직분과 사제직까지 장악했다.
그러나 상고기에 도입된 중장비 보병 전술은 귀족의 군사적 우위를 종식시켰다.
중장비 보병은 창이나 짧은 칼로 무장했으며 크고 둥근 방패, 몸통갑옷, 투구, 손목받이, 정강이받이 등을 착용했다.
전투 시 중장비 보병은 8열 종대로 어깨를 서로 맞댄 팔랑크스 phalanx라는 밀집대형을 유지했다.
각각의 중장비 보병은 오른손에 창이나 단검 같은 찌르는 무기를 들었으므로, 적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진하는 팔랑크스는 꿰뚫을 수 없는 성벽과 다름없었다.
제1열의 병사가 쓰러지면 뒤에 있던 병사가 나와 그 자리를 메웠다.
팔랑크스 전체의 실질적 무게 중심은 제1열의 뒤쪽에 놓여있었다.
병사 개개인은 자기 방패로 앞줄의 병사를 밀쳐냄으로써 공격을 지원했다.
밀집대형과 무거운 장비(방패 포함 약 30킬로그램)는 오직 한 가지 기술, 즉 단결력을 요구했다.
팔랑크스가 온전히 유지되는 한 그 누구도 맞설 수 없었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중장비 보병 전술이 처음 등장했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그리스인은 아시리아인에게서 그 전술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에서 왔든지 일단 중장비 보병 전술이 그리스에 도입되자 모든 폴리스가 앞 다투어 그 전술을 채택했다.
서기전 7세기에 이르러 중장비 보병 전술은 (그에 수반된 밀집대형 훈련과 더불어) 그리스인이 치른 모든 전쟁에서 기본 전술이 되었다.
그 결과는 사회적·정치적 혁명이었다.
모든 폴리스는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중장비 보병 군대를 필요로 했고, 갑옷과 투구를 장만할 능력이 있는 농민은 상고기 폴리스 안에서 하나의 정치적·사회적 세력—중장비 보병 계급—이 되었다.
중장비 보병 전투는 커다란 희생을 요구했고, 폴리스의 생존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된 남성들은 자신이 정책결정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참을 수 없었다.
한때 학자들은 중장비 보병 계급의 동요만으로도 귀족에게서 양보—정책결정 참여 및 '평등한' 정의를 보장하는 성문법 작성—를 얻어내기에 충분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정치 변화를 가져온 진정한 동력은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게서 나왔다.
○귀족문화와 참주정의 등장
서기전 7세기와 6세기에 이르러 귀족들은 여전히 그리스 폴리스들을 지배하고 있었다.
대립적인 귀족 가문들 사이에서 영향력 확대를 위한 투쟁은 일상적이었다.
귀족 가문은 새로운 법률을 이용해서 그리고 식민지 원정 함대를 파견함으로써 경쟁자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이렇듯 자기들끼리 서로 다투기는 했지만, 귀족들은 제각기 폴리스 안에서 모든 공적 권력을 장악하고 이었다.
귀족들은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정치적 직무 수행에 대한 급료를 받지 않으면서도 감당해낼 수 있는 유일한 사회구성원이었기 때문이다.
상고기 귀족들은 부·권력·영광을 누렸을 뿐 아니라 독특한 문화와 특유의 생활방식을 영위했다.
직책을 갖고 정치에 참여하는 것도 귀족적 생활방식의 일부였다.
엘리트 남성들이 (때로 엄청난 양의) 포도주를 즐기면서 친목을 도모하는 향연, (서사시에서부터 술 취해 부르는 음란한 노래에 이르는 다양한) 시, 댄스 대회, (음악과 성적 서비스를 제공한) 고급 창녀, 이 모든 것이 귀족적 생활방식을 구성하는 요소들이었다.
귀족 여성은 사회적·정치적 활동뿐만 아니라 이런 모임에서도 배제되었다.
그러므로 향연은 단순한 사교 행위 이상의 것으로서, 폴리스 내 남성 귀족 생활의 핵심이었다.
동성애는 상고기 귀족문화의 또 다른 중요한 국면이었다.
귀족의 동성애는 사회 관습에 의해 규제되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전반의 나이로 정치적으로 상승기에 접어든 남성은 10대 중반까지의 나이 어린 귀족 소년을 연인·피보호자로 간주했다.
두 사람은 긴밀하고 개인적인 유대관계를 맺었는데, 여기서 성적 관계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인 남자와 소년 사이의 이런 긴밀한 유대는 어린 연인에게 유익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소년은 정부와 사회의 작동방식을 배웠고, 나이 많은 연인은 소년이 성장한 뒤 유리한 정치적·사회적 연결고리를 제공해주었다.
실제로 플라톤 Platon(영어 Plato)은 진정한 사랑이란 두 명의 남성 연인 사이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오직 이런 관계 속에서만 남성은 그의 성격에 걸맞은 상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치관, 사상, 관습, 이념, 이 모든 것이 상고기 귀족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주었다.
그러므로 엘리트 세계 밖에 있는 사람이 폴리스의 공적 생활에 참여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상고기 중반에 이르러 귀족 엘리트 집단의 규모는 더욱 축소되었다.
이제 소수의 귀족이 경쟁자를 밀어내면서 시민 생활을 통제하는 폴리스 안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게 되었고, 다수의 귀족들은 자신의 문화에서 소외된 채 그 안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소외된 귀족들의 입장에서, 이 문제의 해결방안은 가까운 곳—중장비 보병—에 있었다.
중장비 보병 역시 정치권력에서 배제된 자신들의 처지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서기전 7세기에 정치권력 집단 규모가 축소되면서 귀족집단 사이에 폭력이 늘어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대안적 정부 형태로서의 참주정僭主政 tyranny[혈통이나 체제에 상관없이 비정상적인 방식(쿠데타 등)으로 신분을 뛰어 넘어 찬탈한 군주를 말하는 참주에 의한 정치를 말하며, 그리스 정치에서 귀족정에서 민주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정치 형태]이 흥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주僭主 tyrannos(영어 tyrant)란 원래 그리스어 Greek가 아니라 리디아어 Lydian에서 온 말이다.
그것은 전통적 헌정체제에서 벗어난 방식인 일종의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해 휘두르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상고기 그리스에서는 참주가 반드시 부패한 지배자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고전기 그리스의 사상가들은 상고기 참주들의 방만한 권력을 두려워했고, 아리스토텔레스 Aristoteles(영어 Aristotle)는 참주정을 순수한 형태의 세습정 즉 세습 왕정의 왜곡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나 상고기의 참주정은 종종 폭넓은 정치적 자치권을 향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리스의 참주는 대개 엘리트 사회에서 배제되었거나 폴리스 내 귀족 파당의 다툼에 염증을 느낀 귀족이었다.
참주가 되려 하는 자는 중장비 보병 계급에게 그들의 무력이 권력을 가져다줄 수 있다고 설득했고, 이 경우 참주는 반대급부로 중장비 보병에게 참정권을 확대했다.
참주가 권력의 고삐를 놓지 않은 채, 중장비 보병 계급에게 새로운 경제적·사법적 이익만을 제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이었다.
왜냐하면 일단 첫 참주가 중장비 보병의 희망사항을 충족시키고 나면, 참주정 자체의 더 큰 권력을 획득하는 데 있어서 민중民衆—데모스 Demos—이 걸림돌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참주정은 2대 이상 지속된 경우가 드물었다.
참주정은 귀족정이 민주정 같은 폭넓은 참여를 보장하는 정부 형태를 향해 나아가는 중간역 구실을 했다.
○서정시
상고기 그리스 문화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장르는 서정시抒情詩 lyric[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주관적으로 표현한 시]이다.
이 새로운 문학 양식은 서기전 7세기에 시작되어 그 후로도 지속되었다.
그리스 문학사상 최초의 기념비적 작품은 호메로스의 서사시이다.
웅대한 스케일의 이 서사시에는 암흑시대 그리스 사회의 영웅주의가 넘쳐흐른다.
호메로스의 뒤를 이은 헤시오도스 Hesiodos(영어 Hesiod)(서기전 700년경 활동)는 전통적 관점이 깃든 짧은 서사시를 지었다.
그의 ≪신통기神統記 Theogony≫는 신들과 신들이 만든 피조세계被造世界의 기원을 서술했다.
≪노동과 나날 Works and Days≫은 그의 교활한 형과 고향의 엘리트들에 대한 통렬한 비난으로서, 힘든 노동의 대가, 폴리스에서 정의의 가치, 이웃을 잘 대접하는 일의 중요성 등의 주제를 다루었다.
다음 세대 시인들의 작품은 소소한 주제를 다루었지만 지극히 개인적인 특성 때문에 더 큰 호소력을 가졌다.
그들은 시 안에서 시이니 자신에 대해 언급하곤 했다.
시인은 인습적인 수사修辭[보다 아름답고 정연하게 표현한 말이나 글]를 회피하고 관심 있는 주제에 집중했다.
몇몇 시인은 당시 대표적인 관습과 가치관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
파로스 Paros의 아르킬로코스 Archylochus(서기전 680~640년경)는 자신의 용병 복무를 기념하며 이렇게 썼다.
"어떤 야만인이 내 방패를 휘두른다. 내가 버린 방패였다./ 나는 도망쳤지만 그건 아무 문제도 안 된다./ 또 하나를 구할 수 있으니까."
영웅주의와 전투에서의 용감무쌍은 이제 그만!
아르킬로코스는 기꺼이 무기를 버리고 목숨을 건지기 위해 도망쳤다.
그는 또한 정절 없는 연인 및 그녀와 함께 달아난 친구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면서, 그녀를 모든 까마귀의 먹잇감이 되는 무화과나무에 비유했으며, 도망친 친구가 노예 신세로 트라키아 Thrace의 황폐한 땅에 내던져지기를 소망했다.
서정시인 가운데 가장 유명하고 세련된 인물은 사포 Sappho(서기전 620~550년 활동)였다.
그녀는 레스보스섬 Lesbos Island의 폴리스 미틸레네 Mytilene에서 살았다.
사포는 때로 남성에 대한 낭만적 갈망과 성적 욕망을 아름답고 통렬한 시로 썼지만, 여성에 대한 성적 갈망은 더욱 열정적이었다.
그녀의 한 유명한 시는 이렇게 읊고 있다.
"내게는 그분이 마치 신처럼 여겨진다./ 그분은 당신의 눈앞에 앉아서/ 부드러운 당신의 말에/ 그리고 당신의 애정 어린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내가 잠시라도 당신을 바라보았다면/ 목소리는 잠겨 말 나오지 않고/ 혀는 그대로 정지된 채 즉시/ 살갗 밑으로 불길이 달려 퍼지고/ 눈에 비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어/ 귀는 먹먹하고/ 식은땀이 흘러내릴 뿐/ 온몸은 와들와들 떨리기만 할 뿐/ 풀보다 창백해진 내 모습이란 마치/ 숨져 죽어버린 사람 같으리니."
사포의 다른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어떤 이들은 잘 정렬된 기병대가/ 또 어떤 이들은 보병들의 행진이, 또 어떤 이들은 일련의 함대가/ 검은 대지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네./ 그러나 나는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아먈로 가장 아름다운 일이라고 말하고 싶네."
물론 몇몇 서정시인은 여전히 군인다운 미덕을 상찬賞讚[기리어 칭찬함]하고 영우주의를 찬양했다.
하지만 이 시기의 서정시에서 나타난 내밀한 묘사는 서양 역사상 처음으로 등장한 전적으로 새로운 국면, 즉 당대의 지배문화와 충돌하는 경우에도 자신의 느낌을 당당히 표출하는 개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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