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4: 후기 로마 공화정의 사회와 문화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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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4: 후기 로마 공화정의 사회와 문화

새샘 2022. 12. 16. 16:03

서기전 264년에서 서기전 44년까지의 로마 팽창(사진 출처-출처자료1)

 

로마가 무심코 저지른 그리스와 소아시아 정복은 후기 로마 공화정 Late Roman Republic의 경제적·사회적·지적 삶을 변화시켰다.

새로이 로마로 편입된 막대한 재화는 로마 사회의 사회적·경제적 불평등을 증대시켰으며, 검소하고 자기희생적인 로마의 전통적 가치관을 훼손했다.

소농은 농토를 떠나 도시로 향했다.

그들은 귀족이 소유하고 노예가 경작하는 대농장인 라티푼디아 latifundia(단수형 latifundium)와 도저히 경쟁할 수 없었다.

노예가 로마 사회에서 맡은 기술공, 상인, 하인으로서의 역할은 더욱 커졌다.

로마의 헬레니즘 동방 지배는 후기 공화정의 문화생활에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그 영향이 얼마나 컸던지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 로마인은 자신이 그리스를 정복했는지 아니면 그리스가 로마를 정복했는지를 놓고 공공연히 의문을 제기할 정도였다.

 

 

○경제적·사회적 변화

 

고대 세계가 대체로 그랬던 것처럼 로마인 역시 노예제를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로마인이 당시까지 겪었던 역사적 경험만으로는 지중해 서부와 동부 정복으로 인해 어머어마하게 늘어난 노예 인구에 대한 아무런 대비책도 강구할 수 없었다.

서기전 146년 카르타고 Carthago 시가 멸망한 뒤 카르타고인 5만 5천 명은 노예가 되었다.

그로부터 얼마 되지 않아 15만 명의 그리스인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서기전 2세기 말이 되면 이탈리아에만 무려 100만 명의 노예가 있었다.

그 결과 이탈리아는 역사상 노예 의존도가 가장 높은 경제생활을 영위하게 되었다.

 

노예의 대부분은 로마 귀족계급이 소유한 광대한 (그리고 점점 규모가 커가던) 영지에서 농업노동자로 일했다.

이 영지의 일부는 과거 로마인이 이탈리아에서 벌였던 정복활동의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그 밖의 영지는 귀족이 몇 천 명에  달하는 소농의 토지를 사들임으로써 생긴 것이었다.

이들 소농은 거대 규모 라티푼디아를 상대로 해서는 곡물 생산에서 가격경쟁력이 없음을 깨닫고 토지를 팔아치운 것이다.

특히 에스파냐 España와 그리스 원정에; 여러 해 동안 동원되었던 병사들은 가족 농장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병사들은 전쟁과 제국 덕분에 획득한 막대한 이익을 토지에 투자하려는 귀족에게 자신들의 농장을 (종종 아주 후한 가격에) 팔아버리고 도시로 이주했다.

그러나 도시에는 일자리가 없는 경우가 빈번했다.

로마는 산업화로 이행한 적이 없었다.

노예가 모든 힘든 일을 떠맡은 상황에서, 산업화의 전제조건인 기술 개발에 뛰어들게 할 만한 동기부여는 전혀 없었다.

대규모 제조업이 없는 현실에서 도시인구는 실업상태에 놓였고, 그들은 정치적으로 대단히 강력한 폭발성을 가지고 있었다.

서기전 1세기에 로마의 100만 인구 중 거의 3분의 1이 국가로부터 곡물 무상배급을 받고 있었다.

무상으로 곡물을 배급한 이유는, 첫째 그들의 생존을 위해, 둘째 그들을 침묵시키기 위해서였다.

 

로마 경제는 서기전 3세기 중반까지만 해도 근본적으로 농업적이었다.

상업 경제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다음 세기인 서기전 2세기에 접어들어 로마는 동방 정복으로 인해 헬레니즘 세계의 정교한 상업 경제 속으로 완전히 편입되고 말았다.

격심한 경제 변화의 최대 수혜자는 공화정 로마의 네 계급 가운데 두 번째에 속한 기사(나머지 세 계급은 원로원 귀족, 평민, 노예)였다.

해외무역 상인이었던 기사들은 로마의 해외 사치품에 대한 게걸스러운 수요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기사들은 속주에서 로마 정부의 대리인 역할을 하면서 광산 운영, 도로 건설, 세금 징수와 같은 업무를 수행했지만, 그 와중에서도 사욕 추구를 게을리하는 경우는 없었다.

그들은 또한 로마 국가와 고통받는 개인들에게 돈을 빌려준 대금업자이기도 했다.

대출금에 대한 이자율은 턱없이 높았고, 국가가 채무를 상환하지 못할 경우 국가는 대금업자에게 속주의 힘없는 주민을 착취해도 좋다고 승인하곤 했다.

 

토지를 잃은 평민이 경제 변화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노예야말로 로마의 변화로 말미암아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계급이었다.

로마의 노예는 거의 인간으로 간주되지 않았고, 가축과 매한가지로 단지 생산을 위한 도구로 취급되었다.

노예 중 일부는 전쟁포로로 잡혀온 교양 있는 외국인이었다.

하지만 노예 소유주의 기본 방침은 노예의 기력이 고갈돼 죽거나 늙은 뒤 해방되어 혼자 사는 날까지 그들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노동력을 뽑아내는 것이었다.

정복전쟁의 결과 노예를 구하기가 쉬어졌고 가격 또한 쌌기에 로마의 노예제는 고대의 다른 문명들에게 비해 훨씬 더 비 인간적이고 잔인한 제도가 되었다.

때로 가내 노예는 관대한 처분을 받았고, 로마 시내의 일부 노예 기술공은 개인 점포 운영을 허락받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노예들 운명은 끔찍한 것이었다.

 

노예는 로마의 식량 공급을 위한 농업 생산과 도시 상점에서의 노동을 대부분 떠맡았다.

노예는 또한 수많은 비생산적 활동에도 투입되었다.

일부 사업가는 소유 노예를 검투사로 훈련시켜 구경거리를 위해 짐승이나 다른 검투사에 의해 죽임을 당하도록 했다.

사치스러운 생활 때문에 몇 천 명의 노예가 가내 서비스에 종사했다.

부유한 가문에서는 노예를 문지기, 쓰레기 운반인, 시중꾼, 하인, 그리고 자녀의 가정교사로 부렸다.

일부 대갓집에서는 목욕 후 주인의 마사지 전담 노예 또는 샌들 전담 노예를 따로 두기도 했다.

이런 모든 하인 직분을 노예가 맡아 했다.

 

노예 노동에 대한 극단적 의존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노예 구입 가격과 결합해 로마인으로 하여금 기계과학과 노동력 절감 장치의 발명에 무관심하도록 만들었다.

물레방아와 조야粗野한(거칠고 막된) 형태의 증기기관이 로마 전 역사를 통해 로마인 사이에 알려져 있었지만 로마인은 이런 기구에 관심을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값싼 노동력이 끊임없이 공급되는 한 그들에게는 그런 장치가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가정생활과 여성의 지위

 

새로운 영토 획득 때문에 가정의 성격과 여성 지위에도 변화가 생겼다.

초기 로마 가정은 가족 구성원에 대한 남편의 절대적 권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서기전 2세기를 거치면서 두 가지 법률적 혁신으로 가부장적 지배방식에 큰 변화가 왔다.
하나는 자유 결혼의 도입이었다.

이로써 남편에게 귀속되었던 아내 소유의 친정 부친 재산 지분은 이제 그녀의 몫으로 남게 되었고, 그녀 사후에는 그녀의 부친이나 부친 상속자에게 귀속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유 결혼과 더불어 도입된 새로운 이혼 법규로, 이제 남편만이 아니라 아내도 이혼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변화는 재산이 한 가문에서 다른 가문으로 옮겨감으로써 노예 유입으로 조성된 대농장의 규모가 축소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 변화는 아내의 법적 독립성을 높여주었다.

노예제 또한 부유한 여성에게 크나큰 실질적 독립성을 가져다주었다.

노예가 자녀 양육과 가사노동 따위의 여성의 전통적 임무를 떠맡았기 때문이다.

상류계급 로마 여성은 이제 더 많은 시간을 가정을 떠나 다양한 사회적·지적·예술적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동방의 헬레니즘 세계 정복은 로마 상류계급의 생활 속에 그리스적 사상과 관습이 대대적으로 유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로마인은 문화생활의 소박함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로마의 상류계급은 그리스 문화를 세련됨의 지표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그것을 추구할 만한 재력도 갖추고 있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 2개 국어 사용은 점차 흔한 일이 되었고, 그리스 문학은 하나의 표준이 되어 로마 작가들은 그것에 자신을 맞춰가게 되었다.

로마 어린이는 그리스어 교육을 받았고 연극과 문학이 유행처럼 확산되었다.

지중해 세계를 정복한 로마인은 헬레니즘 그리스인이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즐겼던 음식도 재빨리 도입해 즐겼다.

일부 로마인은 그런 변화에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에게는 '훌륭한 옛 로마의 전통'―가부장적 권위와 엄격한 군율―이 흐늘거리는 유약한 삶의 유혹에 자리를 내준 것으로 보였다.

그들의 저항은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거대한 변화의 조류를 막아낼 수는 없었다.

바야흐로 로마는 농민 공화국에서 복잡다단한 사회로 돌이킬 수 없이 변화해버렸다.

새로운 사회에서 가난한 자와 부자 사이에는 거대한 간극이 생겨났고, 남성과 여성 모두 개인적 자율성이라는 새로운 관습을 갖게 되었다.

 

 

○에피쿠로스 철학과 스토아 철학

 

후기 로마 공화정은 그리스 철학 사상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에피쿠로스 철학 Epicureanism을 표명한 로마인은 시인 루크레티우스 Lucretius(서기전 99~55)였다.

그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라는 장편 철학시를 저술했다.

이 작품에서 루크레티우스는 모든 초자연적 존재에 대한 공포―그는 이 공포가 마음의 평화에 가장 큰 방해가 된다고 생각했다가 제거된 우주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신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했으나,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도 지배하지도 않으며 다만 영원한 평화 속에서 살고 있다고 행각했다.

인간 정신을 포함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원자들의 우연한 결합의 결과물이다.

정신은 물질과 떼려야 뗄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죽음은 완전한 사멸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격의 일부가 내세에 살아남아 보상받거나 징벌 받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루크레티우스가 생각한 훌륭한 삶에 대한 개념은 간단하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향락이 아니라 '평화롭고 깨끗한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의 철학 사상은 독창적인 것은 아니지만 장엄한 표현과 감동적 열정을 담은 음악적 리듬 때문에 루크레티우스는 역사상 가장 대한 시인 중 하나로 꼽힌다.

 

스토아 철학 Stoicism은 서기전 140년 무렵 로마에 도입되었고, 이내 로마의 수많은 고위 공직자가 이에 귀의했다.

그들 중 가장 위대한 인물은 '로마 수사학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키케로 Cicero(서기전 106~43)였다.

키케로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포함한 수많은 철학자의 영향을 받았지만, 그 무엇보다도 스토아 철학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키케로의 도덕 철학은 미덕을 행복의 충분조건으로, 그리고 마음의 평정을 최고선으로 본 스토아 철학의 전제에 입각했다.

그는 이성의 인도 아래 슬픔과 고통을 초월한 사람을 이상적 인간상으로 생각했다.

키케로가 그리스 스토아 철학자들과 달랐던 점은 적극적인 정치적 삶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는 국가에 대한 봉사라고 하는 로마의 오랜 전통을 대변하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키케로는 자신이 독창적인 철학자라고는 결코 주장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목표가 그리스 철학의 가장 좋은 것을 서방에 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그 방면에서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키케로의 산문체는 라틴어 작문의 표준이 되었고 그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비록 위대한 사상가는 아니었지만, 키케로는 고대의 사상을 라틴어로 중세 및 근대 유럽에 전달해준 갖아 큰 공로자였다.

 

루크레티우스와 키케로만 후기 로마 공화정의 빼어난 저술가였던 것은 아니다.

바야흐로 상류계급에서는 그리스어 습득 및 그리스 대중문학의 라틴어 개작이 유행했다.

그 결과 문학적 가치를 지닌 작품들이 등장했으며, 그 가운데서 플라우투스 Plautus(서기전 254경~184)의 난잡한 희극, 카툴루스 Catullus(서기전 84경~54경)의 열정적 연애시, 율리우스 카이사르 Julius Caesar(서기전 100~44)의 힘찬 종군기 등이 있다.

 

 

○종교

 

로마인의 종교 신앙도 공화정 후기 2세기 동안 여러모로 변화를 겪었으며, 이 또한 주로 로마와 헬레니즘 세계의 상호작용 때문에 나타난 변화였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동방 신비종교들의 확산이었다.

이들 종교는 전통적인 로마 종교보다 감성적인 종교를 갈망하던 대중을 만족시켰으며, 처참하게 땅에 짓밟힌 그들에게 영생의 보상을 약속해주었다.

이집트에서는 이시스 Isis와 오시리스 Osiris(오늘날 세라피스 Serapis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숭배가, 소아시아에서는 거세된 사제 및 난폭한 주신제를 동반한 지모신地母神(땅이 가진 특성을 모성 원리에 빗대어 인격화한 신) 숭배가 들어왔다.

그러나 이들 새로운 종교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로마인들은 가정과 도시를 지켜주는 전통적 신들에 대한 숭배를 계속 이어갔다.

로마의 다신교는 배타적 종교가 아니었다.

전통적인 신들이 합당한 존중을 받기만 한다면 새로운 신들은 얼마든지 추가되고 숭배될 수 있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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