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5 - 눈잣나무 본문
소나무과 소나무속에 속하는 늘푸른 떨기나무인 눈잣나무는 설악산 등 높은 산의 극한 상황에서 거의 누워 자라는 잣나무이다.
학명은 피누스 푸밀라 Pinus pumila, 영어는 dwart Siberian pine(난쟁이 시베리아소나무), 중국어 한자는 천리송千里松, 만년송萬年松, 언송偃松(누울 언偃) 등이다.
서식지 파괴와 기후변화로 차츰 사라져가고 있어 보호가 시급하다.
눈잣나무는 우리나라 설악산의 주봉인 대청봉 부근에서만 볼 수 있고, 극렬한 환경에서 주인 노릇 하며 천신만고 살아가고 있고, 북한의 금강산·묘향산·장백산 등 높은 산꼭대기에만 남아 있다는 신기한 사실 때문에 관심을 끌고 있다.
○다양한 이름과 특징
우리나라 잣나무 종류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울릉도 섬잣나무는 씨에 발달한 날개가 달려 있고, 나뭇진이 분비되는 나뭇진길(수지도樹脂導)은 눈잣나무처럼 겉껍질(표피表皮)에 접촉해 있다.
눈잣나무는 '누운잣나무'란 이름이 줄어든 것으로, 줄기가 바로 서지 못하고 땅을 기어가는 모양이라 이런 이름을 얻게 되었다.
한자 이름인 '언송'도 '누울 언偃' 자를 쓴 누워 있는 소나무라는 뜻이다.
또 천리송이란 이름은 땅을 기어서 줄기기 길게 뻗는 것에서 붙은 이름이고, 천첩송千疊松이란 별명은 가지를 넓게 펴나가는 모습을 형용한 것이다.
또한 높은 산꼭대기에서만 볼 수 있어서 절정송絶頂松으로도 불린다.
서양 사람들은 난쟁이소나무라 하고 일본 사람들은 앉은뱅이소나무 도는 기는소나무로 부르는데, 모두 이 소나무의 독특한 모양을 의식하여 지은 이름이다.
눈잣나무는 엎어지고 넘어지고 자빠지면서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간다.
떨어진 솔잎으로 덮힌 땅속에는 곰팡이와 작은 동물들이 살 수 있어 별천지가 된다.
이와 같은 환경을 식물기후 도는 미세기후라고 하는데, 이런 특수 환경은 눈잣나무가 뿌리를 잘 내리고 살아가는데 유리한 조건이 된다.
살아가는 조건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는 것은 어려우면서도 해내지 않으면 안 될 일이다.
어느 누구라도 이곳 눈잣나무를 도와줄 수 없다.
길이 3~6cm의 눈잣나무의 바늘 모양 잎은 5개씩 모여 달리며 끝은 뾰족하다.
앞면은 짙은 녹색이고 뒷면에는 2줄의 흰색 숨구멍줄이 나 있다.
암수한그루인 눈잣나무는 5~6월에 꽃이 핀다.
홍자색의 난형인 암꽃송이는 수꽃이삭 위쪽에 몇 개가 달리며, 수꽃이삭보다 늦게 익는다.
황갈색 수꽃이삭은 새 가지 아래쪽에 여러 개가 모여 달리며, 제꽃가루받이를 피하려고 암꽃이삭이 성숙하기 전에
꽃가루를 날린다.
○잣을 노리는 동물들
꽃이 핀 이듬해 7~8월에 녹색에서 갈색으로 익는 열매는 길이 3~5cm의 난형 솔방울(구과毬果)이다.
우리가 잣이라고 부르는 열매 안에 있는 씨는 0.5~1cm 크기의 거꿀달걀꼴(도란형倒卵形)이며 날개는 없다.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가는 눈잣나무를 괴롭히는 것은 솔방울과 잣을 즐겨 먹는 곰으로서, 지난날 눈잣나무로 뒤덮힌 산은 인간이 살고 있는 속세를 내려다보면서 별미를 맛보는 곰들의 연회장이었다.
한편 새들도 눈잣나무의 잣을 즐겨 먹는다.
산에서 장사를 하면서 지내는 사람들은 솔방울이 익을 때면 많은 새들이 몰려들어 불과 며칠 사이에 모든 것은 따먹는다고 말한다.
그 결과 눈잣나무의 씨를 얻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다람쥐 역시 이것을 그냥 두지 않는다.
이렇게 하여 씨앗을 맺어 자손을 퍼뜨리고자 하는 눈잣나무의 소망은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줄기부터 뿌리를 내려 영토를 넓혀나가자는 계획이다.
소나무나 잣나무가 줄기부터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거의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눈잣나무는 생존을 이어나가는 중요한 수단으로 이를 선택하게 된다.
○눈잣나무의 적, 인간
무엇보다도 눈잣나무의 가장 무서운 적은 인간이다.
대청봉 주변의 눈잣나무가 오늘날 수난을 겪게 된 것은 곰도 아니고, 새도 다람쥐도 바람도 아니다.
그것은 사람 때문이다.
필자(임경빈)는 1984년 10월 20일 무렵 대청봉에서 하룻밤을 보내면서 이곳 눈잣나무 밭의 상황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주로 서쪽 바람을 받은 나무줄기는 동북방을 향해서 쓰러져 있었고, 나무의 키는 1m를 넘는 것이 없었다.
중청봉에서 대청봉으로 향하는 등산로를 따라 길이 넓게 나 있는데, 눈잣나무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생존의 터존이 위협을 받고 있는 눈잣나무, 억세게도 모진 목숨을 간신히 이어가고 있는 눈잣나무, 그들은 통곡하고 있었다.
통곡의 벽이 있다더니 필자는 이 언덕을 일단 '통곡의 언덕'으로 이름 붙였다.
이 언덕을 잃으면 이제 영영 그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말 것이다.
○자생지의 특성
눈잣나무는 북쪽 고산 지대에서 좀 더 많이 볼 수 있다.
그만큼 춥기 때문이다.
비래봉, 숭적산, 만탑산, 장백산, 추애산 등 산꼭대기에 나무가 살고 있다.
과거 백두산에도 있었겠지만, 화산이 폭발할 때 눈잣나무들이 모조리 불탄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 후지산도 그 폭발 때문에 눈잣나무의 식생을 잃고 말았다고 한다.
눈잣나무는 산 아래쪽에서는 분비나무나 가문비나무와 싸워서 이겨낼 수 없다.
힘이 부친다.
그러나 추운 강풍 지대에서는 이들을 이겨낸다.
기온이 낮은 빙하시대에는 눈잣나무가 아래쪽에서도 터전을 잡아 행세를 했었다.
지구 기온은 올라가고 있고 산업활동으로 세상이 점점 따뜻해지고 있는 현재, 눈잣나무가 갈 길이 막연해졌다.
태백산에도 눈잣나무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은사였던 일제강점기 일본 식물학자 우에키 박사는 태백산 1800m 고지에 눈잣나무가 있다고 기록한 바 있고, 정태현 선생은 설악산이 눈잣나무의 남쪽 한계라고 주장했다.
시베리아 등 소련의 북동 지방에 눈잣나무와 닮은 잣나무가 있는데, 셈브라잣나무(피누스 셈브라 Pinus cembra)가 그 주인공이다.
셈브라잣나무는 유럽 알프스산맥 군데군데 분포한다.
우리나라의 눈잣나무는 한때 셈브라잣나무의 한 변종으로 취급된 적이 있다.
일본에도 눈잣나무가 있는데, 자람이 매우 늦어 1년에 불과 2~4cm 정도 커나간다는 조사 기록이 있다.
유럽의 셈브라잣나무는 자람이 더 좋은 편이다.
○설악산 눈잣나무의 추억
언젠가 필자는 눈잣나무를 찾기 위해 아침 9시에 수렴동 산장을 떠났다.
당시 높게 띄운 연실처럼 휘휘 굽은 빗줄기가 산허리를 뽀얗게 덮으면서 내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나뭇가지가 우수수 소리를 내고 있었다.
비를 흠뻑 맞으면서 산장을 떠났다.
오르는 길에 비는 눈으로 변하고 말았다.
그해의 첫눈을 구곡담 계곡에서 맞게 되었는데, 서설瑞雪이었다.
올해를 좋게 마무리할 수 있겠다 싶었다.
쌍폭의 비경을 지난 때는 바로 정오, 빨리 올라온 셈이다.
군데군데 눈측백나무, 만병초 군락이 나타났고, 분비나무의 고목이 어려운 생활의 터전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봉정암 뒤 기린봉의 돌은 얼마 안 가서 떨어질 것만 같았다.
봉정 산장의 처마에는 고드름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소청을 바라보면서 올랐다.
길에 눈에 쌓여 있었다.
모든 나무는 얼음옷(빙의氷衣)을 입고 있어 만산滿山은 장관이었다.
손에 든 주목 지팡이를 빼앗길 정도로 바람이 강했다.
얼굴 오른쪽이 찬 바람에 마비되고 말았다.
소청에 이르러 따끈한 당귀차를 마신 뒤, 대청의 낙조를 보기 위해서 떠났다.
중청을 지나 눈잣나무 밭에 이르렀지만, 날이 어두워 내일 보기로 하고 대청을 올랐다.
서쪽에 깔린 구름바다 위에 붉은 불덩어리가 잠기고 있었다.
장엄한 원시原始에 몸이 떨렸다.
미약한 생명이 선경仙景에서 떨고 있었다.
떨고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발칙한 것이기 때문이다.
대청봉에 올라 사방을 내려다보고 고요히 밤을 맞이하는데, 문득 가친家親(남에게 자기 아버지를 높여 이르는 말)의 시 한 수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가친께서 예천군 부용봉에 올라 느낀 감상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부용봉은 아름다운 산이고 소백산맥 중에 솟아오른 산이다.
부용봉상과 대청봉상의 느낌은 부자지간에 비슷하다.
"만 길이나 되는 부용에 올라 눈앞에 신선이 사는 옥루玉樓를 보노라
끝도 없이 모서리도 없이 아득하기만 한데
종소리 없고 경문經文 읽는 소리 없어 절간은 적막하다
안개가 걷히고 구름이 걷히어 아래 세상이 한가롭다
외로운 수레(달)는 항아(달 속에 사는 선녀)의 한스러움을 안고
노승老僧의 혜채慧彩(지혜로운 빛)처럼 빛난다
우리 어찌 이 밤에 잠을 이룰 수 있겠는가
바라건대 단원團圓(보름달)이여 밤마다 오너라 밤마다 오너라"
이 시의 내용은 읽어보는 그대로다.
산에 올라 그때의 정황을 표현했으며, 밤이 되자 보름달이 솟아 잠 못 이룰 아름다운 경지를 토로한 것이다.
대청봉 위에서 내다보는 낙조나, 동해의 일출이나, 나에게는 서로 통하는 웅장한 자연의 펼쳐짐과 같다.
대청봉 산장은 여러 사람으로 붐볐다.
젊은 여자가 손을 훅훅 불며 "무서워, 무서워!"하면서 안으로 뛰어들어온다.
무엇이 무서우냐고 물었더니, 한량없는 하늘의 별이 금방이라도 대청봉으로 쏟아질 것 같아서 더는 서 있을 수가 없다고 한다.
나는 정말일까 하고 나가보았다.
나 역시 하늘의 별을 오래 쳐다볼 수 없었다.
위압되어 눈잣나무처럼 쓰러질 것만 같았다.
바깥 기온은 영하 10도였다.
눈잣나무처럼 대청봉의 밤잠을 겸손하게 청했다.
이러한 극단적인 환경에 자라고 있는 눈잣나무도 지난날 학문하는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곤 했었다.
인재仁齋 강희안姜希顔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만년송萬年松에 대해 "이 나무는 층을 이룬 가지에 타래실을 아래로 드리운 듯한 잎을 달고, 줄기는 굽어 붉은 뱀 같고, 향기가 청렬淸洌한(맑고 차가운) 것이 좋으며, 이른 봄에 가지를 꺾어 삽목을 해서 묘목을 얻을 수 있고 분재감으로 좋다. 금강산과 묘향산의 꼭대기에 잘 나는데, 승려들은 이것을 캐서 부처님께 올리는 향의 재료로 삼는다"라고 했다.
우리 선조들이 세밀한 관찰을 통해 이 나무를 꺾꽂이로 번식시켰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2.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http://www.nature.go.kr/kbi/plant/pilbk/selectPlantPilbkDtl.do?plantPilbkNo=31674#dtlInfo)
3. 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6/02/2015060202010.html
4.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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