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7 - 느티나무 본문
느릅나무과 느티나무속의 갈잎 큰키나무 느티나무는 한반도가 원산지로서, 오래 살고 가지가 넓게 펼쳐져 쉼터를 제공하므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심는 정자나무(정자목亭子木)다.
학명은 젤코바 세라타 Zelkova serrata, 영어는 Sawleaf zelkova(톱니잎느티나무) 또는 Japanese zelkova(일본느티나무, 중국어 한자는 괴목槐木(회화나무 '괴'), 거欅(느티나무 '거'), 규목槻木(물푸레나무 '규') 등으로 표기한다.
선비나무라 일컬어지는 회화나무를 뜻하는 한자 괴槐를 쓸 만큼 품격이 높은 나무다.
재질이 좋아 기둥에서 관재까지 고급 목재로 쓰인다.
○정자나무 이야기
어느 마을이든지 한두 그루의 정자나무가 있기 마련이다.
정자나무가 없는 마을이 있다면 그 마을은 무언가 부족한 마을로 보일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마을의 큰 나무를 보호해서 마을 나무로 만들었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정자나무를 "집 근처나 길가에 있는 큰 나무로서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하여 그 그늘 밑에서 사람들이 놀거나 쉰다"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완벽한 풀이가 아닐 수 없다.
누구든지 그곳에 갈 수 있고 모일 수 있으며 그늘을 이용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서민적이고 민주적인 큰 나무여야 한다.
늦봄부터 초가을에 이르는 더운 때, 그 녹음의 값을 높게 평가받는 것이 바로 정자나무다.
나무가 아무리 크고 웅장하다 하더라도 어느 누구의 집 안에 있어 여러 사람이 이용할 수 없다면 그 나무를 정자나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무가 크면 몇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시원한 바람을 나누면서 매미 소리를 듣는다.
말매미, 쌔롱매미, 참매미, 풀매미, 모두가 모여서 어울려 부르는 노래 고비로 한나절의 흰 구름이 살결을 덮을 때면 정자나무 아래는 이 세상에 둘도 없는 야외 음악당이 된다.
이와 같이 순수한 음률로써 정자나무 아래 모인 사람들의 정서는 흰 구름보다도 더 부드럽고 깨끗한 것이 된다.
그곳에 머무는 동안 사람들은 스스로 부드럽고 깨끗한 것이 되어가는 것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정자나무는 더욱 값진 것이다.
정자나무 아래 모이면 누군가 이야깃거리를 하나 내놓게 되고, 모든 사람의 귀는 그곳으로 쏠린다.
노인이건 젊은이이건, 남자건 여자건, 모두 그 화제에 참여하고 관심을 가지며, 경험이 있거나 견문이라도 있으며 서슴지 않고 토론에 참여한다.
그 화제는 다양하게 펼쳐지지만 가장 보편타당한 것으로 쏠리고 하나의 결론으로 모이게 된다.
그 화제는 무엇이든 좋다.
호랑이 잡는 이야기, 도깨비 이야기, 천년을 산다는 신선 이야기, 담배 농사 잘하는 이야기, 또는 정치 이야기 등 아무런 제한이 없다.
그래서 정자나무 아래는 마치 민주주의 회관 같다.
끝내는 도깨비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곳에 모인 어린 세대는 기성세대에게서 여러 가지 지식을 이어받게 된다.
때로는 한문 선생님이 글방 아이들을 데리고 정자나무 아래로 오기도 했다.
"마상봉한식馬上逢寒食' 하고 소리 내어 당시唐詩를 읽던 지난 여름날이 되살아난다.
이처럼 정자나무 아래는 때때로 다목적 마을회관이 되었다.
마을을 찾아다니는 엿장수는 엿목판을 아예 이곳에 놓아두고 돌아다니며 장사할 생각이란 없어 보였다.
엿장수의 엿목판은 세 계단으로 되어 있는데, 맨 위층은 손거울·가위·화투목·박가분朴家粉(1920년대를 석권했던 국내 관허 제1호 화장품)·연지·쪽집게·실·바늘 등이 진열되어 있고, 중간층에는 박하를 박은 엿판이 있었으며, 아래층에는 돈 대신 받은 쌀·보리쌀 등이 들어 있었다.
지금은 이러한 엿장수가 없어져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허전함을 느낀다.
그래서 정자나무 아래는 '아름다운 추억의 고향'으로 느껴진다.
정자나무는 가지가 동서남북으로 고루 뻗고 잎이 깨끗하면서도 우거지며 나무갓(수관樹冠)이 빽빽해야 한다.
그리고 나무줄기는 위엄과 품위를 지니고 있어야 하고, 나무모양(수형樹型)이 단정해서 원만한 기품을 보여야 한다.
이러한 정자나무 조건에 합당한 것으로는 먼저 느티나무를 들 수 있다.
느티나무의 별명이 정자나무일 만큼 이 나무은 거의 완벽한 정자나무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다.
억센 줄기는 강인한 의지를, 고루 퍼진 가지는 조화된 질서를, 단정한 잎들은 예의를 상징한다.
충·효·예의 나무라고나 할까?
이 나무는 잎이 먼지를 타지 않아서 항상 깨끗하고, 벌레가 적어서 귀인貴人을 연상시킨다.
느티나무는 정말 위대한 나무라고 할 수 있다.
'정자송亭子松'이란 말이 있다.
이것은 소나무도 정자나무로서 좋다는 뜻인데, 소나무는 그늘이 약하고 가지의 퍼짐이 부족하다.
곳에 따라 훌륭한 나무들도 있지만, 정자나무로서는 그 어느 것도 느티나무를 따라올 수 없다.
○나무 이름
느티나무는 한자로 괴목槐木 또는 거欅로 쓴다.
나무모양이 아름답고 목재의 쓰임새가 넓으며 그 재질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문화적인 인식에 있어서는 느릅나무나 회화나무 따위에 밀리는 느낌이 든다.
우리 선조들은 회화나무를 괴목槐木이라 부르며 귀한 나무로 여겼고 기록에서도 이를 많이 볼 수 있지만, 느티나무는 그 명칭인 거수欅樹가 옛 책에 잘 나타나지 않는다.
회화나무는 괴위槐位라든가 괴정槐鼎이라 해서 높은 벼슬자리를 상징하여 중국 주대周代부터 고사에 나오는 등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지만, 느티나무는 그렇지 못했다.
1932년 일본인이 우리나라 식물 이름을 집대성한 ≪선만식물자휘鮮滿植物字彙≫에 보면, 거수欅樹/柜樹를 팽나무(가수榎樹) 비슷한 것으로 설명하고, 그 열매는 성숙했을 때 달고 생으로 먹을 만하다고 했다.
이 경우에는 거수라 하면 팽나무류를 뜻하는 것이 된다.
괴槐를 회櫰로 쓰기도 하지만 이 두 글자의 중국 발음은 서로 같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일반적으로 槐를 쓰지 櫰는 그다지 쓰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우리나라의 느티나무를 광엽거光葉欅 또는 대만거臺灣欅라고 한다.
잎에 녹색의 윤기가 있어서, 또 대만에서 볼 수 있기에 이런 명칭을 얻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대만에만 자라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왜 그런지 우리나라의 고서나 시와 문장에 느티나무는 잘 나타나지 않고 있다.
느릅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등과는 좀 색다르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는 풀이하기 쉽지 않다.
정태현 박사는 느티나무의 한자명으로 괴목, 거, 규목 등을 들었다.
일본인 우에하라는 느티나무의 한자명을 여러 가지로 들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우리나라와 중국과 공통이라고 할 수 있는 '느티나무 거欅'다.
회화나무를 뜻하는 괴목을 느티나무의 한자명으로 들고 있는 것은 지난날 나무 이름에 대한 한자명의 부정확성을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우리나라에서도 느티나무를 괴목이라 불렀고, 느티나무 목재로 만든 밥상을 괴목상이라 해서 귀하게 여겼다.
왜 괴목이란 말로 느티나무를 칭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도 느티나무 이름으로 '느릅나무 유楡'자도 들고 있는데, 옛적에는 느티나무·느릅나무·회화나무를 혼동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또 귀목이란 이름도 있는데, 귀貴 자는 가마채나무 귀로 읽는다고 한자 사전에 나와 있다.
느티나무로 흔히 가마채를 만들었다면, 또 느티나무를 귀한 나무라고 쳤다면, 이 이름은 받아들일 수 있다.
또 느티나무를 규목이라 칭하는데, 규槻 자는 나뭇가지가 아래로 처지는(목지하곡木枝下曲)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느티나무는 오래 되면 곁가지가 멀리 퍼지고, 그 곁가지에서 다시 작은 가지들이 많이 나서 아래로 드리우게 된다.
그래서 느티나무는 정자나무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그 아래에 좋은 그늘을 만드는데, 이런 느티나무의 특징을 생각한다면 규목이라는 이름은 알맞은 이름일 것이다.
느티나무를 거류欅柳라고 말하는 것도 곁가지가 처지는 특징과 관련된 이름일 것이다.
○다재다능한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한국, 일본, 중국에 분포한다.
한국에서는 제주도에서 평안남도까지 자라지만, 추위에 약하여 북쪽으로 갈수록 그 수가 적어진다.
목재는 황갈색의 아름다운 무늬와 색상을 가지고 있으며, 결이 곱고 단단하여 마찰과 충격에 잘 견딘다.
국내 나무 가운데 최상급 목재라고 할 수 있다.
≪태종실록≫과 ≪세종실록≫을 보면 임금을 알현할 때 손에 드는 홀笏에 괴목을 쓴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상진 교수는 가야시대 고분과 경주 천마총에서 출토된 관, 완도군 약산도에서 인양된 고려 초기의 화물선, 해인사 법보전, 화엄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 부여 무량사 극락전의 기둥은 모두 느티나무로 만들었다고 말한다.
느티나무는 흔한 나무이기 때문에 가구재로 널리 쓰였다.
느티나무로 만든 조선시대 뒤주, 궤짝, 장롱, 밥상, 사방탁자, 사찰의 구시 등이 발견된다.
그밖에 악기, 조각재, 불상 조각에도 널리 쓰였다.
≪주례≫에 '동취괴단지화冬取槐檀之火'라는 말이 있다.
겨울에는 느티나무(회화나무?)와 박달나물을 비벼서 자연 발생하는 불을 만든다는 뜻이다.
단을 박달나무로 풀이하였으나 빗살나무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는데, 그 옳고 그름은 말하고 싶지 않다.
예전 중국에서는 왕(정부)이 계절에 따라 다른 불씨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다.
겨울에는 느티나무 목재를 마찰하여 불을 만들었고, 봄에는 느릅나무(유楡)와 버드나무(류柳)의 목재를 마찰하여 불을 만들어 백성에게 나누어주었고(주례사관왈周禮司爟曰 춘취유류지화春取楡柳之火), 여름에는 대추나무로 불을 만들어주었다.
느티나무 열매는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쓸모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는데, 옛글을 보면 가을에 열매를 따서 복용하면 건강에 좋다고 했고(태청초목방왈太淸草木方曰 괴이시월상이취자복지槐異十月上已取子服之 호안색장생통신好顔色長生通神), 또 열매를 먹음으로써 가는 글자를 볼 수 있고 흰 머리칼이 검게 되었다고 했다(양서왈梁書曰 유견오복괴실칠십여庾肩吾服槐實七十餘 목견세자目見細字 백발반흑白髮反黑).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 나무의 열매가 보약의 재료로 사용되었다는 말은 아직 듣지 못했다.
혹시 위의 글은 회화나무 열매를 뜻하는 것일까?
한편 ≪산림경제≫를 보면 괴槐에는 벌레가 많으니 집 주변이나 우물 부근에는 심지 말아야 하며, 열매는 약으로 쓰이고 장수長壽에 좋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이 회화나무인지 느티나무인지 분간하기 어렵긴 하지만 회화나무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느티나무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노란 단풍이 드는 나무도 있고 붉은 단풍이 드는 나무도 있다는 것이다.
단풍은 나뭇잎에 들어있는 다양한 색깔을 띠는 광합성 색소들이 계절 변화에 따른 함량 변화로 생기는 현상이다.
따라서 계절 변화가 없는 열대 지방에서는 단풍이 들지 않는다.
온대 지방의 여름에는 광합성의 주된 색소인 초록색 엽록소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나뭇잎들이 녹색을 띠지만, 일사량이 줄어들기 시작하는 가을에는 광합성을 담당하는 초록색의 엽록소(클로로필 chlorophyll)가 파괴되면서 엽록소에 가려져 있던 보조 색소들이 자신의 색깔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붉은색, 노란색, 갈색 등으로 단풍이 드는 것이다.
보조 색소에는 붉은색의 안토시아닌 anthocyanin, 주황색의 카로틴 carotene, 노란색의 엽황소葉黃素(크산토필 xanthophyll), 황갈색 및 회갈색의 페오피틴 pheophytin 등이 있다.
느티나무처럼 같은 나무에서 서로 다른 단풍이 드는 것은 개체별로 잎에 든 보조색소별 성분 함량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엽황소 함량이 높은 느티나무 잎은 노란 단풍이 들지만 안토시아닌 함량이 높은 느티나무 잎은 붉은 단풍이 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붉은 단풍이 드는 것으로만 알고 있는 단풍나무 역시 종종 노란 단풍이 들기도 한다.
전 세계에서 색색의 단풍을 볼 수 있는 지역은 동아시아권과 미국 동부 지역뿐이라고 한다.
○삼척 도계리의 긴잎느티나무
1989년 5월, 필자는 강원도 쪽에 자라는 이름난 노거목을 보기 위해 나섰다.
강원도 삼척시 도계읍 도계리에 천연기념물 제95호 긴잎느티나무가 있다.
원래 이곳은 도계여자중학교 운동장이었는데, 학교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느티나무의 최대 나이를 천 년으로 잡고 있으나, 삼척의 이 긴잎느티나무는 2천 년 정도로 더 높게 잡고 있다.
이 나무의 높이가 약 20미터, 줄기 가슴높이 둘레가 약 7.5미터나 되는 거목이다.
도계읍민의 서낭당 나무가 되어 주민을 지켜온 유래가 있다.
긴잎느티나무는 그 이름이 말해주듯이 잎이 일반 느티나무보다 더 길다.
긴잎느티나무는 이곳 도계 외에도 몇 곳에 더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학계에서는 긴잎느티나무를 느티나무의 변종으로 보고 느티나무에 포함시킴으로써 긴잎느티나무란 이름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천연기념물 나무는 긴잎느티나무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어 있다.
도계의 긴잎느티나무는 무언가 간절히 원하면 그것을 이루어준다는 말이 있어서 그것이 하나의 풍속이 되기도 했다.
특히 고려 말에는 많은 선비들이 이곳으로 피난 와서 이 나무가 학문하는 분위기와 관련이 되기도 했다.
따라서 입학시험 계절이 되면 많은 학부모들이 이 나무를 찾아 자녀의 합격을 기원한다.
이 나무가 학교 운동장에 있어 동신洞神(마을의 수호신)이 거처하기에는 좀 시끄럽고 부산한 느낌이 있자 동신목洞神木(서낭당나무)을 다른 곳의 나무로 바꾸려고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이 나무의 진노를 사서 천둥 번개가 치는 바람이 변경 계획이 취소되었다고 한다.
나무의 신은 천진무구한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데 불편을 느끼지 않은 모양이고, 또 도계 주변에는 이 나무를 대신할 만한 나무도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신이나 사람이나 오랫동안 살아온 거처는 정이 들어서 옮겨가기 싫어하는 것이 아닐까?
긴잎느티나무가 흔한 것은 아니다.
이 나무는 일제강점기 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는데, 당시 기록을 보면 긴잎느티나무는 조선의 특산수목으로, 눈높이 줄기둘레 8.54미터, 나무높이 26.8미터이며, 가지퍼짐은 동쪽 16미터, 서쪽 17미터, 남쪽 18.2미터, 북쪽 16미터로 되어 있다.
이 수치를 보면 나무갓이 동서남북 고루 비슷하게 확장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이와 비슷하다고 알려져 있는데, 다만 나무높이 측정치가 당시보다 더 낮게 나타난 것은 이 나무의 노쇠에서 온 것일까? 아니면 측정상의 오류 때문일까?
도계의 긴잎느티나무가 너무나 웅장하여 필자는 그곳을 쉽사리 떠나고 싶지 않았다.
나무가 커서 사진 한 장에 담기가 어려워 필자는 멀리 떨어져 전경을 담아보았다.
어떤 연유로 긴잎느티나무 한 그루가 이곳에 나타났을까?
그 위용을 몇 번이가 되돌아보면서 그곳을 떠났다.
○괴산 오가리의 느티타무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오가리의 느티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안보 온천에서 멀지 않고, 문경새재외도 가까운 곳이다.
괴산군청 공보실 담당관들의 친절한 배려로 기능 좋은 차를 타고 오가리고 가게 되었다.
그곳에는 네 그루의 큰 느티나무가 있는데, 그중 한 그루는 작은 편이었으나 줄기 지름은 40센티미터에 가까웠다.
이 나무는 잎이 붉은 구릿빛으로 단풍이 져서 느티나무의 변종임을 알려주었다.
이곳 사람들은 느티나무 세 그루에 뜻을 담아 '삼괴정三槐亭'으로 부르고 있다.
나무 이름은 상괴上槐, 하괴下槐로 부르기도 하는데, 또 하나의 큰 느티나무를 인괴隣槐(이웃느티)로 부르기도 하고 상괴와 줄기가 접촉하다시피 해서 자라고 있는 작은 느티나무를 소괴小槐로 부르기도 한다.
상괴와 하괴는 약 60미터 거리로, 또 상괴와 인괴는 약 130미터 거리로 떨어져 있다.
인괴는 북쪽에, 하괴는 남쪽에 있으며, 이 중 하괴는 긴잎느티나무로 강원도 도계의 긴잎느티나무보다 잎이 더 길게 발달해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느티나무를 괴槐로 부르고 있다.
이처럼 과거부터 우리는 느티나무를 괴목이라 흔히 말해왔다.
괴槐는 회화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풀이하여 받아들여왔지만, 때로는 느티나무를 뜻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런 사실을 이곳 삼괴정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다.
상괴와 하괴는 나무나이가 800~900년으로 추정되고, 나무높이는 각각 25미터와 19미터, 줄기 지름은 270센티미터, 280센터미터였다.
거창한 몸집을 자랑하고 있었으며 아직 건강해 보였다.
상괴 줄기에 접하는 제석祭石이 있었고, 줄기에는 새끼줄이 감기고 빗자루가 매어져 달려 있고 무명천으로 된 자루도 달려 있어, 이 나무가 숭앙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나무는 해마다 정월 대보름 한밤중에 올리는 서낭제의 대상으로, 마을 수호신격의 신목이라 한다.
하괴에는 더 큰 제단석이, 그것도 2개나 있었다.
인괴와 소괴는 가을에 더 빨리 단풍이 지고 그 색깔도 진한 붉은 구릿빛으로 변하는 변종이고, 상괴와 하괴는 단풍이 늦게 지는 일반 느티나무다.
충북 괴산군의 괴槐는 느티나무와 더 인연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의령 세간리의 현고수 느티나무
경남 의령군에는 소나무,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이름난 노거목이 있다.
노거목을 본다는 것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오랜 세월 갖은 풍파를 겪으며 살아온 그 위엄에 외경을 느끼며 사연을 들어보는 것은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는 것은 더한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
경남 의령군 가까운 곳에 있는 큰 소나무는 천연기념물 제39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곳에서 멀지 않은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에 큰 은행나무가 았는데, 이 나무에는 작은 젖기둥(유주乳柱: 나뭇가지에서 땅 쪽으로 발달하는 돌기)이 발달해 있다.
이 은행나무 근처에 현고수懸鼓樹 느티나무가 있다.
현고라 하면 북을 걸어두고 둥둥 쳤다는 뜻이므로, 현고수는 북을 매던 나무라는 뜻이 된다.
이 나무에 얽힌 사연은 이러하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대장 곽재우가 의병을 훈련할 때 이 나무에 북을 달아놓고 치면서 독려하고 병술을 가르쳤다고 한다.
비스듬히 누운 느티나무의 줄기를 보면 북은 매다는 데 알맞았다고 생각된다.
선조 25년(1592) 4월 13일 왜적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41세의 곽재우는 이곳 세간리에서 의병으로 모아 훈련시켰다.
이 나무 옆에 곽재우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세간리는 이처럼 애국의사들을 훈련했던 명예스러운 역사가 있다.
이 마을은 평탄한 농경지에 둘러싸인 지형으로, 당시 현고수 느티나무 주변은 논이었다.
이 느티나무는 잘 보호 관리되고 있었다.
현고수 느티나무는 나무높이 약 15미터, 가슴높이 줄기둘레 7미터로, 천연기념물 제49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합천 해인사 백련암의 느티나무
이곳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어느 여름에도 더위를 모르는 곳이 바로 홍류동 계곡이라 한다.
만일 숲이 없었더라면 자연스럽게 흐르는 물도 없어질 것이고, 숲과 물이 없어지면 이곳의 여름 기온도 다른 곳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숲은 우리 환경에 영향을 끼치고, 그중에서도 온도를 조절해서 우리를 쾌적하게 해주는 효과가 매우 크다.
필자는 이러한 사실을 이곳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성철性徹 스님이 계시던 해인사 뒤쪽 산허리의 백련암白蓮庵에는 경북 예천 용문사에 있는 윤장대輪藏臺(경문經文을 넣어 두기 위하여 나무로 만든 책궤로서, 여덟 면으로 된 책장에 중심대를 달아 돌아가도록 만든다) 비슷한 장치가 두 틀 있었는데, 그 조각이 매우 정교했다.
이곳 윤장대는 고심원古心院 안에 있었고, 불상 대신 성철 스님의 사진이 놓여 있었으며, 성철 스님이 거처한 염화실이 이웃이었다.
모든 욕심을 버리고 세속적인 환희와 단절하고 투명한 공기 속에서 살다가 미련 없이 세상을 떠난 한 스님의 위대함으로 곱씹어본다.
뜰 앞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다.
가슴높이 줄기 지름 2미터, 밑가지 높이 2미터, 높이 22미터, 가지퍼짐은 동쪽으로 5미터, 서쪽으로 15미터, 북쪽으로 10미터, 남쪽으로 14미터에 이른다.
지혜로운 사람도 이 느티나무를 쳐다보면 지났을 것이고, 어리석은 자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곳 느티나무 줄기의 대담한 골격 구조는 인간이 연출해낼 수 없는 예술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해인사의 노랜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이 느티나무는 인간의 짧은 생애를 내려다보면서 연민의 정 같은 것을 느끼고 있을까?
해인사 주변에는 이것 말고도 큰 느티나무들이 많이 있다.
○서울의 느티나무
창덕궁과 창경궁 경내에는 큰 느티나무들이 자라고 있고, 이 밖에도 서울 시내에는 곳곳에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
남산에도 늙은 느티나무가 많은 편이다.
남산의 각종 노거수 중 느티나무가 최고령의 자리에 있는데, 200년으로 추정되는 것도 있다.
가슴높이 지픔이 70센티미터에 가까운 것도 있다.
이처럼 서울에서는 느티나무를 많이 볼 수 있다.
예전에 청계천 제방을 따라 큰 느티나무들이 서 있었다.
도읍지 서울은 성저십리城底十里라 해서 내사산 안의 면적이 사방 10리 규모라고 하였다.
북악산과 인왕, 그리고 남산의 물이 모여 청계천淸溪川(또는 개천開川)이 되고, 그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마침내 한강과 합류해 서쪽으로 황해로 들어간다.
그런데 청계천이 종종 홍수로 인해 범람하여 주거지를 침범하고 제방을 무너뜨렸다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서울 시민의 주거지는 매우 취약했던 모양이다.
농경지를 쓸어버리고 가축이 죽고 하수가 범람해 악취가 진동하고 위생도 안 좋았다.
주민들이 청계천에 오물을 마구 버린 터라 수도 서울의 면목이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따라서 나라에서는 시내 주변에 살고 있는 주민을 동원해 방축을 쌓고 나무를 심게 했다.
태종 1년(1401)에는 개천도開川都라는 관직을 마련하여 청계천의 기틀을 튼튼히 하고자 했고, 그다음 해에는 전라·경상·충청 3도의 군인과 민간인 2,035명(그중 승려군 500명)을 동원해 돌쌓기와 돌다리 놓기 등을 했다.
세종 4년(1422)에는 43만 명의 장정을 동원해 도성을 수축하고 청계천 개수 작업을 끝냈다.
같은 해에 성문도감城門都監을 설치했다.
그 뒤 청계천 제방에 버드나무류를 심어서 청계천 수풀이 조성되었다.
이처럼 서울 청계천 제방의 수림 조성은 조선조가 나라의 기틀을 완성하려는 시기에 수행된 한 본보기로 해석할 수 있다.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최초의 측우기가 세종 24년(1441)에 창안된 것도 이러한 수재水災와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서울 사산四山의 보호를 철저히 하고자 처음에는 감역관監役官(조선 시대에, 선공감에서 토목이나 건축 공사를 감독하던 종구품의 벼슬)을 두었으나, 뒤에 이것을 승격시켜 사산참군四山參軍(조선 후기에, 서울 주위의 네 산을 지키던 무관 벼슬)으로 하여금 기능 수행에 만전을 기하도록 했다.
이곳에 수해 방비를 위한 호안림護岸林이 조성된 것도 특기할 만하다.
버들 종류의 삽목 조림이 많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구한말(1910년 무렵) 청계천 제방에는 느티나무, 소나무, 능수버들, 회화나무 등의 노거목이 많았다고 한다.
느티나무는 서울의 녹지 환경을 담당하는 주역 수종 중 하나였던 모양이다.
지금의 청계천에서는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남원 진기리의 느티나무
느티나무는 장수하는 나무다.
은행나무, 회화나무, 향나무, 팽나무, 왕버들, 비자나무, 이팝나무, 가시나무, 녹나무, 후박나무 등과 같이 느티나무류는 개체가 많다.
오래 사는 나무는 대체로 몸집이 크다.
오래 살자면 많은 에너지 축적이 필요하고, 그것을 담아두자면 넉넉한 몸통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변의 다른 나무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우선 큰 나무가 되어 넓은 생활공간을 점유할 필요가 있다.
느티나무는 집으로 말하면 대궐 같은 공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깨끗하고 품격이 높다.
스스로 화려한 것을 찾지 않으나,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영광스럽게 해준다.
전북 남원시 보절면 진기리에 천연기념물 제281호로 지정된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다기에 어느 해 늦가을 그곳에 방문했다.
느티나무가 대개 그렇지만 이 나무도 모양이 정돈되어 나무갓이 반달형으로 흠잡을 데 없는 기하학적 선을 연출하고 있었다.
보는 순간 절로 탄성이 새어나왔다.
높이 20미터, 가슴높이 줄기둘레 8미터, 뿌리목 줄기둘레 약 13미터, 나이 약 600년.
나무갓 폭은 동서로 24미터, 남북으로 26미터로, 이것은 모두 필자가 측정한 것이다.
이 나무의 줄기는 지상 2미터쯤 되는 높이에서 4개로 크게 갈리지고, 다시 3미터쯤 높이에서 8개로 갈라지고 있다.
이처럼 줄기가 갈라져서 느티나무는 둥근 나무갓의 형태를 이룰 수 있었다.
보절면 느티나무의 특이한 점은, 땅 표면을 따라 발달한 곁뿌리가 고루 많이 노출되고, 노출된 부분에서 생긴 돌기가 위로 발달해서 공기뿌리 aerial root(기근氣根)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 공기뿌리는 마치 무릎처럼 튀어나왔다고 해서 영어로는 무릎뿌리 knee root라고 하는데, 낙우송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보절면 느티나무의 경우 큰 공기뿌리는 높이가 20센티미터에 이르고, 그 수가 얼핏 200여 개는 되는 것으로 보였다.
느티나무 공기뿌리는 흔하지 않다.
사람들이 이 나무 아래를 자주 찾기에 공기뿌리의 끝이 마모된 것이 많다.
이 나무는 낮은 산자락 아래 평탄한 언덕 위 밭가에 서 있는데, 왜 이런 공기뿌리가 발달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숨을 더 쉬어보겠다는 뿌리의 생리일지도 모르겠지만, 공기뿌리 덕분에 이 나무는 더 값진 것으로 보인다.
○경주 계림의 느티나무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사적 제19호 계림鷄林은 느티나무, 회화나무, 팽나무, 물푸레나무, 왕버들, 싸리나무 등 노거목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종교림宗敎林의 성격을 가진 숲이다.
계림은 신라 초부터 있던 꽤 이름난 숲이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탈해왕 9년(65년) 3월, 왕이 밤중에 금성金城 서쪽에 있는 시림始林에서 닭 우는 소리가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어 조사한 바 있다.
보아 하니 나뭇가지에 황금으로 된 상자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색 닭이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와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니, 왕은 사람을 시켜 그것을 가져와 열어보았다.
그 안에 어린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그 용모가 기이하고 출중했다.
왕이 기뻐하면서 하늘이 나에게 내려준 아이가 아닌가 하고 키웠더니 총명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이름을 알지閼智로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 하여 성을 김金으로 하였다.
그리고 시림이라는 이 숲의 명칭을 계림鷄林으로 고쳤으며, 계림을 나라의 이름으로 삼았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이란 말이 있듯이, 느티나무가 그의 격에 맞을만한 팽나무, 회화나무, 시무나무, 왕버들을 친구로 해서 계림의 주인공 노릇을 한 것은 그의 품위에 어울린다.
위대한 인물은 위대한 숲에서 태어난다는 역사는 다른 곳에서도 읽을 수 있다.
계림을 잘 보호하고 관리해야 할 것이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2. https://daily.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102193(단풍 색깔)
3. 구글 관련 자료
2024. 8. 3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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