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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21 - 닥나무

새샘 2024. 10. 12. 18:22

닥나무 열매(출처-출처자료1)

 

껍질에 많이 들어 있는 길고 튼튼한 인피靭皮 섬유 bast fibre(쌍떡잎 식물의 줄기를 둘러싸고 있는 질긴 섬유 껍질)로 전통 한지韓紙를 만들었다.

신라 민정문서民政文書(통일신라시대의 마을 기록)나 무구정광대다리니경에 쓰인 닥나무 종이는 천 년을 넘겨도 썩지 않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다.

닥나무 종이는 천 년을 넘겨도 썩지 않을 정도로 품질이 뛰어나다.

 

뽕나무과의 갈잎 큰키나무인 닥나무의 학명은 브로우소네티아 카지노키 Broussonetia kazinoki, 영어는 Japanese paper mulberry(일본종이닥나무), 중국어 한자 표기는 저목楮木·구목構木·곡목木 등이다.

 

필자의 고향 마을에 닥나무가 있었다.

경사진 밭 둔덕에 한 줄로 서 있었는데, 물론 사람이 심은 것이었다.

흙의 침식 유출 방지와 방풍의 효과도 노린 것으로 짐작된다.

닥나무가 없었더라면 밭의 경계는 무너졌을 것이다.

필자는 닥나무의 고마움을 알고 있다.

 

그때 우리는 이 나무를 딱나무라고 불렀지, 힘 없는 악센트로 닥나무라고는 부르지 않았다.

딱나무라 말하면 좀 더 짜릿하고 자극적인 맛을 풍긴다.

"죽을 때 제 이름을 소리치면서 죽는 나무는?" 하는 수수께끼는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항상 새롭게 여겨졌다.

'딱' 소리와 함께 가지나 줄기가 끊어져 나가는 '딱나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 그 밭 언저리에 있던 딱나무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다.

 

닥나무는 뽕나무과의 작업실에서 만들어진 나무로서 뽕나무류, 무화과나무류, 꾸지뽕나무류와는 모두 서로 동기간이다.

그래서 그들끼리는 서로 닮았고, 한솥밥을 먹고 자라났으니 친숙한 관계다.

 

닥나무속의 종으로는 닥나무와 꾸지나무가 잘 알려져 있다.

남쪽 지방에서는 꾸지나무도 닥나무라고 부르는 일이 흔하다.

 

 

○한지

 

닥나무 어린 잎(출처-출처자료1)

 

닥나무는 한지 즉 문종이(창호지窓戶紙: 주로 문을 바르는 데 쓰는 얇은 종이)를 만드는 원료다.

한지는 우리나라 문화가 만들어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옛날 책은 거의 한지로 만들어졌고, 우리 조상들은 문종이를 바른 문 안에서 살아왔다.

 

농사일을 끝내고 초겨울이 올 때면 날씨 좋은 날을 택해서 문종이를 바른다.

찬란한 가을 햇볕에 팽팽하게 붙여진 문종이가 희게 표백되어간다.

문을 다시 달면 그날 저녁에는 흥분이 되어서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그러나 문종이 문이 달린 방 안에 있으면 마음의 긴장과 초조가 모두 사라진다.

그래서 우리 국민성은 선량한 것으로, 그리고 평화를 사랑하는 것으로 기울어졌나 보다.

 

닥나무 가운데는 잎에 털이 더 많이 나는 것이 있다.

이것을 꾸지나무(곡목穀木)라고 하는데, 쓰임새는 닥나무와 비슷하다.

예전 사람들은 이를 구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닥나무는 암수한그루인 반면 꾸지나무는 암수딴그루다.

 

닥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는 기름을 먹이면 강해진다.

유둔지油芚紙(이어 붙인 두꺼운 기름종이)는 군수 물자로서도 매우 주요한 것이었다.

고려·조선 시대의 장흥고는 돗자리와 유둔지 등을 맡아보는 관청이었는데, 유둔지가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사용하는 천막의 재료였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아직 화폐제도가 발달하지 않아 주로 모시, 삼베, 무명과 같은 옷감으로 물자를 교환했다.

이에 1401년에 정승 하윤 등이 주장하여 지폐인 저화楮貨를 발행해 통용을 장려했지만 널리 유통되지는 못한 것 같다.

 

1403년에는 주자소를 두고 동활자를 만들어 인쇄용 종이가 많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양에 조지서造紙署란 관청이 생겼고, 각 지방에서 많은 종이를 헌납받았다.

 

세종 6년(1424)에는 조지서에서 댓잎, 볏짚, 솔잎, 삼, 버들 같은 것을 섞어서 잡초지雜草紙를 만들어 쓰기도 했다.

닥 원료를 절약하기 위해서였다.

세조 2년(1457)에도 대장경 50권을 인쇄하는데 막대한 양의 종이가 필요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민간에서도 종이 만드는 연구가 이루어졌다.

선조 대에 들어와 전란으로 조지서의 기능도 마비되고 관공서에서 사용하는 종이의 질도 나빠졌다.

그러자 선조 29년(1596)에는 승려 가운데 종이를 잘 만드는 기술자를 골라 조지서에서 일하게 했고 닥나무 지식도 권장헸다.

그때부터 닥나무 재배와 제지업은 승업僧業(승려의 업무)과 같이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 닥나무 품종 개량이라든가 그 재배법이 학자나 위정자들 사이에서 진지하게 논의되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隨錄≫(1770)에 따르면, 우리나라 재래종 닥나무보다는 일본에서 가지고 온 왜저倭楮(일본닥나무)가 종이의 질을 좋게 하므로 인조 때 일본으로부터 종묘가 수입되었고, 이것이 주로 우리나라 남쪽 해안 지방에 재배되었다고 한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도 남쪽 도서 지대와 바닷가 쪽에 일본닥나무가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경주, 울산, 거제도, 고성, 황해도 풍천 등에 왜저가 많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왜저가 산닥나무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다.

 

 

산닥나무 잎과 꽃(출처-출처자료1)

 

산닥나무는 섬유가 우수하여 좋은 종이를 만드는 재료가 되기도 한다.

닥나무는 잎이 어긋나지만, 산닥나무는 잎이 마주나고 어린 가지가 녹색을 띠며 잎에 톱니가 없어서 구별이 된다.

산닥나무는 경남 남해, 그리고 강화도에 나는데,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더 많은 곳에 날 만하다.

닥나무는 나는 곳에 따라 성질이 매우 달랐다.

전북 전주에서 생산되는 한지는 특히 그 질이 우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무 이름

 

닥나무는 한자로는 '닥나무 저楮'라 나타내는데, 꾸지나무와 혼동되어 쓰인 것 같다.

무라타 시게마로(촌전무마村田懋磨)는 그의 책 ≪토명대조만선식물자휘土名對照滿鮮植物字彙≫(1934)에서 꾸지나무라는 제목 아래에 저목楮木, 구목構木, 곡목穀木이라는 한자명을 쓰고 있다.

이때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곡식 곡穀'자와 '닥나무 곡榖'자의 구별이다.

곡식 곡穀자는 '一'자 아래 벼 '화禾'자가 들어가 있고, 닥나무 곡 자는 '一'자 아래 나무 '목木'자가 들어가 있다.

곡식인 벼는 풀인 반면 닥나무는 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곡식 곡穀'을 쓸 때는 흔히 '一'자를 생략하고 '禾'자만 쓰기도 한다.

 

1830년 무렵 사물의 명칭을 우리말로 주해한 실학자 류희柳僖의 저서 ≪물명고物名考≫에서는

"닥나무 저楮는 곡穀(곡식 곡의 쌀 미米)과 같다.

다만 껍질이 얼룩진 것은 저楮(닥나무 저)이고, 흰 것은 곡穀(쌀 미가 들어가는 곡식 곡)이라 한다.

닥나무를 곡상桑(곡식 곡)이라고 하고, 닥나무 열매를 저도楮桃라고 한다"라고 했다.

 

 

○≪제민요술≫의 닥나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농업서인 ≪제민요술齊民要術≫은 6세기 전반에 가사협賈思勰이 지은 것으로 10권으로 되어 있다.

가사협은 이 책에서 작물 재배와 가축 사육 기술 등을 설명했는데, 이 책에 기록된 닥나무 관련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닥나무는 곡저穀楮라고 하는데, 곡과 저는 한가지이고, 그 나무껍질로 종이를 만든다.

닥나무는 습기가 있는 곳에 심으며 땅이 비옥할수록 좋다.

가을에 열매를 따서 깨끗한 물로 씻은 뒤 햇볕에 말리고 밭갈이를 잘해서 삼씨와 함께 초봄에 뿌린다.

그해 가을, 겨울에도 삼을 그대로 둔다.

삼이 있어야 닥나무가 추위의 해를 견딜 수 있으며, 삼씨와 함께 뿌리지 않으면 닥나무는 대개 얼어 죽게 된다.

삼은 그다음 해 초봄에 베어주고 불을 질러서 태운다.

한 해 동안 사람 키 한 길 정도는 자라는데, 태우지 않으면 줄기가 가늘게 되고 자람도 늦어진다.

3년이 지나면 잘라서 이용할 수 있으며, 3년 이전이면 껍질이 얇아서 쓸모가 없다.

닥나무 벌채 시기는 12월이 가장 좋고 4월이 그다음이다.

시기를 잘못 정해서 자르면 닥나무가 고사하는 일이 흔하다.

해마다 정월에는 불을 붙여 태운다.

잎이 떨어져 있으므로 불을 붙이면 그것이 타면서 닥나무의 자람을 돕게 된다.

껍질을 찐 뒤에 벗겨서 팔면 그대로 파는 것보다 더 이익이 될 수 있다.

껍질을 벗기고 난 뒤의 휘추리(가늘고 긴 나뭇가지)는 땔감으로 이용된다.

닥나무 밭 30묘畝(1묘는 100평 남짓)를 만들어놓으면 한 해에 10묘씩 이용하고 3년마다 한 번씩 베어 계속 수익을 올릴 수 있다."

 

 

○종이의 역사

 

닥나무 몸통 줄기(출처-출처자료1)

 

세계 문명의 발상지 중 하나인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에서는 서기전 4천 년부터 3천 년 사이에 이르는 사이, 말하자면 6천 년 전부터 점토판에 쐐기문자[설형楔形문자: 회화 문자에서 생긴 문자로, 점토 위에 갈대나 금속으로 새겨 썼기 때문에 문자의 선이 쐐기 모양(楔形)으로 붙은 이름]를 새겨 기록을 남겼다.

그 뒤에 저 유명한 이집트의 파피루스 papyrus가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목간木簡, 죽간竹簡이라 해서 나무나 대나무의 줄기를 얇게 다듬어 기록 재료로 사용했다.

청죽靑竹을 가열해 기름을 없앤 뒤 사용했는데, 길이 22센티미터, 폭 1.2센티미터, 두께 1밀리미터의 것이 많다.

중국 남부에는 대나무가 많아서 죽간을 이용했다.

동양권에서 글씨를 횡서하지 않는 것은 목간이나 죽간에 쓰던 데서 이어져온 것일 것이다.

 

양피지羊皮紙를 파치먼트 parchment라고 부르는데, 이는 양의 껍질을 벗겨 석회액에 담궈 털을 뽑고 건조한 뒤 칼로 깎아내어 얇게 한 생피生皮다.

반면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것을 벨럼 vellum이라 하는데, 이것도 고급 기록 재료로 쓰였다고 한다.

 

영어로 라이스페이퍼 rice paper라고 부르는 통초지通草紙는 대만 특산품으로 통탈목通脫木 줄기의 심을 얇게 깎아내어 얇은 막으로 만든 것이다.

제주도의 서귀포, 천제연폭포 쪽에는 길가에 통탈목이 많이 자라고 있다.

 

최초의 종이 한지漢紙는 중국에서 발명되었다.

≪후한서≫에 따르면 서기 105년 채륜이 삼과 나무껍질을 재료로 해서 한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에 앞서 서기전 170년 무렵 전한前漢에서 종이가 사용된 것이 알려져, 채륜은 종이 만드는 기술을 개량·개발한 것으로 인정되었다.

 

중국 제지술은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었는데, 고구려의 승려 담징이 610년 일본으로 건너가 제지술을 알려주었다는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와 있다.

중국 제지술이 어느 때 어떠한 경로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다.

우리나라에 전파된 중국 제지술이 그들보다 더 발달하여 얇은 종이를 만들게 되자 중국에서는 우리나라 종이 한지韓紙를 숭상하게 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사신이 중국으로 갈 때마다 뇌물용으로 종이를 많이 가져갔는데, 관문을 통과할 때마다 고려지 한 장만 뇌물로 주면 모든 일이 해결되었을 정도라니 알 만하다.

 

역사를 훑어보면 조선 후기에도 청나라를 향한 종이 조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예물로 보낸 공물지는 연간 2만여 권이었으나 병자호란 이후에는 10만 권에 이르렀다고 하니, 이로 말미암아 당시 우리나라 종이 생산이 얼마나 곤경에 빠져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6세기 후반쯤 나온 문헌에 고려지는 견면繭綿(겉풀솜 또는 고치솜:누에가 고치를 만들 때에, 고치 겉면을 둘러쌀 솜 층으로 토하여 놓는 물질)으로 만들었는데 빛이 희고 무늬가 있으며 질기고 부드럽기가 비단 같고, 이러한 종이가 중국에는 없다고 했다.
견면 외에 다른 재료도 들어간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매우 질긴 것이 가죽 비슷하다 해서 중국에서는 등피지等皮紙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견지繭紙란 누에의 고치실을 넣어 만든 것이 아니라, 그 질이 섬세하고 질기며 명주처럼 광택이 있는 좋은 종이에 대한 명칭일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우리나라 종이 한지韓紙의 역사

 

닥나무 종이가 사용된 기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마을 기록인 민정문서가 있다.

이 문서는 일본 도다이지(동대사東大寺) 쇼소인(정창원正倉院) 중창中倉에 보관되어 있는데, 1953년 노무라 다다오(야촌충부野村忠夫)가 쓴 ≪사학잡지史學雜志≫ 제62집 4월호 <쇼소인에서 발견된 신라의 민정문서에 대하여(正倉院り發見された新羅の民政文書について)>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다.

이 문서는 닥나무 종이로 되어 있고, 세로 약 30센티미터, 가로 약 60센티미터에 이른다.

 

이 문서가 작성된 것은 서기 755년 무렵 신라 경덕왕 때로, 근 1,300년 동안 그 원형을 유지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은 닥나무로 만들어진 덕택이다.

만일 이 문서가 당시 흔했던 비단, 즉 명주 천에 기록되었더라면 오늘날까지 전해지지 못했을 것이다.

닥나무의 위력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종이는 신라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중국 채륜 때보다 700여년 뒤의 시기의 일이다.

하지만 종이의 사용 시기는 중국보다 늦어졌지만 제지술은 중국을 능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지의 오래된 유품으로 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석가탑이 창건되었을 때 그 안에 보존해두었던 다라니경 권축券軸(글씨나 그림 따위를 표장表裝하여 말아 놓은 축)이 있다.

넓이 6.5센티미터, 길이 약 7미터의 두루마리 종이이며, 재료는 우리나라의 닥나무로 알려져 있다.

권축을 보호한 비단 천은 썩은 상태였지만, 종이는 거의 그대로였다.

이런 용도로 종이를 만들 때 적은 양이긴 하나 비상砒霜石(은이나 구리 따위의 광석을 녹여 그 함유물을 분석할 때에 생기는 비소 화합물)을 섞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역시 8세기 중엽의 일이다.

 

닥나무는 종이 제조의 원료로서 귀중한 것이었고, 지필묵연紙筆墨硯(종이, 붓, 먹, 벼루)은 문방사우文房四友로서 학문 발달의 바탕이 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재식栽植(농작물이나 나무 심기) 조에도 "각 고을의 옻나무, 뽕나무, 과목(과실수)의 수와 닥나무밭, 대나무밭, 왕골밭은 대장을 만들어 비치해두고 재식하며 배양한다"라고 되어 있어 닥나무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한편 17세기 중반쯤 영의정 김육金堉 등이 만든 책 ≪저죽전사실楮竹田事實≫은 닥나무, 대나무, 옻나무, 뽕나무 등의 재배 현황과 생산 수량을 기록한 것으로, 닥나무가 어느 지방에 많았는지 알려준다.

영호남 지방에 닥나무가 많았고, 충청 지방에는 적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곡성, 임실, 구례, 무주, 전주, 순천, 부안, 고창, 광양, 남원, 하동, 의령, 진주, 거창, 영천, 합천, 문경, 영덕, 부여, 보은 등지는 닥나무가 많은 곳으로 되어 있다.

단, 이 책에는 경기도와 강원도 지방의 통계가 없어 그 지역에 대한 것은 알 수 없다.

 

또한 태종 11년에는 각 도에 대호大戶 200그루, 중호中戶 100그루, 소호小戶 50그루의 닥나무를 재배하도록 했다고 한다.

 

 

○종이의 종류

 

문종이(창호지)로 통칭되기도 하는 우리나라 한지韓紙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대전회통大典會通≫에서는 나라에서 사용되는 종이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①자문표지咨文表紙: 중국과 왕래하는 문서에 사용하는 종이

②저상지楮常紙: 일상에서 사용하는 닥종이

③차초주지次草注紙: 품질이 다소 떨어지는 초기草記(서울 각 관아에서 행정에 그리 중요하지 아니한 사실을 간단히 적어 임금에게 올리던 상주문 )용 종이

④공사지公事紙: 보통 관청에서 사용하는 종이

⑤관교지官敎紙: 사령장辭令狀(임명, 해임 따위의 인사에 관한 명령을 적어 본인에게 주는 문서)에 쓰이는 두꺼운 종이

⑥대호지大好紙·소호지小好紙: 과거에 응시할 때 쓰는 종이로, 소호지는 작고 질이 좀 떨어짐.

⑦백면지白綿紙: 중국에 보내는 예물용 종이로 목화를 섞음.

⑧저주지楮注紙: 두루마리 종이, 주지周紙(두루마리), 권지卷紙(연속지連續紙를 감은 것)

⑨약선지藥線紙: 화승火繩(불을 붙게 하는 데 쓰는 노끈)에 쓰이는 종이

⑩장지壯紙: 두껍고 단단하며 품질이 좋은 종이

 

신라시대에는 종이 생산을 담당하는 지조부서紙造部署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관영 제지공장인 지소紙所가 설치된 바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조지소造紙所와 앞서 말한 조지서造紙署를 두었다.

종이를 다루는 일을 맡아 하던 지장紙匠은 상당한 대우를 받았다.

민간에서도 종이를 생산했는데, 특히 승업僧業(승려의 업무)으로서 발달하였다.

이러한 종이 제조는 찬란한 우리 문화의 면모를 드러낸다.

 

 

○'닥나무'라는 이름의 나무들

 

-삼지닥나무

 

팥꽃나무과에 속하는 갈잎 떨기나무로 가지가 굵고 강인해서 꺾기 어렵다.

어린 가지는 흰 털이 있고, 잎은 좁고 길며 톱니가 없고 뒷면이 희게 보인다.

봄에 피는 꽃은 모여 있어 둥근 공처럼 보인다.

흰 털이 나고 줄기는 셋으로 갈라지는 특성이 있어 삼지三枝닥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

중국산으로 꽃을 보려고 뜰에 심는다.
노란 꽃이 볼 만하며, 껍질은 제지용으로 쓰인다.

남쪽 따뜻한 곳에 심어 기르지만, 음성 식물로서 직사광선을 싫어하기 때문에 다른 나무 아래 함께 심는 것(혼식混植)이 좋다.

 

 

-산닥나무

 

언뜻 보면 싸리나무처럼 보인다.

역시 팥꽃나무과에 속하는 갈잎 떨기나무로 키는 1미터쯤 된다.

어린 가지는 가늘고 부드러우며 마주나고 톱니는 없다.

잎 뒷면은 희게 보이고, 꽃은 여름에 핀다.

우리나라 남쪽에서 자라며 일본에도 있다.

일본에서는 황안피黃雁皮로 쓰고 기간피 kiganpi라 읽는다.

꽃받침 색깔이 노랑이라서 '기(황黃)'라는 형용어가 들어간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목안피木雁皮라 쓰는 것은 잘못이다.

고급 섬유의 재료로 사용된다.

 

일본에서 이 종이를 안피지雁皮紙라 부르는 것으로 볼 때, 산닥나무는 오래전 일본에서 도입해와 심게 된 것으로 보인다.

강화도 전등사 부근 산자락에서 이 나무 몇 그루를 보았고,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곡리에 있는 산닥나무 자생지는 절간 옆 숲속 다소 개방된 곳에 분포한다.

 

≪동국여지승람≫에서 왜저倭楮라고 하는 것은 산닥나무를 말하는데, 울산·경주·창원·고성·거제 외에 황해도 풍천에서도 난다고 했다.

조선조 때 일본의 발달된 닥나무 종류와 제지 기술을 도입하고자 노력했고, 세종 12년(1430)에 대마도에 사람을 보내 왜저를 도입했다고 한다.

또한 기록에 보면, 왜저로 종이를 만들면 윤택이 나고 질기며 또 생채기가 나지 않아 좋은 종이가 만들어진다고 했으며, 도입한 것을 진도·완도·거제도·창녕 등지에 심게 했다고 한다.

 

산닥나무는 가을에 씨를 따서 뿌리면 어렵지 않게 묘목을 얻을 수 있다.

이 나무가 있는 산에는 자연생 어린 묘목도 관찰되며, 목재는 제지 원료로서 귀하게 취급되고 있다.

 

한편 정태현 박사는 산닥나무 중 꽃 이삭이 더 긴 것을 강화산딱나무로 이름 붙여 구별하고 있으며, 이 나무는 강화도에 야생한다고 했다.

 

 

-두메닥나무

 

마찬가지로 팥꽃나무과에 속하는 갈잎 떨기나무로, 잎에 톱니가 없고 꽃이 가지 끝에 모여서 노란색으로 피며, 둥근 열매가 가을에 붉게 익는다.

높은 산에서 볼 수 있는데, 사할린 Sakhalin, 캄차카 Kamchatka, 우수리 Ussuri, 아무르 Amur 등 추운 지방에 분포한다.

이 나무는 관상觀賞(취미에 맞는 동식물 따위를 보면서 즐김) 가치가 있고 껍질은 제지용으로 쓸 수 있으나 희귀하다.

 

 

○닥종이 문화

 

필자가 자랄 땐 한지란 말은 쓰지 않았고 문종이 또는 창호지라 했다.

문틀에 붙이지 않는 것이라도 일단 문종이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필자는 문종이와 깊은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왔다.

정월 대보름 때 서낭당에 제수祭需(제사에 드는 여러 가지 재료)로 썼던 백지를 가져다 태우고 그 재를 물에 타서 마시면 두뇌가 명석해지고 공부 잘하는 사람이 된다고 알려졌는데, 그 종이는 으레 나이 든 형님 또래의 차지가 되었고 필자는 그 재를 먹어보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필자의 일생은 종이와 함께 해온 것 같다.

책과 원고지, 만년필이나 볼펜, 때로는 붓, 이런 것들은 필자의 전 생애에 걸쳐 동반자가 되어왔는데, 주변 사람들은 필자가 가족보다 이들을 더 가까이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이렇게 보면 종이는 분명 필자에게 대단한 존재이다.

 

필자가 종이와 처음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예닐곱 살 때 한문 서당에 다니면서 붓글씨 공부를 할 때라고 기억한다.

선생님이 한 줄 초草(기초起草: 글의 초안을 잡음)를 잡아 써주시면 그것을 흉내 내면서 몇 줄 쓰는 것인데, 당시 종이는 신문지였다.

어릴 때는 후각이 더 예민해서 그런지 신문지에는 독특한 현대문명의 향기가 푹 배어 있는 것을 느꼈다.

그 냄새는 시골 아이들의 후각에 찡하는 자극을 주는 데 넉넉했다.

 

형님 또래들은 정월 초쯤 되면 한지와 대막대기로 연을 만들었는데, 어머니에게서 얻은 밥과 단단한 무명실, 그리고 성냥 한 갑이면 연을 만드는 재료는 완비된다.

한지를 알맞은 크기의 네모꼴로 자르고, 대나무를 갈라서 가는 줄기로 만든 다음, 이 줄기를 연의 크기에 맞게 끊는다.

대줄기에 밥풀칠을 충분히 하고 한지에 붙여 늘린다.

'쌀 미米'자 형으로 대나무 줄기를 배열해서 붙이고 알맞은 곳에 구멍을 뚫어 이 구멍에 실을 꿰매면 연이 완성된다.

연을 들고 그때는 한없이 넓게 보이던 밭에 가서 띄우면, 동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산마루를 넘다시피 하며 연은 우리의 꿈을 싣고 하늘로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의 높은 뜻이 연실을 통해서 손목에 와닿을 때 우리의 의지는 푸른 하늘 속으로 녹아들어갔다.

연은 동심의 꽃이 피어오르는 꿈의 장치였던 것이다.

추운 날 코를 흘려가면서 종일 연에 매달려, 점심 독촉하는 어머니의 말도 희미하게 들리곤 했다.

한지는 꿈의 비행 장치였다.

 

해가 지나자 제삿날 지방紙榜(종잇조각에 지방문을 써서 만든 신주神主) 쓰는 일이 필자의 의무처럼 된 것은 조상 숭배의 정신을 철저히 주입해보겠다는 아버지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필자는 제사가 끝나고 소지燒紙(부정不淨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할 때를 생각해서, 희게 잘 표백된 깨끗하고 얇은 한지를 골라 알맞게 끊어, 끝이 가는 붓으로 '···神位(신위)'라고 조심스럽게 써서 족보책 사이에 넣어놓고 기다렸다.

그때 지방으로 택한 종이는 화선지의 일종이었던 것 같다.

종이에는 평행선으로 자국이 나 있었으며, 지방을 쓸 때 이 자국을 따라 길게 썼다.

 

강신降神(제삿상으로 내려온 혼령)한 선조들이 필자가 쓴 글씨를 알아보고 지방으로써 접신接神(사람에게 신이 내려서 서로 영혼이 통함)하게 될 때, 필자는 그 글씨를 누가 썼는지 알아볼 수 있는 신들의 능력에 감탄했다.

제사가 끝나고 지방을 불사를 때, 그다지 연기를 내지 않고 타버린 뒤에 재도 남기지 않으면서 타올라 사라져버리는 닥나무 종이의 성분에 놀라곤 했다.

시원스레 하늘로 올라가 흔적을 남기지 않을 때, 제사에 바친 우리의 정성이 잘 감응된 것으로 보고 좋아했다.

 

제사상祭祀(제상, 제물상: 제사 지낼 때 제물을 벌여 놓는 상) 뒤에는 으레 병풍을 세웠다.

그때 병풍은 필자에게는 너무 높게 느껴졌다.

병풍을 치면 그 앞쪽은 갑자기 성스러운 공간이 되고, 조상신들이 지난날의 모습 그대로 그곳에 모여 자손들의 정성을 바라보는 듯했다.

문종이 병풍이 자아내는 신령스러운 공간 앞에서 우리의 마음은 경건 그 자체가 되어 갔다.

우리가 드리는 젯메(제찬祭粲: 제사 때 올리는 밥)는 깨끗한 공간에 차려져야 한다고 믿었다.

제사가 끝나고 병풍이 제자리로 돌아가면 놀랍게도 그 공간은 갑자기 우리의 일상생활의 공간으로 급변해버렸다.

병풍이 뭐길래 그렇게 신비스러운 공간을 연출하는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생각하며 우리는 자랐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특유한 병풍 문화가 아니었을까?

 

그때 우리 집에는 이상한 종이독이 있었다.

독은 독인데 종이를 안팎으로 덧붙인 가벼운 것이었다.

생각건대, 속살은 대나무임에 거의 틀림없을 것 같으나 댕댕이덩굴로 편책編柵(대나무, 갈대, 수수깡, 싸리 따위로 발처럼 엮거나 걸어서 만든 물건)한 골격일지도 모른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런 골격이 철근에 해당하고, 종이는 시멘트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버릴 만한 문종이 조각이 있으면 모아두었다가 풀칠해서 더덕더덕 처발라준다.

그 독의 생김새가 날씬할 수은 없으나, 옮겨놓기 쉽고 통기성이 좋아서 저장한 알곡이 상하지 않는 장점이 있었다.

다만 종종 쥐구멍이 나서 어머니는 짜증스러워 하셨다.

폐지를 이용한 선조들의 훈훈했던 슬기가 칼칼하고 날씬한 현대의 용기와 무척 대조된다.

종이독은 할머니들의 낡은 무명 치맛자락에 안겨서 사랑을 받는 것이 어울린다.

 

종이독에 질세라 사랑방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갓집이다.

소나무를 켜서 가느다란 나무막대기를 만들고, 이것을 얽어서 팔각형의 틀을 짜는데, 중간은 위로 튀어올라 그 안에 갓을 넣을 수 있다.

문종이를 바르고 또 발라서 두껍게 만들고 기름칠을 해 천장에 매달아둔다.

밑바탕의 반은 여닫을 수 있도록 되어 있어서, 갓집의 문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갓을 넣고는 문을 올려 닫는 것이다.

 

 

○문종이 문화

 

무엇보다 우리 민족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 아니 삶에 동반된 것은 문살에 발라진 문종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유리 따위의 다른 것들이 문종이를 대신하고 있지만, 오랫동안 우리 조상들은 문종이 문짝 안에서 살아왔다.

얇디얇은 한 장의 문종이가 척박한 외부 환경으로부터 실내의 고요와 평안을 지켜주었던 것이다.

겨울밤, 찬바람 부는 바깥 세계와 갈라놓은 방 안의 따스한 공기는 신기하고도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이다.

가을밤, '바삭' 하고 떨어지는 오동나무 잎사귀 소리를 도리어 증폭해서 들려주는 문종이의 위대한 악기이자 고막처럼 생각되었다.

 

눈이 오고 달이 뜨면 젖빛의 문종이는 예술의 극치에 이르는 순백으로 표백되어갔다.

눈인지 달빛인지 종이인지 분간이 가지 않고 우리는 황홀한 추상의 자연공간에 떠 있는 상태에 이르렀다.

닥나무의 긴 섬유가 서로 손잡고 문살에 붙어 연출해내는 특별한 무대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우리 민족은 '문종이 문짝 민족'이라 해도 좋을 것 같다.

그 은은하고 믿음성 있는,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기 짝이 없는 문종이 문을 생각해보자.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면 시골 사람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 더 생각나게 된다.

봄과 여름에는 논농사·밭농사에 골몰하다가 한숨 돌려 추수의 계절을 기다리는 동안, 잊었던 사람들이 생각나고 편지 보낼 마음이 절로 나게 된다.

지난날에는 전화란 게 어디 그리 흔했던가?

 

이럴 때면 동네 사람들은 흔히 우리 집에 찾아왔다.

우리 집 사랑방에 편지 쓰는 데 필요한 벼루와 크고 작은 붓, 그리고 두루마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루마리는 장터에서 사온 건데, 요즘 흔히 화장실에 걸어놓고 쓰는 회전식 화장지와 같은 모양이었다.

표면은 반지르르하고 뒷면은 다소 까슬까슬한데 먹이 번지지 않고, 편지를 써내려가면서 두루마리 종이를 서서히 풀어나간다.

편지를 쓰고 나면 끊어내고 처음부터 읽어내려간 뒤에 부친께서는 더 할 말이 있느냐고 물어보시곤 했다.

읽는 도중 어머니들은 마루에 앉아서 글썽글썽 눈물을 흘리기 일쑤였다.

20세기 초반의 편지지는 이런 두루마리 형태였다.

 

 

○초롱불

 

전기 조명기구가 없던 시절, 그때는 석유 호롱불도 감사한 시대였다.

이 호롱(불을 켜는 데에 쓰는 그릇)은 방 안에서는 등잔 위에 올려놓지만, 이웃집 마실 갈 때 또는 변소 갈 때는 호롱을 초롱속에 넣어 들고 다녔다.

이것이 지등紙燈(겉을 종이로 발라 만든 등)이다.

제사가 있는 밤이면 몇 개의 지등을 준비해야 했고, 처마에도 한두 개를 달아서 광역조명 역할을 하게 했다.

섣달그믐이나 정월 보름 때는 나쁜 귀신을 쫓아버리기 위해 초롱불을 여러 개 많이 켜두는 습속習俗(습관이 된 풍속)도 있었다.

 

초롱(지등)은 나무 막대기로 측면을 사면체로 만들고 거기에 문종이를 바른 것이다.

위쪽에는 구멍을 뚫어 그을음을 내보냈고, 밑바탕은 나무 판때기로 되어 있어 호롱을 올려놓을 수 있었다.

집집마다 한두 개의 초롱은 있었다.

때로는 초롱 안에 촛불을 켜기도 했다.

초롱의 은은한 불빛은 우리 민족의 생활 사고를 유순하게 만들었으며, 중용을 즐기고 극단을 피하는 생활 태도를 길러주었다.

 

큰 비가 온 뒤 개천 물이 불어 제방이 무너질 위험이 있는 깜깜한 밤중, 동네 어른들이 손에 초롱불을 켜들고 제방에 한 줄로 모여 서서 걱정하던 모습들이 생각난다.

붉은 불꽃에 물든 문종이 빛깔은 칠흑의 밤을 이겨내는 광휘光輝(환하고 아름답게 눈이 부신 빛)와 같았다.

그것은 또한 얇은 문종이의 위대한 힘이기도 했다.

 

 

○장판지

 

당시 우리 마을 사람들은 주로 방바닥에 돗자리를 펴놓고 살았다.

돗자리를 살짝 들면 흙이 보이고 흙냄새가 났다.

살 만한 집에서는 장판지壯版紙(장판: 방바닥을 바르는 데 쓰는 마감용 종이)를 깔았으나, 장판지를 깔고 사는 집은 드물었다.

장판지는 몇 겹의 문종이로 된 것으로, 우리 생활 문화의 큰 자랑이자 종이 문화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장판지를 바르고 콩댐질(장판이 오래가고 윤과 빛을 내기 위해 불린 콩을 갈아서 들기름 따위에 섞어 장판에 바르는 일)을 한 뒤 방구들에 불을 넣어 은근히 온도를 높이면 콩댐의 효과가 빨리 나타났다.

그 뒤 하루나 이틀, 사흘 동안 사용하지 않고 장판지의 안정을 기다렸는데, 장판방에만 살 수 있다면 실내환경으로선 더 바랄 것이 없었다.

부자 중의 부자도 장판방이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장판지 바로 몇 밀리미터 바로 아래는 흙이다.

자연의 정수는 흙이고 또 자연의 꽃은 식물성 섬유라고 할 수 있는데, 흙과 장판지의 궁합이 딱 들어맞고 어색함이 전혀 없다.

장판 위에 맨살을 대고 누우면 자연의 품에 안긴 것처럼 느껴지는데, 우리나라 사람처럼 자연과 밀착된 생활을 영위해온 민족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서양 사람이나 일본 사람이나 그들의 실내공간은 흙으로부터 멀리하고자 노력한 모습을 보여준다.

흙은 인간을 낳게 한 어머니라 할 수 있다.

안방에서나 사랑방에서나, 흙과 불과 몇 밀리미터 거리를 두고 사는 우리는 친자연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얇은 문종이 장판이 10년이고 20년이고 간다는 것은 기적 중의 기적이다.

쓰면 쓸수록 광택이 나고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장판 방, 이것은 우리의 자랑거리임에 틀림없다.

 

인간은 항상 자연을 그리워한다.

우리 주변이 자연으로 차 있을 때 우리는 그만큼 더 행복하다.

유리보다는 종이를, 시멘트보다는 목재를 좋아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 욕구가 아닐까?

생각해보면 우리는 진정한 종이 민족이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준 나무가 바로 닥나무였던 것이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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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1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