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25 - 독일가문비나무 본문

동식물 사진과 이야기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25 - 독일가문비나무

새샘 2024. 11. 24. 22:24

 

독일가문비나무 잎(출처-출처자료1)

 

북유럽이 고향이며 노르웨이를 비롯한 원산지에서는 아름드리나무로 자라 큰 숲을 이룬다.

질 좋은 목재를 생산하는 나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조경수로 심는다.

학명은 피체아 아비스 Picea abies, 영어는 Norway spruce(노르웨이가문비), 중국어 한자는 구주당송歐州唐松 또는 흑피목黑皮木.

 

독일가문비나무는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곳곳에서 심고 있다.

이 나무는 북유럽 여러 나라와 독일, 폴란드, 러시아 등 넓은 지역에 퍼져서 난다.

유럽의 산림 문명이라고 하면 소나무와 가문비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산림의 90퍼센트 이상이 소나무와 가문비나무 두 가지로 되어 있을 정도다.

 

독일가문비라는 이름은 좀 잘못된 것이다.

이 나무의 본고장 유럽에서는 노르웨이가문비 Norway spruce라고 부르고 있다.

과거 일본 사람이 독일에 가서 이 나무를 가져왔는데, 그때 독일에서 온 나무라는 이유만으로 독일가문비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처진 가지

 

국립수목원의 독일가문비나무(출처-출처자료1)

 

필자가 이 나무를 처음 본 것은 수원에서였다.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정문 앞에는 상징적으로 독일가문비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잎이 바늘같이 생겼고, 곁가지가 거의 수평 방향으로 나며, 그 곁가지에 달린 작은 가지는 모두 아래로 처진다.

노르웨이의 푸름으로 겨울을 굳세게 지내는 아름다운 나무다.

나무갓(수관樹冠) crown가 알맞은 원뿔 모양이고, 가지의 굳셈과 유연함은 마치 음악과 같다.

강인한 곁가지와 유연한 작은 가지가 서로 어울려서 조용한 그림을 만든다.

 

 

독일가문비나무 잎과 열매(출처-출처자료1)


북극의 빙하라든가 높은 산의 만년설을 이웃하는 독일가문비나무는 조용할 수밖에 없다.

느린 속도로 흐르는 빙하에 물결 소리가 있을 리 없고, 그 옆에서 이 나무가 떠들어댈 필요도 없다.

몇백 년의 침묵이라도 좋다는 나무가 바로 독일가문비나무다.

잔가지가 아래로 처지고, 긴 솔방울(구과球果) 열매 역시 아래로 드리운다.

고개를 아래로 숙인다는 것은 침묵이나 고요함을 뜻한다.

 

독일가문비나무가 자라는 지방에는 눈이 많이 온다.

만일 독일가문비나무 가지가 힘을 갖고 위로 쳐든다든가 그 솔방울이 빳빳하게 위로 선다면 바람과 눈 때문에 부러지거나 꺾일 것이다.

나무의 곁가지자 짧은데, 만일 그 곁가지가 길었더라면 눈이 그 위에 쌓여 꺾일 것이다.

 

생물은 살아가기 위해서 알맞은 몸가짐을 고안해낸다.

그런데 눈이 오고 쌓이는 까닭에 독일가문비나무가 이처럼 몸의 구조를 변형시킨 것은 아니다.

원래 이 나무는 여러 종류가 있어 곁가지가 길고 굵은 경우도 있었다.

그 중 곁가지가 굵은 나무는 눈 때문에 살아남지 못하고 도태된 반면, 곁가지가 가늘고 잔가지가 처지는 것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적응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진 나무만이 살아남게 된 것이다.

아래로 처지는 모양이 힘없어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이는 무서운 것을 이겨내는 장치다.

그래야 춥고 무서운 바람이 부는 북쪽에서 견딜 수 있다.

약하게 보이지만 사실은 강한 것이다.

약하게 보이는 것이 이기고 강하게 보이는 것이 지는, 그런 특이한 원칙을 이 나무가 알려주고 있다.

 

 

○원산지에서의 독일가문비나무 모습

 

천연 가문비나무 숲(출처-출처자료1)

 

독일가문비나무는 노르웨이에서 보아야 실감이 난다.

1961년 이른 봄, 필자는 스톡홀름에서 친구와 노르웨이 쪽으로 자동차 여행을 했다.

오슬로 교외에 있는 스키장 부근의 가문비나무 숲은 절경이었다.

오슬로 시는 독일가문비나무 숲속에 둘러싸여 있었다.

얼마나 아름다운 나무들인가?

크리스마스트리의 주인공이 바로 이 가문비나무다.

독일가문비나무는 종교적인 침묵과 사색, 명상, 그리고 고요함을 담고 있다.

그러한 나무숲 안에 살고 있다는 게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인가!

필자는 그곳에서 나무가 연출하는 숲의 예술을 볼 수 있었다.

 

1973년, 다시 노르웨이를 찾을 기회가 있었다.

8월 31일 오슬로를 거쳐 서해한 쪽에 있는 베르겐으로 향했다.

약 만 년 전인가 몇천 미터의 두께에 이르는 얼음덩이가 유럽의 천지를 덮었다가 천천히 후퇴하면서 북극으로 옮겨갔다.

이때 얼음덩이는 유럽 대륙을 대패질하듯이 깎아버렸다.

노르웨이 국토에는 이 얼음에 할퀸 자리가 남아 있었다.

남쪽에서 북쪽을 향하여 줄을 그은 듯 할퀸 자리가 뚜렷이 보였다.

언덕도 바위도 산도 평야도 모조리 깎여 있었다.

빙하의 위대한 힘을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땅 위에 가문비나무와 유럽소나무가 뿌리를 박고 있었다.

 

 

○지구의 절경, 피오르

 

노르웨이 요정의 길, 피오르(출처-출처자료1)

 

베르겐에 도착하여 다시 배를 타고 피오르 fjord(협만峽灣: 빙하의 침식으로 만들어진 골짜기에 빙하가 없어지고 바닷물이 들어와서 생긴 좁고 긴 만으로서, 양쪽 해안은 경사가 급하며 횡단면은 U자 모양을 이룬다. 노르웨이 해안에서 볼 수 있다)에 떠 있는 작은 섬으로 갔다.

노르웨이 서북쪽에 피오르가 있고 그것이 질경을 이루고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고 그림으로 보기도 했지만, 직접 필자의 눈으로 그것을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필자 생애 이보다 더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본 적이 없다.

스위스의 알프스, 독일의 라인강변 모두 아름다웠지만, 노르웨이의 피오르를 당할 곳은 없다고 본다.

 

북해의 물은 푸르디푸른 빛이었고, 그 깊이는 알 수 없을 정도로 깊었다.

깎아지른 화강암 절벽은 후퇴하는 빙하가 마지막 힘을 다해서 절단한 것이 아닐까?

빤히 건너다보이는 양쪽 절벽 사이에 푸르다 못해 검게 보이는 깊은 바다가 굽이굽이 내륙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높이 100미터가 넘는 그 절벽에는 가는 곳마다 폭포가 걸리고 무지개가 피오르 위에 서 있었다.

폭포에서 생기는 물안개는 아침·낮·저녁 할 것 없이, 봄·여름·가을·겨울 할 것 없이 그 위치에 그대로 무지개를 걸어놓고 있었다.

 

가문비나무는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가문비나무 고향의 영광을 모르고선 이 나무를 말할 수 없다.

 

 

○노르웨이의 인심

 

필자는 섬에 있는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여기서 2주일 동안 머물 예정이었다.

호텔 직원에게 노르웨이 돈으로 환전할 것을 부탁했다.

호텔에 그날의 환율 시세가 표시되어 있었다.

돈을 바꾸어주는 여직원의 말에 필자는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선생님, 이 호텔에서도 돈을 바꿀 수 있지만, 베르겐 시내에 있는 은행에서 환전을 하면 선생님에게 더 유리합니다. 내일 아침 제가 배를 타고 나가서 돈을 바꾸어 오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와 같은 친절을 우리 주변에서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까?

이러한 인정이 바로 노르웨이가문비나무의 인정인 것이다.

가지가 아래로 드리우는 부드러움과 그 여직원의 부드러움은 서로 통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 가문비나무 숲에서 인간성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거만이라든가 고개를 빳빳이 세우는 모습은 생각할 수 없었다.

 

필자는 피오르의 호텔을 떠나 노르웨이를 동서 방향으로 횡단했다.

베르겐과 오슬로 중간 지점에 예일로 Geilo라는 작은 도시가 있었다.

높은 산 위 평원에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관광도시로 발달한 곳이었다.

 

도중에서 본 보링포센 Voringfossen 폭포는 높이가 182미터로서 이 폭포에는 아래위로 무지개가 겹쳐서 걸려 있었고, 물은 피오르의 바다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예전에 가문비나무로 통나무집을 만들어 살았다.

물론 유럽소나무도 통나무집을 만드는 재로가 되었을 것이다.

백두산 근처에서 통나무집에 살아본 경험이 있는 필자는 이곳 노르웨이의 통나무집 건축 양식이 우리나라의 것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러나 노르웨이 통나무집은 그 규모가 훨씬 컸다.

지붕 위에 흙을 얹고 풀이 나 있는 것으로 보아 비가 많이 오지는 않는 모양이다.

 

 

○캔들 트리

 

스웨덴의 가문비나무 숲(출처-출처자료1)

 

높은 산에 자라는 가문비나무의 나무갓은 정말 좁다.

곁가지가 매우 짧다는 것이다.

줄기는 곧다.

줄기가 굽었다간 눈 때문에 당장 꺾일 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눈이 많이 오는 지역의 나무는 곧은 줄기를 가지고 있다.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눈이 적은 곳에서는 줄기가 조금 굽어도 상관없다.

그래서 굽은 나무를 더 많이 볼 수 있다.

나무갓이 좁은 가문비나무를 흔히 '캔들트리 candle tree'라고 부른다.

불을 켜는 초처럼 가늘고 길다 해서 캔들이라 한 것이다.

 

필자는 스웨덴과 핀란드, 그리고 폴란드에서 가문비나무 숲을 볼 수 있었다.

핀란드에서 거의 북위 70도가 되는 곳까지 가보았는데, 북쪽에 자라는 가문비나무는 생장이 매우 늦었다.

150년생 나무의 줄기를 기념으로 받았는데, 그 지름이 15센티미터가 되지 않는다.

15센티미터 되는 줄기의 횡단면에서 300개의 나이테를 읽어야 하지 않는가?

이것은 나무가 자란 것이 아니라, 세월을 그대로 지내온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필자는 그 줄기의 원판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독일가문비나무는 씨로 번식이 잘 된다.

뿌리가 땅속 깊게 들어가는 일이 없기 때문에 바람이 적은 곳에 심어야 한다.

서양식 정원을 꾸미는데 알맞은 나무다.

물론 독일가문비나무는 종류가 많고 쓰임새도 많지만, 풍치風致(훌륭하고 멋진 경치)의 나무라는 것이 더 적당한 표현일 것이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2024. 11. 1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