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27 - 등 본문
흔히 등나무라 불리는 등은 쉼터의 그늘을 만들어주며 연보랏빛 꽃이 주렁주렁 매달리는 아름다운 콩과식물의 갈잎 넓은잎 덩굴나무다.
경남과 전남 일부 지역세서 자생하며 전국 정원과 공원에 심고 있다.
껍질을 벗겨 닥나무와 함께 종이를 만들었고, 줄기는 등공예에 이용되었다.
학명은 위스테리아 플로리분다 Wisteria floribunda, 영어는 Japanese wisteria(일본등) 또는 common wisteria(보통등), 중국어 한자는 등藤 또는 여라女蘿.
'등나무 등藤'자는 '풀 초艸'자와 '물 솟을 등滕'(또는 '오를 등騰')자가 합쳐져 만들어진 글자로서, 위로 감아 올라가는 식물이란 뜻이다.
이는 등나무의 생태적인 성질을 말하는 형성문자다.
'등滕' 또는 '등騰'자는 모두 무엇을 감고 올라간다는 뜻이 있으며, '등登'자나 '승繩'자와 같은 계통의 글자다.
옛책에서 칡(갈葛)은 풀로 취급하고 등藤은 나무로 취급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사람들의 눈에 등은 역시 둥치가 굵어서 풀로는 도저히 볼 수 없었던 것 같다.
'등'이 덩굴나무(만목蔓木)라 하면 구태여 등나무나 칡만을 일컫는 것이 아니로 나무인 모든 덩굴식물을 포괄하여 표현하기도 한다.
개인이나 집단이 서로 적대시하고 충돌하는 것을 뜻하는 갈등葛藤이란 칡과 등이 서로 얽힘을 표현한 것이다.
좁게는 꽃이 아름다운 '참등藤'을 말하지만, '등'이라 하면 등 종류로 통용되고 있다.
영문명 '위스테리아 wisteria'는 '위스타리아 wistaria'로 쓰기도 한다.
○등 자생지
필자가 참등의 엄청난 자생지를 본 곳은 부산 동래의 범어사 주변이었다.
범어사는 의상대사가 창건한 절로, 해발 약 800미터의 금정산金井山에 위치하고 있다.
산허리 경사가 거의 평평한 편이며 계곡에는 물이 흐르고 큰 바위가 수없이 지면에 노출되어 있는데, 그 넓은 면적에 걸쳐서 등이 자라고 있다.
그 사이사이에는 소나무, 팽나무 등 큰 나무들도 자라고 있는데, 등나무가 이들 나무를 감고 올라가서, 특히 소나무 가운데는 죽은 것들이 있었고 등나무의 압박을 받고 있는 큰 소나무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등이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는 군생지群生地로 천연기념물 제176호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등나무의 기세가 너무 등등해서 사찰의 중요한 경관을 이루고 있는 소나무 노거목은 그 기세에 눌려있는 모습이었다.
범어사 주변의 솔숲은 매우 아름다웠고 소나무 고유의 미를 아낌없이 나타내고 있었다.
등나무도 중요하지만 소나무 또한 그 못지않게 값진 존재이므로 소나무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등에 대해서는 그 위쪽 덩굴의 일부를 끊어서 세력을 줄여주고 소나무가 그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다.
몇 해 지나면 등이 다시 그 소나무를 타고 올라가겠지만 그때 다시 이와 같은 작업을 해주어 소나무를 보호하고, 때로는 큰 나무를 무섭게 감고 올라가는 용과 같은 등나무의 모습을 남겨 그것을 보는 것도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에도 범어사에 갈 일이 있었는데, 등나무가 아니었다면 아직까지 범어사 주변의 아름다운 사찰림을 보지 못했을 것으로 생각되어 등나무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등에 관한 전설
범어사 말고도 경주 오류리五柳里에 있는 큰 참등 네 그루 역시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그중 큰 나무는 가슴높이 줄기 지름이 약 50센티미터에 이른다.
이 등나무에는 아름다운 전설이 있다.
신라시대에 용림龍林이라 해서 임금이 사냥을 즐기던 이곳의 등을 용등龍藤으로 부르는데, 혼기를 앞둔 두 자매가 죽어서 이 등나무로 변했다고 한다.
내용인즉, 두 자매가 동시에 옆집 총각을 사랑했고 그 총각이 싸움터로 나가게 되자 삼각관계의 사랑을 알게 된 두 자매가 연못에 몸을 던져 등나무가 되었다는 것이다.
총각은 전쟁터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고 슬퍼하다가 그도 역시 연못에 몸을 던졌는데 그 몸이 팽나무로 변했으며, 그래서 지금 이 등나무는 큰 팽나무를 감고 올라가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 등나무의 꽃을 말려서 신혼부부의 금침 속에 넣어주면 애정이 더해지고, 잎을 따서 물에 삶아 마시면 애정이 되살아난다고 하여 지금도 이곳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이와 비슷한 그리스 신화가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제우스 Zeus와 헤르메스 Hermes 신을 극진히 대접한 보답으로 바우치스 Bauchis와 그의 남편 필레몬 Philemon이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다가 죽어서 부인은 피나무가 되고 남편은 참나무가 되어 줄기가 서로 붙어 한 나무가 되었다는 이야기다.
지금도 각처에서 사람들이 찾아와서 이 훌륭한 부부를 흠모하는 뜻에서 꽃다발을 가지에 걸어준다고 한다.
한편 경주에 서부엽림西部獵林이란 숲이 있었는데, 이 숲에는 큰 등이 많았다고 한다.
예전의 시에 "평평한 수풀을 바라보니 끝없이 넓고 그 안에는 울밀鬱密한(나무 따위가 무성하게 우거져 빽빽한) 백년의 등넝쿨, 천년을 넘긴 나무들이 자욱하며 온갖 짐승이 우글거린다"는 내용이 있다.
지금과는 엄청나게 다른 아득한 경주 주변 자연상태가 연상된다.
○한시 속의 등나무
등나무는 흔히 경관 조성용으로 심는데, 꽃이 아름다워 시로도 읊곤 한다.
다음 시는 매우 고결하고 무언가 인간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좋다.
당나라 때 장적張籍의 시다.
"독향쌍봉로 獨向雙峯老 (홀로 두 개의 산봉우리를 보면서 사는 동안에 늙었구나)
송문폐양애 松門閉兩涯 (두 언덕 사이에 소나무 문이 있어 길을 막고 있네)
번경상초엽 翻經上蕉葉 (경전을 번역해서 파초잎 위에 글을 쓰는데)
괘납락등화 掛衲落藤花 (가사袈裟 걸어둔 곳에 등꽃이 떨어지네)
추석신개정 甃石新開井 (돌을 다져서 새로 우물을 만들고)
천림일종다 穿林日種茶 (숲을 끊어 날마다 차나무를 심는다)
시봉해남객 時逢海南客 (때로 해남에서 손님이 찾아와)
만어문수가 蠻語問誰家 (사투리로 누군가의 집을 찾는구나)"
경전을 읽는 동안 파초잎이 길게 자랐고, 가사를 걸어놓고 산속에 있는 동안 벌서 등꽃이 진다는 것인데, 이는 산속에 오래 머물고 있음을 암시하는 표현으로 가난하지만 깨끗하고 향기 나는 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지금은 어디에서 이러한 분위기를 찾아볼 수 있을까?
현실적으로 이렇게 한적한 분위기에만 젖어 있을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나마 이러한 상황을 음미해보는 것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고요한 명상에 잠길 수 있는 시간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다음은 백거이白居易가 쓴 늦봄 자은사慈恩寺 등나무에 관한 시다.
이 시에서는 흐르는 세월을 원망하며 온종일 산속을 헤매고, 황혼과 더불어 등꽃으로 인해 초여름이 닥쳐온 것을 느끼고 있다.
"자은춘색금조진 慈恩春色今朝盡 (자은사의 봄기운은 이제 끝나고)
진일배회의사문 盡日徘徊倚寺門 (온종일 돌아다니다가 지금 절간 문에 이르렀네)
추창춘귀유부득 推悵春歸留不得 (슬프다 봄은 떠나가고 그 봄을 붙잡지 못했구나)
자등화하점황혼 紫藤花下漸黃昏 (등꽃은 피는데 황혼이 드리운다)"
위의 두 시에서는 모두 등나무는 잡다한 일상생활을 떠나 있다는 점에서 서로 통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도 등나무는 절간에 많이 심었다.
등의 줄기는 섬유로 이용될 수 있다.
칡만큼은 쓰임새가 많지 않지만, ≪계림유사鷄林類事≫에 "신라는 등포藤布가 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도경高麗圖經≫에 "고려의 종이는 모두 닥나무를 쓰는 것이 아니라 대로 등의 섬유로도 만든다", "등으로 각종 그릇을 만든다"라고 한 것을 보면, 신라 때부터 고려 초에 걸쳐 등은 필수 재료품 중 하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도 등공예의 인기는 대단하다.
또 전남 담양의 소쇄원 및 전남 강진군 다산초당의 정원에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등나무는 옛날부터 관심의 대상인 정원수였다고 생각된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2.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 http://www.nature.go.kr/kbi/plant/pilbk/selectPlantPilbkDtl.do?plantPilbkNo=3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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