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고조선이 사랑한 세 가지 무역품 본문
1. 세계 최초의 명품, 모피
유명한 사자성어 가운데 '관포지교管鮑之交'란 말이 있다.
서로를 잘 이해하는 깊은 우정을 뜻하는 이 말은 중국 춘추시대春秋時代(서기전 770~서기전 403)의 사람인 관중管仲과 포숙아鮑叔牙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인들에게 관중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고사성어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고조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겐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관중에 대한 책 ≪관자管子≫는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이 책에서 고조선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이 최초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관자라는 인물은 약 2,700년쯤 전 중국 춘추시대에 실제로 활동했던 사상가이다.
이 책에는 현재의 산둥반도에 세워졌던 국가인 제齊나라의 왕 환공桓公(재위 서기전 685~서기전 643)이 관자에게 나라를 어떻게 운영해야 하는지 묻고 그가 답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책의 저자는 관중이 아니라 그가 죽은 뒤 몇백 년 뒤 관중의 사상을 따르던 사람들이다.
책이 쓰여진 시기와는 다르지만 책에는 관중이 활동하던 당시의 시대상이 잘 반영되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책에 조선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일까?
당시 제나라는 중국 변방에 있는 변두리 국가였다.
관자는 이곳을 다스리는 환공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제나라는 중원을 중심으로 보면 바깥이었지만, 산둥반도라는 거점에 위치해 바다를 끼고 여러 나라와 교역하기에 유리했다.
이런 환경에서 환공은 국가 발전을 위해 관자와 대화를 나누게 된 것이다.
환공이 먼저 이렇게 물었다.
"내가 듣자 하니 해내海內(중국과 그 주변 지역)에는 일곱 가지의 옥패玉佩(옥으로 만든 패물 즉 보물)가 있다고 하던데요."
그 말을 받아서 관자는 여러 지역의 보물을 열거하면서 "발조선發朝鮮(고조선)은 문피紋皮(얼룩무늬 모피)가 유명합니다"라고 한다.
이 구절만 보면 관자가 어딘가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가 아닌지 의심할 수도 있지만, 그는 이어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부언한다.
"발조선의 문피가 유명하고 천금의 가치가 있으니 제값을 주고 사 오면 주변 국가들이 우리에게 복종할 것입니다."
문피는 호랑이나 표범처럼 생태계의 최상위를 차지하는 포악한 육식동물의 가죽을 말한다.
당시에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다.
즉, 각 제후국이 서로 경쟁하면 서로의 위용을 과시했다.
호피는 지금도 고가지만, 과거에는 황제들만 깔개로 사용하는 최고급 물건이었다.
호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야 했는데, 중국에는 그 동물들이 잡히는 곳이 거의 없었다.
인도의 벵골호랑이, 알타이 Altai 지역의 표범, 백두산호랑이 정도가 포획할 수 있는 맹수류의 전부였지만, 춘추전국시대에 중국은 인도나 알타이 지역과는 거의 교류하지 않았다.
그러니 다른 제후국의 왕(엄밀하게는 공公이나 후侯)도 비싼 돈을 주고서라도 자신의 위엄을 나타내는 호피가 필요했을 것이다.
만약 제나라가 고조선과 결탁해 호피 무역선을 독점한다면 무력을 쓰지 않아도 다른 나라들이 스스로 제나라의 눈치를 보며 복종할 것이라는 뜻이다.
고조선은 중간에서 두 지역을 연결하는 중개무역을 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관자≫에 나오는 그 한 줄이 바로 그 점을 증명하는 것이다.
고대 이래로 모피는 전 세계적으로 희귀성과 보온성, 독특한 무늬 덕에 높은 가격을 자랑하는 명품으로 취급받았다.
따라서 모피를 탐한 나라는 제나라뿐만이 아니었다.
시베리아 Siberia가 러시아 Russsia 땅으로 편입된 이유도 모피 때문이었다.
1580년에 러시아는 처음으로 우랄산맥 Ural Mountains을 넘어 시베리아 땅을 밟았다.
당시 러시아 탐험대의 반은 불한당, 반은 떠돌이인 코사크인 Cossack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들은 황량한 불모지에 열광하여 무엇인가에 홀린 듯 동쪽으로 이동해 70년도 안 되어 땅 끝인 캄차카 반도 Kamchatka Peninsula에 이르렀다.
그들을 사로잡은 것은 바로 추운 눈밭을 날쌔게 다니는 고운 털의 스라소니 lynx, 담비 marten, 타르바간 tarbagan, 비버 beaver 같은 모피 동물이었다.
그들이 잡아온 모피는 너무나도 귀해서 '검은 황금 Black Gold'이라 불릴 정도였다.
때마침 당시 유럽은 소빙기小氷期 Little Ice Age(빙하기는 아니지만 비교적 추운 기후가 지속되었던 시기로서 16세기 말부터 1850년대까지 이어진 산악빙하의 증가기)로 겨울이 혹독하게 추웠으므로 귀족들은 앞다투어 따뜻하고 아름다움 모피를 구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시베리아가 러시아의 땅이 된 이유는 바로 모피에 환장換腸한(어떤 것에 지나치게 몰두하여 정신을 못 차리는 지경이 된) 유럽의 귀족과 사냥꾼들 때문이었다.
이처럼 모피는 대체로 추운 고산지대에서 생산되지만 이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문명국가의 상류층이었기 때문에 원산지와 판매처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동물을 사냥해서 모피로 가공하는 산업은 상당히 부가가치가 높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브랜드, 고조선의 모피
그렇다면 실제 고대인들이 입었던 모피코트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러시아 알타이 산악지역의 영구동결대에서 아쉽게도 고조선의 모피는 실물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약 2,500년 전의 모피코트 실물이 발견되었다.
몇천 년의 시간으로 비록 빛은 바랬지만 견고하고 포근한 느낌은 여전히 남아 있다.
고대인들은 두툼한 모피코트 하나로 제대로 된 난방도 없는 추운 시베리아의 겨울을 견뎌냈을 것이다.
하지만 고조선이 있었던 지역은 시베리아만큼 춥지도 않고 험한 산악지대도 아니었다.
모피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동물들은 대부분 먹이사슬의 최상위포식자이기 때문에 주변에 사람이 전혀 없는 곳에만 서식한다.
그런 험지에는 국가를 세우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고조선의 모피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모피의 흔적과 같은 직접적인 증거보다 유적에서 발굴되는 모피 동물의 뼈와 도구 따위로 간접 추론해볼 수 있다.
2011년, 내몽골 동남부에서 만주지역의 동물 뼈가 나온 유적을 모두 검토한 결과, 백두산 일대의 장백산맥과 압록강 중상류에서 모피를 가공했던 동물의 뼈가 다수 발견된 것으로 나타났다.
호랑이 뼈는 약재로 사용했기 때문에 거의 발견되지 않았고, 족제비, 오소리, 두더지, 비버와 같은 동물 뼈는 많이 출토되었다.
모피로 가공되는 동물들은 산 채로 잡기가 쉽지 않은 데다 성질이 포악하고 덩치가 작기 때문에 고기로 선호하지 않았다.
따라서 사냥한 자리에서 곧바로 가죽을 벗겨내므로 거주지에서는 뼈를 발견하기 어렵다.
다만 가끔 모피를 가공하는 마을에서 양질의 모피를 얻기 위해 털갈이 하는 것을 기다리거나, 아니면 새끼를 데려와서 어느 정도 키운 다음 잡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 흔적이 고대 거주지 유적에서 발견된 것이다.
또 다른 간접 증거는 모피 사냥꾼들에게 대금으로 지급하는 철기 유물이다.
현재 북한의 자강도와 양강도 일대에서 길을 넓히는 공사를 하던 중 중국 춘추전국시대 연燕나라에서 사용된 화폐인 명도전明刀錢과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는 철제 농기구가 가득 담긴 항아리 몇십 개가 발견된 적이 있다.
이 물건들은 모피와 같은 명품을 물물교환하기 위해 준비해둔 것이었다.
항아리가 발견된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모피 동물은 대부분 겨울에 사냥한다.
그때가 눈이 높게 쌓여 사냥하기도 쉽고 동물의 털도 곱기 때문이다.
이렇게 얻은 모피를 중국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했다.
고조선은 지리적으로 중국과 교역하기 위해 서쪽 해안을 활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중국과 가장 가까운 곳은 산둥반도였는데, 모피를 생산하는 백두산에서 산둥반도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한 번에 가기 어려웠다.
따라서 모피 사냥꾼들은 중간에 무역중개상을 끼고 물물교환하는 방식으로 생필품을 얻었다.
무역상은 물물교환을 하기 위해 온갖 물건들을 가지고 만주지역 근처까지 갔다.
그런데 무역이 끝나고 복귀할 때, 무겁게 가지고 간 철기가 남으면 다시 가져오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래서 남은 철기는 집 근처의 담벼락 부근에 묻어놓고 나오는 것이다.
명도전과 철기 농기구 유물은 일제 강점기부터 이 지역을 길을 낼 때 종종 발견되곤 했다.
이렇게 해서 백두산에 있었던 모피가 고조선으로 넘어왔다는 것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그렇다면 실제 모피를 가공하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최근 <신과 함께>나 <킹덤 아신전 Kingdom: Ashin of the North>과 같은 영화와 드라마에 북방에 살던 여진족의 모습이 종종 등장했다.
시대는 그보다 오래되었지만, 고조선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생활상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화려한 모피코트를 입는 것은 귀족이나 왕이었고, 그 동물을 사냥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의 그렇게 화려하지 않았다.
최근 지린성(길림성吉林省) 퉁화시(통화시通化市) 만발발자萬發撥子라는 유적에서 모피를 사냥하고 살던 사람들의 집단 무덤이 발견되었다.
이 유적이 만들어진 시기는 고조선이 멸망하기 직전으로 추정되며, 집단 무덤의 주인들은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당시 족제비나 오소리와 같은 설치류를 중심으로 모피를 가공했던 사람들로, 이들의 죽음에는 직업이 관련되어 있었다.
설치류는 흑사병(페스트 pest)의 원인인 페스트균을 옮기는 숙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모피 기술자들 사이에 설치류에서 옮은 전염병이 돌면서 단체로 비슷한 시기에 사망한 것이라고 필자의 최근 연구에서 밝혔다.
이렇듯 모피는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이어지는 사이에도 아주 중요한 수출품이지만, 때로는 그들의 생명을 위협하기도 했다.
이러한 모피 중개무역은 고조선에서부터 시작해 만주 일대에 몇천 년 동안 널리 퍼져왔다.
다음 그림은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 19세기의 것이다.
당시 모피를 수납하던 곳은 아무르강 중상류의 데렌이라고 불리는 지역으로 청나라 관리들은 모피 사냥꾼들이 모피를 들고 찾아오면 다른 물건으로 물물교환을 해주곤 했다.
바로 이러한 중개무역의 시초가 고조선이었던 셈이다.
고대 이래 세계사에서 모피가 차지하는 비중은 너무나 컸다.
고조선 역시 그러한 흐름에서 뒤처지지 않았다.
인간의 동물 가죽에 대한 욕망은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왔고, 고조선이 중국과 교류하는 근거가 되었다.
모피는 온대와 한대 사이의 교역을 이어주는 세계사의 커다란 축이었으며 고조선은 모피 무역의 중심지였다.
북반구 전역에서는 산간에서 모피를 사냥하는 집단, 소매상, 중개인 따위를 거치는 이러한 모피 무역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고조선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무역 능력이 뛰어났음을 보여준다.
모피는 현대사회에 패션 하면 프랑스, 건축 하면 스페인이 떠오르는 것처럼 고조선을 대표하는 최초의 브랜드였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청동기를 만들었다는 것만으로 국가가 오래 지속될 수는 없다.
다른 지역에서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뛰어난 정보력으로 재회를 확보해야만 경제력이 높아지고 국가 경쟁력의 우위를 점하게 된다.
당시에 그와 같은 전략을 세울 수 있는 물품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모피였다.
고조선의 모피는 고조선의 역사가 아니라 세계사의 물결에서 고조선이 함께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2. 고조선의 음악
고고학이 밝혀낼 수 있는 정보는 그리 많지 않다.
현대에 이르러서까지 형태를 보존한 채 발견된 유물과 유적만으로 과거의 생활상을 모두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음악, 미술, 음식 따위와 같은 무형의 산물을 찾아내는 일은 더욱이 쉽지 않다.
그런데 여기, 고조선의 무형 유산과 음식 문화를 밝혀낼 수 있는 재미있는 연구가 남아 있다.
2014년에 개봉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라는 영화를 기억하는가?
72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함께한 노부부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 documentary(다큐 docu: 실제로 있었던 어떤 사건을 사실적으로 담은 영상물이나 기록물) 장르 genre(갈래)로는 이례적으로 500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모으며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주었다.
이 영화의 제목은 고대가요인 <공무도하가公無渡河歌>에서 모티프 motif(모티브 motive: 예술 작품을 표현하는 동기가 된 작가의 중심 사상)를 얻었다.
<공무도하가>는 머리가 하얗게 센 미친 남자, 다른 말로 백수광부白首狂夫의 아내가 물에 빠져 죽은 남편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노래라고 전해진다.
전문은 이렇다.
"공무도하公無渡河 (님아 그 물을 건너지 마오)
공경도하公竟渡河 (님은 기어코 물을 건너셨도다)
타하이사墮河而死 (물에 빠져 돌아가시니)
당내공하當奈公何 (가신 님을 어이할꼬)"
이 노래의 창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진晉나라의 최표崔豹가 지은 ≪고금주古今注≫에 설화와 함께 한역漢譯이 기록되어 있어 그 이전에 창작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또한 노래가 발견된 지역은 고조선 멸망 후 조선인들이 머무르던 곳이었으므로 역사적 배경 역시 우리나라로 보고 있다.
한漢나라는 사방을 정벌할 당시 각 지역을 돌면서 민요을 수집했다.
<공무도하가>는 그중에서 고조선을 침략했을 때 채록한 문학으로, 다른 말로는 <공후인箜篌引>이라고도 부른다.
백수광부의 아내가 남편이 죽은 뒤 공후를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는 데서 제목이 유래되었다.
공후는 지금의 하프 harp와 같은 악기로, 고조선의 악기는 아니었다.
현재까지 발견된 가장 이른 하프는 약 5,500년 전에 메소포타미아 Mesopotamia의 무덤에서 발견된 바 있다.
그리고 약 3,000년 전에는 실크로드(비단길) Silk Road 지역인 중앙아시아와 중국 신장성(신강성新疆省)에서도 널리 연주되었다.
당시의 하프는 현재 우리가 아는 하프라기보다는 라이어 lyre라고 하는 휴대용 악기였다.
크기는 말 위에 타고서도 연주할 수 있을 만큼 작고 가벼웠다.
<공무도하가>의 별칭이 '공후인(하프의 노래)'이라니 고조선은 서역에서 악기를 수입해서 연주할 정도로 새로운 음악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개방성 덕분에 <공무도하가>가 한나라에서도 널리 인기를 끈 게 아닐까?
3. 고조선의 음식문화
고조선의 식문화에 관한 기록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찾아볼 수 있다.
고조선의 음식은 사료에는 남아 있지만, 고고학적으로는 거의 형태를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기록 중에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진다.
전한前漢의 7대 황제인 무제武帝(재위 서기전 141~서기전 87)는 위만조선을 침략해 영토를 확장했다.
어느 날 무제가 고조선의 바닷가를 걸어가는데, 어딘가에서 시큼하고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났다.
냄새가 나는 곳을 따라가 보니 생선 젓갈이 땅에 묻혀 있었다.
한나라의 황제와 군대가 몰려오자 그 지역에 살던 백성들이 모두 도망가면서 젓갈을 땅에 묻어둔 것이었다.
무제는 이것을 보고 "오랑캐를 쫓다가 내가 발견했구나"라고 말하며 젓갈에 '축이逐夷'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는 이후에도 젓갈을 아주 좋아하며 즐겨 먹었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한무제가 고조선을 침공했을 때 수많은 고조선의 문화가 중국으로 건너갔을 것이다.
4. 맺는 말
고조선이 사랑한 3대 무역품은 이렇게 명품 의류인 모피, 음악은 하프, 음식은 젓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고고학 유적을 엮어 들여다보면 한 번도 보지 못한 고조선인들의 삶도 우리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우리의 기원이라고 하면 여전히 곰과 호랑이가 떠오르는가?
고조선이 설화 속에 등장하는,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국가처럼 여겨지는가?
고조선은 말도 안 되게 거대했던 상상 속의 나라도 아니고, 중국이 말하는 것처럼 이름만 있었던 나라도 아니다.
한국사의 시작인 동시에 문명사적인 보편성을 획득한 역사적인 고대국가였다.
유라시아에서 숙련된 기술자를 스카우트해서 청동기를 만들고, 가장 값비싸게 거래할 수 있는 모피를 중개무역하면서 부를 쌓았다.
고조선 시대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지리적 조건은 달라지지 않았다.
고조선은 세계사적인 보편성과 한반도가 가진 지정학적인 환경을 적절하게 이용하며 등장한 한반도의 첫 번째 문명이었다.
1995년에 필자가 첫 번째 석사 논문을 쓸 당시, 연구를 위해 중국에도 가보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웠다.
졸업한 뒤에는 러시아에서 박사과정을 밟게 돼 중국에 가는 일은 점점 더 요원해졌다.
그러다가 2004년 10월, 드디어 중국으로 건너가 난생처음으로 비파형 동검을 만져보며 조사할 기회를 얻었다.
지금도 그때가 미치 슬로비디오의 한 장면처럼 생생하게 기억난다.
현장의 분위기, 칼을 처음 본 느낌, 칼의 촉감 따위가 마치 어제 일처럼 떠오른다.
그 칼이 마치 필자에게 말을 거는 듯했다.
고고학은 마치 새로운 사람을 만나 대화하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 시대를 알아가는 재미를 선사한다.
유물 한 점에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 하나에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숨겨진 사연이 몇천 년을 이어와 현대에 닿고, 우리에게 예상치 못한 감격을 선사한다.
이것이 바로 고고학만이 갖고 있는 신비로운 매력이다.
※출처
1. 강인욱 지음, 우리의 기원-단일하든 다채롭든, 21세기 북스, 2022.
2. 강인욱 지음, 강인욱의 고고학 여행, 흐름출판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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