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식물의 '생장 가소성'이란 본문
식물은 끊임없이 환경에 반응하며 생장하기 때문에, 똑같은 유전자형 genotype을 가진 개체라도 저마다 서로 다른 형태로 자랍니다.
이를 식물의 생장生長 가소성可塑性 growth plasticity이라 합니다.
'가소성'이라는 말이 조금 낯설게 느껴지죠?
쉽게 말해, 가소성이란 외부의 자극에 따라 형태나 기능이 변할 수 있는 능력을 뜻합니다.
이 용어는 원래 뇌과학 분야에서 자주 쓰입니다.
인간이 아이로 처음 태어났을 때 어린아이의 뇌는 완전 백지상태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후에 아이가 자라면서 어떤 경험을 했는지, 어떤 학습을 했는지에 따라서 아주 다른 형태의 신경세포망(뉴런 네트워크) neuron network이 형성됩니다.
그런데 그 신경세포망이 한 인간의 정체성을 결정해 주게 됩니다.
뇌를 어떻게 빚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다른 인격체로 성장할 수 있다는 뜻으로 '신경 가소성 neural plasticity'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죠.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은 주어진 환경에 따라 자신의 형태를 바꾸어 가며 자라야 하는 운명을 지녔지요.
반면, 동물은 발생 과정이 대부분 유전적으로 결정되어 있어 환경의 변화를 거의 받지 않습니다.
사례를 들어볼까요.
사람의 경우, 유전적으로 동일한 일란성 쌍둥이가 태어나면 두 아이를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를 받으신 큰어머님도 동생과 저를 왼쪽, 오른쪽에 따로 눕혀 놓으셨다고 하더군요.
"오른쪽 먼저, 오른쪽 먼저···"를 계속 되새기면서요.
당연히 이후 성장 과정에서도 매번 친척들은 누가 "일하냐?"라고 반복해서 물으셨지요.
그만큼 외형은 물론 성장 과정까지 유전적 프로그램, 즉 유전체 genome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식물로 돌아갈게요.
식물은 동물과 달리 생장 과정이 환경에 크게 좌우됩니다.
우리 연구실에서 실험 재료로 사용하는 애기장대는 100세대 이상 제꽃가루받이(자가수분自家受粉: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꽃의 꽃가루가 스스로 암술머리에 붙어 열매나 씨를 맺는 일)을 거친 순계純系(똑같은 접합체로부터 나온 유전적으로 같은 계통) 품종이라, 모든 유전자가 사실상 동일합니다.
즉, 완벽한 유전적 복제 상태이지요.
하지만 이 애기장대 씨앗들을 배지 위에 뿌려 발아하는 모습을 관찰해 보면, 일란성 쌍둥이에서 기대하는 똑같은 모습으로의 성장을 절대로 볼 수 없습니다.
씨앗이 놓인 위치마다 빛의 세기, 수분, 온도 따위의 미세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환경에 맞게 서로 다른 생장을 하는 것이지요.
이처럼 환경 차이에 따라 같은 유전형이 서로 다른 표현형 phenotype을 보이는 현상, 그것이 바로 식물의 생장 가소성입니다.
○극적인 가소성의 사례

이제 좀 더 극적인 생장 가소성의 사례를 살펴볼까요?
콩을 어두운 곳에서 발아시키면 우리가 익히 아는 콩나물이 됩니다.
떡잎은 닫혀 있고 노란색이며, 하배축下胚軸(고등 식물의 배胚에서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길고 가늘게 자라지요(위 왼쪽 사진).
반대로 빛을 쬐며 발아시키면 떡잎은 초록색으로 활짝 펼쳐지고, 하배축은 짧고 굴게 자랍니다(위 오른쪽 사진).
우리가 알고 있는 쌍떡잎식물의 일반적인 발아 모습이지요.
위 사진에서의 애기장대는 앞에서 말한 대로 일란성 쌍둥이와 같습니다.
유전적으로 동일하지요.
하지만 빛이 있고 없고에 따라 전혀 다른 생장을 하고 있어 이 둘을 쌍둥이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왜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자랄까요?
식물의 생장 가소성도 결국 오랜 진화의 산물입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의 입장에서 환경은 언제라도 시시때때로 변하기 때문에, 변화한 환경에 적합한 생장을 해야합니다.
위 사진의 사례에서처럼, 어두운 곳에서는—일반적으로 토양 속에서 씨앗이 발아하는 경우 어둡겠지요— 떡잎이 닫혀 있어 정단 조직을 보호할 수 있고, 하배축이 길어 가늘게 자라서 토양 밖으로, 또는 응달에서 빨리 탈출할 수 있게 해줍니다.
반면, 밝은 곳에서는 떡잎이 초록색으로 활짝 펼쳐져 있어 광합성을 더욱 효율적으로 할 수 있고, 하배축을 굵고 짧아져 바람에 쉽게 꺾이지 않게 해주지요.
이 모든 것이 빛 환경에 적응하여 진화한 생장 가소성의 결과입니다.
○빛의 세기에 따른 미세한 적응

생장 가소성의 진화적 장점 하나 더 소개할까요?
미세환경에 따라 식물이 정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식물을 키울 때 빛의 강도만 조금 바꾸어 주어도 제각각 다른 모양으로 자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바로 위 사진).
이 사진에서 왼쪽은 약한 빛에서의 애기장대 생장 상태이고, 가운데는 중간 빛, 오른쪽은 아주 강한 빛에서의 애기장대 생장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빛이 약할 때는 잎을 가늘고 길게 뻗어주어 빛을 받는 표면적을 늘리게 되고, 빛이 강할 때는 잎을 둥글고 작게 만드는 한편 안토시아닌 anthocyanin 색소를 잎에서 생성하여 자외선을 비롯한 강한 빛의 피해를 막습니다.
빛 환경에 따른 작은 변화들이지만 이 모두 생장 가소성의 장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이 환경을 마음대로 조종할 수는 없지만 주어진 환경을 이롭게 활용할 수 있도록 스스로 가소적 변화를 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입니다.
○인간이 식물의 생장 가소성을 활용하여 개발한 분재

식물의 생장 가소성이라는 특성을 이용하여 일본에서는 소형 분재盆栽 bonsai 기술이 꽤 발달해 있습니다.
원래 몇십 미터의 높이로 자라는 느티나무, 소나무 따위를 뿌리 공간과 가지의 형태를 지속적으로 제한하여 심지어 손바닥 크기 정도의 형태로 왜소화시키기도 하지요.
일본의 소형 분재는 식물의 생장 가소성을 극단적으로 활용한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바로 위 사진).
※출처
1. 이일하 저, 식물의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초봄책방, 2026).
2. 구글 관련 자료
2026. 8. 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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