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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우리 나무 4 - 참오동나무 본문

동식물 이야기와 사진

경복궁의 우리 나무 4 - 참오동나무

새샘 2026. 8. 9. 04:10

참오동나무 꽃(출처-출처자료1)

 

"대궐 뜰 오동잎에 밤비 소리 싸늘한데

 귀뚜리미 귀뚤귀뚤 이내 수심 일으키네

 한가로이 거문고에 새 곡조를 올려보니

 한없는 가을 시름 흥과 함께 굴러가네"

 

연산군 12년(1506)에 연산군이 직접 지은 시다.

같은 해 중종반정으로 쫓겨날 것을 예견이라도 한 듯 처량한 느낌을 준다.

이처럼 옛사람들은 붉게 물드는 단풍을 보는 대신 커다란 오동잎에 두둑두둑 떨어지는 가을비 소리를 들으며 가버리는 한 해를 아쉬워한 것 같다.

주자의 <권학문勸學文>에도 가을의 오동나무를 노래한 대목이 있고, 대중가요 <오동동타령>도 "오동추야 달이 밝아 오동동이냐"로 시작한다.

 

 

참오동나무의 (왼)햇빛을 받는데 유리한 매우 넓은 잎 (가운)끝이 뾰족한 열매 (오른)짙은 회갈색 나무껍질(출처-출처자료1)

 

오동나무의 잎은 타원형이지만 흔히 오각형이 되기도 하며, 나뭇잎 한 장으로 어른 얼굴을 가릴 수 있을 만큼 커다랗다.

특히 어릴 때는 잎 길이와 너비가 70~80센티에 이르기도 하여 작은 우산을 편 만큼이나 크다.

1천여 종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나무 가운데 오동잎보다 잎사귀가 큰 나무는 없다.

 

바람에 찢어지기 쉽고 벌레가 눈독 들이기 십상인데 오동나무는 왜 넓은 잎사귀를 고집하는 것일까?

다른 나무보다 더 많은 햇빛을 받아 더 많은 영양분을 만들어서 빠른 속도로 몸집을 불리겠다는 속셈이다.
그래서 오동나무는 15년에서 20년 정도면 재목의 구실을 하고도 남는다.

짧게는 40~50년, 길게는 100년 가까이 되어야 겨우 나무 구실을 하는 다른 나무들이 눈흘기고 질투할 만하다.

 

 

오동나무 판재로 만든 아쟁(출처-출처자료1)

 

빨리 자라는 나무는 대체로 단단하지 못하여 쓸모가 없다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적어도 오동나무와는 무관하다.

1년에 나이테 지름이 2~3센티미터씩이나 커질 정도로 빨리 자라지만 세포 하나하나를 쓸모 있게 키워내는 '슈퍼 트리 super tree'다.

자라는 속도가 빠르고 강도가 적당할 뿐만 아니라 습기를 적게 빨아들이고 잘 썩지 않으며, 불에 잘 타지 않는 장점까지 갖추었다.

당연히 쓰임새가 넓어서 장롱, 문갑, 소반, 나무베개(목침木枕), 장례용품 따위의 생활 도구에 두루 쓰인다.

악기를 만들 때 오동나무를 공명판으로 쓰면 다른 나무들은 감히 넘볼 수 없는 독보적인 소리를 낸다.

가야금, 거문고, 아쟁, 비파와 같은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는 모두 오동나무로 만든다.

조선 선조와 광해군 때의 문신 신흠申欽(1566~1628)은 ≪야언野言≫에서 "오동은 천년이 지나도 가락을 잃지 않고, 매화는 일생 추워도 향기를 팔지 않는다"라고 했을 정도로 오동나무는 악기재로 유명했다.

 

 

경복궁의 참오동나무(출처-출처자료1)

 

경복궁의 참오동나무 위치(출처-출처자료1)

 

흔히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어두었다가 시집갈 때 장欌(농장, 옷장, 찬장, 책장 따위의, 물건을 넣어 두는 가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을 만든다는 말을 한다.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는다는 말은 일본의 대표적인 오동나무 산지인 후쿠시마(복도福島)현 일대에 전하는 이야기다.

중국 명나라의 약학서인 이시진李時珍(1518~1593)의 ≪본초강목本草綱木≫을 보면 오동나무에 대한 설명의 끝 부분에 "어린 딸이 있는 집에서는 오동나무를 심을 만하다. 나무가 잘 자라기 때문에 아이가 커서 시집갈 때쯤이면 잘라서 옷장을 만들 수 있는 크기가 된다"고 했는데, ≪본초강목≫의 이 내용이 그대로 일본에 전해져 풍속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조선시대 때 우리나라는 유교의 영향으로 남존여비 사상이 아주 강했다.

그래서 딸이 태어나면 축복하는 사람이 없었고, 산모는 어른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였다.

이런 사회 풍토에서 아버지가 딸을 위해 오동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 상황과도 맞지 않을뿐더러 믿을 만한 근거도 없다.

 

우리 옛 기록에 오동나무가 등장하는 부분을 살펴보자.

우선 ≪삼국유사≫에는 '동수桐藪'와 '동지야桐旨野'라는 지명이 나타난다.

'오동나무 꽃절'이라는 뜻을 담은 이름을 가진 대구의 동화사桐華寺는 창건 당시에는 유가사瑜伽寺라 했으나 신라 흥덕왕 7년(832)에 중창할 때 겨울철임에도 절 주위에 오동나무 꽃이 만발했기에 지금의 이름인 동화사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오동나무가 널리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조선시대에는 오동나무를 심고 관리하기를 나라에서 널리 권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성종 12년(1481) "오동나무는 악기와 군대 병기에 긴요하게 쓰이므로 올해부터 서울의 여러 관사에는 각각 10그루씩, 외방의 여러 고을에는 각각 30그루씩 심게 하고, 공조工曹와 관찰사가 세심하게 살피도록 하라"는 왕의 특명이 있었다.

명종 15년(1560)에는 영천 군수 심의겸이 향교 앞뜰에 있는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들었다가 벼슬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벌을 더 주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으나 간신히 면했다고 한다.

헌종 11년(1670)에도 남포 현감 최양필이 거문고를 만들 요량으로 향교 오동나무를 베었다가 파직을 당한 기록이 있다.

쓸모 있게 자란 향교의 오동나무를 넘보다 크게 경을 친 것이다.

공공의 물건을 함부로 쓰면 안 된다는 당시의 법도가 돋보이는 사례다.

 

또한 세종 28년(1446)의 기록에는 "왕비의 상제喪制(상례에 관한 제도)에 세자는 위가 둥글고 아래는 모가 지게 한 삭장削杖 오동나무 지팡이를 쓴다"고 했다.

≪세종실록≫의 '오례五禮'에는 오동나무 지팡이를 사용하는 이유에 대하여 "삭장削杖은 오동(동桐)이다. 어머니를 위하여 동을 사용하는 것은 동同을 말함이다. 속마음으로 슬퍼함이 아버지에게와 같음을 취한 것이다"고 하여 오동나무의 쓰임새를 밝히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모친상을 당하면 오동나무 지팡이를 쓰는 풍속이 남아 있었다.

 

 

5월, 모내기를 논 한쪽에 참오동나무 꽃이 활짝 피었다.(출처-출처자료1)

 

이렇게 쓰임새가 많은 오동나무에 대한 옛사람들의 사랑이 각별했던 탓인지, 동桐이란 이름이 들어간 가짜 오동나무가 여럿 있다.

벽오동碧梧桐, 자동刺桐(음나무), 유동油桐, 의동倚桐(이나무), 야동野桐(예덕나무), 개오동 따위와 같은 오동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무들도 잎만 비슷하면 '동'이란 접두어나 접미어를 하사받는 영광을 얻었다.

 

우리가 흔히 오동나무라고 부르는 오동나무속屬의 나무는 중국 원산인 참오동나무와 울릉도 원산이라고 하는 오동나무 2종種이 있다.

둘 모두 자주색의 예쁜 꽃이 달리지만 참오동나무에는 통처럼 생긴 꽃의 안쪽에 자줏빛 줄이 점점이 나 있고 오동나무에는 그런 줄이 없는 것이 차이점이다.

그러나 자주색 줄은 같은 나무에서도 있는 꽃과 없는 꽃이 섞여 있어 종의 특징으로 보기 어렵다는 주장이 많다.

일부 학자들은 오동나무와 참오동나무를 같은 종으로 취급하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만나는 오동나무는 참오동나무가 대부분이고 궁궐에 있는 오동나무도 참오동나무다.

 

 

참오동나무의 (왼)햇빛을 받는데 유리한 매우 넓은 잎 (가운)끝이 뾰족한 달걀 모양의 열매 (오른)짙은 회갈색 나무껍질(출처-출처자료1)

 

참오동나무는 중부 이남의 따뜻한 곳에 주로 심는 잎갈 넓은잎 큰키나무로 높이 15~20미터, 줄기 둘레는 두세 아름에도 이를 수 있다.

회갈색의 나무껍질은 오래되어도 껍질이 잘 갈라지지 않고 작은 숨구멍이 점점이 보인다.

잎은 마주나기로 달리고 매우 크며 잎 뒷면에 갈색 털이 나 있다.

잎의 가장자리는 밋밋하거나 얕게 갈라지며 어린잎에는 톱니가 있다.

꽃은 5~6월에 가지 끝에 달리는 원뿔 모양의 꽃차례에 모여 피고 흰색이나 보라색이다.

열매는 늦가을에 익고 달걀 모양이며 끝이 뾰족하다.

 

※출처

1. 박상진 지음, 궁궐의 우리 나무, 개정2판 2쇄 발행((주)눌와,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6. 8. 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