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동제각화 대결5 본문

글과 그림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의 동제각화 대결5

새샘 2007. 12. 11. 20:25

홍도와 윤복의 다섯번째 그림대결은 정조가 종이봉투를 내려 줌으로써 다시 동제각화대결로 돌아간다.

 

'봄풀 불어난 개울가 빨래터에서 여인을 바라보며

가만히 숨을 죽여도 가슴속은 한없이 두근거리네'

 

이 짧은 시를 보고서 두 그림천재는 아무렇지도 않은 평온한 표정이었으나 마음속은 수많은 생각으로 어지러웠다.

 

도성 안의 개울가에서 홍도는 별 말이 없었다. 윤복은 박자를 맞춰 방망이질을 하는 두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같은 풍정을 보고 있으나 두 사람의 머릿속에는 전혀 다른 구도와 인물과 색감이 떠돌았다. 하지만 두 점의 그림은 결국 같은 긴장과 설레임을 표현할 것이었다.

 

닷새 후 작업의 결실을 두루마리통에 챙긴 두 화인은 나란히 편전 앞에 대령했다. 홍도는 자꾸만 윤복의 어깨에 걸친 두루마리통을 힐끗힐끗 바라보았다. 양쪽에서 문이 열리고 저편에 정조의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두 사람은 나란히 두루마리를 얹은 상을 받쳐들고 편전을 들어선다.

 

“겉으로 보이는 백성의 삶이 아닌 백성의 속마음을 보고 싶다. 사람의 마음 중에 가장 궁금한 것이 남녀의 끌림이 아니더냐. 하하.”

정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앞에 치렀던 몇 차례의 동제각화로 세 사람은 말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허물없는 사이로 만들어놓았던 것이다.

 

“한 나라의 왕으로 백성들의 상열지사를 엿보려 함이 저속하다 할지 모르나 그 또한 알고 싶다. 백성의 풍속과 심성을 아는 것이 다스림의 근본이려니.”

정조는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둘을 바라보며 눈짓했다. 홍도가 먼저 두루마리통을 열고 그림을 펼쳤다.

 

푸릇한 산기슭에 따뜻한 햇살이 흘러 무르익는 봄이었다. 불어난 개울물이 철철 흐르고, 너럭바위에서 치마를 겉어붙인 두 여인이 힘차게 방망이질을 하고 있었다. 옆에는 나이든 여인이 헹군 빨래를 짜고, 뒤쪽 너럭바위 위에는 또 다른 여인이 머리를 손질하고 있었다.

화면 오른쪽 바위로 시선을 옮기던 정조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하얀 옷가지가 걸린 바위 뒤에 납작 몸을 엎드린 남자. 갓과 푸른 기가 도는 도포를 잘 차려입은 남자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귀한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런 자세로 빨래하는 여인들을 훔쳐보고 있었다.

 

“하하하. 이자는 정말이지 숨이 막힐 듯 하군.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규범이 엄연하나 여인에게 끌리는 남정네의 정념은 어쩌지 못할 테니 말이다.”

정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갓과 도포차림으로 점잖은 체하지만 여인의 걷어붙인 허벅지살을 훔쳐보려고 애태우는 사내의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 거침없는 폭로와 드러냄에 정조는 통쾌함을 감출 수 없었다.

 

“조정의 양반들이 보았다가는 단원을 가만두지 않을 것 같구나.”

“하오나 누구도 빨래터의 여인네들을 한두 번 훔쳐보지 않았다면 거짓이겠지요.”

“그렇지. 그렇지 않다 하는 자가 있다면 필시 사내가 아닐 것이니 말이다. 하하하.”

정조가 다시 큰 너털웃음을 웃었다. 모든 고민과 근심을 털어버린 듯 즐거운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이야말로 당파의 다툼과 반대파의 위협에 지친 왕에게 두 화인이 준 진정한 웃음이었다. 조정과 왕실의 누구도 왕에게 그렇듯 호탕하고 건강한 웃음을 주지는 못했다.

 

윤복은 자신의 그림이 또 한 번 왕을 웃게 만들 수 있기를 바라며 그림을 펼쳤다.

 

전체적인 색감은 홍도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햇살이 내리쬐는 풀밭과 바위틈의 이끼가 푸릇푸릇했다. 물길은 홍도의 그림만큼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방향과 주변정경은 비슷했다. 개울 가운데에서 허벅지를 드러낸 채 방망이질을 하는 여인이 한 명뿐인 것은 구도를 단순화하기 위함이었다. 개울가 풀밭 위에서는 여인이 머리를 땋아내리고 있었다.

그림의 핵심인 남자는 홍도의 그림과 반대로 왼쪽에 배치되었다. 오른손에 활을 ,왼손에 긴 화살을 든 건장한 남자는 고개를 돌려 머리를 매만지는 여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목반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근처에서 사냥을 하던 참인 것 같았다.

 

“이자의 눈길이 꽂힌 곳은 머리를 매만지는 여인의 저고리 아랫단으로 드러난 젖가슴이 아니냐. 그러니 어찌 숨이 막히지 않을 수 있겠느냐.”

정조는 풀밭에 앉은 여인의 저고리 아래로 드러난 여인의 붉은 유두를 보며 말했다.

 

“사냥하던 사내는 우연처럼 여인들이 빨래를 하는 개울로 다가온 듯합니다. 머리로는 그러면 안 된다고 하지만 젊은 춘정을 어쩔 수 없어 두 발이 개울가로 향했던 것이겠지요. 어떤 일이 있어도 선비의 도리를 지켜야 하기에 이를 악물고 앞만 바라보며 여인들의 곁을 지났지만, 결국 다 지나왔다고 생각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고 말았지요.”

홍도가 감탄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잘 그린 그림을 가리는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정조는 찬찬히 앞에 놓인 두 점의 그림을 번갈아 살폈다.

 

“같은 풍정을 그렸으나 두 그림의 화풍은 확실히 다르다. 윤복은 물가의 돌 하나, 바위의 이끼 하나, 풀밭의 풀잎 하나까지 정밀하게 묘사했지만, 홍도는 주변의 배경을 의도적으로 생략하여 인물을 부각시켰다. 세심하고 정확한 윤복과 대담하고 거침없는 홍도의 성정들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구나.”

정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두 명의 뛰어난 화인이 아니었다면 동네밖 개울가에서 허벅지를 드러내놓고 방망이질하는 여인을 어디에서 볼 것이며, 그 여인을 훔쳐보기 위해 양반의 체통마저 던져버리는 사내의 뜨거운 속마음을 어찌 엿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정조는 그림의 풍정을 즐기며 만족하는 감상자에 머무르지 않았다. 정조는 뛰어난 관찰자였으며 탁월한 비평가였다.

“이상한 점은 윤복의 그림에 보이는......이전에 없던 변화다.”

둘은 동시에 두 눈을 크게 뜨며 바짝 긴장했다.

 

“어떤 ..... 변화이옵니까?”

홍도가 정조와 윤복의 눈치를 동시에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색을 극도로 자제하여 쓴 것 같다. 윤복은 색을 절제하는 홍도와 달리 늘 화려한 색감과 다양한 색의 조화를 화풍으로 삼지 않았더냐. 그러나 이 그림은 그 묘사와 구도가 윤복의 것이라 할 만하나 색으로만 본다면 홍도의 것과 별 차이가 없다.”

홍도의 이마맡에서 가는 힘줄이 불끈거렸다. 윤복은 얼핏 홍도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소인이 이전부터 강렬한 색을 즐겨 썼으나 이번에는 스승의 화풍을 좇아 색을 배제하였습니다. 아무리 화려한 색으로도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스승의 필치를 따라잡을 수 없음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난감한 표정이 된 홍도가 머리를 조아렸다.

 

“주상전하의 심미안이 놀라울 따름이옵니다. 진작에 알아차리지 못하였으나 이제 보니 과연 그러함을 알겠사옵니다. 구태여 색이 없이도 여전히 뛰어난 그림이라....”

홍도가 말끝을 얼버무렸다. 가만히 고개를 숙인 윤복은 홍도의 말끝이 떨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2007. 12. 1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