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오주석의 '우리나라 전통문화에 스며 있는 음양오행' 해설 본문
이 글은 조선미술평론가이며 조선미술사(조선회화사)가인 고 오주석 선생(1956~2005)의 명저 가운데 하나인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2003, 솔출판사)에 실려 있는 글을 발췌한 글이다.
오주석 선생은 서울대 동양사학과와 동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를 졸업했으며, 더 코리아헤럴드 문화부 기자, 호암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의 학예연구원(큐레이터)을 거쳐 간송미솔관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중앙대학교 겸임교수, 연세대학교 영상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하면서 후학을 양성하기도 했다.
저서로는 유작인 <그림 속에 노닐다>(2008)와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2>(2006)을 비롯하여,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1>(1999), <단원 김홍도>(1998) 등이 있으며, 공저로는 우리나라 최고의 겸재 정선 전문가인 최완수 등과 더불어 펴낸 <우리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 2>(1998) 등이 있다.
특히 조선이 나은 위대한 화가 단원 김홍도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문화 전반에 깔려 있고 관통하고 있는 사고방식 즉 생각의 틀이 바로 음양오행(陰陽五行)이다. 음양오행은 사서삼경의 하나인 역경(易經)이라고도 불리는 '주역(周易)'의 핵심사상이다.
먼저 우리나라 절의 탑에서부터 시작해보자.
탑은 부처의 사리를 모시고 있어 대개 절 마당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탑의 층수를 보면 3층, 5층, 7층, 13층과 같이 거의가 홀수로 되어 있는 반면 이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4각 아니면 8각과 같이 짝수이다.
이렇게 기단은 짝수, 탑은 홀수로 만들어져 있는 것은 바로 주역의 음양오행에서 온 것이다.
주역에 보면 "天一地二 天三地四......天九地十이니, 天數는 25요 地數는 30이라"는 구절이 있다.
즉 1, 3, 5. 7, 9는 홀수요 양수요 하늘의 수(천수)니 그 합이 25이고, 2, 4, 6, 8, 10은 짝수요 음수요 땅의 수(지수)니 그 합이 30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늘과 맞닿은 탑은 천수이며 양수인 홀수층으로 만들고, 땅과 맞닿은 기단은 지수이며 음수인 짝수각으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예외없는 규칙은 없다고 경천사지십층석탑은 고려말 티베트 불교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이례적인 탑으로서 교리가 다르면 생각하는 마음도 다르고 형태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궁궐이나 사찰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축물을 보면 정면의 칸수는 반드시 홀수로 되어 있다.
한가운데를 어칸, 좌우에 협칸, 가장자리에 귀칸이 있는데 이런 것들 역시 모두 음양관념에서 비롯되어 천수를 뜻한 양수인 홀수를 쓴 것으로 짐작된다.
서울 이름이 한양(漢陽)인 이유는 한강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
해가 하늘에 떠 있을 때 산은 높아 남녘에 볕이 들므로 남쪽이 양이고 북쪽이 음이 된다.
반대로 강은 움푹 파여 있어 북녘에 볕이 들므로 북쪽이 양이고 남쪽이 음이 된다.
그래서 산의 남쪽을 양, 강의 북쪽을 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서울은 한강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도시이기 때문에 한양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지금의 강남지역은 한양이 아니라 한음이 된다.
양을 정신, 음을 물질이라고 보고 있는데, 묘하게도 강북에는 아직도 전통문화의 정신이며 문화가 남아있는 반면 강남에는 온통 서양의 물질문명에서 온 풍요가 두드러진다.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보고 있는 앞쪽이 당연히 남쪽이라고 생각했다. 왜냐면 사람은 모름지기 밝은 남쪽을 바라보고 모든 걸 생각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특히 임금은 반드시 남면을 향한다. 왕은 붙박이별인 북두성의 위치에 자리잡고서 밝은 남쪽을 바라본다. 신하들은 남쪽에서 어두운 쪽에 계신 임금님께 끊임없이 밝게 깨우치게끔 올곧은 말씀을 올린다. 그러니까 동서남북을 그리면 위가 남쪽, 아래가 북쪽, 왼편이 동쪽, 오른편이 서쪽인 것이다.
그런데 옛분들은 시간과 공간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동서남북 공간이 동시에 춘하추동 시간이라는 생각, 이것은 엉뚱한 듯하지만 사실 굉장히 합리적인 생각이다. 즉 시간은 태양이 중심에 있고 지구가 주위를 돌면서 자리잡는 위치에 따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분들은 동쪽은 봄, 남쪽은 여름, 서쪽은 가을, 북쪽은 겨울이라고 보았다.
또 지구가 한번 자전을 하는 동안 하루가 지나가므로 동서남북을 하루에 비겨 아침, 점심, 저녁, 밤 이렇게 배당하기도 한다.
옛분들은 이런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가지고 오행 즉 수화목금토에 따라 한양의 사대문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오행에 맞추어 색깔로 따져보면 동은 파랑(靑), 남은 빨강(紅), 서는 하양(白), 북은 검정(玄), 중앙은 황색(黃)이 된다. 동물로 말하면 동은 청룡, 남은 주작(봉황), 서는 백호, 북은 현무(뱀이 거북을 감고 있는 형태)이 된다. 오행에서 동은 나무(木), 남은 불(火), 서는 쇠(金), 북은 물(水), 중앙은 흙(土)이다.
동쪽은 봄에 해당한다. 봄이 되면 눈이 녹고 보슬비가 내리고 햇볕이 따스해지면서 만물이 모두 파릇파릇 새싹을 틔워 피어나고 자란다. 봄은 이렇게 만물을 어질게 키워내기 때문에 봄의 덕을 '어질다(仁)'고 한다. 그래서 동대문을 '봄의 어진 덕을 일으킨다고 해서 흥인지문(興仁之門)'이라 지은 것이다.
남쪽은 여름에 해당하는데 여름이 되면 모든 초목이 우거지고 부쩍 웃자라서 늘 다니던 산길이 묻혀버릴 정도로 일시에 무성해진다. 그러나 가만히보면 제자리에서 정연한 질서를 이루며 자라나지, 함부로 남을 해치고 분수를 벗어나질 않는다. 이것은 예(禮)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남대문을 '예를 높이는 숭례문(崇禮門)'이라 하였다.
가을이 되어 찬바람이 한번 휙 불고 나면 가을의 덕은 냉엄해서 잡초처럼 죽일 것은 누렇게 시들여 죽이고, 곡식이며 과일처럼 남길 것은 살뜨하게 남긴다. 의롭게 분별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을에 의(義)를 배당해서 '의를 돈독케 한다는 뜻으로 서대문을 돈의문(敦義門)'이라 불렀다.
북대문은 겨울을 상징한다. 겨울이 되면 춥고 그 다음해를 기약하려면 씨앗은 땅속에 묻혀 있어야만 한다. 땅위로 나돌아다니다가는 그만 얼어죽어서 다음해를 기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건 참 슬기롭다고 해서 원래는 알 지(智)에다 엄숙할 숙(肅) 자를 써서 숙지문(肅智門)이라 할 것이었는데, 이 지혜라는게 씨앗이 땅속에 숨어 있는 지혜이고 밖으로 나대는 성질이 아닌 까닭에, 또 사람의 지혜도 인의예(仁義禮)처럼 겉으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지혜란 드러나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처음에 숙청문(肅淸門)'이라 했다가, 나중에 중종 때에 '고요하고 안정되어 있다'는 정(靖) 자로 바꾸어 북대문을 숙정문(肅靖門)'으로 하였다.
그러니까 사대문에는 동서남북, 춘하추동, 인의예지가 다 들어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운데에 있는 것은 보신각이다. 두루 보(普)에 믿을 신(信) 자, 이 보신각 종이 아침에 '뎅'하고 33번 울리면 33천이 열리고 밤에 28번 울리면 하늘의 28수 별자리가 뜨게 된다.
한글 역시 음양오행의 천지인(天地人) 체계로 되어 있다. 모음만 살펴보면 · ㅡ ㅣ 세 요소가 모음을 만든다. · 는 둥근 하늘을 의미하는 하늘소리, ㅡ는 평평한 땅을 의미하는 땅소리, ㅣ는 바로 선 사람을 의미하는 사람소리이다.
이번에는 엽전을 한번 보자. 엽전의 겉은 둥글고 속은 네모지다. 둥그런 것은 주역의 64괘를 원형을 배열했을 때 하늘의 모습을 나타낸 것이고, 8x8=64 이렇게 정사각형으로 늘어놓은 것은 땅을 상징한 것이 된다(아래 그림은 주역 64괘의 방원도).
그러니까 엽전은 하늘과 땅 사이를 굴러다니면서 여러 사람들을 두루두러 모두 이롭게 하라 그런 뜻에서 이런 모양으로 만든게 아닌가 생각되는 것이다. 그 의미도 깊지만 서양동전보다 금속도 절약되고 또 가벼우니 얼마나 좋은 것인가?
천지간에는 음양오행의 기운이 운행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모든 생명체 가운데 가장 맑고 깨끗한 기운을 받아 태어난 것은 바로 사람이라 하였다. 사람은 가장 슬기로울 뿐만아니라 도덕심까지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음양과 오행이 온전히 갖추어져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를테면 좌우대칭으로 생긴 모양은 음양이다. 그래서 왼쪽은 양, 오른쪽은 음이 된다.
우리가 설날 세배할 때 왼손을 위에 두고 절을 한다. 양이 위로 올라가도록 하는 것이다.
상갓집에 가서 절할 때는 이번에는 오른손이 위로 올라간다. 물론 여성은 남성과는 반대이다.
판소리 수궁가에는 손에 대해 이렇게 읊조리는 대목이 나온다.
엄지가 두 마디인 것은 하늘과 땅 음양으로 나뉜 것이고, 네 손가락 가운데 첫 손가락(검지)은 정월, 이월, 삼월, 둘째 손가락(중지)이 사월, 오월, 유월....... 이런 식으로 됐다 그래서 검지와 약지는 각각 봄과 가을이라 길이가 엇비슷하고 장지는 여름이니 길고 소지는 겨울이라 짧다고 것이다.
이렇듯 주역의 음양오행 즉 자연의 모습이나 현상에 기초를 둔 옛 문화와 사상 가운데 지금도 그대로 이어갈 만한 훌륭한 것이 무척 많다. 그런데도 무조건 서양식만 따르고 있으니 답답할 뿐이다.
문명비평가 소르망이 "자신들의 가치 체계에 대한 대한을 심각하게 모색하고 있는 서구인들에게 '한국이 서구를 열심히 모방하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런 느낌도 주지 못한다"고 갈파한 말을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모두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야 할 필요가 있다.
2008. 11. 1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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