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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곽경택 인생의 도시 부산

새샘 2012. 1. 31. 09:44

됐나? 됐다! 부산은 내 영화의 영원한 무대

<부산광역시 문화관광사이트 홈페이지에 실린 태종대 앞바다 사진, http://tour.busan.go.kr/kor/02_sightseeing/02_01/index,1,list1,6.jsp>

 

 

곽경택에게 태종대는 정신의 성장판이었다. 1970년대 중반 영도초등학교 다닐 때 매일 아버지를 따라 3.6킬로미터 순환도로를 걸었다. 열일곱살이던 1·4 후퇴때 인민군 징집을 피해 홀로 남하했던 아버지는 큰아들 손을 잡고 가며 조곤조곤 이야기를 들려줬다. 아버지는 놀라운 기억력으로 마치 눈앞에 보듯 생생하게 옛일들을 설명했다. 곽경택"영화감독으로서 묘사력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라고 했다.

 

누군가 다람쥐 한쌍을 선물받자 아버지는 태종대에 들고 와 아들더러 숲에 풀어주라고 했다. 새장째 선물받은 새도 아버지가 어렸을 적 새끼 참새를 놓아줬듯 날려 보냈다. 아버지는 길가 어린 소나무에도 아들 이름을 붙여주고는 두고두고 지켜보라 했다.

 

부자父子는 태종대 순환도로를 언제나 시계방향으로 돌았다. 지금 여느 산보객이나 관광열차 코스와는 거꾸로였다. 제법 가파른 첫 언덕을 넘으면 갑자기 시야 가득 바다가 펼쳐지는 게 어린 눈에도 좋았다. 이제는 전망대가 들어선 자살바위 앞 주전자섬 뒤로 해가 떴고, 맑은 날엔 대마도까지 내다보였다. 새벽안개 낀 산책로는 환상적이었다. 뭔가 나타날 것만 같고, 온갖 소리들이 가까이에서 들렸다.

 

어린 곽경택태종대 앞바다에 떠가는 배들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펴곤 했다. 거기 탄 사람은 어떤 이들이고, 그 사람들의 가족은 어떤 이들일까. 그가 훗날 뉴욕에서 영화를 공부할 때 교수가 그림이나 사진 한 장을 내주고 발표를 시키는 '상상수업'이 있었다. 사진 속 사람이 어떤 직업과 어떤 고민을 가졌고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발표하게 했다. 상상력을 키우는 일종의 시나리오 작법 강의가 어릴 때 태종대 배를 보며 상상했던 방식과 똑같았다.

 

곽경택"영화감독이란 상상력의 직업"이라며 "제임스 캐머런이 지닌 상상력의 깊이는 호주에서 바다를 보고 자라며 얻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곽경택은 그렇게 태종대에서 정을 알았고 상상력을 키웠다. 부산에서 영화 <친구>를 찍을 때는 장동건, 유오성을 비롯한 출연자들을 태종대부터 데려갔다. 바다를 따라 함께 걸으면 누구든 서로 마음을 터놓고 친해질 수밖에 없는 곳이 태종대다.

 

곽경택은 군의관 아버지의 수영 민락동 군인아파트에서 유년을 보냈다. 한 채만 덩그러니 서 있더 아파트 앞은 논밭이고 뒤는 산이었다. 어린 곽경택은 매일 뒷산에 올라 칡을 캐고, 들쥐와 메뚜기를 잡았다. 그렇게 땅에서 자랐던 시골의 삶이 더할 수 없이 소중했다늦깍이 개업을 한 아버지는 괜찮은 병원 자리를 찾느라 여러 곳을 이사 다녔다. 수영에서 영도로, 범일동으로, 그리고 광복동에 접한 토성동으로 옮겨 다녔다. 그래서 곽경택은 초등학교만 수영, 영도, 좌성, 토성 네 군데를 다녔다.

 

휴일 낮 광복동엔 싱그런 젊음이 어깨를 부비며 강물처럼 흐르고 있었다. 젊은이들을 서면 쪽으로 뺏기면서 한물갔다고는 해도 광복동은 여전히 '부산의 명동'이다. 지금 ABC마트가 된 옛 미화당백화점 자리는 땅값이 제일 비쌌다.  예나 지금이나 한 시간만 서 있으면 친구 열댓은 간단히 마주친다는 곳이다. 곽경택은 '광복동 키드'였다. 아버지 병원이 자리잡으면서 초등학교 4학년부터 토성중을 거쳐 부산고를 졸업할 때까지 토성동에 살았다. 집에서 육교만 건너면 광복동이었고, 곧바로 극장들이 죽 이어졌다. 왕자·국도·제일·부산·대영·부영, 대로 건너 자갈치 쪽 동명극장까지. 그는 휴일 아침 극장 간판들을 보며 걷다 내키면 들어가 조조할인영화를 봤다. 그 시간에 단속 나오는 선생님들도 없어 안심이었다. 그는 중학 2학년때 지금 키 173센티가 다 자라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도 쉽게 봤다. 어쩌다 극장 문 지키는 기도가 "몇살이고?" 물으면 "스무 살 넘었어예"라고 잡아뗐다. "주민증 내봐라"엔 "갱신하고 있어예", "그라믄 학생증?"엔 "공장 다녀예"라고 대답하며 능청을 부렸다.

 

그가 살던 5층짜리 토성상가맨션은 헐어 없어지고 그 자리에 50 몇층짜리 빌딩을 짓는다고 터 닦기가 한창이다. 지금 식으로 말하면 주상복합쯤 될 토성상가맨션은 일층이 상가였다. 국제시장처럼 장난감을 비롯한 잡동사니를 팔고 건어물 가게도 많았다. 가운데 빈 'ㅁ'자 건물의 2층부터 5층까지 60가구쯤이 살았다. 판사, 검사, 의사, 국제시장 상인에 완월동 포주까지 다양한 사람이 살았지만 모두 잘 어울려 지냈다. 이웃이 다 친구였다. 한 해 하루는 '토성상가 주민의 밤'으로 정해서 상가 문 닫고 노래자랑도 하며 이웃끼리 질편하게 놀았다. 곽경택 "그 아파트 자체가 용광로 같은 도시, 부산의 축소판이었다"고 했다.

 

고3때 적성검사를 해봤더닌 문과 쪽이 98점으로 두드러지게 높게 나왔다. 하지만 그는 의대를 선택했다. 아버지를 비롯한 사촌형제와 집안 사위들까지 주변사람이 모두 의사여서 곽경택은 의사가 돼야 밥먹고 사는 줄 알았다. 다른 길은 생각지도 않았다. 고신대 의대를 다니다 보니 의사인생이 답답해 보였다. 찡그리는 환자 얼굴을 평생 보고 살 생각을 하면 숨이 막혔다. 본과 올라가서는 점수도 잘 안 나왔다. 그는 TV 광고 찍는 일이 하고 싶어졌다. 삶이 다이내믹해지고, 멋진 남녀들과 어울리며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곽경택은 1991년 뉴욕으로 건너가 뉴욕대 예술대의 TV영화학과, TC스쿨에서 5년을 공부했다. 그러면서 늘 한국적인 것을 찍으려고 애썼다. 졸업작품으로 단편 <영창>을 찍을 때도 그랬다. 부산헌병대 방위병으로 복무할 때 이발병부터 감방간수까지 갖은 일을 다했던 경험을 살린 작품이었다. 이때도 믿을 곳은 부산이었다. 곽경택은 자갈치에서 군복과 군대소품들을 사가서 찍었다. 그는 이 작품으로 뉴욕대가 주는 '스튜던트 필름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귀국한 뒤 첫작품 <억수탕>도 부산에서 찍었다. 서울엔 아는 사람, 연고도 없었고 조감독도 한번 안해본 처지였다. 서울 영화관 텃세도 만만치 않았다. 그는 무대가 될 옛 공중목욕탕을 비탈진 언덕 동네 개금동과 반송동에서 쉽게 찾아냈다. <억수탕>은 언론과 평단으로부터 열렬한 찬사를 받았지만 독립영화 감성으로 만든 영화여서 흥행은 시들했다. 무속과 의사이야기를 결합한 <닥터 K>는 흥행은 물론 평단에서도 외면당했다. 두 차례 실패한 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만든 것이 <친구>였다.

 

<친구>의 시나리오는 따로 취재를 하지 않고도 고교시절 기억과 상상력만으로 썼다. 부산에서 자란 네 친구의 우정과 갈등을 그린 <친구>는 오래돼 누렇게 바랜 일기장 같은 작품이었다. 그는 영화 찍을 때마다 시나리오를 아버지에게 보여드리곤 했다. 아버지는 <친구>의 초고를 읽어보더니 "니가 쓴 것 중에 제일 낫다. 돈 있으면 투자하겠다"고 하셨다. "누가 부산놈 아니랄까봐, 욕이 너무 많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으셨다. 실향민인 아버지는 탈북자 이야기를 다룬 2005년 <태풍>을 제일 반겼다. 영화를 보고 나서 말씀했다. "마, 수고했다."

 

곽경택지금까지 만든 영화 열 편 중 여덟 편을 부산에서 찍었다. 한국적 소재를 찾아온 그에게 부산만한 곳이 없었다. <친구> 촬영지도 머릿속에서 바로바로 떠올랐다. 준석과 상택이 속마음을 털어노는 곳은 부산이 내려다보이는 산복도로 집 옥상, 패거리들이 내달리는 곳은 어릴 적 살았던 범일동 철로변 길...... <친구>는 배우들보다 도시가 더 많은 이야기를 해준 영화였다. 부산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친구>2001년 870만 관객을 불러 모으며 한국영화사를 새로 썼다. 부산의 매력을 골목 구석구석까지 세상에 알렸다. <친구> 촬영지들은 관광명소가 됐다. 부산시는 영화가 지닌 매력과 위력을 <친구>에서 깨닫고 영화촬영팀을 열심히 지원하고 유치하기 시작했다. 윤제균 감독의 쓰나미 영화 <해운대>를 찍을 때는 광안대교를 여섯시간이나 막아줬다. <친구> 이후 영화에 쏟는 애정이 '야구사랑' 못지않은 부산사람들 덕분이었다.

 

부산은 영화의 도시다. 한 해 제작되는 장편 극영화 열에 넷은 부산에서 촬영된다. 부산시는 곽경택에게 보답하듯 자갈치 건어물시장, 기장 대변항 방파제, 범일동 국제호텔 앞에 <친구> 촬영을 기념하는 현판을 내걸었다. 범일동 철길육교에서 삼일극장까지 '친구들의 질주' 6백미터 길을 '친구의 거리'로 명명했다.

 

부산은 열린도시다. 이미 6백년 전인 조선시대 세종 때 부산포를 개항하고 왜관을 둬 일본이들이 살게 했다. 19세기 말 개항이래 전국 각지에서 갖가지 사연을 품은 민중이 맨손으로 찾아들었다. 해방직후 30만이던 인구가 1955년 100만을 넘어섰다. '천일의 임시수도' 시절엔 한꺼번에 50만 피란민이 몰려 아우성을 쳤다. 곽경택의 어머니도 피란 온 목포 사진관집 딸이었다. 지금도 명절에 일가가 모이면 평안도·전라도·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인다. 상에 오르는 음식도 가지각색이다. 부산은 용광로다. 누구 눈치 안보고 살아가는 자유인들의 도시다. 부산에 야구열이 뜨거운 것을 두고 곽경택 "고향과 원향原鄕"이 제각기 다른 사람들이 정서적으로 하나가 될 구심점이 없다가 야구가 그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곽경택은 영화촬영이 없어도 한 달에 일주일은 부산에 온다. 그때마다 맨먼저 달려 가는 곳이 밀면집과 돼지국밥집이다. 그는 "밀면 안 먹으면 집에 온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밀면 그릇엔 전란의 아픔, 피란의 배고픔, 고향생각의 간절함이 함께 버무려 있다. 피란 온 이북사람들은 고향의 냉면이 먹고 싶었지만 메밀을 구할 수가 없었다. 미군부대 구호품 밀가루로 면을 뽑고 돼지 뼈로 육수를 내 냉면을 대신한 게 밀면이다. 돼지고기로 설렁탕 맛을 낸 게 돼지국밥이다. 부산은 모든 것을 아우르고 녹여낸다.

 

부산사람들은 뒤끝이 없다. 화끈하다. "됐나? 됐다!" 두 마디면 끝이다. 곽경택은 "부산 사람들은 거칠고 무뚝뚝해 보이지만 소리만 클 뿐, 음흉하지도 않고 숨겨둔 셈도 없고 수도 낮다"며, "응어리를 바다에 다 토해내고 살아서 그런가 보다"고 했다.

 

곽경택은 1966년 부산 출생. 뉴욕대를 졸업한 유학파 영화감독. 단편영화를 영화 연출을 시작한 그는 첫 작품 <Oh, Boy>, 1994년 작품 <Another Morning>을 거쳐 1995년 <영창>을 연출하였다. <영창>으로 제2회 서울단편영화제에서 우수상을 수상하며 주목을 받았고, 1997년 <억수탕>을 가지고 장편 영화감독으로 데뷔. 1998년 메디컬 서스펜스라는 신종장르 영화 <닥터 K> 발표. 2001년 최고의 흥행작 <친구>로 그간의 부진을 일거에 만회. 이후 <챔피언> <똥개> 등을 연출.

 

이 글은 오태진 글, 내 인생의 도시(2011, 도서출판 푸르메)에 실린 글을 발췌해서 옮긴 것이다. 이 글을 시작으로 이 책에 실린 나머지 20개의 도시에 대한 글을 앞으로도 블로그에 올릴 예정.

 

2012. 1. 31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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