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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도읍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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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도읍지

새샘 2019. 3. 5. 20:33

<고조선의 도읍지와 요하문명>


1. 삼국유사

 

『삼국유사』권1「기이紀異」편 <고조선>조에 있는 고조선의 도읍에 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阿斯達[경經에는 무엽산無葉山이라 했고 또한 백악白岳이라고도 했는데 백주白州라는 땅에 있다. 또한 개성의 동쪽에 있다고도 하는데 오늘날 백악궁白岳宮이 그것이다]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해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니 고高(요堯)와 동시라 했다.『고기古記』에 이르기를 ……(단군왕검이) 당고唐高(요)가 즉위한 지 50년인 경인庚寅[당고의 즉위 원년은 무진戊辰이니 50년은 정사丁巳이지 경인이 아니다. 아마 틀린 듯하다]에 평양성平壤城[오늘날 서경西京]에 도읍하고 비로소 조선이라 일컫고,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에 옮기어 도읍했는데 그곳을 또 궁홀산弓忽山[궁弓 자는 혹은 방方 자로도 됨]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하니, 치국하기 1,500년이었다. (서)주의 호왕虎王이 기묘己卯에 즉위해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니 단군은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기었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가 숨어서 산신이 되니 수壽가 1,908세 였다 한다."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인용한『위서』와『고기』는 현존하지 않으므로 그 원문을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이 일연 이전에 전해오던 것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일연은『위서』가 전하는 단군왕검의 도읍인 아사달에 대해서 무엽산·백주의 백악·개성 동쪽의 백악궁,『고기』가 전하는 단군왕검의 첫 도읍지인 평양성에 대해서는 당시의 서경(오늘날 평양)이라고 주석해 놓았는데 이것은 일연이 생존했던 고려시대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한 것으로 당시에 고조선의 첫 도읍지에 대한 견해가 통일되어 있지 않았음알게 된다. 고조선의 도읍지를 확인하는데 이런 일연의 주석이 참고는 되겠지만 그것에 집착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일연의 시대는 이미 유교사관이 주류를 이루어 사대관계가 존중되었고 한국사 인식의 판도가 한반도로 위축되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위『삼국유사』의 내용에 따르면,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위서』에서는 아사달,『고기』에서는 평양성이라고 했으므로 아사달과 평양성이 각각 다른 2개의 지명인지 또는 동일한 곳에 대한 다른 호칭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언어학자들의 연구결과(이병선, 한국고대국명지명연구, 형설출판사, 1982)에 따르면, 고대 한국어에서 아사달의 아사阿斯는 '왕王'이나 '읍邑'을 뜻하는 것으로, 아사달은 '대읍大邑' 도는 왕읍王邑'의 뜻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평양성의 평平은 '대大' 또는 '장長'을 뜻하며 양壤은 '읍邑' 또는 '성城'을 뜻하는 것으로 평양은 '대읍' 또는 '장성長城'을 의미하는데, 이것이 한자로 표기되면서 한문식으로 성이 다시 결합되어 평양성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므로『위서』가 전하는 아사달과『고기』가 전하는 평양성은 같은 곳을 가리키는 다른 호칭인 것이다. 그리고 아사달과 평양성은 특정한 어느 한 곳에 대한 명칭이 아니며 도읍이 옮겨지면 자연히 옮긴 곳도 아사달과 평양성이란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일연이 인용한『고기』에 따르면 고조선의 도읍지는 평양성, 백악산아사달, 장당경, 아사달의 네 곳이다. 그런데 마지막 도읍지인 아사달에 대해서 원문에 "후에 아사달에 돌아가……"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이 아사달은 이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아사달이『위서』에 기록된 아사달이었는지 또는 『고기』에 언급된 두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결국 고조선의 도읍지는 세 곳이었다는 뜻으로 귀결된다.  그런대 일연은 고조선이 두 번째 도읍지 백악산아사달에서 세 번째 도읍지 장당경으로 천도하게 된 것은 기자箕子가 조선에 봉해졌기 때문이라고 밝히면서도 나머지 두 번의 천도 사유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삼국유사』가 전하는 고조선의 천도 기록이 사실과 부합된다면『삼국유사』기록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고조선 도읍지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기자국의 성립, 이동 및 멸망에 대한 것은 1983년에 발표한 논문『기자신고』를 통해 자세히 밝힌 바 있다. 주周족에 의해 상商(은殷)이 멸망하자 상 왕실의 후예인 기자가 중국 하남성 상구현 지역에 있던 자신의 거주지 즉 기자국을 당시 연燕의 통치지역이었던 오늘날의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하류의 서부 연안으로 이동하여 자리잡았다. 그 후 전국시대를 거쳐 중국을 통일한 진秦나라 세력에 밀려 기자국은 다시 난하 중하류의 동부 연안, 즉 고조선의 서쪽 변경에 자리해 고조선의 후侯국(거수국渠帥國)이 되었다. 이 사실과『삼국유사』가 전하는 고조선의 천도와 연결이 될 수 있다. 즉 기자국이 고조선의 국경과 먼 난하 하류 서부 연안에 있을 때는 고조선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지만 난하 중하류의 동부 연안으로 이동하였을 때는 기자국이 고조선의 서쪽 국경과 너무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조선의 천도가 기자국의 무력 때문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고조선이 기자국과 전쟁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국시대에 연나라와 서로 침공하는 전쟁을 치룰 정도의 강한 군사력을 보유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고조선이 중국의 통일세력에 밀린 소국인 기자국에게 위협을 느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기자국은 고조선의 후국(거수국)이 되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 변경에 자리하는 것을 허용받았을 것이다. 이는 고조선으로서도 서쪽 변경에 위치하는 기자국이 진나라 세력을 견제하는 완충지로서도 필요한 것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마치 후에 서한에서 기자국으로 망명한 위만이 서한의 침략을 방어하는 조건으로 국경 지대인 패수 유역에 거주하는 것을 허용받았던 것(『삼국지』「동이전」<한전>의 주석『위략』)과 비슷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 옛 문헌에 보이는 '조선후朝鮮侯 기자'라는 표현은 고조선의 지배자라는 뜻이 아닌 고조선의 제후인 기자 또는 당시 고조선 변경에 있던 지명이었던 조선 지역에 거주하는 제후인 기자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를 종합해보면 기자가 조선 지역으로 이동해 오기까지 고조선의 두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은 조선 지역에서 가까운 오늘날 중국 하북성과 요령성의 접경 지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기자의 이동으로 말미암아 천도한 고조선의 세 번째 도읍지였던 장당경은 그보다 동쪽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장당경에서 네 번째 도읍지였던 아사달로 이동한 고조선의 마지막 천도는 위만조선의 성장과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알다시피 서한西漢(전한前漢)에서 기자국으로 망명한 위만衛滿은 당시 고조선과 서한의 국경이었던 패수(오늘날 난하) 연안에 거주하면서 중국에서 오는 망명객을 모아 무리를 형성하여 기자국 정권을 탈취했다. 그리고 서한의 외신外臣이 될 것을 약속하고 서한에게서 군사와 경제 원조를 받아 주변의 소읍과 진번·임둔 등 대읍을 공략해 고조선의 서부 지역을 점차로 잠식했다. 마침내 오늘날 요하에 조금 못 미치는 지역까지 차지하면서 위만조선이 성립되었으며 고조선은 그 동쪽에 위치해 위만조선과 병존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때의 천도는 불가피했고 그 도읍지는 오늘날 요하 동쪽에 있어야 한다.

 

중국의 옛 문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서한 초까지는 요수遼水가 오늘날 난하에 대한 호칭이었다. 그런데 서한이 위만조선을 멸먕시키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한 후에는 요수가 오늘날 요하遼河에 대한 명칭으로 이동했다. 다시 말하면 요수는 중국의 동북부 국경을 이루는 강에 대한 호칭으로서 서한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요수라는 강 이름도 동북쪽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그런데 한사군 가운데 낙랑·진번·임둔군은 위만조선의 영역에 설치되었고 현도군은 위만조선의 영역 밖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사군이 설치된 후 요수가 오늘날 요하였던 것으로 보아 위만조선의 동쪽 경계는 오늘날 요하에 조금 못 미쳤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은 그 동쪽에 있게 된다. 고조선의 마지막 도읍이었던 아사달은 그 이전에도 도읍지였으므로 이곳이 바로 고조선의 첫 번째 도읍지 평양성이었음이 명백해진다. 그 이유는 두 번째와 세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과 장당경은 모두 오늘날 요하 서쪽이었으므로 네 번째 도읍지인 요하 동쪽의 아사달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로서 고조선의 첫 번째 도읍지가 오늘날 요하 동쪽에 있었고 두 번째 도읍지는 오늘날 난하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것은 고조선이 원래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고찰에 대해 생길 수 있는 중요한 의문점은 다음 2가지 정도이다. 첫째는 전국시대 연나라 진개가 고조선 서부 깊숙이 침공하였을 때 왜 천도를 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고, 둘째는 종래 위만조선의 성립은 바로 고조선의 종말을 뜻하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었는데 위만조선의 성립 후에도 고조선이 오늘날 요하 동쪽에 존재했다고 보는 근거가 무엇이냐는 점이다.

 

첫째 의문점은 진개가 고조선을 침공한 후 오래지 않아 연나라 국력이 극도로 쇠태해지게 되면서 진개가 점령한 고조선의 영토에서 곧 후퇴함으로써 고조선의 국경에 큰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후 고조선이 연나라를 침공한 바도 있다는 사실이 해명해준다.

 

둘째 의문점은『삼국지』「동이전」<예전濊傳>에 실린 다음 기록이 풀어준다.

 

"예는 남쪽은 진한, 북쪽은 고구려·옥저와 접하고, 동쪽은 대해大海에 이른다.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 모두 그 땅이다."

 

위 기록에서 예의 위치를 "오늘날 조선의 동쪽"이라 표현한 것은『삼국지』가 저술되던 시기에도 고조선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저자 진수陳壽는 3세기(233~297)에 살았던 사람이므로 고조선은 서기 3세기까지도 존재했다는 것이 된다. 물론 이 시기의 고조선은 그 이전보다 훨씬 작은 세력이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진수는 같은 책에서 기자와 위만에 대해서도 언급하는데 이들이 위치했던 지역과 당시의 고조선 위치가 일치하지 않아 이를 구별하기 위해 당시의 고조선을 "오늘날 조선"으로 표현했을 것이다. 그런데 종래에는 이러한 진수의 표현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기자 또는 위만의 출현을 바로 고조선의 멸명으로 인식하는 오류를 범했던 것이다.

 

종합해보면 고조선은 원래 오늘날 요하 동쪽에서 일어나 그 지역에 도읍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세력이 성장해 그 영역이 오늘날 난하에까지 이르게 되자 도읍을 서쪽으로 옮겨 오늘날 하북성과 요령성의 접경 지역에 두었을 것이다. 그런데 중국 통일세력 진秦나라에 밀려 기자국이 고조선의 서쪽 변경으로 들어오자 당시 도읍이 너무 국경에서 가까웠으므로 중국과의 경계 서남부 지역의 방어를 기자국에게 맡기고 동쪽으로 천도했을 것이다. 그후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이 고조선의 서부를 잠식해 오늘날 요하 가까이까지 차지하게 되자, 고조선은 요하 동쪽에 있었던 첫 도읍지로 다시 도읍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런 결론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는 좀 더 구체적인 자료가 필요한데, 한국의 옛 문헌에서는 찾을 수 없으므로 중국의 옛 문헌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2. 중국 문헌

 

고조선에 대한 중국의 기본 사료인『사기』「조선열전」에는 위만조선의 도읍지를 왕험王險이라 했고, 이의 주석으로 실린『사기집해』와『사기색은』에는 험독險瀆왕험성王險城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왕험, 험독, 왕험성은 모두 같은 뜻을 지닌 도읍의 명칭이었다. 이런 명칭들은 위만조선 지역의 언어 즉 고대 한국어가 한자화된 것임이 분명하며,『삼국유사』에 고조선으로 기록된 아사달과 평양성과도 같은 뜻을 지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삼국유사』에 고조선 통치자를 단군왕검壇君王儉/檀君王儉이라 했으니 중국 문헌의 왕험은 단군왕검의 왕검이 달리 표기된 것이며, 험독은 왕검이 거주하는 곳 즉 검터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결국 험독, 왕험, 왕험성, 왕검, 왕검성, 아사달, 평양성 등은 한국 고대사에 나타난 도읍에 대한 다른 호칭인 것이다.

 

이들 중국 문헌에서 험독, 왕험, 왕험성 등의 위치가 확인된다면『삼국유사』에 기록된 고조선의 도읍지와 비교하여 도읍지를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사기집해』와『사기색은』에 소개된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추정되는 곳은 ①서광徐廣(동진東晉시대 4~5세기)이 말한 창려 험독현, ②응소應劭(동한東漢시대 2~3세기)가 말한 요동 험독현, 신찬臣瓚(남북조시대 5세기)이 말한 낙랑군 패수 동쪽의 왕험성의 세 곳이며, 

다른 중국 문헌(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요사遼史)에서는 중국 요령성이 있는 ④대릉하 중류 동부 연안의 북진 험독오늘날 요하 동부 연안의 심양 동남 지역 험독 등 개의 험독을 더 전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다섯 지역이 각각 다른 곳인지 아니면 같은 곳인지를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서광이 말한 창려昌黎 험독현고죽국이 있었던 오늘날 난하(당시에는 '유수'라 불림) 하류 동부 연안인 하북성 동북부 창려현 부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응소가 말한 요동遼東 험독현서광이 말한 창려 험독현과 동일한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창려군은 진晉시대 이전인 한시대에는 요동이었다가 진시대에 요동을 나누어 창려군을 설치하였으며, 선진先秦시대부터 서한 초까지의 중국 요동은 오늘날 난하 하류부터 창려에 이르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③신찬이 말한 낙랑군 패수浿水(지금의 난하) 동쪽의 왕험한사군의 낙랑군 조선현이 있던 오늘날 중국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 중하류 동부 연안이었을 것이며, 이 낙랑군 왕험성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아닌 기자국과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된다. 이것은 기자국이 그 말기에 서한시대의 조선현에 위치하고 있었고, 기자국의 정권을 탈취한 위만조선은 기자국의 도읍지를 그대로 계승했을 것이며, 위만조선 지역에 들어선 낙랑군 역시 같은 도읍지를 사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본다면 위만조선의 왕험성에 관한 서광, 응소, 신찬의 설 가운데 신찬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여러 군데의 험독이나 왕험성이란 도읍지가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것은 고조선과 위만조선은 조선이라는 동일한 국명을 사용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④대릉하 중류 동부 연안의 북진北鎭 험독은 일찍부터 험독으로 전해오고 있는 현 중국 요령성 지역이다.

오늘날 요하 동부 연안의 심양沈陽 동남 지역 험독은 한시대의 험독현에 속했다.

위 ④북진 험독과 ⑤심양 험독은 그 위치로 보아 한시대의 요동군이나 험독현이 될 수 없음에도 한시대의 요동군 또는 험독현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 지역이 험독이었다는 사실이다.

 

3. 결론

 

중국 문헌에서 나온 다섯 곳의 험독 또는 왕험성을 고찰한 결과 기자국·위만조선의 도읍지였던 낙랑군 패수 동쪽 왕험성(지도에서 5)을 제외한 나머지 네 곳의 험독은 모두 고조선의 도읍지로 추정되며, 네 곳 중 두 곳 즉 ①창려 험독과 요동 험독은 동일한 곳이므로 결국 세 곳의 험독-창려, 북진, 심양-이 고조선의 도읍지가 된다. 

 

이 세 곳의 험독과『삼국유사』에 기록된 세 곳의 도읍지를 서로 비교 고찰함으로써『삼국유사』에 기록된 고조선의 도읍지를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유사』에서 두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아사달에서 세 번째 도읍지인 장당경으로 천도(서기전 221년 무렵)한 것은 당시 기자가 조선 지역으로 이주해 왔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므로 조선의 당시 도읍지는 너무 서쪽 변경에 치우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의 아사달 천도(서기전 194년 무렵)는 위만조선이 성장해 오늘날 요하 가까이까지를 차지하게 됨으로써 이루어졌을 것으로 고찰하였다. 따라서 고조선의 두 번째와 세 번째 도읍지인 백악산아사달과 장당경은 모두 오늘날 요하 서쪽에 있었을 것이고 마지막 도읍지 아사달은 오늘날 요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조선의 마지막 천도가 아사달로 돌아갔다는 표현을 썼으므로 이 아사달은 그전에도 도읍을 했던 곳으로서 아마도 첫 번째 도읍지였던 평양성이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첫 번째이자 마지막 도읍지였던 평양성과 아사달은 같은 지역으로서 오늘날 요하 동부 연안의 심양 동남(지도에서 1,4)두 번째 도읍지였던 백악산아사달은 난하 하류 동부 연안인 하북성 동북부의 창려(지도에서 2), 세 번째 도읍지였던 장당경은 대릉하 중류 동부 연안의 북진(지도에서 3)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첫 번째 도읍지였던 오늘날 요하 동쪽의 평양성에서 훨씬 서쪽인 오늘날 난하 동부 연안의 백악산아사달로 천도한 것은 조선족이 원래 요하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진출했을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삼국유사』에서 평양성에서 백악산아사달로 옮긴 것을 "또 옮겼다(우이도어백악산아사달又移都於白岳山阿斯達)"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조선족(아사달족)이 평양성에 도읍하고 국호를 조선이라고 정하기 이전에는 평양성 즉 심양의 동남이 아닌 다른 곳에 거주했을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고대사 신론'(만권당, 2017)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19. 3. 5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