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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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방죽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새샘 2019. 4. 1. 11:47

<제천 뒤뜰방죽; 출처-https://blog.naver.com/okckfof/220909274088>

들이 넓은 지역에는 크고 작은 저수지들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벼농사를 짓는 곳은 미리 물을 가둬놓고 써야 할 때는 끌어다 써야 하기 때문에

저수지를 두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그런 평야지대에는 대지주가 있기 마련이다.

세월이 흐르다 보면 점차 몇몇 제한된 사람들에게 돈이 모이고 땅도 모이고 사람들도 모인다.

그래서 지주가 생겨난다.

지주가 되면 그 다음에는 돈이 돈을 만들고 땅이 땅을 만든다.

놀부가 그렇게 해서 생겨났고 옹고집도 그래서 생겨났다.

 

지주를 제외한 나머지 주변 사람들은 소작농들이었다.

자작농이나 마름도 있었겠지만 봉건시대에 땅에 의지한 사람들 대다수는 소작농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다.

지주에게 예속된 소작농들은 자신의 노동력으로 땅을 일구어 가을 추수가 끝난 뒤

소출의 절반을 지주에게 갖다 바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설움과 사연들이 빚어졌겠는가?

놀부나 옹고집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그와 같은 배경에서 생겨난 것들이다.

소제蘇방죽(대전 소제동의 둑으로 둘러막은 물웅덩이) 전설의 부자富도 그런 인물이었다.

 

흔히 '장자長者못 전설'이라고 부르는 이 이야기는 우리나라 전역에 흩어져 있는 광포설화廣布說話이다.

논농사가 활발했던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지역은

어느 고을 어느 들판을 가더라도 이러한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지금은 메워지고 동네 이름으로만 남아 있는 대전광역시 동구 소제동의 소제방죽 전설도 같은 내용의 이야기이다.

너른 들과 거기서 삶을 꾸려야 했던 농투성이들이 만들어낸 그들의 이야기이다.

 

부자富者를 장자長者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이 이야기의 핵심사항이다.

가진 자는 어른이어야 한다.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주변을 품어야 하고 베풀어야 한다.

너그러워야 하고 이끌고 갈 줄 알아야 한다.

경주 최부자집이 아직도 그 명성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그 집안이 주변사람들을 끌어안을 줄 알았기 때문이다.

흉년이 들면 놀부는 희희낙락 고리대로 열을 올렸겠지만

최부자는 자기 집 곳간을 열어 사방 1백 리 안에 굶어죽은 사람이 안 나오도록 했다.

그래서 장자인 것이다.

 

경주 최부자집 이외에도 조선을 대표하는 명문가들이 여러 집 있다.

일세의 명성을 얻고 지금도 그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집안의 내력들을 보면 거의가 비슷비슷하다.

방식이야 다를 테지만 '노블레스 오블리주 nblesse oblige 귀족은 의무를 갖는다'의 사례들을

다들 한두 가지씩은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명문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재물이 많아서가 아니었다.

집이 번듯해서도 아니고 인물을 많이 배출해서도 아니었다.

주변사람들로부터 변함없는 인정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귀족의 책무를 강조하는 말로

처음에는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비교적 단순한 뜻이었다.

특권을 향유하면 그에 상응하는 도덕적 임무도 다하여야 한다.

이 당연한 명제가 로마제국의 2천 년 역사를 지탱하였고

그 뒤에는 유럽의 여러 나라도 계승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귀족계급이 사라진 지금은 부나 권력 혹은 명예를 쥐고 있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여 그 역할을 수행한다.

 

우리나라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람들의 사례도 많다. 

조선 말 10대 부호 집안의 6형제 중 넷째인 이회영과 그 형제들이 대표적 인물들이다.

이들은 할아버지가 이조판서를 지냈던 명문가로서 한일합방 후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하기 위해 모두 만주로 이주하였다.

이때 가지고 간 돈이 당시 소 1만 3천 마리 값으로

현 시세로 600억원 가량이었는데 8년 만에 바닥이 났다고 한다.

이들 형제는 전통적인 명문가 자제였음에도 봉건적 관습에서 가장 먼저 벗어나

집안 노비들에게 존대하고 노비문서를 파기해 모두 평민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청상과부가 된 누이동생을 개가시키기도 했던 것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사업가로 첫 손가락에 꼽는 이는

유한양행의 창업주이자 독립운동가인 유일한박사이다.

초창기 미국에서 성공한 아메리칸 드림의 주인공인 유일한은

보장된 미래를 뒤로 한 채 조국으로 돌아와 기업가가 되었다.

항상 윤리 경영을 실천하고 털어도 먼지 한 톨 안 나올 정도로 법인세를 철저히 납부했다.

박정희 정권 때 정치자금 거절로 인한 보복성 세무조사를 받았는데도

오히려 모범납세법인으로 선정됐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겼다.

 

유일한 박사의 어록에는

"기업에서 얻는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준 사회에 환원하여야 한다."

"국가·교육·기업·가정, 이 모든 것은 그 순위를 정하기가 매우 어려운 명제들이다.

그러나 나로 말하면 바로 국가·교육·기업·가정의 순위가 된다."

유한양행은 1939년 대한민국 최초로 종업원 지주제를 실시한 기업이며,

1969년 노환으로 은퇴하면서 경영권을 전문경영인에게 인계함으로써

대한민국 최초의 전문경영인 제도를 시행한 기업이 되었다.

1971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타계했다.

 

※이 글은 민찬 지음, '도청도설 길에서 듣고 지껄이다'(다운샘, 2013)과 공감신문(2019. 4. 1, 출처 - http://www.gokorea.kr/news/articleView.html?idxno=19577)에서 발췌한 것이다.

 

2019. 4.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