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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열국시대의 중요성

새샘 2019. 4. 9. 19:58

<열국의 위치도>

1. 열국시대란?

 

한국 고대사에서 열국列國시대고조선의 뒤를 이어 한반도와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에 한민족의 여러 나라가 존재했던 시대를 말하며, 열국사란 열국시대의 역사인 것이다.

이 시기에 오늘날 요서 지역에는 중국 한나라가 세운 한사군이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열국시대 기간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 것인가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열국시대란 고조선이 분열되어 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국, 대방국, 한(삼한), 신라, 백제, 가야 등의 여러 나라가 존재했던 시기이므로, 그 시작 연대는 열국 가운데 맨 먼저 세워진 나라의 건국 연대를 택하면 된다.

그러나 그 마감 연대를 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

 

열국 가운데 일찍 건국된 나라는 동부여, 신라, 고구려였는데 그 건국 연대는 서기전 59년, 서기전 57년, 서기전 37년이었다.

그러므로 열국시대의 시작 연대는 서기전 59년 또는 서기전 1세기 중엽으로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열국들의 기원은 읍제국가인 고조선을 구성했던 여러 토착부족들이었다.

 

그런데 위만의 침공에 이어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오늘날 요하까지를 차지하고 그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이들 토착부족들은 대거 동쪽으로 이동해 오늘날 요하 동쪽에 정착하게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고구려·예맥·부여·옥저·낙랑 등은 원래 오늘날 하북성 동북부에 있는 난하로부터 요령성에 있는 요하에 이르는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던 고조선 구성부족의 명칭 또는 지명이었다.

그런데 위만조선의 흥망 과정에서 그 부족의 구성원 또는 그 지역의 거주인들이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 정착지를 마련하고 독립된 정치세력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당시 고조선 왕실은 위만 및 서한과의 전쟁을 거치면서 세력이 약화되어 고조선의 구성부족을 통어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고 작은 세력으로 전락했다.

그 결과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지역은 열국시대에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열국시대는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서한의 한사군이 설치되었던 서기전 108년 무렵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여진다.

이 시기는 앞에서 언급했던 동부여·신라·고구려의 건국 연대인 서기전 1세기 중엽과 비슷하다.

이것을 종합해보면 열국시대의 시작 연대는 서기전 1세기 무렵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열국시대의 마감 연대는 약간의 논의가 필요하다.

 

이 문제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열국 가운데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나라들의 멸망 연대를 보면 신라 935년, 고구려 668년, 백제 660년, 가야 562년, 동부여 494년, 최씨낙랑국과 대방국은 300년, 동예는 245년 이전, 동옥저는 56년이었다.

그러므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정립했던 삼국시대는 562년부터 660년까지의 98년 동안이며,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는 494년부터 562년까지 68년 동안이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동부여의 오국시대는 300년부터 494년까지 194년 동안이다.

여기서 몇 개의 나라가 존재했던 시기까지를 열국시대로 볼 것인지에 따라 열국시대가 정해지게 된다.

 

한국사에서는 그동안 삼국시대라는 용어가 통용되어왔다.

그런데 삼국시대의 마감은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시기까지를 잡고 있지만 그 시작을 어느 시기로 잡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정확하게 말하면 삼국시대는 562년부터 660년까지 98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사 개설서들을 보면 이 기간만을 삼국시대로 서술하지는 않는다.

대개 삼국시대에 고구려, 백제, 신라와 더불어 가야가 포함되어 있고 고구려의 멸망까지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로서, 494년부터 668년까지 174년 동안이 된다.

따라서 가야가 포함된다면 삼국시대라는 명칭은 적합하지 않.

 

명칭에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동안 한국사에서는 가야가 포함된 삼국시대를 열국시대의 뒤를 잇는 한 시대로 인정해왔다.

그러므로 명칭에 대한 문제점은 일단 접어두고 삼국시대의 시작을 열국시대의 하한으로 잡는다면 그 연대는 494년이 된다.

그리고 열국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여러 변화들이 대개 5세기 이전에 일어났으므로 열국시대는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로 잡는 것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삼국시대라는 용어의 문제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삼국시대란 고구려, 백제, 신라를 일컫는 용어가 분명한데도 야가 존재했던 시기까지 포함하여 삼국시대라고 부른다면 가야는 한민족 국가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뜻이 되는 셈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만이 한민족의 국가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일본인들은 서기 4세기 중기부터 서기 6세기 중기까지 약 200년 동안 왜국이 한반도 남부의 가야 지역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고 그 지역을 지배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가야는 왜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한국사보다는 일본사에 포함되는 것이 옳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일본인들이 이 시기를 삼국시대라고 부른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가야와 같은 나라라고 주장했던 『일본서기』의 임나는 왜열도의 기비吉備(오늘날 오카야마 현) 지역에 있던 나라 이름이었고 '임나일본부'도 그곳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한국사에서 가야를 제외하고 삼국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잘못이다.

 

2. 열국시대에 대한 인식 부족

 

지금까지 열국시대를 하나로 묶어 종합적으로 고찰한 역사서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열국시대에 대해 체계적이고 깊은 지식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열국시대에 관한 연구가 충분하지 못해 고조선과 열국의 관계 및 열국시대의 중요성이 충분하게 설명되지도 못했다.

지난날 열국시대 연구가 어려움에 봉착했던 것은 다음 몇 가지 문제점 때문이었다.

 

첫째, 연대 인식에 문제가 있었다.

고조선과 열국의 관계에 대해서 지난날에는 흔히 고조선은 열국 가운데 가장 앞선 나라였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은 고조선과 열국이 같은 시대이거나 시대차가 크게 나지 않는 나라였던 것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서기전 2,333년에 건국되었는데, 열국 가운데 일찍 건국한 나라는 동부여, 신라, 고구려로서 그 연대는 모두 서기전 1세기이었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시작 연대와 열국시대의 시작 연대 사이에는 무려 2,200년이 넘는 오랜 시간차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오랜 시간차를 무시하고 이들을 같은 시대나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나라로 오해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둘째, 연구 경향에 문제가 있었다.

지난날 한국 고대사 연구는 고구려, 신라, 백제에 대한 연구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요즈음 부여나 가야에 대한 연구도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고조선사나 열국시대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사보다는 덜 중요한 것 같은 인상을 주었고, 결과적으로 열국시대에 대해서는 관심이 적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열국은 고조선의 분열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 고구려는 그 가운데 하나였으며 백제와 신라는 열국 가운데 한韓에서 분열되었다.

그러므로 열국시대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삼국사도 올바로 알 수 없다.

지난날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한국사에 처음 출현한 국가로 상정하여 국가 기원 문제를 논했던 것도 고조선사와 열국시대사에 대한 이해 부족에서 온 결과였다.

고구려, 백제, 신라를 포함한 열국은 한국사에 처음 등장한 국가가 아니라 고조선의 뒤를 이은 국가들로서 정확히 말하면 왕조 교체였던 것이다.

 

셋째, 용어 사용에 문제가 있었다.

'열국시대'란 용어는 삼국시대나 고려시대 또는 조선시대와 같이 어느 시대를 의미하는 용어로 정착하지 못했다.

그것은 열국시대에 관한 연구가 부족하여 그 시기를 하나의 독립된 시대로 명명해도 좋을지 자신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그러한 예는 열국시대를 '원原삼국시대'로 부르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용어를 사용한 학자들은 원삼국시대를 대개 서기 전후부터 서기 300년 무렵까지로 잡고 있다.

이 시기는 열국시대에 해당한다.

'원삼국시대'라는 용어에서 '원原'은 proto를 번역한 말로서 '원시의' 또는 '원형의'라는 뜻을 지닌다.

따라서 원삼국시대란 삼국의 원시 형태 또는 삼국의 원형을 보여주는 시대를 뜻한다.

어떤 사실이나 사물의 뿌리가 된 것이 앞시대에 존재했으나 그것에 대한 적절한 이름이 존재하지 않을 경우 그 사실이나 사물의 이름에 '원' 자를 붙여 그것의 원형이라는 뜻의 고유명사를 만드는 것이다.

'원삼국시대'의 기간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시기라는 뜻을 담고 있어서 열국의 역사를 통째로 부인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3. 열국시대의 중요성

 

열국시대는 고조선이 붕괴되면서 여러 나라가 독립함으로써 시작되었고, 그 나라들이 통합을 거듭하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사국시대를 거쳐 신라와 발해의 남북왕조시대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열국시대에 대한 바른 이해 없이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한국사 전개과정을 바르가 알 수가 없다.

열국시대의 특징과 열국사 연구의 중요성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열국시대는 한민족이 하나의 민족을 형성한 뒤 처음 맞는 민족분열의 시대였다.

한민족은 고조선시대에 형성되었다.

한반도와 만주의 거주민들은 고조선 건국 이래 오랫동안 하나의 공동체 속에서 생활하여 같은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고조선의 백성이란 공동 귀속의식을 공유함으로써 민족을 형성했다.

그런데 고조선이 통치능력을 잃게 되자 그 거수국渠帥國들이 독립하여 열국시대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민족이 형성되고 나서 처음 맞는 민족 분열이었던 것이다.

 

둘째, 거주민의 혼합이 이루어지고 민족의식이 강화된 시기였다.

고조선 말기 오늘날 난하 동부 유역에 위만조선이 건국됨에 따라 그 지역의 고조선 거수국들과 주민들이 동쪽으로 이동했고, 서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오늘날 요서 지역에 그들의 군현인 한사군을 설치하자 그 지역의 고조선 거수국들과 그 주민들이 또 동쪽으로 이동했다.

이들은 고조선이 통치능력을 잃자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와 한반도 및 연해주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는데, 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동예, 최씨낙랑국, 대방국 등이 그런 나라들이었다.

이 과정에서 일족이 분산되는 현상도 일어났고,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 요하 동쪽으로 이주한 사람들과 토착인의 혼합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의 거수국 단위의 종족의식은 약화되고 민족의식이 강화되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열국 주민들 사이에는 고조선과 같은 단일 민족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이 일어나게 되었다.

고구려의 다물多勿 이념이 대표적이다.

 

셋째, 통치 제도가 지방분권제에서 중앙집권제로 변화된 시기였다.

고조선은 각 지역에 거수국을 두고 거수국의 통치를 거수에게 위임한 지방분권의 국가였다.

그러나 열국시대에는 왕이 전국을 직접 통치하는 중앙집권제가 추진되었다.

고조선의 지방분권적 통치 조직이 정치적 분열을 초래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통치 제도의 개혁은 일시에 달성할 수는 없어서 상당히 긴 기간 지방분권제의 요소가 병존했다.

그 정도는 나라에 따라 달랐는데 가야의 경우 지방분권제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멸망했다.

 

넷째, 고유문화와 외래문화의 혼합이 크게 일어난 시였다.

고조선시대는 한민족 고유문화의 원형이 형성된 시기였다.

고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에는 한반도와 만주의 각 지역이 여러 정치집단으로 나누어져 있어 아직 민족을 이루지 못했다.

서기전 6,000~3,000년은 고을나라(부족사회) tribe society가, 서기전 3,000~2,333년은 추방사회 chiefdom society였기 때문에 이들 사회의 문화를 민족문화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서기전 2,333년 고조선이 건국되어 한민족을 형성함으로써 한민족의 민족문화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조선의 문화는 한민족 문화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고, 이러한 한민족의 고유문화가 열국시대로 이어졌다.

 

그러나 열국시대는 초기부터 중국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기 시작했고, 중기에 이르러서는 유학과 불교가 전래되었다.

한민족이 처음 맞는 외래문화의 큰 접촉이었다.

외래문화는 지배층 -지배층은 당시의 최고 지식인들이기도 하였다-의 옹호를 받으면서 점차 한민족 상층부의 문화로 정착되어 갔다.

국시대는 한민족의 고유문화와 외래문화가 처음으로 큰 접촉과 융합을 가졌던 시기인 것이다.

 

다섯째, 한민족이 해외로 진출하는 기반을 마련시대였다.

열국시대의 각 나라들은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국력을 튼튼히 하려고 노력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와 만주의 각 지역은 이전보다 급속한 발전을 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진출도 활발해졌다.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던 숙신肅愼은 고조선 말기에 오늘날 연해주로 이주하여 그곳에 읍루挹婁라는 나라를 세웠다.

읍루의 하층민들은 대부분 연해주의 토착인들이었기 때문에 한민족에 포함시키기 어렵겠지만, 그 나라는 건국 주체와 지배층이 한민족이었으므로 한민족의 나라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이 시기에 , 가야, 백제, 신라, 고구려 등의사람들도 왜열도 남부에 진출하여 그곳에 분국을 건설했는데, 가야와 백제인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

그리고 백제는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에 진출하여 그곳을 지배함으로써 황해를 그들의 내해로 만들었다.

민족을 단위로 본다면 한민족은 열국시대 말기에 역사상 가장 넓은 지역을 지배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섯째, 고조선 후기에 보급되기 시작한 철기는 열국시대에 이르러 일반화되었다.

이에따라 노동능률이 크게 올라 넓은 토지가 개간되었고 생산이 증대되었다.

그 결과 토지소유자들이 늘어났고 소유의 규모 또한 확대되었다.

그리고 노동단위가 집단에서 개체로 변하여 토지소유주와 노동자 사이의 생산관계가 변했다.

그뿐만 아니라 생산 증대로 인한 경제 성장으로 생활은 풍요로워졌고 풍속은 다양해짐으로써 한민족의 생활 전통이 확립되어 갔다.

 

그리고 정치 위에 군림했던 고조선시대 이래의 종교 권위가 무너지면서 새로운 종교사상과 철학체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학술, 자연과학, 금속기술 등도 발달하여 여러 종류의 서적이 편찬되었으며, 천문과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이 활발하여 그 예측이 가능해졌고 금속을 이용하는 기술 또한 크게 발전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이런 여러가지 특징들은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열국시대는 한국사에서 중요한 전환기였던 것이다.

 

4. 열국시대 연구의 기본 사료와 이용 방법

 

열국시대 연구의 기본사료는 한국 문헌 중국 문헌, 그리고 일본 문헌의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한국 문헌은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제왕운기帝王韻紀 등 3종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삼국유사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 관한 역사서로서 그 밖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 사이의 관계에서 가끔 언급되었을 뿐이다.

『제왕운기』 역시 내용이 간략하여 열국시대에 관한 자세한 정보를 제공해주지 못한다.

따라서 이 책들은 열국시대의 모든 나라를 종합적으로 연구하는 데는 사료로서 한계가 있다.

그러나 열국시대에 대해 더 자세하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한국 문헌이 없으므르 이 책들을 기본사료로 쓸 수밖에 없.

 

이 책들은 고려 후기인 12~13세기에 편찬되었으므로 고구려, 신라, 백제가 건국되고 무려 1,200년 정도가 지난 뒤의 기록이다.

이런 이유로 일본인들은 이 책들에 보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초기 기록은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 영향은 지금도 작용하고 있으니,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건국 연대를 인정하지 않는 것도 그러한 예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을 부인할 수 있는 분명한 근거는 없다.

이런 현실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이들 기록을 부인하고 추리에 추리를 거듭하여 다른 가설을 세운다면 과연 그것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기록보다 신빙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역사는 사료에 의해서만 복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모든 문헌이 그러하듯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록도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이 책들은 그 전에 있었던 문헌의 기록에 근거하여 당시 책임 있는 학자들이 편찬했으므로 거기에 실린 사건이나 사실의 기본 골격은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옳다.

따라서 자체 모순을 지니고 있거나 그 기록을 뒤집을 분명한 근거가 있는 것을 제외한 『삼국사기』, 『삼국유사』, 『제왕운기』의 모든 기록을 기본사료로 사용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국 문헌으로는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삼국지三國志』오환선비동이전烏丸鮮卑東夷傳」 '동이전東夷傳',『진서晉書』 「동이열전」,『송서宋書』 「이만열전夷蠻列傳」 '동이전',『남제서南齊書』 「만동남이열전蠻東南夷列傳」 '동이전',『양서梁書』 「제이열전諸夷列傳」 '동이전',『위서魏書』 「열전列傳」 제88,『주서周書』 「이역열전異域列傳」 상上,『남사南史』 「이맥열전夷貊列傳」 하下,『북사北史』 「열전」 제82 등 10종이며, 일본 문헌으로는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의 2종이다.

 

이들 중국과 일본 문헌에 보이는 고대 한반도와 만주에 관한 기록은 그들의 견문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보거나 듣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킨 부분이 있을 수 있다.

또 열국에 대한 여러 문제를 균형 있게 기록했다기보다는 그들이 알고 있는 것 가운데 관심을 가졌던 사건이나 사실만을 기록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정보에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국의 정사正史들은 대개 당시의 기록을 기초로 하여 편찬되었기 때문에 참고할 내용이 많다.

일본 문헌들도 자신들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 가운데 당시 한일관계를 알 수 있는 기록들이 많이 보인다.

 

한국사에서 열국시대 시작 연대인 서기전 1세기는 중국의 서한西漢(서기전 206~서기 8년) 후기에 해당한다.

그 후 왕망王莽(, 8~23년)과 경시제更始帝(23~25년)를 거쳐 동한東漢(25~220년)과 삼국시대(위·촉한·오: 220~266년)로 이어졌다.

따라서 동한에 관한 역사서인 후한서 동이열전[남송南宋의 범엽范曄(398~445) 편찬]과 삼국시대에 관한 역사서인 삼국지 동이전[서진西晉의 진수陳壽(233~297) 편찬]은 열국시대 전기에 관해 가장 기본 사료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은 후한서 동이열전사료 가치가 없는 것으로 평가했는데, 그것은 삼국지후한서보다 늦은 시대 역사서이긴 하지만 편찬 연대가 100년 이상 앞설 뿐만 아니라, 내용이 서로 같은 부분이 많은데 전체적으로 삼국지가 훨씬 풍부하기 때문에 후한서 동이열전삼국지 동이을 베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편찬 연대가 앞선다는 이유로 삼국지 동이이  후한서 동이열전」보다 사료로서 가치가 높다는 평가는 잘못이다.

 

두 역사서가 같은 시대에 관한 것이라면 당연히 먼저 편찬된 책이 사료로서 더 가치가 있는 것은 당연하지만 두 역사서는 서로 다른 시대의 역사서이기 때문에 같은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

늦은 시기의 역사서인 『삼국지』는 당시 중국인들이 앞선 시기의 중국인들보다 한반도와 만주에 대한 정보를 더 많이 가졌을 것이므로 그만큼 내용이 풍부해 질 수 있는 것이다.

두 역사서의 내용이 중복되는 부분은 주로 문화나 생활풍속에 관한 것으로 이것들은 시대가 바뀌어도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한서』가 편찬될 당시 남송에는 동한에 관한 많은 역사서들이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자인 범엽은 그만큼 충분한 자료에 근거해 편찬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후한서』 동이열전 내용을 삼국지 동이전을 비롯한 다른 중국 문헌에 보이는 열국에 관한 내용과 동등한 가치를 지닌 것으로  취급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후한서』 「동이열전」『삼국지』 「동이전」보다 앞선 열국시대 초기의 사료로 이용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후한서』를 사료로 이용하여 한반도와 만주의 상황을 연구할 때 알아두어야 할 점이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은 『사기史記』「조선열전朝鮮列傳」이나 『한서漢書』「조선열전」과는 성격이 서로 다르다는 점이다.

즉 사기』 「조선열전」은 위만조선에 관한 기록인데, 위만조선은 중국의 외신이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을 한나라 역사의 한 부분으로 생각하여 실었던 것이며, 『한서』 「조선열전」은 사기』 「조선열전」 기록을 그대로 옮겨 싣고 있다이다. 

이와는 달리 『후한서』 「동이열전」은 부여(동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예(동예), , 왜 등에 관한 기록으로서 당시 중국의 통치질서에 속하지 않았던 외국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이다.

즉 중국인들은 『후한서』부터 중국 주변의 다른 나라나 이민족에 대한 기록을 역사서에 싣기 시작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주변 이민족에 대한 관심과 지식이 높아졌고 유가사상이 자리를 잡아 천하는 모두 중국 천자가 통치해야 한다는 천하사상이 확고해지면서 주변 다른 나라나 이민족들도 미래에 그들의 통치 아래 들어와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열국시대 초기 중국 동북방 상황을 보면 서기전 1세기에 위만조선(서기전 195~서기전 108년)은 이미 멸망했고 그곳은 서한의 영토가 되어 그들의 군현인 한사군(서기전 108~서기 313년) 설치되어 있었다.

위만조선은 서한의 간접통치를 받았지만 한사군은 직접 통치지역이었다.

따라서 외국의 기록인 『후한서』 「동이열전」에는 서한 영토인 위만조선의 옛 땅에 관한 기록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후한서』 「동이열전」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열국이 있었던 곳)과 사기 조선열전, 한서 조선열전에서 다루고 있는 지역(위만조선과 한사군이 있었던 곳)이 서로 지명이 같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서로 다른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면 『후한서』 「군국지郡國志」에 나오는 낙랑군, 현도군, 조선현, 대방현, 고구려현 등은 동한의 영토가 된 위만조선이 있었던 곳의 지명인 반면 『후한서』 동이열전」에 나오는 낙랑, 현도, 조선, 대방, 고구려 등은 동한 영토 밖인 열국의 지명으로서 서로 다른 지역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후한서』와 『삼국지』에 있는 기록이 모두 그 당시의 상황인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이 두 역사서의 내용 가운데는 중국의 동한이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한반도와 만주 상황이 아닌 그보다 앞선 시기의 상황을 말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편찬자가 당시의 상황에 이르는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추가한 내용도 있고 정보를 늦게 입수하여 지난날의 상황을 당시의 것으로 오인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문헌 자료와 더불어 고고학 자료도 열국사 연구의 중요한 사료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서기전 1세기부터 서기 5세기까지의 고고학 발굴 자료나 그 연구 결과는 열국시대에 관한 기본사료가 되는 것이다. 

그것들은 문헌 자료가 말해주지 못한 부분을 보완해주고 때로는 문헌 자료가 잘못 전한 내용을 수정해주기도 할 것이다.

고고학 자료가 이런 역할을 하려면 발굴보고서와 그 연구 결과가 정확해야 한다.

 

지금까지 열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의 유적 발굴을 많이 했고, 또 풍부한 유물이 출토되었음에도 이를 이용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이들의 발굴보고서에 나타난 유적들의 연대가 과학적으로 측정한 것이 아니라 추측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유적 발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확한 연대를 확인하는 것이다.

이러한 추측 연대로는 유적과 유물을 연대순으로 체계화하는 구체적인 연구를 진행할 수 없다. 

유적이나 유물의 정확한 연대를 알아야만 이들을 역사의 연대에 정확하게 자리매김할 수가 있고 그 유적이나 유물이 인류 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유적 발굴에서 과학적인 연대 측정을 의무화해야 한다.

발굴이 완전히 끝난 뒤에는 그 유적에 대해서 다시 과학적인 연대 측정을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유적의 연대 측정은 주로 기존 유적들의 구조나 유물의 형태 또는 지층을 비교하는 방법을 통해 추정해왔다.

이 방법은 상대적인 선후 관계를 밝히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그 유적의 절대연대를 말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

또한 이 방법은 기존 유적의 연대가 정확하다는 전제에서만 연대 추정이 가능한 것이다.

 

지난 날 국내 유적의 연대를 측정하는 데는 중국 유적과 비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경우 중국과 같은 유물이 출토되는 유적의 연대는 중국 유적보다 수백 년 늦게 잡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것은 황하 유역이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먼저 발달한 지역이었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작용하여 그것이 중국에서 한국에 유입되는 시간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추정된 연대가 이후에 발굴되는 유적들의 연대를 추정하는 기준이 되어왔던 것이다.

 

그런데 황하 유역을 비롯한 중국 유적들의 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을 하게 된 뒤로 크게 올라갔다.

그들은 거의 모든 유적에 대해 과학적인 연대 측정을 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추측 연대를 크게 수정했던 것이다.

초기의 추정 연대가 부정확하면 그것에 기초한 이후 유적들의 연대는 모두 잘못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과학적인 연대 측정을 거치지 않은 기존 국내 유적들의 연대를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작업이 이루어져야만 각 유적과 유물들은 역사에서 순서대로 제자리를 찾아 진정한 가치를 발휘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4. 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