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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동부여의 건국과 위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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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2-동부여의 건국과 위치

새샘 2019. 5. 22. 11:42

 

1. 들어가며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부여는 고조선이 붕괴된 뒤 건국된 열국시대의 부여이다.

이 부여는 한반도와 요하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지역에 있었던 열국 가운데 가장 북쪽에 있었다.

고구려와 접경을 접하고 그 북쪽에 있었던 독립국이었다.

그러나 부여라는 이름은 이보다 훨씬 앞서 고조선시대부터 존재했다(『상서』「주관」편에 부여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중국 서주 무왕시대인 서기전 12세기로서 고조선 중기).

 

고조선시대의 부여는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거수국들 가운데 가장 서북쪽에 위치했다.

그곳은 오늘날 북경 북쪽 난하 상류 유역이었다.

따라서 고조선시대에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던 부여와 뒤에 고구려의 북쪽에 독립국으로 있었던 부여는 그 위치와 성격이 전혀 다르다.

 

고대 문헌에는 성격이 다른 부여가 여러 개 나타난다.

이름과 성격이 다른 여러 부여들은 문헌에서 대개 부여라고만 표기됨으로써 그것이 어느 부여에 관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부여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부여에 관한 기록들을 분석하여 그 기록이 어느 부여에 관한 것인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조선이 존재했던 시기의 문헌에서는 오늘날 난하 상류 유역에 고조선의 거수국으로 있었던 부여만 보인다는 점이다.

다른 부여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뒤의 문헌에서 보인다.

 

여러 부여의 등장은 고조선의 붕괴와 관계 있을 것임을 시사한다.

그러므로 부여의 변천 과정 고찰은 부여의 정체를 바르게 인식하고 고조선이 붕괴된 뒤 열국이 독립하는 과정을 인식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2.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부여·남부여

 

옛 문헌에는 5개의 부여 즉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부여·남부여라는 이름이 보인다.

이 가운데 남부여는 백제가 사비(오늘날 충남 부여)로 도읍을 옮긴 뒤 사용했던 나라 이름으로서 이 글의 주제와는 관계가 없으므로 논의를 할 필요가 없다.

 

『삼국유사』 기록에서 북부여·동부여·졸본부여의 존재가 확인된다.

「기이」 <북부여>조에 북부여왕 해부루가 동쪽의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옮겨 동부여를 건국했으며 동명제[추모왕]는 졸본부여에서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부여가 독립 항목으로 서술되어 있지는 않으나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의 내용은 『삼국유사』 기록과 일치한다.

다만 해부루를 북부여왕이라 하지 않고 부여왕이라 표현한 점만 다르다.
이밖에 『제왕운기』와 『동명왕편』에도 북부여와 동부여에 관한 기록이 있다.

 

졸본부여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본 『삼국유사』 「기이」 <북부여>조 외에도, <고구려>조에 고구려가 바로 졸본부여라는 기록과 「고구려본기」 <시조 동명성왕>조에 주몽(추모왕)이 졸본천에 이르러 고구려를 건국했음을 전하면서 주석에서 주몽이 그곳 왕의 사위가 되고 왕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었다는 내용을 덧붙였다.

따라서 이들 기록을 종합해보면 고구려가 건국된 지역에 원래 졸본부여라는 나라가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그런데 <광개토왕릉비문>에는 북부여나 동부여 또는 졸본부여 등과는 별도로 처음부터 부여로만 불린 지역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즉 추모왕이 나라를 건립할 때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길에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여는 위치로 볼 때 북부여나 동부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3. 북부여와 동부여의 건국 연대

 

『삼국유사』에서는 『고기』를 인용하여 전한前漢의 선제宣帝 신작神爵 3년(서기전 59년)에 북부여가 건국됐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동명왕편』에는 신작 3년이 북부여의 건국 연대가 아니라 북부여의 통치자가 해부루에서 해모수로 교체된 연대 즉 동부여의 건국연대라고 말하고 있다.
이 두 기록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를 가려내기 위해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에 대한 다른 기록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구려 당시의 기록인 「광개토왕릉비문」과 「모두루牟頭婁묘지」와 고려 시대 기록인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모두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는 반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와 『삼국유사』 「기이」 <고구려>조에는 동부여에서 내려와 고구려를 건국한 것으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옳은지를 먼저 밝혀내야 한다.

모든 기록에서 일치하는 점은 북부여의 해부루왕이 동쪽의 가섭원이라는 곳으로 옮겨 동부여를 건국했다는 것과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왔건 동부여에서 왔건 부여라는 나라에서 왔다는 것이므로, 추모왕이 과연 어느 부여에서 왔는지를 밝힐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인용한 자료들에서 연대에 관해 얻을 수 있는 근거로는 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연대, 그리고 고구려 건국 당시 추모왕의 나이이다.

고구려 건국연대는 『삼국사기』에 서한 원제元帝 건소建昭 2년인 서기전 37년이므로 부여의 건국 연대와는 22년이라는 시차가 있다.

그리고 고구려를 건국할 때 추모왕의 나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22세로, 『삼국유사』 「기이」 <고구려>조에는 12세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추모왕의 부여에서의 성장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를 건국할 때는 이미 어린 나이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추모왕은 스스로 고구려라는 나라를 건국할 정도의 인물이었으므로 12세의 어린이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뿐만 아니라 추모왕은 망명하기 전 부여에 있을 때 이미 결혼하여 아들을 두었다.

이런 점들을 종합해볼 때 고구려 건국 당시 추모왕 나이는 22세였다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기록이 설득력이 있다.

 

고구려 건국 당시의 추모왕의 나이를 22세로 본다면 북부여나 동부여의 건국 연대로 기록된 서기전 59년은 그가 출생한 해가 된다.

만약 서기전 59년이 북부여의 건국연대라면 추모왕이 동부여에 와서 고구려를 건국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북부여의 해부루왕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건국했으므로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까지의 동부여 역년은 추모와의 나이인 22년에 훨씬 못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기전 59년을 동부여 건국 연대로 본다면 추모왕이 동부여에서 왔다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고구려 건국 당시 추모왕의 나이가 22세로 보았기 때문에 추모왕은 동부여 건국과 동시에 출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모왕은 동부여를 건국한 해부루왕의 뒤를 이은 금와왕때 출생한 것으로 되어 있어 출생 연대와 나이가 합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기전 59년'이라는 부여의 건국 연대와 '추모왕이 온 부여'에 대한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설명이 되려면 서기전 59년은 동부여의 건국 연대가 되고, 추모왕이 온 부여는 북부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고 기록한 「광개토왕릉비문」, 「모두루묘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등의 기록과 일치한다.

특히 「광개토왕릉비문」과 「모두루묘지」는 고구려 당시의 기록이어서 이보다 후대인 고려시대의 기록인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보다 사료로서의 가치가 더 높다는 점에서도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하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결론적으로 북부여는 건국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동부여보다 오래된 나라였으며, 서기전 59년에 이르러 북부여의 해부루왕은 동쪽의 가섭원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건국했다.

해부루왕이 동쪽으로 옮겨 가자 원래의 북부여에는 해모수라는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여 그 지역을 통치하게 되면서 나라 이름은 여전히 북부여라고 불렀던 것이다.

22년 뒤인 서기전 37년에 추모왕은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졸본부여의 땅에 고구려를 건국했던 것이다.

 


4. 북부여와 동부여의 위치

 

 

중국의 옛 문헌에서는 위치가 다른 두 곳의 부여가 확인된다.

하나는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보이는 부여이고, 다른 하나는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부여이다.

 

『사기』 「화식열전」에 보이는 부여의 위치는 오환烏丸과 이웃하여 연燕의 북쪽이며, 이 기록은 『사기』가 편찬된 서한 무제 때의 이전인 서기전 140년대 이전의 상황을 말하고 있다.

여기서 연의 위치는 서북쪽의 발해와 갈석碣石 사이라고 했는데, 이 두 지역의 위치에 대한 『사기정의史記正義』주석에 따르면 발해는 오늘날의 발해만이고 갈석은 난하 하류 동부 유역의 오늘날의 갈석산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시 연의 위치는 오늘날 북경시와 천진시 지역으로 오늘날 난하 서부 유역이다.

부여가 연의 북쪽에 있다고 했으므로 이 부여는 오늘날 난하 상류 유역인 하북성 동북단과 내몽골자치구의 경계 지역에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서기전 140년대 이전의 고조선시대 말기의 부여로서 고조선의 거수국 가운데 가장 서북쪽에 위치했다.

 

『후한서』 「동이열전」 <부여국전>과 『삼국지』 「동이전」 <부여전>에 보이는 부여는 오늘날 길림성 북부와 내몽골자치구 동부 일부 및 흑룡강성 지역인 북만주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부여는 『사기史記』「화식열전貨殖列傳」에 보이는 고조선시대의 부여보다 늦은 시기의 부여로서 중국의 동한시대와 삼국시대 즉 서기 25년 전후와 그 이후에 존재했던 부여인 것이다.

이 부여의 위치는 서기전 140년대 이전 고조선말기 부여보다 동쪽 있었다.

 

이 두 부여의 위치를 가지고 북부여·동부여·부여·졸본부여의 위치를 고찰해보자.

이 가운데 부여는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지명 정도로 나타나는 부여로서 국가 규모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졸본부여는 그곳에서 고구려가 건국했으므로 고구려라는 이름이 등장하면서 그 이름은 소멸되었다. 

북부여와 동부여는 각각 서쪽과 동쪽에 있었고, 추모왕이 북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던 것으로 보아('3. 북부여와 동부여의 건국 연대' 참조) 부여와 졸본부여는 북부여와 동부여보다는 남쪽에 있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사기』 「화식열전」에 등장한 부여와 『후한서』 「동이열전」과 『삼국지』 「동이전」에 보이는 부여는  각각 서쪽과 동쪽에 있어 북부여와 동부여의 상호관계와 일치한다.

그리고 존재 시기 역시 북부여가 동부여보다 앞섰다는 기록들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던 부여는 북부여, 북만주 지역에 있었던 부여는 동부여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길림성 북부와 내몽골자치구 동부 일부 및 흑룡강성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동부여의 정치 중심지는 오늘날 길림성 북부에 있는 부여현 지역었을 것이다.

 

동부여의 중심지가 오늘날 길림성 부여현(최근 '송원松原'으로 개명) 지역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들이 뒷받침한다.

첫째, 오늘날 그곳의 지명이 부여라는 점은 이 지역이 고대에 부여의 중심지였을 가능성을 말한다.

둘째, 앞에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4년〉조에 동부여가 고구려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길림성 부여현 지역은 고구려의 북쪽이 된다.

셋째, 길림성 부여현 지역의 자연환경은 고대 문헌 기록에 보이는 부여의 자연환경과 일치한다.

 

이제 동부여의 위치가 확인되었으므로 북부여의 해부루왕이 왜 동쪽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건국했는지를 알아보자.

 

북부여의 해부루왕이 동쪽으로 이주하여 동부여를 건국한 해는 서기전 59년이었다.

서기전 59년은 한사군이 설치된 뒤 49년이 지난 해이다. 한사군은 오늘날 요서 지역에 설치되었는데 한사군 설치 전에 그 지역에는 위만조선이 있었다.

위만조선이 건국되기 전 그 지역은 고조선의 서부 변경이었다.

 

오늘날 요서 지역에는 원래 고구려·숙신·낙랑·예·맥 등의 고조선 거수국들이 있었는데 그곳에 위만조선이 건국되어 영토를 확장하자 이들 거수국들은 영토를 잃고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그 후 서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오늘날 요하까지 서한 영토에 편입시켜 한사군을 설치했다.

이렇게 되자 동쪽으로 이동했던 고조선 거수국들은 오늘날 요하 동쪽의 만주와 연해주 및 한반도 지역에서 자리를 잡고 국가를 재건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조선 말기에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는 혼란한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부여는 난하 상류 유역에 위치하여 고조선 거수국들 가운데 가장 서북쪽에 있었으므로 난하 하류 유역에서 건국된 위만조선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태가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부여가 북쪽으로 이동했다 하여 거주민 모두가 이동해 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여 주민 일부는 그 지역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원래 부여가 있었던 지역은 여전히 부여라 불렸을 것이며, 북쪽으로 이주한 새로운 부여는 그 북쪽이 되므로 북부여라 불렸을 것이다.

「광개토왕릉비문」에 추모왕이 북부여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오는 과정에서 통과한 것으로 기록된 엄리대수가 있었던 부여는 바로 원래 부여가 있었던 자리였을 것이다.

 

동부여의 건국 연대인 서기전 59년 무렵 오늘날 요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되어 중국 영토가 됨으로써 요서 지역에 있던 대부분의 고조선 세력은 오늘날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북부여 홀로 중국 영토의 북쪽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결토 유리하지 않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북부여의 해부루왕은 고조선의 후계세력들이 있는 동쪽으로 이주할 결심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북부여에서는 통치세력의 교체가 일어났다.

오늘날 요서 지역에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에서 부여 주민 일부는 이보다 먼저 오늘날 요동 지역으로 이동하여 졸본에 자리를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졸본부여다.

 

북부여의 해부루왕이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부여를 건국한 뒤 북부여 지역은 여전히 북부여라는 이름을 사용했는데 새로 등장한 통치세력도 고조선의 후계세력이었던 것 같다.

북부여는 346년까지 존속했다(『자치통감資治通鑑』 및 『진서晉書』).

 

북부여가 멸망한 뒤 그 종족은 멀리 연해주 밖까지 이동하여 두막루국豆莫婁國을 건국했다(『위서魏書』 <두막루전>, 『신당서新唐書』 <유귀전流鬼傳>).

이 기록은 470년대의 상황이었다.

 

 

5. 마치며

 

고조선시대에는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하나의 부여만 존재했으나 고조선이 붕괴된 뒤 그 지배귀족과 거주민들이 여러 곳으로 이주함에 따라 여러 곳에 부여라는 이름 생겨 동부여·북부여·졸본부여·부여 등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1)부여

고조선시대부터 있었던 원래의 부여로서 그 위치는 오늘날 난하 상류 유역이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뒤 이 부여는 지명으로만 남게 되었다.

 

2)북부여

서기전 195년 난하 하류 유역에서 건국된 위만조선의 영토 확장과 서기전 108년 서한 무제의 한사군 설치 과정에서 부여의 지배세력이 북쪽으로 이동하여 국가를 유지하고 있었던 부여로서 원래의 부여보다는 다소 북쪽에 있어 북부여라는 이름이 붙었다. 

북부여의 위치도 부여와 가까운 난하 상류 유역이었다.

북부여의 세력이 동쪽으로 이동해 간 뒤에 북부여 지역에는 새로운 통치세력이 등장했는데 이들도 고조선의 후계세력으로서(통치자를 단군을 의미하는 해모수라고 부름) 북부여라는 이름을 그대로 사용했다.

서기전 140년 이전부터 있었으며 346년 선비족이 세운 전연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으며, 그 후 고구려에 병합되었다.

 

3)졸본부여

부여의 거주민 일부가 일찍이 오늘날 요동 남부 지역으로 이동하여 세운 나라가 졸본부여이다.

북부여에서 내려온 추모왕이 이곳에서 고구려를 건국함으로써 졸본부여라는 이름은 사라져 버렸다.

 

4)동부여

동부여는 북부여왕 해부루가 중국 영토 북쪽에 남아 있는 것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동쪽으로 이동하여 서기전 59년에 세운 나라로서 오늘날 길림성 북부와 내몽골자치구 일부 지역 및 흑룡강성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동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투항함으로써 멸망하였다.

 

5)두막루국

북부여가 멸망한 뒤 주민 가운데 일부는 연해주 밖까지 이동하여 오늘날 오호츠크해 연안에 세운 나라가 두막루국이다.

이들과 그 후손은 시베리아 지역에 거주했던 고아시아족의 일부를 형성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부여가 분열 이동하여 새로운 거주지에 자리 잡는 과정에서 그곳의 토착인들이나 오늘날 요서 지역에서 이동해 온 고조선의 다른 거수국 주민들과 혼합이 이루어졌다.

이런 현상은 부여뿐 아니라 다른 거수국의 주민들도 마찬가지였으며 그 결과 강한 민족 혼합을 가져오게 되었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5. 22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