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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세계시민 정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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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세계시민 정신

새샘 2019. 7. 28. 17:21

<알렉산드로스 대왕>

(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5%8C%EB%A0%89%EC%82%B0%EB%93%9C%EB%A1%9C%EC%8A%A4_3%EC%84%B8)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처럼 단 한 번도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는 고대 그리스 북부의 왕국

마케도니아 Macedon 국왕이었던 알렉산드로스 대왕 Alexander the Great(서기전 356~서기전 323)

[정식 명칭은 알렉산드로스 3세 Alexander Ⅲ Magnus]은

고대의 영웅 그 누구보다도 후대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나폴레옹이 말했듯이 알렉산드로스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이었다.

그러나 서양 역사에서 그가 갖는 중요성은 군사적 천재성만이 아니다.

만민의 평등과 협조에 바탕을 둔 세계국가 이념이야말로 그의 업적이 지닌 진정한 역사적 의의다.

젊고 자부심에 참 정복자가 착안한 이 정치적 비전은 그가 죽고 제국이 사라진 후에도 지속되었고,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알렉산드로스는 13살 때부터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을 받았다.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의 3년 동안 그의 예리한 정신은 그리스적인 관점에 젖어들게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알렉산드로스에게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인 모든 야만인들,

특히 아시아인은 타고난 노예라고 가르쳤다.

이런 관점은 고대 그리스의 전형적 특징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인 플라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알렉산드로스는 그리스인의 편견과 스승 아리스토텔레스의 한계를 뛰어넘은 청출어람의 제자였다.

 

알렉산드로스는 아시아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이후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발상과 행동을 보여주었다.

알렉산드로스의 전 생애에서 이 시기에 나타난 발상과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들이 초래한 결과는 사상사적인 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유념해야 할 점은,

알렉산드로스도 처음에는 야만인에 대해 그리스적 관점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플라톤은 모든 야만인은 날 때부터 그리스인의 적이라고 주장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든 야만인들-특히 아시아의 야만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노예라고 말한 바 있다.

 

알렉산드로스가 직면한 문제는 오리엔트적 전제주의를 그리스적 전제주의로 대체해야 하는가였다.

다시 말해서 구세계와 동일한 나라를 만들 것인가, 아니면

기존의 국가 체계와 전혀 다른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가 하는 문제가 알렉산드로스의 당면 과제였다.

플루타르코스는 알렉산드로스가 '돌려가며 마시는 큰 잔'처럼

모든 사람들을 뒤섞어 놓는 것이 왕의 임무로 여긴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로스는 전쟁터와 같은 장소에서 야만인들과 접촉할 기회를 가지면서

그리스인이 과연 그들보다 우월한지 면밀하게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을 통해 그는 모든 사람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알렉산드로스가 가지고 있던 '기이한' 사상이었다.

단짝 친구인 헤파이스티온 Hephaestion-올리버 스톤 감독의 영화 <알렉산더>에서

두 사람은 동성애 관계로 묘사된다-은 이 같은 그의 사상을 '기이한'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알렉산드로스는 헤파이스티온이야말로

자신의 제국 건설 계획을 이해하고 받아들인 유일한 친구라고 선언했다.

 

서기전 329년 봄 알렉산드로스는 힌두쿠시를 가로질러 박트리아로 진군했다.

그런데 거의 같은 무렵, 그의 주력부대인 그리스 기병대가 반란을 일으켜 본국으로 가버렸다.

기병대 사령관 파르메니오를 반역 혐의로 처형한 데 대한 반발이었다.

존경하던 사령관의 죽음에 대한 기병대의 분노와 본국 귀환은 알렉산드로스 생애 최대의 위기였다.


알렉산드로스 자신도 귀환해야 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난처한 처지에 몰렸다.

더 이상 그리스인 또는 마케도니아인 병력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정이 비극적 종말을 고할 수도 있던 상황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밖에 없었다.

모든 것을 운에 맡기고 아시아인 병력을 대대적으로 충원하는 것이었다.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시아인 병력은 박트리아-소그디아나에서의 2년에 걸친 활동을 통해

알렉산드로스에게 매우 값진 존재임을 증명했다.

이 기간에는 게릴라들의 기습이 있었고, 끝없는 행군과 매복과 배신행위가 이어졌다.

부상과 질병은 알렉산드로스를 괴롭혔다.

게다가 마케도니아 귀족 장수들의 반발이 상존하고 있었다.


클레이투스 살해 사건은 이 같은 반발의 전형이었다.

연회가 벌어지던 어느 날 밤, 알렉산드로스의 친구 클레이투스는

알렉산드로스가 필리포스와 필리포스의 부하들에게 큰 은혜를 입고 있다고 조롱했다.

만취한 알렉산드로스는 분을 참지 못하고

'흑인'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죽마고우 클레이투스를 죽이고 말았다.

 

이 2년 동안 알렉산드로스는 생각할 여유를 가졌다.

아시아인 병력이 그토록 충성스럽다면, 이란 동부 주민의 민심을 다독이고

게릴라 전투를 종식시키기 위해 화해의 제스처를 취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알렉산드로스는 박트리아 왕의 딸 록사나 Roxana와 결혼했다.

병사들은 그녀가 다리우스 왕비를 빼고는 아시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했다.

전설은 이 일을 하나의 연애 사건으로 미화하지만 사실 그것은 정략결혼이었다.

아시아를 충실한 파트너로 삼기 위한 현실적인 노력의 시작이었다.


아시아를 파트너로 삼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알렉산드로스는 죽기 한 해 전에는 다리우스의 딸인 바르시네 Barsine와도 결혼했다.

알렉산드로스만이 아니었다. 이즈음 알렉산드로스의 친구들은 대부분 야만인 출신 아내를 얻었다.

그리고 1만 명에 달하는 병사들에게도 같은 선물을 나누어주었다.

그들은 원정 과정에서 이미 아시아 여성들에게 상당한 친근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인종 혼합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해서,

알렉산드로스가 계획적으로 동방을 그리스화하거나

그리스 및 마테도니아를 야만화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유롭게 종족 고유의 생활 방식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관습과 혈통의 혼합에 기반을 둔 새로운 생활 방식'이 확산되고 있었다.

 세상을 바라보는 이러한 새로운 태도는 그의 제국을 결속시키는 힘이 되었으며,

그의 제국 건설을 추진하는 토대로 기능했다.

 

그는 3만 명의 원주민 청년들로 하여금 그리스어를 배우게 하고,

마케도니아 무기 사용법을 익히도록 했다. 그리고

새로운 이념이 보편적으로 실현될 것임을 증명하기 위해,

동방에서의 정복 사업을 마친 다음 서쪽으로 방향을 돌려 이탈리아 방면으로 행군을 계속했다.

이것은 그의 과대망상이 점점 심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최초의 징조였다.

 

그렇다면 신뢰할 수 없는 장수들의 문제는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마케도니아 병력의 반발로 그 문제는 이미 드러나지 않았던가?

기병대의 반란이 일어날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던 만큼 이 문제는 신중히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알렉산드로스는 결국 마케도니아 왕국의 오랜 전통이었던

장군들과의 '동지적 유대'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스스로 독재자가 됨으로써 위태로운 지원 체계를 종식시키는 동시에,

만약의 경우 있을지도 모르는 음모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했다.

그리스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는 신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알렉산드로스의 계획은 당대에는 실패로 끝났다.

알렉산드로스의 기상천외한 사상-즉 세계 정복 및 자신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자리매김,

행정 및 군대에서의 야만인 활용, 도시 건설, 하나의 공통된 문화, 개인의 신격화 등-을 돌아볼 때,

독재적인 방법 말고는 그 사상을 실현할 길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상이란 스스로 자라나는 것이다.

 

죽기 한 해 전, 알렉산드로스는 소규모 폭동이 있은후 부하들과 더불어 단합을 위한 잔치를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제국 내에서의 공동 협력을, 그리고 국가 공동체

-여기서는 모든 국민이 신민臣民이 아닌 동료가 되어야 했다-내에서의 단결과 화합을 기도했다.

그가 이 자리에서 바친 기도는 인류 정신사에 혁명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 사상은 맨 먼저

스토아학파의 비조鼻祖(시조始祖) 제논Zenon(서기전 335년경~서기전 263년경)에 의해 채택되었다.

제논이 설파한 스토아 철학은 인류가 형제임을 가르쳤다.

그 사상은 그 후 사도 바울로 이어졌다.


그는 자신의 감동적인 세계관을 펼쳐 보이면서,

"거기에는 그리스인도 유대인도, 할례를 한 사람도 하지 않은 사람도, 야만인도 스구디아인도,

종도 자유인도 없습니다"(<골로새서> 3:11)라고 선포했다.

 

이런 의미에서

 알렉산드로스는 21세기 지구촌 시대에 걸맞은 보편적 세계관의 기초를 놓은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이 글은 박상익이 지은 <나의 서양사 편력 1>(2014, 푸른역사)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19. 7. 2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