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4-가야의 왜열도 진출 본문
<가야의 왜열도 진출 지역>
1. 고대 한반도와 왜열도의 사회 발전 과정과 상호관계
왜열도와 대마도에도 한반도에 있었던 고대 열국들―고구려·백제·신라·가야(임나)―과 같은 이름을 가진
나라나 지역이 있었던 연유는 고대에 한국과 일본의 사회 발전 과정과 상호관계에서 확인할 수 있다.
고고학적으로 볼 때 한반도와 만주는 지금부터 1만 년 전(서기전 8000년)에 구석기시대가 끝나고
신석기시대가 시작되었으며 서기전 2500년 무렵에는 청동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이를 사회 발전 단계로 보면 서기전 8000년에 마을사회가, 서기전 4000년에 고을나라가 형성되었으며,
서기전 2333년에는 고조선이 건국되어 국가가 출현했다.
그리고 고조선 후기인 서기전 800년 무렵에는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왜열도에서는 신석기문화인 조몬(승문繩文)문화가 서기전 3세기까지 계속되었고,
서기전 3세기에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가 혼합된 야요이(미생彌生)문화가 출현하여 약 600년간 계속되다가
고훈(고분古墳)문화로 이어졌다.
이는 왜열도에서의 신석시기대 종료와 청동기시대 시작은 한반도와 만주보다 무려 2,200여 년이나 늦은 것이다.
그리고 한반도와 만주에서는 1,700여 년이라는 오랜 기간의 청동기시대가 계속된 후에야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는데,
왜열도에서는 청동기와 철기에 동시에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왜열도에서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가 동시에 나타난 것은
그것들이 혼합된 문화가 늦게야 한반도에서 전달되었기 때문이었다.
구석기시대부터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문화가 전달되어 왔지만
특히 야요이문화는 바로 한반도의 문화가 전달되어 형성된 것이었다.
서기전 3세기 이전 조몬시대에 완만했던 왜열도 발전은 야요이시대에 접어들어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이루었는데,
이는 야요이문화가 한반도로부터 강한 문화 영향을 받아 돌연히 형성된 것으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회 단계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서기전 3세기에 시작된 야요이문화는 초기에 벼농사 위주의 농경과 질그릇(민무늬 즉 무문無紋 토기)·묘제(고인돌),
중기에 청동기(배에 실려온 구리 도구를 의미하는 박재동기舶載銅器인 다뉴세문경多紐細文鏡과 세형동검細形銅劍) 및 철기(철제도끼 등) 등 새로운 문화요소를 가지고 정착생활을 하는 생산경제사회이었다.
야요이문화는 한반도에서 가까운 거리의 서북 규슈 지방에서 시작되어
그 말기에는 홋카이도 일부를 제외한 왜열도 전 지역에 확산되었는데,
한반도인들이 일찍이 서기전 8000년 전에 이미 농경과 더불어 정착생활에 들어갔던 것과 비교하면
왜열도인들의 정착생활은 매우 늦게 시작되었다.
야요이문화 주요소들이 거의 같은 시기에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전달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왜인들을 통해 수입되었던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화 요소들을 가진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대거 이주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특히 지배계층의 권위를 뒷받침하는 청동 무기와 청동 의기儀器는 지배계층의 독점적 도구로서
다른 집단들에게 판매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볼 때 야요이문화의 주체는 한반도에서 왜열도로 이주해 간 사람들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은 왜열도에서 마을을 이루고 살면서(마을사회)
자루식 철제도끼를 이용하여 원시림으로 울창한 왜열도를 개간하면서 정치세력을 형성했을 것이다.
왜열도에서 야요이문화가 전개되었던 서기전 3세기부터 서기 3세기에 이르는 기간은
한반도에서는 고조선 말기부터 열국시대 전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한민족의 왜열도 이동은 고조선 말기부터 급격히 증가하여 열국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왜열도로 이주한 한반도인들은 고조선과 그 뒤를 이은 열국시대에
이미 국가라는 정치조직을 가지고 생활할 경험이 있었다.
이들 이주민이 여러 마을을 통합하여 고을나라를 형성하였고, 더 발전한 소국들이
북규슈 지역을 시발점으로 하여 왜열도의 여기저기에 출현하게 되었다.
이후 4세기 무렵에 이르면 한반도에서 고훈문화라는 새로운 문화가 전달되는데,
이 시기에 고훈문화인들은 고을나라인 소국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국가를 출현시키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 시기에도 한민족의 왜열도 이주와 문화 전달은 계속되었다.
4세기 말부터 5세기에 걸쳐서 북규슈와 긴키(근기近畿) 지방을 중심으로 한 왜열도에는
한국의 도질토기陶質土器가 반입되어 이를 기반으로 스에키(수혜기須惠器)라 불리는 토기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런 왜열도의 초기 스에키는 한반도의 가야 질그릇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4세기 초부터 덩이쇠(철정鐵鋌)도 한반도 가야에서 왜열도 북규슈로 전달되기 시작하여
5세기 중엽에는 긴키 지방을 중심으로 서일본에 걸쳐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왜열도에서는 이런 철을 사용하여 본격적인 철기 생산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5세기 초부터 한반도 가야 유적 출토물과 동일한 철제 마구류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5세기 중반에는 철제 무기류(투구, 갑옷, 견갑 등)가 완성되었는데,
이런 갑주甲胄 제조 기술 역시 한반도 가야에서 들어온 것이었다.
또한 이 시기 왜열도에서 출토된 칼에 있는 그림이나 명문 상감은 한반도 가야와 백제에서 보이는 기술과 동일하다.
이상과 같이 4~5세기 왜열도 출토 유물은 한반도 가야의 것이거나 그 영향을 받은 것들이며,
유물 출토 고분 역시 한반도 가야 고분과 비슷함으로써
당시 왜열도 지배계층이 한반도 가야 계통임을 말해 주고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왜열도의 사회 발전 과정과 출토 유물로 미루어 볼 때
왜열도와 대마도 지역에 있었던 가야·고구려·백제·신라는
바로 한반도에서 이주해 간 사람들이 살았던 곳의 이름이자 그들이 세운 소국의 이름이었다.
따라서 같은 이름이 왜열도 안에서도 여러 곳에 등장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나일본부가 있었던 임나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본서기』에 보이는 왜·고구려·백제·신라·가야 사이의 전쟁이나 교류에 관한 기록은
왜열도에서 국가가 성립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다.
2. 가야인들이 왜열도에 이주했다는 문헌 기록들
『고사기』에 기록된 일본 건국신화에 나오는 다카키신(고목신高木神)이란 나무와 관련된 한자 이름은
역시 나무 이름의 한자로 된 단군檀君과 비슷하고,
또 다른 일본신의 강림지인 구지후루타케(구사포류다기久士布流多氣)는
가야국 수로왕이 강림했다는 구지봉과 음이 비슷하며,
일본의 3가지 신기神器―구슬·거울·칼―은 단군사화의 천부인天符印 3개―검·방울·거울―과 비슷하다.
또한 위 『고사기』 건국신화에서 일본신이 구지후루타케에 자리를 잡을 때 "이곳은 한국韓國을 바라보고 있고..."
라는 말에서 한반도를 의미하는 한국을 일본인들은 가라쿠니로 읽지만, 한민족의 한은 가라로 발음하지 않는다.
따라서 위 건국신화의 한국은 원래 가야국이었던 것이 나중에 표기가 바뀌었거나 넓은 의미로서 한국을 표기했지만 그 의미는 가야국이었기 때문에 가라라고 읽었을 것이다.
이상의 사실들을 통해 볼 때 위의 건국신화 주인공들은 한반도의 가야에서 이주해 간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는 스스로 가야의 후손임을 자처했던 일본 귀족들의 성씨가 많이 보이다.
이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으며, 일본 각지에는 가야계의 성씨가 아래 기록보다 훨씬 많다.
미치다노부라지(도전연道田連): 임나국 가라 왕실
오이치노오비토(대시수大市首), 시미즈노오비토(청수수淸水首), 사키타노오비코(벽전수辟田首): 임나국인 쓰누가아라시토
다타라노키미(다다양공 多多良公): 어간명국주御間名國主(임나국왕, 가야국왕) 이리구모왕
오토모노미야쓰코(대반조大伴造): 임나국왕 용주왕龍主王의 후손 좌리왕佐利王
도요쓰노미야쓰코(풍진조豊津造), 가라히토(한인韓人): 임나국인 사라고무
아라라노키미(황황공荒荒公): 임나국 풍귀왕豊貴王
미마나노키미(삼간명공三間名公): 임나국왕 모유지왕牟留知王
『속일본기續日本紀』에도 미농국美濃國 석전군席田郡의 대령직大領職에 있었던 자인子人과 오지吾志가
한반도의 가야(가라쿠니賀羅國)에서 이주해 간 사람들의 후손이어서
가라니야쓰코(하라조賀羅造)라는 성씨를 하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3. 마치며 일본인들은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가야)·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이름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대마도와 왜열도에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이들 나라 이름을 모두 한반도에 있던 나라들로 해석했다는 것이 가장 큰 오류였다. 일본 역사책인 『일본서기』는 왜열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위주로 기술된 것으로 보는 것이 상식이다. 따라서 앞에서 열거한 자료들로 보아 한반도의 가야·고구려·백제·신라 사람들은 왜열도에 진출하여 집단마을을 이루고 거주하면서 자신들의 선진 문화를 전달했으며, 나아가 고국에서 체험한 정치적 경험을 기반으로 왜열도 이곳저곳에 소국을 출현시킴으로써 왜열도가 국가 단계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들은 고국에서 살았던 곳의 지명이나 나라 이름을 새로 이주한 곳의 이름으로 사용함으로써 왜열도에 가야·고구려·백제·신라라는 지명과 나라 이름을 남겼던 것이다. 그 결과 가야계통의 지명이 왜열도의 규슈지역, 세토 내해지역, 긴키지역에 많이 있게 되었고, 그 지역에 가야 소국들도 존재하게 되었다. 왜열도 가야 소국들은 한반도의 본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한반도 가야는 562년에 멸망했지만, 왜열도 가야 소국들은 646년 무렵까지도 계속 활동했던 것으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9. 10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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