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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주석의 혜원 신윤복 "미인도" 해설

새샘 2019. 10. 17. 15:08

신윤복, 미인도, 비단에 채색, 114.2x45.7㎝, 간송미술관(출처-출처자료)

 

위 그림은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미인도美人圖>이다.

여성을 그리지 않았던 내외하는 세상, 조선시대의 여자 그림이니 보나마나 기생?

기생이지만 저 얼굴을 좀 보라.

아주 조촐하고 해맑은 인상이다.

이 치마 아래에는 오색 또는 일곱 가지 색의 무지기라는 속옷을 입었다.

층층이 색이 다른 속옷이 옅은 옥색 치마 아래로 은은하게 비쳐 보인 것이다.

이런 것이 조선식의 아름다움이었다.

 

그렇게 해서 통치마가 푸하게 부풀었기 때문에 옛날 분들은 머리에도 큰 다래머리를 얹은 것이다.

자연 위아래 균형이 잘 맞았는데, 시중의 그림책 같은 데서 이 그림 설명을 찾아보면 상당히 에로틱한 그림이라고 해석한 것이 많다.

하긴 주인공이 옷고름을 풀고 있으니...

옷을 벗고 있다!

오른쪽에 드리운 것은 속옷 고름인데 연지빛으로 도드라지게 칠했다.

요즘은 하도 이상한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는 세상이라서 어떨는지 모르지만, 예전 남정네들은 이런 기생의 연지빛 속고름이 드러워진 그림만 보아도 아마 가슴이 막 쿵쾅쿵쾅 했을 게다.

 

그런데 혜원이 여기다 뭐라고 써 놓았느냐 하면,

 

"이 조그만 가슴에 서리고 서려 있는 여인의 봄볕같은 정을 (반박흉중만화춘 盤薄胸中萬化春)

 붓끝으로 어떻게 그 마음까지 고스란히 옮겨 놓았느뇨?     (필단능여물전신 筆端能與物傳神)"하였다.

 

자기가 그린 그림에 자기가 엄청 칭찬을 해 놓은 것이다. 그야말로 자화자찬이 아닐 수 없다.

 

미인도의 인물 세부(출처-출처자료)

 

여기에는 연유가 있다.

위 그림에서 이 여인의 눈빛을 자세히 뜯어보자.

이 앞에 누군가 남정네가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분명 여인이 옷을 벗는 모습이다. 반대로 옷을 입는 모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아래 치마끈 매듭이 풀려 느슨해진 것을 보라.

하루 일이 끝난 고단한 몸을 우선 치마끈 매듭부터 풀러 숨 쉬게 해놓고 이제 막 저고리도 마저 벗으려는 것이 분명하다.

옷고름을 풀 때는 이렇게 한 손으로 노리개를 꼭 붙들고 끈을 끌러야 아래로 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주위에 남자가 없는 것을 어떻게 알까?

남자는커녕 아무도 없는 게 분명하다.

 

이 꿈꾸는 듯한 눈매를 보라!

이런 맑은 표정이 남 앞에서 나올 수 있을까?

그러니까 아무래도 신윤복이 저 홀로 지극히 사모했던 기생을 그린 것 같다.

그것도 대단한 일류 기생을 말이다.

아득하니 저 멀리 높이 있어서 도저히 제 품에 넣을 재간은 없고, 그렇다고 연정을 사그라뜨릴 수도 없으니까 이렇게 그림으로라도 옮겨 놓은 것 같다.

 

기생이라고 하면 흔히 요새 술이나 따르는 고만고만한 그런 여성을 생각할 지 모르지만, 물론 조선시대라고 그런 기생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기생이라는 게 사실 천차만별이다.

가끔 국악 하셨던 분들께 "예전에 뭐하셨어요, 할머니?" 그렇게 물으면 "나 기생이었다"고 당당하게 얘기하시는 분들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나라가 망한 후 기생들은 조합을 만들었다.

일패, 이패, 삼패 기생이 있었는데 일패, 이패 기생은 서로 양상 색깔부터 달랐다고 한다.

가령 일패 기생을 길에서 만나면 이패 기생은 스스로 양산을 접고서 상대가 가길 기다렸다가 지나갔다고 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이패 기생부터는 공연 예술을 주로 했다.

만약 일제강점기 때 일패 기생을 데려다가 명월관에서 한 시간 무대 위에 세우려면 전표를 무려 300시간 분으로 끊어야 계약이 성사됐다고 한다.

그것도 미리 예약을 해야 하며, 공연 당일에는 인력거로 모셔 오고 또 모셔다 드렸다.

그러니 일패 기생의 경우 그들은 우리 옛 전통문화를 전부 두 어깨로 짊어지고 왔던 분들이다.

기생이란 이름만으로 함부로 얕잡아볼 게 아니었다.

 

아마도 그림 속의 이 기생은―혜원이 늘 화류계를 들락날락했지만―도저히 넘볼 수 없는, 그런 여인을 옮겨 그린 게 아니었나 싶다.

사람이란 본래 자기가 꼭 갖고 싶은 걸 그린다.

화가들은 그런 속성이 있다.

이를테면 구석기시대 때 들소를 꼭 잡아먹어야 되는 원시인들이 열심히 사실적인 들소를 그린 것과 마찬가지다.

 

기생 얘기를 한 김에 한마디만 더 하자면 안동 기생 같은 경우는 《대학》을 줄줄 다 외웠다고 한다.

시도 척척 쓴다.

또 저 함경도나 평안도 기생은 무인들 상대가 많으니까, 말 타고 전력질주하면서 갑자기 뒤로 돌아서 과녁에 대고 휙 쏘면, 화살이 과녁에 딱딱 맞고, 그랬다고 한다.

지금은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는 일이다.

지금 기생에 관한 연구가 시원찮다는 것은 전통문화의 정체를 도무지 모른다는 뜻이다.

얼마 전에 한 일본인이 쓴 책이 나왔는데, 삐딱하게 왜곡된 시선으로 쓴 책이라 일고의 가치조차 없었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1813 이후)은 화원인 신한평의 아들로, 단원 김홍도와 함께 조선시대에 쌍벽을 이룬 풍속화가다. 단원이 서민들의 일상과 애환을 진솔하면서도 해학적으로 표현했다면 혜원은 양반들의 도회풍속을, 그것도 한량과 기녀 사이의 사랑과 일탈을 은밀하면서도 에로틱하게 보여 주었다. 신윤복은 특히 그 동안 화면 속에 거의 등장하지 않았던 여성을 표현함으로써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금기를 향한 대담한 도전이었다. 실학의 등장, 경제유통의 활성화, 자주의식의 발달 등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근대적이고 개방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여성의 지위가 조금씩 높아졌고 이로 말미암아 여성의 모습이 그림의 화면의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련되고 감각적인 분위기, 과감하고 파격적인 소재 선택 등으로, 혜원은 독보적인 풍속화의 세계를 보여 주면서 조선시대의 미술문화를 한층 풍요롭게 만들었다. 또한 풍속화뿐만 아니라 남종화풍의 산수와 영모 등에서도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최근에는 혜원의 작품이 연극으로 변주되기도 하였고, 그를 소재로 한 소설과 드라마, 영화가 나오는 등 대중적인 인기도 끌고 있다.

 

※이 글은 오주석 지음,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2017, 푸른역사)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10. 1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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