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7-백제의 중국 동부 지배1 본문
<백제의 중국 동부 해안 진출도>
1. 들어가며
백제가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에 진출해서 그 지역을 지배한 사실은 『송서宋書』, 『남제서南齊書』, 『양서梁書』,
『남사南史』, 『북제서北齊書』, 『통전通典』,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의 중국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도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던 시기의 진晉나라 역사서인 『진서晉書』를 포함한 북조北朝 계통의 역사서와
한국의 『삼국사기』 등에는 그러한 사실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해서는 이미 몇몇 학자들이 논의한 바가 있다.
그런데도 열국시대의 역사를 복원하는 데 이 문제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므로
다시 한 번 이를 검토해보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선학들이 발굴한 자료와 연구 내용을 재구성하고 이를 보완하는 작업인 것이다.
일찍이 조선 영조시대 학자 신경준申景濬(1712~1781년)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권14, 「여지고輿地考」 2에서
한국과 중국의 사료에 근거하여 백제가 한때 요서와 월주越州 땅을 차지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국의 사서들에서 그러한 기록을 발견할 수 없는 것은 그에 관한 기록을 빠뜨렸기 때문일 것이라 했다.
신채호申采浩(1880~1936년)도 중국 사료에 근거하여 백제가 요서·산동·강소·절강 등을 차지했을 것으로 보았고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 정인보鄭寅普(1893~1950년)도 백제의 중국 진출 사실을 인정했다(『조선사연구』 하).
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한 사실은 북한 학자 김세익이 1967년 『력사과학』에 한 편의 학술논문을 제출하면서
치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는 「중국 료서지방에 있었던 백제의 군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중국의 『송서』, 『남제서』, 『양서』, 『남사』,
『통전通典』 등에 기록된 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한 내용과 이와 연관된 한국과 중국의 여러 문헌 기록,
그 당시 백제의 국력 및 주변 여러 나라의 정세 등을 고찰하고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하여 그곳을 지배했음을 확인했다.
대한민국의 김상기金庠基 (1901~1977년)도 1967년 『백산학보白山學報』 제3호에 「백제의 요서경략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중국 문헌에 보이는 백제의 요서 진출에 관한 기록을 상세하게 검토하여 그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김세익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그 후 재미사학자 방선주方善柱(1933년~ )는 1971년 「백제군의 화북華北 진출과 그 배경」(『백산학보』 제11호)에서
김세익과 김상기의 논리를 더욱 발전시켜 백제가 진출했던 지역은 요서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남쪽으로 산동성과 강소성에 이르렀다고 보았다.
이렇게 백제가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에 진출하여 그곳을 지배했다는 사실은 당시 백제의 국력을 알게 해주며,
백제가 해양 활동을 활발히 한 국가였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황하 중류 유역과는 구별되는 문화권으로 한반도 및 만주와 밀접한 문화 교류가
있었으며, 그곳에 거주했던 사람들은 황하 중류 유역의 거주민들인 제하족諸夏族에 의해 동이東夷라 불렸다.
그리고 서한 무제는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반대하고 서한으로 이주한 예군 남려 등 28만 명을 받아들여
오늘날 발해만 서부 연안 창주滄州지구에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하여 그곳에 거주하도록 했다.
따라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는 한민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백제의 중국 동부 해안 지역 진출이 쉬웠던 것이다.
또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 뒤에는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732~781년) 일가가
산동성 지역에서 치청번진淄靑藩鎭을 경영하면서 당唐 황실에 대항했다.
이런 활동을 가능하게 했던 것도 그 전에 백제가 이 지역에 진출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백제의 중국 동부 해안 지역 진출은 단순히 백제의 대외진출이라는 점에서만이 아니라
한민족과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의 관계를 깊이 이해하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2. 백제의 중국 진출 사료 검토
송나라는 동진東晉(317~419년)의 뒤를 이어 420년부터 478년까지 중국 남부에 있었던
남북조南北朝시대(386~589년)의 남조 왕조이다. 중국을 통일하여 삼국분립시대를 마감한 서진(266~316년)이
남흉노의 전조前趙에게 멸망한 뒤 서진 세력이 남쪽으로 이동하여 동진이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 북부는 흉노·갈·선비·저·강 등의 5개 이민족(오호)들이 세운 16개 왕조가
교체를 거듭하면서 혼란이 계속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304~439년)였다.
그 뒤를 이어 남북조시대가 오고, 선비족이 세운 북위北魏(386~534년)가 중국 북부 지역을 통일했다.
남부 지역에서는 송宋·제齊·양梁·진陳의 네 왕조가 차례로 교체되었다.
그러므로 동진시대부터 남북조시대에 이르기까지 북방은 이민족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한족漢族의 남조는 중국의 남부에서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1) 송서
송서는 남조의 네 왕조 중 송나라(420~479년) 사서이며, 송나라 상서령과 제나라 높은 관직을 지냈던
심약沈約(441~513년)이 지었기 때문에 신빙성이 높은 사서로 평가받고 있다.
『송서』 <백제전>에
"·······, 그 후 고(구)려는 요동을 침략하여 소유하게 되었고 백제는 요서를 침략하여 소유하게 되었는데,
백제가 다스리는 곳을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백제는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고 있는 시기에 진평군 진평현을 다스리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2)남제서
남조의 제나라는 중국 북부에 있었던 제나라인 북제北齊(550~577년)와 구별하기 위해 남제南齊(479~502년)라 부른다.
송나라의 뒤를 이은 제나라의 역사서 『남제서』에는 백제의 요서 진출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 안의 <백제전>은 현재 일부만 남아 있을 뿐이고 첫머리 일부는 없어져 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없어진 부분에 그런 기록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송서』 편찬자인 심약은 남제에서도 관직에 있었으므로 남제에서 백제의 중국 진출을 몰랐을 리 없다.
게다가 남제의 역사를 전한 『자치통감資治通鑑』 「제기齊紀」에는 백제의 요서 진출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남제서』 <백제전> 부분에는 백제가 중국에서 활동했음을 간접적으로 전해주는 내용이 있다.
백제가 남제에 보낸 국서의 내용 가운데
"이해(490년)에 (북)위 오랑캐가 또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경계에 들어가니
모대牟大가 장군 사법명沙法名·찬수류贊首流·해례곤解禮昆·목간나木干那 등을 파견하여······그들을 크게 격파했다."
위 기록에서 모대는 백제의 동성왕이고, 언급된 백제 장군들의 성 가운데 사씨·해씨·목씨는 백제의 대귀족이었다.
이로 보아 위의 기록은 중국 북방에 있었던 북위와 백제 사이에 있었던 전쟁에 관한 기록임이 분명하다.
위 기록에 이어서 사법명을 비롯한 공로자들에게 표창으로 관작을 제수했다고 말하고,
남제에서도 이들에게 관작을 내려줄 것을 요청하고 있다.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보이지만 내용이 매우 간략하다.
"(동성왕) 10년에 위나라가 군사를 보내어 쳐들어왔으나 우리에게 패배했다."
동성왕 10년은 488년으로 앞에 나온 『남제서』 <백제전>에 보이는 연대인 490년과는 2년의 차이를 보여준다.
여기서 『남제서』 <백제전>에 실린 국서의 내용을 보면 백제와 북위의 전쟁은 여러 해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단 한 번의 전쟁 기록만 실려 있으므로
백제와 북위는 488년과 490년 전후에 걸쳐 전쟁을 벌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남제서』 「백제전」에 실린 백제와 북위의 전쟁 기록은 백제가 중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남제서』는 비록 백제의 요서 진출을 직접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3)양서
남제의 뒤를 이은 양나라(502~557년)의 역사서인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해 『송서』보다 더 자세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나라는 본래 (고)구려와 더불어 요동 동쪽에 있었는데, 진晉나라 때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소유했고,
백제 또한 요서·진평 두 군의 땅에 웅거하면서 소유하여 스스로 백제의 군을 설치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중국 진晉나라(서진 266~316, 동진 317~419년) 때 고구려는 이미 요동을 차지하고 있었고,
백제 또한 요서군과 진평군을 차지하여 그곳에 백제군을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것은 진시대 이전임을 알 수 있다.
4)남사
중국 남조의 역사서인 『남사』 <백제전>에는 『양서』 <백제전> 기록과 똑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렇게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는 것은 백제가 요서를 차지했다는 것이 사실로 인정했음을 알게 해준다.
『송서』, 『남제서』, 『양서』 등의 남조 역사서들을 보면,
그들은 백제와 자주 사신 왕래가 있었고 비교적 긴밀한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에 관한 소식을 비교적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밖에도 당唐시대에 편찬된 『통전』 <백제>조에도
"진시대에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침략하여 소유했는데, 백제 또한 요서·진평 두 군에 웅거했다."고 하여
『송서』와 『양서』의 기록을 따르고 있으며,
이와 같은 기록은 『자치통감』, 『문헌통고』, 『계동록啓東錄』 등의 후세 역사서들에서도 보인다.
5)진서
백제가 진출했던 지역과 거리가 먼 곳에 있었던
남조 역사서에는 백제의 중국 동부 진출에 대한 사실이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백제가 진출했던 지역에 있었던 진나라나 북위 등 중국 북부 나라들의 역사서에는 이에 관한 기록을 볼 수가 없다.
『진서晉書』 「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마한전>과 <진한전>이 있을 뿐 <백제전>은 없다.
『진서』의 본기本紀에 해당하는 「제기帝紀」에는 백제와 사신 왕래를 했던 기록이 있다.
이로 보아 진나라에서는 백제에 대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을 것인데도 <백제전>을 의도적으로 빼버린 것이 아닐까?
하지만 다음과 같은 백제의 중국 진출을 알 수 있는 간접적인 기록들은 발견할 수 있다.
372년 『진서』 기록에 진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백제왕 여구餘句(근초고왕)를 진동장군으로 삼고 낙랑태수를
거느리도록 했다는 것은 당시에 백제가 낙랑군 지역인 오늘날 난하 서부 지역을 다스리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진서』 <재기載記>에 모용황이 세운 전연前燕(337~370년)의 접경에 있었던
강한 적대세력은 고구려·백제 및 우문宇文·단부段部 등이라는 기록에서
백제는 중국 북부의 모용씨와 가까운 지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 <진기>에는 346년 녹산에 있던 부여가 백제의 침략을 받아 서쪽으로 이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부여는 두 곳에 있었는데 그 중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던 부여를
당시 난하 유역에 있었던 백제가 공격했다는 것을 말한다.
이로써 백제는 고대의 요서, 즉 오늘날 난하 유역에 영토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6)위서
남북조시대 북위의 역사서 『위서魏書』에 <백제전>이 있으나 백제의 중국 진출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더욱이 『남제서』 <백제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 확인된 백제와 북위의 전쟁에 대해서도 한마디 언급도 없다.
이것은 백제의 중국 진출이나 북위가 백제에게 패한 전쟁은 북위로서는 명예롭지 못한 사건이므로
이와 같이 북위에 불리한 내용을 일부러 제외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런『위서』에서도 백제가 중국에 진출해 있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기록을 찾을 수 있다.
<물길勿吉전>에 물길이 백제와 함께 고구려를 치려고 하는데 그것이 옳은지 아닌지를
사신을 보내 북위의 의견을 묻고 있는 내용이 있다.
당시 물길의 위치는 고구려의 북쪽으로 오늘날 연해주 지역이었다.
물길이 백제와 연합하여 치려는 지역은 전략적으로 가치가 있는 고구려 서부이거나 발해 북쪽 연안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물길이 연합하려는 백제 군대는 한반도 남부가 아닌
고구려 서쪽의 요서 지역에 있는 백제 영토의 군대라고 봐야 할 것이다.
7)북제서
북위가 분열하여 일어난 북제北齊(550~577년)의 역사서인 『북제서北齊書』 <후주기後主紀>에도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음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기록이 있다.
"(571년) 봄 정월 ······ 백제왕 여창餘昌(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도독都督·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삼았다."는 것은
북제가 백제의 위덕왕에게 동청주의 군사와 행정의 대권을 맡겼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이런 관직은 중국 영역 안의 관직으로서 영역 밖에서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동청주는 중국 안에서 찾아야 하는데,
그곳은 바로 오늘날 산동성 동남부의 해로의 요충지인 청도시靑島市 지역이다.
이런 중요한 지역의 문무 대권을 백제왕이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백제가 해상활동을 활발하게 했음을 뜻하고,
그 이전부터 중국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북제는 그러한 현실 상황을 인정했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북조의 역사서들은 남조의 역사서들처럼 백제의 중국 진출을 직접 말하지는 않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시사하는 간접적인 기록은 여러 곳에서 확인된다.
이러한 남조와 북조 역사서들의 기록을 종합해 볼 때
백제의 중국 진출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에 올릴 예정인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8-백제의 중국 동부 지배2'에서 계속!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11. 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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