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8-백제의 중국 동부 지배2 본문
3. 백제의 중국 진출지의 지리적 위치
『송서』 <백제전>에 기록된 백제 진출지인 요서군은 과연 어느 시대의 요서군이었을까? 이 요서군을 오늘날의 요서 지역으로 단정할 수는 없는데, 그것은 중국 역사상 행정구역은 여러 번에 걸쳐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양서』 <백제전>에는 백제가 진晉시대에 요서·진평 두 군을 소유하여 스스로 백제의 군을 설치했다고 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백제가 진출했던 지역은 진시대의 요서군과 진평군이었다는 것이 된다. 하지만 『진서』 <지리지>에 요서군은 보이지만 진평군은 보이지 않는다. 진평군은 다른 이름이 잘못 기록된 듯하다.
그럼 먼저 요서군에 관한 기록부터 보자. "요서군은 진秦제국에서 설치했는데, 3개의 현을 거느린다."고 말하고는 양락陽樂·비여肥如·해양海陽 등의 현이 있다고만 했을 뿐 자세한 정보는 제공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기록에 따르면 진晉시대의 요서군은 진秦제국에서 설치한 것이므로 진제국시대부터 진나라에 이르기까지 위치가 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위서』 「지형지地形志」에는 요서군에 대해 『진서』 <지리지>와 마찬가지로 진제국에서 설치했으며 양락·비여·해양의 3개 현을 거느린다고 말하고는, 비여현은 양한兩漢시대부터 진晉시대에 이르기까지 요서군에 속했으며, 고죽산사孤竹山祠·갈석碣石·무왕사武王祠·영지성令支城·황산黃山·유하濡河가 있다고 했다.
위 내용에서 고죽산사·갈석·유하 등은 위치가 이미 확인되었다. 고죽산사는 고죽국의 사당인데 고죽국은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었고, 갈석은 난하 동부 유역에 있는 산의 이름이며, 유하는 일반적으로 유수濡水라 불렸는데 난하의 옛날 이름이었다. 이로 보아 진晉시대의 요서군은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진시대의 요서군이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었다는 사실은 『한서』 <지리지>에서도 확인된다. 요서군은 진제국에서 설치했는데 14개의 현이 있다. 해양현에는 용선수龍鮮水가 있고 동쪽에서 봉대수封大水로 들어가고, 신안평新安平에는 이수夷水가 있으며 동쪽에서 새외塞外로 들어가며, 영지令支현에는 고죽성孤竹城이 있고, 비여현에는 현수玄水가 있어 동쪽에서 유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위 내용에서 해양현의 용선수는 동쪽으로 흐르며, 비여현의 현수는 동쪽으로 유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수경주水經注』 「유수」조에 따르면 용선수는 유수의 지류였고, 용선수와 현수가 있었던 해양현과 비여현은 유수 즉 오늘날 난하의 서부 유역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안평현에 있는 이수가 새(국경에 설치된 요새)외로 들어간다고 한 것은 서한시대의 요서군은 국경지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영지현의 고죽성은 고죽국의 성으로서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서한부터 진晉나라에 이르는 시기의 요서군은 오늘날 난하 유역에 있었으며 그 대부분 지역은 오늘날 난하 서부 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제국과 서한시대에 난하 하류 유역에는 요동군이 있었는데 그 동쪽 경계는 갈석산이었다. 그리고 요동군의 서북쪽에 요서군이 있었다. 그런데 진晉나라의 요서군 비여현에 갈석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서한부터 진晉에 이르는 시기에 요서군의 위치는 변화가 없었지만 그 범위는 다소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백제가 진출했던 요서군은 오늘날 난하 서부 유역이었다. 그러나 진평군에 대해서는 그 자체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를 보완하는 기록을 『통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당唐시대에 두우杜佑(735~812년)가 편찬한 『통전』 <백제조>에는 진시대에 백제가 요서·진평 두 군에 웅거했다고 하면서 그 위치에 대한 주석으로 오늘날 유성柳城과 안평安平 사이라 했다. 그리고 『문헌통고』에서도 이를 받아 그 위치를 당시대의 유성과 북평 사이라 했다. 그러므로 당시대의 유성·안평·북평의 위치를 확인하면 될 것이다.
『통전』 <주군州郡조>와 『신당서』 <지리지>의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유성군은 오늘날 요하에서 서쪽 480리 떨어져 있었고, 동쪽에 갈석산이 있었으므로 그 위치가 오늘날 난하 유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북평군은 유성군에서 서쪽으로 수백 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진출 지역은 오늘날 난하 유역에서 서쪽으로 하북성 중부에 이르는 지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송서』와 『양서』 <백제전>에 요서군과 함께 언급된 진평군은 당시의 행정구역에 보이지 않는데 어느 곳을 의미하는 것일까? 『송서』 「지리지」 <광주군廣州郡조>를 보면 울림군에 진평현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곳은 오늘날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옹녕현邕寧縣으로서 옹녕현에는 현재 백제향百濟鄕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에 백제향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는 곳으로 보아 『송서』와 『양서』 <백제전>에 보이는 진평군은 『송서』 「지리지」에 보이는 울림군 진평현을 잘못 기록했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를 따른다면 당시 백제는 북쪽의 난하 서부 유역과 남쪽의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 지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여기서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중국 고대의 행정구역이었던 요서군과 요동군은 오늘날 요서나 요동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는 점이다. 요동군은 오늘날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고 요서군은 그 서북쪽에 있었는데, 난하 유역의 서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진시대를 지나 북위시대에도 백제는 중국에서 활동을 계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제서』 <백제전>에는 백제가 북위와 싸워 승리한 사실과, 그 전쟁에 참가했던 장수들에게 공로로 중국의 관직을 제수했는데 이를 제나라에서 승인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이 내용에는 광양廣陽군·광릉廣陵군·청하淸河군·성양城陽군 등의 지명이 있다.
『위서』 「지형지」에는 조선朝鮮·대방帶方·낙랑군樂良郡 등의 이름이 나오는데, 조선·대방·낙랑은 원래 서한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군현(한사군)의 이름으로서 이 시기에는 이들 군현이 고구려에게 이미 축출(미천왕 16년 315년 한사군 정복)된 뒤였다. 따라서 이들은 원래의 위치에 있지 않았고 그 유민들을 정착시키기 위해 오늘날 난하 서부 유역에 조성한 군현이었다. 그리고 광양군은 오늘날 하북성 융화隆化 지역으로서 난하 상류 유역, 광릉군은 오늘날 강소성 양주揚州 지역, 청하군은 오늘날 산동성 익도益都 지역, 성양군은 진晉시대의 성양군 지역인 오늘날 산동성 거현莒縣 지역으로 바다와 가까운 곳이다.
이렇게 보면 남북조시대에 백제가 중국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던 지역은 오늘날 하북성 난하 유역에서 동부해안을 따라 산동성을 거쳐 강소성의 남부까지 이르렀으며, 남쪽의 광서장족자치구 울림군 지역에도 근거지를 마련했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백제가 중국에서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북위 멸망 후 북제北齊시대(550~577년)까지도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제서』 <후주기後主紀>와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17년>조에 북제의 후주後主가 백제의 위덕왕을 사지절使持節·도독都督·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북제서』 571년, 『삼국사기』 570년). 즉 백제 위덕왕이 동청주의 문무 대관을 장악한 것을 북제가 인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동청주가 오늘날 어느 곳인가? 『북제서』에는 <지리지>가 없다. 그런데 북위가 분열하여 534년에 동위東魏(534~550년), 535년에 서위西魏(535~556년)가 섰는데 550년에 동위는 북제(550~577년)로 서위는 북주北周(557~581년)라 나라 이름을 고쳤다. 따라서 북제는 북위의 행정구역 이름을 대개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위서』 「지형지」와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의 두 사서에 청주靑州는 동양東陽을 치소治所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 두 청주는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독사방여기요』에 동청주는 청주를 나누어 설치했던 곳으로 그 치소는 불기성不其城으로서 즉묵卽墨에서 서남 방향으로 50리 지점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즉묵은 지금도 그 지명을 그대로 가지고 산동성에 있으며, 그 서남쪽에 불기성이 있었다. 그러므로 동청주는 오늘날 교주만膠州灣 연안으로 광역의 청도靑島시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이전의 북위시대에 백제가 지배했던 지역에 포함된다. 이 지역에 대한 백제의 지배는 계속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백제는 북쪽으로는 오늘날 난하 유역부터 남쪽으로는 강소성의 남부에 이르는 지역에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러한 사실은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실린 '상태사시중장上太師侍中狀'에서도 확인된다.
"고(구)려와 백제는 전성했을 때 강한 군사가 백만 명이어서 남쪽으로는 오吳와 월越을 침공하고 북쪽으로는 (중국 북부의) 유幽·연燕·제齊·노魯 등의 지역을 흔들어 중국의 큰 두통이 되었으며, 수隋 황제가 세력을 잃은 것은 저 요동(오늘날 요서)을 정벌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백제가 침공했다고 말한 북쪽의 유·연·제·노는 오늘날 난하 유역부터 산동성에 이르는 지역이며, 오나라는 강소성 지역에 있었고 월나라는 절강성 지역에 있었으므로 월나라가 있었던 절강성 지역을 제외하면 확인된 백제의 중국 지배 영역과 일치한다. 최치원이 쓴 이 글은 당나라의 태사시중에게 쓴 편지로서 백제의 중국 침공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그런 내용을 감히 적을 수 없었을 것이다.
4. 백제의 중국 진출 시기와 배경
이제부터는 언제부터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으며 그 역사적 배경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보자.
『송서』와 『양서』
<백제전>에 백제는 진晉시대에 이미 요서 지역에 진출해 있었는데 그 시기는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한 시기와 같은 때라고 했다. 그러므로 백제가 요서 지역에 진출한 시기는 진시대보다 앞섰다는 뜻이 된다. 즉 진시대보다 앞선 시기로서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했던 시기여야 하는 것이다.
고구려는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건국되었으므로 백제의 요서 지역 진출 시기는 고구려 건국 당시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고대에는 지금과 달리 일반적 의미의 요동은 오늘날 요서 지역이었고, 행정구역인 요동군은 오늘날 난하 하류 유역에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 요서 지역에 한사군이 설치된 뒤 일반적 의미의 요동은 오늘날 요동 지역으로 이동했으나 요동군은 난하 유역에 그대로 있었다.
『송서』와 『양서』가 편찬된 시기는 한사군이 설치된 이후에 해당하므로 오늘날 요동이 일반적 의미의 요동으로 불리고 있었다. 그곳은 고구려 건국지이므로 그곳에는 처음부터 고구려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므로 『송서』와 『양서』 <백제전>에서 말한 고구려가 진출했던 요동은 일반적 의미의 요동이 아니라 요동군을 말한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는 어느 시기에 요동군 지역에 진출했을까? 먼저 이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고구려가 요동에 진출한 기록 가운데 가장 이른 연대는 49년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조에 모본왕 2년(49년) 한나라의 우북평右北平·어양漁陽·상곡上谷·태원太原을 습격했으나 요동태수와 곧 다시 화친했다는 기록이 있다. 같은 내용이 『후한서』 「동이열전」에도 있다. 우북평·어양·상곡은 서한과 동한시대에 동북의 국경지역에 위치했던 군 이름이며, 태원군의 위치는 이들보다 훨씬 서쪽의 황하 유역으로 오늘날 산서성 태원시 지역이었다.
당시 요동군은 태원군보다는 훨씬 동쪽에 있었으므로 모본왕 때 고구려는 요동군을 넘어 그보다 훨씬 서쪽까지 진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위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는 그 지역을 계속 차지하고 있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후 고구려 태조왕시대에 고구려가 여러 차례 요동군을 쳐들어간 기록이 보인다. 105년 요동군에 쳐들어가 여섯 현을 빼앗았으나 요동태수에게 패했으며, 121년에는 동한의 유주자사, 현도태수, 요동태수가 고구려로 쳐들어왔는데 이들과 싸우면서 현도와 요동 두 군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동한군을 죽이거나 포로로 붙잡았다. 146년 고구려는 요동군의 서안평현을 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붙잡았다.
이렇게 고구려는 49년부터 이미 요동 지역에 진출하기 시작하여 150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요동군을 습격하거나 요동군 지역에서 전쟁을 했다. 이러한 고구려와 중국 사이의 전쟁은 계속되어 고구려 미천왕 때인 313년부터 315년까지 난하 동쪽에 있던 현도군과 낙랑군을 난하 서쪽으로 완전히 축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기에 백제도 요서 지역에 진출했을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너무 막연하고 근거가 빈약하다.그러므로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음을 알게 하는 좀 더 분명한 근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
백제가 요서에 진출했음을 알게 하는 분명한 근거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보인다. 즉 백제 고이왕 13년인 246년 중국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낙랑태수 유무, 삭방태수 왕준과 더불어 고구려를 침략했는데, 백제는 이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으로 하여금 낙랑(군)의 변경을 습격하고 그곳 주민을 빼앗았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낙랑군은 오늘날 요서 서부 변경인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다. 진충은 북경 근처 난하 유역에서 전쟁을 했던 것이다.
위나라의 고구려 침략으로 그 지역이 비게 되자 진충 장군이 바로 군사를 움직인 것으로 보아 진충 장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바다를 건너갔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백제는 이전부터 난하 유역에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백제 책계왕 13년 298년 한漢이 맥인貊人들과 함께 쳐들어와 왕이 막다가 전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한은 한족 즉 중국인들이며, 맥인은 중국이 오늘날 요서 지역에 한사군을 설치하고 그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편입시킬 때 동쪽으로 이주하지 못한 채 그 지역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맥족을 말한 것이다. 고조선시대에 맥족은 난하 유역에 거주하고 있었으나, 요서 지역에 위만조선이 서고 이어서 한사군이 설치되자 그 일부가 동쪽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맥족의 일부는 이 시기에 난하 유역이나 그곳에서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족이 오늘날 난하 유역에 살고 있었던 맥인들을 동원한 것으로 보아 이 전쟁은 난하 유역에서 있었던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백제 분서왕 7년 304년에 군사를 보내 낙랑의 서부 현을 공격하였고, 그해 10월에는 낙랑태수가 보낸 자객에게 왕이 해를 입어 돌아가셨다는 기록이 보인다. 현은 군에 속해 있었던 행정구역이고 태수는 군을 다스리는 지방관리였으므로 이 낙랑은 낙랑군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낙랑군은 오늘날 난하 동부 유역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전쟁 또한 난하 유역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들은 백제가 246년 이전에 이미 오늘날 난하 유역에 진출했음을 알게 해준다. 백제가 진출했던 난하 유역은 요서군 지역이었다.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이미 요동 지역에 진출하여 중국과 승패가 반복되는 싸움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백제는 언제까지 요서군 지역을 포함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었을까? 앞에서 확인한 것처럼 이에 관한 가장 늦은 시기의 기록은 북제 후주가 백제 위덕왕을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로 삼았다는 『북제서』 <후주기後主紀>의 571년과 『삼국사기』 「백제본기」 <위덕왕 17년>조의 570년이다.
북제의 후주 위緯가 재위했던 연대는 565년부터 북주에게 멸망당한 577년까지이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은 581년 북주 정권은 외척인 양견에게 넘어가 수隋나라가 건국되었다. 수나라는 589년 남쪽의 진陳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그러므로 백제 위덕왕이 북제 후주에게서 관작을 제수받은 것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불과 20여 년 전이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해볼 때 백제가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한 시기는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시기이거나 그보다 불과 몇 년 앞선 시기였던 588년 무렵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과 같이 백제는 246년 이전부터 588년 무렵까지 약 350년 동안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지배했다. 그 영역은 초기에는 오늘날 난하 유역부터 하북성 중부까지였지만 그 영역을 점차 남쪽으로 확대하여 산동성을 포괄하고 강소성 남부에까지 이르렀다. 최치원의 글에 따르면 절강성도 백제의 지배권에 들어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나 구체적인 사료가 확인되지 않는다. 그리고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 지역에도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남는다.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백제가 거대한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을 지배했다는 것이 과연 가능했을까? 그리고 백제가 그곳에 진출한 것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당시 중국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백제의 진충 장군이 낙랑을 쳐들어갔던 246년은 중국의 삼국시대(220~266년) 말기였다. 이보다 앞서 중국은 동한 말에 황건농민봉기를 토벌한다는 명분으로 여러 지역에서 군웅이 할거했는데, 그런 세력 가운데 북방에서는 220년 조조 아들인 조비가 위魏를, 남서부에서는 221년 유비가 촉한蜀漢을, 남동부에서는 229년 손건이 오吳를 건국하여 삼국시대가 되었다.
이 시기에 중국 동북부에서는 동한 말부터 공손탁·공손강·공손연 3대가 요동 지역(오늘날 난하 유역)을 장악하고 독자세력으로 할거하고 있었다. 이 세력은 238년 위나라의 사마의에게 멸망했지만, 이 사건은 당시에 요동 지역이 위나라에 완전히 장악되지 않았음을 알게 해준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246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그 후방이 비어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백제의 좌장 진충이 낙랑군을 쳤던 것이다.
266년에는 사마염이 위의 원제를 폐하고 선양의 형식으로 즉위하여 진晉나라를 건국했다. 이에 앞서 263년 촉한은 위나라에게 멸망했다. 진나라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중국을 통일했다. 그러나 진나라는 내부의 정권다툼과 기근 때문에 오래가지 못하고 316년에 멸망했다. 이를 이후의 동진東晉과 구별하기 위해 서진西晉(266~316년)이라 부른다. 서진이 멸망한 뒤 중국 북부 지역은 흉노·갈·선비·저·강 등 이민족의 활동무대로 변했다. 120여 년 동안 이들이 세운 나라는 16개가 넘는다. 중국인들은 이를 '5호胡 16국國'이라 부른다.
한편 서진이 멸망하자 진나라 귀족들은 남쪽으로 이주하여 317년 진조晉朝를 재건했는데 이것이 동진이다. 동진은 남방에서 안일한 생활을 계속하다가 420년 유유에게 정권을 빼앗겨 송宋나라가 건국되었다. 송나라가 건국된 뒤 중국 남부에서는 170여 년 동안에 제齊·양梁·진陳 등의 나라가 교체되어 약체 왕조를 벗어나지 못했다.
한편 북방에서는 386년 선비족의 탁발씨가 북위北魏를 건국하여 439년에는 북방을 통일했다. 이 시기에 남방에서는 송·제·양·진 등의 나라가 교체되었는데 이 시대를 남북조南北朝시대(386~589년)라 부른다. 그 후 북위가 분열되어 534년 동위, 535년 서위가 건국되었는데 이들은 나라 이름을 북제와 북주로 고쳤다. 577년 북제는 북주에게 멸망했고, 581년에는 북주 외척인 양견이 제위에 올라 수隋나라를 건국했다. 수나라는 589년 남조의 진을 멸망시켜 중국을 통일했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여 활동했던 시기는 바로 이러한 중국의 혼란 시대였다. 한족들의 세력은 지극히 약화되어 중국대륙을 지배할 능력이 없었고 그때까지 중국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북방 지역을 여러 이민족들에게 유린되어 있었다. 이 시기에 중국 북방을 유린했던 흉노·갈·선비·저·강 등은 동아시아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 종족들로서 고구려나 백제보다 강한 세력은 결코 아니었다. 이러한 당시 상황을 놓고 보면 이 시기에 고구려와 백제가 중국에 진출한 것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그런데 백제가 바다 건너 중국의 동부 지역에 진출해야 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지금까지는 백제가 고구려와 패권을 다투면서 남하하는 고구려 세력을 배후에서 견제하려는 목적에서였을 것으로 보아왔다. 그러한 견해에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백제와 고구려의 패권다툼만을 너무 확대 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가 나빠진 것은 고구려 고국원왕 때 전쟁하면서부터였다. 그 전에는 백제와 고구려는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은 백제 개로왕이 중국 북위에 보낸 국서의 내용에서 확인된다. 그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를 침략하기 전까지는 백제와 고구려의 사이가 매우 좋았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가 백제를 친 것은 고국원왕 39년 369년이었다.
백제는 이보다 훨씬 전인 246년 이전부터 난하 유역에 진출해 있었다. 다시 말하면 백제가 난하 유역에 진출했던 시기는 고구려와 우의가 돈독했던 때였다. 그러므로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백제 고이왕 13년 246년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쳤을 때 백제의 진충 장군은 북위의 낙랑군을 공격했다. 백제가 낙랑군을 친 것은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는 동시에 고구려를 돕기 위한 목적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초기에 백제가 요서(오늘날 난하 서부 유역)에 진출하고 고구려가 요동(오늘날 난하 유역)에 진출했던 것은, 고조선의 옛 땅이었던 오늘날 요서를 빼앗아 간 중국을 응징하고 그곳을 되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고구려는 오늘날 요동에서 건국하기 전 고조선시대에는 오늘날 요서 지역에 있었으므로 그곳은 고조선의 옛 땅이기도 했다. 부여도 오늘날 요동으로 이주하기 전 고조선시대에는 난하 상류 유역에 있었으므로 부여의 후예로 자처했던 백제로서는 조상들의 옛 땅을 찾는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 진출 초기에는 백제와 고구려 사이에 협력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369년에 백제와 고구려가 전쟁을 치른 뒤 두 나라 사이의 상황은 바뀌었을 것이다. 중국에서의 두 나라 관계도 서로 견제하는 상황이 되었을 것이다. 백제 개로왕이 북위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가 백제와 맺었던 화친을 먼저 깼음을 논한 뒤 북위에게 함께 고구려를 치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은 이를 알게 한다.
그런데 백제의 중국 요서 지역 진출에서 공로를 세운 백제의 장수와 관리들에게 백제가 관직을 제수했음은 물론, 남제에서도 관직을 제수받은 것으로 『남제서』 <백제전>에 기록되어 있다. 남제에서 이들에게 관직을 제수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당시 북조는 이민족들의 정권이었고 남조는 한족 정권이었다. 그런데 자신들만의 힘으로 북방을 회복할 능력이 없었던 남조로서는 북방 회복에 백제의 힘을 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백제로서도 한족 정권인 남조의 관직을 제수받는 것이 그 지역 토착민을 지배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상호 이해관계는 백제와 남조를 매우 친밀한 관계로 만들었고 백제와 북조는 소원한 관계가 되었을 것이다. 백제가 남조와는 잦은 사신 왕례와 무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 북조와는 그런 활동을 가진 기록이 별로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백제가 중국에서 활동한 지역은 주로 북조의 영역에 속한 지역이었으므로, 이러한 상황도 북조와 관계를 소원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북조 역사서에 백제의 중국 진출에 관한 기록이 빠진 것도 이러한 상황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마침내 북조도 백제의 중국 진출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북제가 백제 위덕왕을 사지절·도독·동청주자사로 제수한 것은 그러한 사실을 말해준다.
5. 마치며
백제는 일찍부터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 진출하여 그곳을 지배했다. 백제가 중국에 처음으로 진출했던 지역은 요서군과 진평군 지역이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는데, 오늘날 난하 유역에서 서남으로 하북성 중부의 안평 지역까지와 광서장족자치구의 옹녕현 지역이었다.
난하 유역에서 하북성 중부까지를 차지하고 기반을 닦은 백제는 그 세력을 점차 남쪽으로 확장하여 오늘날 산동성 지역을 거쳐 강소성 남부 양주 지역까지를 장악했다. 백제는 오늘날 절강성까지 진출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분명한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어느 시기까지 광서장족자치구 옹녕현 지역에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도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백제가 차지하고 있었던 이 지역은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으로 한반도 남부에 있었던 본국에서 관리와 연락이 쉬운 지역이었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한 시기는 246년 이전으로 추정되는데, 이보다 앞서 고구려는 이미 당시의 요동(오늘날 난하 유역) 지역에 진출해 있었다. 백제는 589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바로 전까지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을 지배했다. 이러한 고구려의 요동 진출과 백제의 동부 해안 지역 진출은 고조선의 옛 땅을 수복하고 지난날 고조선의 영토를 침략한 중국을 응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고조선시대에는 고구려와 부여가 난하 유역에 있었으므로 이는 고구려의 옛 땅과 백제 왕실 조상들의 옛 땅을 수복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백제가 중국에 진출했던 시기는 중국이 위·촉한·오의 세 나라로 분열되었던 시기인데, 뒤에 한때 진晉나라에 의한 통일 시기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고 중국 북방은 이민족들의 정권이 흥망을 거듭하면서 혼란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은 백제가 중국에 진출하여 그 지역을 계속 지배하는 데 유리한 조건을 제공했다.
당시에 한족 정권은 중국 남부에서 남조를 형성하고 있었으나 세력이 매우 약했다. 이들은 백제의 힘을 빌어 북방을 수복해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들은 백제와 화친을 유지하면서 중국 동부 해안 지역에서 활동하는 백제 관리와 장수들에게 사지절·도독·자사·장군·태수 등의 중국 관직을 제수했다. 백제로서도 그러한 관직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중국의 관직은 현지의 한족들과 토착인들을 지배하는 데 명분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백제가 중국 동부 해안 지역을 지배한 것은 340년이 넘는 오랜 기간이었다. 이 기간 동안 백제와 고구려의 관계에 변화가 있었다. 초기의 백제와 고구려의 화친관계가 무너지고 대립관계로 바뀌면서 중국에 진출한 양국의 세력도 서로 견제하는 관계로 변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백제와 중국은 이 기간 동안 내외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러므로 백제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영역을 계속 지배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지금으로서는 그 영역 변천 과정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그 말기까지 산동성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지배 영역의 변천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앞으로 보완되어야 할 과제다.
산동성을 중심으로 한 중국의 동부 해안 지역에서는 이후 당시대에 고구려 유민 이정기李正己(732~781년) 일가가 치청번진淄靑藩鎭을 형성하고 작은 왕국과 같은 세력으로 55년 동안 당조唐朝에 대항했다. 그리고 치청번진이 멸망한 뒤에는 바로 장보고張保皐(787~846년) 대사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해상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한민족의 활동은 이전에 백제가 이 지역을 지배했던 역사적 기초 위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19. 11. 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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