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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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호생관 최북의 인생과 그림 세계

새샘 2020. 8. 11. 18:14

주객酒客·화사畵史·미치광이(광생狂生)·주광화사酒狂畵史 등으로 불렸던 불행한 천재 칠칠七七이 최북

최북, 풍설야귀인도風雪夜歸人圖(지두화指頭畵), 종이에 담채, 66.3x42.9㎝, 개인(사진 출처-출처자료)

 

최북, 메추라기, 비단에 채색, 24.0x18.3㎝, 고려대 박물관 (사진 출처-출처자료)

 

호생관毫生館 최북崔北(1712~1786?)은 자신을 스스로 못난이로 불렀다.

자신의 이름 가운데 북北 자를 두 글자로 나누어 칠칠七七이도 못난 놈, 곧 '칠칠이'라 부르고 다녔다.

 

 

○칠칠이의 기행

 

그는 그림을 썩 잘 그렸지만, 자신의 한쪽 눈을 스스로 찔러 한쪽 눈을 잃은 당대의 기인奇人 중에 기인이기도 했다.

때문에 화첩을 보고 그림을 그릴 적에는 한쪽에 안경을 걸치고 그렸는데, 안경테는 매번 대장간에서 얻어온 커다란 말발굽이었다.

 

최북은 또 술을 즐겼다. 바람처럼 떠돌아다니기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금강산의 구룡연 폭포에 올라가 너무 즐거워하며 술을 마시고 잔뜩 취해 울고 웃다가, 이윽고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천하의 명인名人 최북은 마땅히 천하의 명산에서 죽으리라!"

그런 뒤 몸을 솟구쳐 못에 뛰어들고 말았다.

다행히 곁에서 구해주는 이가 있어 빠져 죽지는 않았다.

 

술값 대느라 집안의 서책이며 종이·비단을 몽땅 가져다주어 집안의 재산이 날로 줄어들어 가난해지자, 마치 그런 날만을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이 평양에서 동래에서 나그네처럼 떠돌며 그림을 그려 팔았다.

그러자 그가 가는 곳마다 그 지역의 사대부들이 비단을 들고 끊임없이 문을 드나들었다.

 

최북은 자신이 그린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어 흡족한데도 돈을 적게 주기라도 하면, 불같이 화를 내고 욕설을 해대며 그림을 박박 찢어버렸다.

반면에 자신이 그린 그림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도 돈을 후하게 쳐주면, 오히려 껄껄거리면서 그 사람을 문 바깥으로 떠밀고 나선 손가락질을 해대며 '그림 값도 모르는 녀석'이라고 웃었다.

 

이렇듯 칠칠이 최북은 성품이 너무나 오만해서 결코 남을 따르는 일이 없었다.

하루는 왕손이면서 학문이 깊고 당시 예인들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서평군西平君과 백금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었다.

한데 그가 한창 이기려 하자 서평군이 그만 한 수 물러주기를 청했다.

그러자 그가 갑자기 바둑돌을 마구 흩어버리며 두던 손을 거두며 이렇게 말했다

"바둑은 본래 즐기려고 하는 것인데, 무르기를 그치지 않는다면 한 해가 다 가도록 한 판도 둘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다시는 서평군과 바둑을 두지 않았다.

 

한데도 칠칠이의 그림은 날로 세상에 알려져 세간에서 그를 일컬어 '최 산수崔山水'라 칭했다.

하지만 꽃과 풀, 동물, 괴석, 세월의 풍파에 말라죽은 고목 따위를 더 빼어나게 잘 그렸을 뿐더러, 미친듯한 광기로 장난삼아 그린 것도 여느 화가의 재주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훗날 이조판서와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은 이런 최북의 인상을 《최칠칠전崔七七傳》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흔히 칠칠이를 주정뱅이 또는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아가는 호생자쯤으로 생각하거나, 심한 사람은 미치광이라 일컫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언행에는 때로 묘한 깨달음이나 여운 같은 것이 없지 않았다.

 

최북은 자신의 호를 스스로 호생자毫生子라 했다.

그림을 그려 먹고 살아가는 사람이란 뜻으로, '그러니 어쩔 거냐?'라는 다분히 직설적이고 반항기마저 묻어난다.

중인中仁 계급으로 제도권 바깥에서 놀 수 밖에 없는 처지였던 그는 불합리한 신분적 계약을 강요하는 당대 사회 구조에 대한 저항을 숨기지 않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의 재주를 안타깝게 여긴 많은 사람들이 그림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에라도 머리 숙이고 들어가 화원이 되길 바랐으나, 본시 바람처럼 떠돌아다니길 좋아하여 그 어디에도 구속될 수 없는 오만한 성품과 타협할 줄 모르는 자만심으로 결코 머리 숙이는 법이 없었다.

 

때문에 칠칠이는 한묵翰墨[문한文翰과 필묵筆墨이라는 뜻으로, 글을 짓거나 쓰는 것]의 선비화가도 되지 못했으며, 화원 또한 될 수 없었다.

그저 품팔이 환쟁이가 되어 그림을 그리는 족족 내다 팔아 먹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었으니, 그 불같은 성깔에 겪었을 치욕과 한숨을 알만도 한다.

 

이런 그의 모습을 당대 이름난 시인이었던 신광수는 칠칠이를 그의 <설강도雪江圖>에 부치는 시 <설강도가雪江圖歌>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최북매화장안중 崔北賣畵長安中 장안에서 그림 파는 최북을 보소

생애초옥사벽공 生涯草屋四壁空 살림살이란 오막살이에 네 벽은 텅 비어 있네

유리안경목필통 琉璃眼鏡木筆筒 유리 안경 접어 쓰고 나무 필통 끌어내어

폐문종일화산수 閉門終日畵山水 방문을 걸어 닫고 앉아 종일토록 산수화를 그려대네

조매일폭득조반 朝賣一幅得朝飯 아침에 한 폭 팔아 아침밥을 얻어먹고

모매일폭득모반 暮買一幅得暮飯 저녁에 한 폭 팔아 저녁밥을 얻어먹고

 

 

칠칠이의 신변과 주변의 평가

 

최북은 일생 동안 숱한 일화를 남긴 기인이었다.

아마도 그는 조선시대 화가들 가운데 가장 많은 일화를 남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는 것처럼 그의 신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 또한 그리 많지가 않다.

다만 신광하만이 '최칠칠은 체구가 작달막하다'고 했으며, 한결같이 애꾸눈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남공철 또한 '최칠칠은 한쪽 눈을 잃어서 항상 안경알을 하나 걸치고 그림을 그렸다'고 했다.

 

한데 당대의 화가 조희룡은 최북이 한쪽 눈을 잃게 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지체 높은 이가 최북에게 그림을 요청했는데, 그가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지체 높은 이가 그를 겁박했다.

그러자 최북이 분노하여 "남이 나를 저버리느니 차라리 내 눈이 나를 저버리게 하겠다"며,

송곳을 들어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고 말았다.

나이 들어서는 대장간에서 얻어온 말발굽으로 만든 안경을 한쪽 눈에 걸쳤다.

 

이럴 정도이고 보면 그가 그림을 놓고서 벌였을 고집, 자만심, 기개, 불같은 성깔의 숱한 일화가 가히 어떠했을지 짐작이 가고 남는다.

 

그러나 그의 이런 기행을 두고 남공철이나 이규상과 같은 사대부가 보는 눈과, 같은 길을 걷는 화가 조희룡이 보는 시각 사이에는 상당한 상거相距[서로 떨어짐]가 있다.

먼저 사대부들은 그의 천성이 오만하여 남의 비위를 맞추려하지 않았다거나, 성품이 날카로운 칼끝이나 불꽃과도 같아서 조금이라도 어긋남이 있으면 반드시 상대를 욕 보이곤 했다고하여 최북을 보는 시각이 상당히 부정적이었다.

반면, 중인 출신의 화가 조희룡은 최북의 됨됨이가 격앙스럽긴 하지만 웬만해서는 꿈쩍하지 않을 정도로 당당하여 작은 규범에 스스로 구속되는 일이 없었다고 하여 되레 최북의 행동을 굽힐 줄 모르는 자기 소신이라는 긍정적인 시각으로 본 것이다.

 

정약용도 자신의 저서에 최북에 대한 인상을 적었는데, '어느 대감 댁에서 그의 그림을 펼쳐보는데, 그 집의 자제들이 "우린 도무지 그림을 모르겠어..."하고 퉁명스럽게 말하자, 최북이 당장 발끈하여 "그림을 모르다니요? 하면 다른 것은 안다는 말이오?"하고 쏘아붙였다는 것'이다.

 

이처럼 최북의 일화는 굽힐 줄 모르는 기상과 강렬한 개성이 꿈틀거리고 있어서 분명 거기에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존재한다.

특히 어떤 지체 높은 이와의 돌이킬 수 없는 승부(?)에서 한쪽 눈을 잃는 고통조차 뛰어넘는 그의 오만하기까지 한 자부심은 의기에 충만한 한 인간의 통쾌한 모습마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칠칠이의 교유 관계

 

한데 '결코 남을 따르는 법이 없는데다', '날카로운 칼끝이나 불꽃과도 같은', 이런 강렬한 개성의 최북에게 교유 관계가 넓고 두툼했다는 사실은 조금은 뜻밖이다.

더구나 그와 교유 관계를 맺었던 이들이 그저 그렇고 그런 얼굴들이 아니라, 적어도 먹물을 안다는 당대 이름난 사대부들이 망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우선 당대의 이름난 명필인 이광사와 어울려 지내며 서화를 즐겼고, 역시 당대 이름난 시인인 신광수가 그의 그림에 부치는 시까지 지었는가 하면, 당대 재야에서 명성이 높은 학자였던 이익은 최북의 일본 여행에 즈음하여 송별시를 지어주었고, 당대 예림의 총수인 강세황이 친구들과 사노회四老會를 결성하였는데, 이때 <아집도雅集圖>(문인들의 친목을 위해 결성한 사적 모임의 모습을 그린 그림)를 다름 아닌 최북이 그렸다.

 

미천한 신분의 최북이 이렇듯 당대 상류 사회의 인사들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가 화가였기 때문이다.

그림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통해서 그들 곁에 다가설 수 있었을 뿐더러, 그만큼 그의 예술적 가치가 상류 사회에서도 인정받고 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였다.

 

뿐 아니라 최북 또한 사대부들과 자리를 함께 할 때면 그런 분위기에 맞는 격식을 갖췄으리라 짐작이 간다.

최북이 지은 <추회秋懷>(가을날의 감회)라는 서정미 넘치는 시를 읽다보면, 그가 상류사회의 문사들과 얼마든지 대화도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백록성변낙일사 白麓城邊落日斜 백록 산성 너머로 지는 해가 저문다

수주황엽시오가 數株黃葉是吾家 시든 나뭇잎 몇 그루가 서 있는 곳은 내 집

금년팔월청상조 今年八月淸霜早 올해 8월에 벌써 맑은 서리 내리니

리국생심이작화 籬菊生心已作花 울타리 국화도 마음을 일으켜 이미 꽃을 피웠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칠칠이와 절친했던 친구는 이단전이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비록 최북과 마찬가지로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시를 잘 지어 오지랖이 넓었다.

최북이 영의정까지 지낸 남공철과 교류할 수 있었던 것도 딴은 이단전의 그런 오지랖 때문으로 보인다.

 

 

칠칠이의 술과 순정

 

물론 그의 이런 교유 관계에서 또한 빼놓을 수 없는 건 술이었다.

자신과 신분이 다른 지체 높은 사대부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었다.

지체 높은 사대부들 가운데 칠칠이와 가장 격의 없이 지냈다고 알려진 남공철이, 그와 어울려 지내면서 보냈던 서찰을 보아도 그들 사이가 얼마나 친밀한 관계였으며 또 최북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를 말해주고 있다.

 

....자네는 이미 술에 취해 있어서 어지럽게 내 책 따위를 잔뜩 흐트려 놓고는 이내 미친 듯이 부르짖으며, 토하려고 해서 남들이 붙들어주어서야 그쳤다고들 하더군.

돌아가는 길에 넘어져 다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네.

조자앙의 <만마도萬馬圖>는 진실로 명품이더군.

이단전이 말하기를, 비단이 아직 닳지 않은 것으로 보아, 필시 자네가 그려 가지고 남을 속이려 한 것이라 했네만, 비록 칠칠이의 손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림이 이처럼 빼어나다면 조자앙의 필치라 해도 해롭지 않겠네.

모름지기 그 진부를 논할 게 못되네.

그런데 이런 것을 남에게서 얻었다니, 이 모두가 평소 술 좋아한 인연으로 생긴 것이니, 또다시 배를 두드리고 마실만한 일일세.

어쩌다 술 한 동이 마시걸랑 다시 나를 찾아 오시게나.

 

최북은 이처럼 거의 술주정뱅이에 가까웠다고 한다.

'술 한 동이 마시걸랑 다시 찾아오라'는 남공철의 서찰 속 당부처럼 마냥 술에 절어 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술은 흔히 말하는 어떤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촉매가 아니었는가 싶다.

최북보다는 후대에 살았으나 최북과 같이 천재 화가로 불렸던 오원 장승업의 그림에서와 같이, 한 잔의 술에 실린 어떤 신명이나 취화醉畵같은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그의 작품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에게 있어 술은 그저 고단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유일한 해방구였고, 또한 그만의 순정이었을 따름인 것이다.

 

 

글씨 잘 쓰고 그림 잘 그린 칠칠이의 '호방한 멋'

 

최북은 당대 화가로서는 흔치 않게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한, 단연 인기 작가였다.

그가 시를 잘 지었다는 것은 남공철의 《최칠칠전》에도 나온다.

 

이단전이 말하기를 칠칠이는 ·············· 시를 지으면 또한 기발한 가운데 예스런 맛이 있어 가히 읊을 만하나, 속으로 감추어 잘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최북의 시 3수가 풍요속선風謠續選에 실려 있는 것으로 보아, 남공철의 그러한 주장이 결코 허튼 부추김만은 아닌 것 같다.

그 가운데서도 <야유랑冶遊郞>이란 시는 소재의 선택이나 발상 면에서 과연 최북다운 풍모가 물씬 묻어난다.

 

백마교두립 白馬橋頭立 백마교 다리 위에 올라서니

미풍락유화 微風落柳花 산들바람에 버들꽃이 지네

양편동백상 揚鞭東百上 채찍을 들어 동쪽길로 오르는데

하처시창가 何處是娼家 창녀촌은 그 어디에 있단 말인고

 

그는 글씨도 곧잘 빼어나게 잘 썼다.

남공철은 '칠칠이는 광초狂草를 즐겨 썼다'고 말하고 있으며, 이규상은 '칠칠이는 초서를 잘 썼는데, 특히 반행半行의 서체는 아름다우면서도 기이하게 탁월했다'고 쓰고 있다.

 

실제로 최북이 자신의 그림에 써넣은 화제畵題[그림 제목]와 낙관落款[작가의 도장]을 보면, 반행의 흘림체가 남다른 생명력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호방한 기개가 마치 작품 속에서 살아 꿈틀거리듯 거침이 없고 통렬하기조차 하다.

 

최북은 그림 솜씨도 매우 빼어났다.

당대의 문사들은 그를 '최산수'로 부를 정도로 산수를 잘 그린다고 열광했고, 의 산수화는 '기이한 멋'이 있다고 한결같은 증언을 남기고 있다.

 

먼저 남공철은 '칠칠이의 그림은 세상에 절로 전해져 세칭 최산수라 불리었다.

그러나 화훼·영모·괴석·고목을 더욱 잘 그렸는데·········· 최북은 (여느) 화가들의 (일반적인) 의장意匠[시각을 통해 미감美感을 일으키는 것]을 훌쩍 뛰어넘었다'고 했고, 조희룡은 '그는 산수와 집, 나무를 잘 그렸는데 그림의 뜻이 실로 창울蒼鬱했다[빽빽하게 우거지고 푸르다]. 원나라 문인화가 황대치를 숭배하여 마침내 스스로 일가를 이루었다'고 평가했다.

 

이규상 역시 '최북의 화법은 근력筋力을 위주로 하였기 때문에, 비록 가느다란 필획으로 풀잎을 그리더라도 마치 낚시 바늘이나 노끈처럼 (힘이 있는) 형상이 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 때문에 자칫 거칠고 사나운 분위기를 풍기고 했는데, 특히 메추라기를 잘 그려 사람들은 그려 최메추라기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일찍이 호랑나비를 그린 적이 있었는데, 보통 나비와 달라 그 까닭을 물으니 그가 대답하기를 ,"깊은 산속 궁벽한 골짜기에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이런 나비의 모습이 허다하다"고 하였다'며, 보다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어가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에게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로 널리 알려져 있는 미술사학자 유홍준은 이와 크게 다른 평가를 내리고 있다.

'········가느다란 필획으로 풀잎을 그리더라도 마치 낚시 바늘이나 노끈처럼 (힘이 있는) 형성이 되지 않은 것이 없는, (여느) 화가들의 (일반적인) 의장을 훌쩍 뛰어 넘었다'고 증언하고 있는 당대의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런 평가에 값하는 실제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홍준의 이런 평가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략 100여 점 남짓한 최북의 작품들 대부분이 예술이라기보다는 붓으로 그저 먹고 살기 위한 노동의 산물이란 점에서 나온 것이며, 최북의 인생은 예술로서 빛난 것이 아니라 단지 기인으로서 기록될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학 박물관에서 만난 칠칠이의 최고의 걸작 <계류도>

 

최북, 계류도, 종이에 담채, 28.7x33.3㎝, 고려대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그동안 지하 서고에 소장하고 있던 조선시대의 옛 그림을 공개한다 하여 친구와 함께 들렀다.

우리는 그림과 그림 사이를 옮겨다니면서 있는데, 정선·김홍도·윤두서·심사정·신윤복·장승업·정약용·흥선대원군 이하응 등의 그림들이 즐비하게 내걸려 있는 사이에서, 최북의 그림과 마주쳤다.

그런데 어둠 속을 헤매다 갑자기 빛에 노출된 사람마냥 눈길은 먼저 그쪽으로 한사코 꽂히게 되면서 단번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러다 화면 왼쪽 흰 여백 속에 또렷이 쓰여 있는 호생관毫生館의 관서款書[호를 쓴 글씨]와 함께 비록 오랜 세월로 말미암아 그 빛이 퇴색하긴 하였으나 '최북崔北'이라고 쓰여 있는 낙관의 붉은 글자를 확인한 순간, 그만 가슴이 뜨끔하고 말았다.

 

더욱이 함께 간 친구의 말마따나 그의 작품 <계류도溪流圖>는 한눈에 보아도 이미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지금껏 보아온 그의 그림하고는 달라도 한참이나 다른 차원이었던 것이다.

 

<계류도溪流圖>는 정서의 깊은 개입으로 화면의 완성도는 물론, 과연 3백여 년 전에 그린 그림이라곤 차마 믿기 어려울 만큼 지금 보아도 대담하면서도 모던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실로 거장다운 면모가 물씬 풍겨나는 보기 드문 작품이며, 참으로 만나보기 어려운 빼어난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여태까지 보아온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서도 단연 최고의 걸작임이 틀림없어 보인다.

기라성 같은 조선의 다른 화가들의 작품이 박물관 안에 즐비했으나 모두가 이미 거둔 자신들의 명성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데 반해, 최북의 <계류도>는 딱히 흙속에 묻혀 있는 보석처럼 눈부신 광채를 화면 깊숙이 간직하고 있다.

 

<계류도>와 같은 최북의 걸작이 또 나올 가능성이 있다.

그는 1747년 홍계희를 정사로 한 조선통신사 일행의 수행 화원으로 일본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 때 그가 일본에서 그린 그림이 아사오카 고테이(조강흥정朝岡興楨)의 《고화비고古畵備考》라는 책의 《조선서화전》에 <월야산수도月夜山水圖> <산거도山居圖> 등 모두 5점이 수록되어 있다.

 

당대 재야에서 명성이 높은 학자였던 이익은 최북의 일본행을 송별하면서 '송최칠칠지일본送崔七七之日本'이란 제목의 시 3수三首를 지었는데, 그중 마지막 수는 다음과 같다.

 

졸나평생흠장관 拙懶平生欠壯觀 옹졸하고 게으른 나는 평생 장관을 못 봤건만

기유천외격파란 奇遊天外隔波瀾 그대는 바다 건너 하늘 밖을 노닐게 되었구나

부상지상진형일 扶桑枝上眞形日 해 뜨는 동쪽에는 진짜 해가 있을지니

묘화장래여아간 描畵將萊與我看 그것을 그려 가져와 내게도 보여다오

 

최북의 해외여행은 비단 일본만이 아니었다.

신광하가 지은 <최북가崔北歌>를 보면, '만주벌 너머 멀리 흑룡강까지 들어갔다'고 전하고 있다.

무슨 일로 그 멀리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지은 <홀로 술을 마시며(독작獨酌)>라는 시를 보더라도 퍽이나 오랫동안 낯선 타국에 떨어져 고국 땅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아련하기만 하다.

 

일편동주월 一片東州月 동주에 달이 밝으니

응지고국명 應知故國明 고국도 응당 밝은 줄 알겠노라

기년위객재 幾年爲客在 몇 년 동안 객지에 있었던가

가절매수생 佳節每愁生 아름다운 계절마다 향수가 일어나네

제설통림정 霽雪通林淨 눈 그친 숲속은 맑게 트이

귀운출수횡 歸雲出岫橫 돌아가는 구름은 언덕에 걸렸구나

춘풍관주록 春風官酒綠 봄바람에 푸른 술을 내 오니

짐작임오정 斟酌任吾情 내 마음껏 홀로 마셔보리라

 

최북의 이런 해외여행에 굳이 주목하고자 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언제인가 '최북의 그림이 일본에서 꽤 인기가 높다'는 얘길 전해들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적잖은 그의 그림들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갔다는 얘기에, 어쩌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꽃같은 그의 숱한 기행이, 왕문王門의 광대가 되지 않았던 오만이라도 화폭에 벼락같이 쏟아져 내린' 그의 또 다른 걸작들을 만나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면서부터이다.

우연찮게 대학 박물관에 <계류도>와 같은 명작을 만날 수 있었던 것과 같이....

 

 

불행한 천재 칠칠이의 수수께끼와도 같은 최후

 

최북은 그의 죽음까지도 아직 수수께끼로만 남아 있다.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자신의 최후를 마쳤는지에 대해선 입을 여는 이마다 제각기 설이 다 다르다.

 

남공철은 《최칠칠전》의 맨 마지막 부분에서 '칠칠이는 한성의 객가客家에서 죽었는데, 그것이 언제인지 기억하지 못하겠다'고 했고, 이규상은 '몸이 늙어 남의 집에서 기식奇食[남의 집에 붙어서 밥을 얻어먹고 지냄]하다 죽었다'고 말했다.

조희룡은 《호산외기》에서 '칠칠이는 49살에 죽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두고 7×7=49라는 숫자의 첨籤[예언]이라 했다'고 쓰고 있다.

 

한데 유홍준은 보다 더 구체적이고 정교한 주장을 펴고 있다.

이가환의 《동패락송》에는 칠칠이가 1712년생이라고 했으니, 만약에 그가 49세에 죽었다면 1760년이 된다.

그렇다면 남공철과의 관계가 설명되지 않는다. 1760년이라면 남공철은 3세가 된다.

그리고 칠칠이의 유작 중에는 그의 나이 54세가 되는 1765년[을유乙酉]의 <송음관폭도松陰觀瀑圖>가 전해지고 있으니, 최북의 49세 사망설은 낭설일 뿐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기록을 하나 찾아내었는데, 그것은 신광하가 쓴 <최북가>이다.

이 시는 칠칠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시로 신광하는 신광수의 친동생이므로 가형과 함께 칠칠이와 교류했을 가능성이 아주 크다.

시의 내용에 따르면, 칠칠이가 어느 겨울날 술에 취해 돌아오는 길에 성벽 아래에서 잠이 들었는데 마침 폭설이 내려 그만 얼어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신광하의 <최북가>는 그런 한 많은 칠칠이의 일생과 예술을 더없이 극명하게 담아낸 아주 감동적인 내용이다.

 

군불견최북설중사 君不見崔北雪中死 그대는 보았는가, 최북이 눈 속에서 죽은 것을

초구백마수가자 貂裘白馬誰家子 담비가죽 옷에 백마 탄 이는 뉘 집 자손이더냐

여조비양불련사 汝曹飛揚不憐死 너희들은 어찌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아니하고 득의양양하는가

북야비미진가애 北也卑微眞可哀 최북은 비천하고 미미했으니 진실로 애닯도다

북야위인심정한 北也爲人甚精悍 최북은 사람됨이 참으로 굳세었다

자칭화사호생관 自稱畵師毫生館 스스로 말하기를 붓으로 먹고 사는 화사라 하였네

구간단소묘일목 軀幹短小眇一目 체구는 작달막하고 눈은 외 눈이었지만

주과삼작무기탄 酒過三酌無忌憚 술 석 잔 들어가면 두려울 것도 거칠 것도 없었다네

북궁숙신경흑삭 北窮肅愼經黑朔 최북은 북으로 숙신[만주]까지 들어가 흑산[흑룡강]에 이르렀고

동입일본과적안 東入日本過赤岸 동쪽으로는 일본으로 건너가 적안[오사카]까지 갔었다네

귀가병장산수도 貴家屛障山水圖 귀한 집 병풍으로는 산수도를 치는데

안견이징일소무 安堅李澄一掃無 그 옛날 대가라던 안견과 이징의 작품들을 모두 쓸어버리고

색주광가시방필 索酒狂歌始放筆 술에 취해 미친 듯 노래하며 붓을 휘두를 요량이면

고당백일생강호 高堂白日生江湖 큰 집 대낮에 산수 풍경이 생겼다네

매화일폭십일기 賣畵一幅十日饑 그림 한 폭 팔고는 열흘을 굶더니

대취야귀와성우 大醉夜歸臥城隅 크게 취해 한밤중 돌아오다 성곽 모퉁이에 쓰러졌다네 

차문북망진토만인골 借問北邙塵土萬人骨 북망산 흙속에 묻힌 만골에게 묻노니

하여북야매각상장설 何如北也埋却三丈雪 어찌하여 최북은 세 길 눈 속에 묻혔단 말인가

명호북야신수동사 鳴呼北也身雖凍死 오호라, 최북은 비록 몸이 얼어 죽었어도

명불멸 名不滅 그 이름 영원히 사라지지 않으리

 

신광하가 이 시를 쓴 것은 1786년이었다.

내용으로 보아 이 애도가는 칠칠이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지은 것으로 생각되며, 만약 당해 연도에 지은 것이라면 향년 75세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껏 나온 최북의 최후설 가운데 가장 정밀해 보인다.

 

그러나 한편 곰곰 생각해 보면 그게 또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가 49세에 죽었건 75세에 죽었건 간에 무엇이 그리도 중요하다 하겠는가.

어쩌면 최북은 같은 화가의 길을 걸었던 조희룡의 찬사만으로도 만족타 하지 않았을까.

 

북풍열야 北風烈也 북풍이 너무도 맵구나

부작왕문령인족의 不作王門伶人足矣 부잣집 광대 노릇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장한데

하내자고여차 何乃自苦如此 어찌 그다지도 괴롭게 한 세상을 사셨나요

 

최북은 당대의 화가들이 대개 중인 계급 이상이었던 시절에 미천한 신분으로 태어나 제도권 안으로 편입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림 그리는 것 말고는 달리 생계를 꾸려갈 방도가 없었던, 가난과 고독이라는 치욕을 평생토록 그림자처럼 달고 살아가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대를 탓하지 않았다.

자신의 그림 세계를 결코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았으며, 부잣집 광대로의 안주조차 한사코 거부했다.

숨을 거두는 마지막 날까지도 오로지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찾기 위해 붉은 피와 같은 기행으로 몸부림쳤던, 조선 후기 불행한 천재 화가였다.

 

그리하여 그가 그린 소나무는 복숭아꽃과 다투지 않았다.

일상의 치욕을 넘어 껍질 바깥의 또 다른 희열을 너무나 일찌기 힐끗 엿보고 말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글은 박상하 지음, '조선의 3원3재 이야기'(일송북, 2011)에 실린 글을 발췌한 것이다.

 

2020. 8. 11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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