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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원별집2-수록 작품 소개

새샘 2021. 2. 19. 17:08

≪화원별집畵苑別集에 수록된 그림 몇 점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석경, 용머리, 종이에 담채, 24.9×19.7㎝,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맨 먼저 석경石敬(?~?)의 <용머리(운룡도雲龍圖)>다.

오세창의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 석경은 안견의 제자로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다른 기록들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

한편으로 ≪명종실록≫에는 석경石璟이란 화원이 이상좌와 함께 1549년 중종의 영정을 그렸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이 ≪명종실록≫의 석경石璟≪화원별집畵苑別集≫의 석경石敬을 같은 인물인 것으로 짐작하므로, 석경은 16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화가로 볼 수 있다.

이 추정이 맞다면 석경은 1세기 전의 화가였던 안견의 제자일 수는 없고, 아마도 안견파의 화풍을 추종했던 16세기 화원일 가능성이 큰 것이다.

 

대체로 보아 ≪화원별집畵苑別集≫의 <용머리>는 석경이 그린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되는 그림이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 몇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평양박물관 도록 '북녘의 문화유산(국립중앙박물관, 2006)'에 실린 안견安堅(1400?~1479?)의 <용> 그림이 ≪화원별집畵苑別集≫에 있는 석경의 이 <용머리> 그림과 거의 똑 같다는 사실이다.

평양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실물 그림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진위는 알 수가 없지만, 석경을 16세기 화가로 전제한다면 석경이 안견의 <용> 그림을 모작했을 가능성이 크다.

<평양박물관 도록 '북녘의 문화유산'(사진 출처-https://www.museum.go.kr/site/main/archive/report/archive_5835)과 이 도록에 실린 안견의 '용' 그림(https://m.blog.naver.com/ghost0200/221686791795)>

 

다음으로 이불해李不害(1529~?)의 그림 <예장소요도曳杖逍遙圖>를 보자.

이불해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다만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가 쓴 ≪화단畵斷≫에 "그의 그림이 해박하고 정밀한 점은 안견에 버금가나 활달한 맛을 오히려 그보다 낫다"고 하였고, 청죽聽竹 남태응南泰膺(1687~1740)의 저서 ≪청죽화사聽竹畵史≫에는 "강희안姜希顔(1417~1465) 이후 신세림申世霖(1521~1583)과 나란히 이름을 날렸으나 전하는 유작이 드물다"고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이불해, 예장소요도, 비단에 담채, 18.6×13.5㎝,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이불해의 그림으로는 조그만 크기의 그림이 몇 장 남아 있을 뿐이어서 화첩에 실린 <예장소요도>의 진위를 알 수가 없다.

대가로 알려져 있는 이불해 윤두서 같은 대가도 높이 평가했던 인물이긴 하지만, 지금 우리로선 이 조그만 쪽 그림을 가지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불해의 그림은 절파풍[절강성(저장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직업화가들의 화풍]이 상당히 농후하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세 번째는 정세광鄭世光(?~?)이란 이름의 전혀 알려지지 않은 화가가 그린 <어렵도漁獵圖>다.

정세광에 대해 윤두서는 ≪기졸記拙≫에서 "얌전하고 정밀함은 가도可度[안견의 자字]의 필의筆意[붓놀림 방법]를 체득하였으나 필봉筆鋒[붓놀림 위세 즉 붓끝]이 다소 둔하고 창윤蒼潤[푸르고 물기가 촉촉한] 빛은 미치지 못한다"라고 평하였다.

따라서 그의 화풍은 초기 안견의 영향을 받은 안견파로 알려져 있다. 

 

<정세광, 어렵도, 비단에 담채, 15.5×21.5㎝,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어렵도> <천어도川魚圖> 또는 <삼태그물 거두기>란 이름으로도 불리며, 바람 부는 강가에서 고기 잡는 모습을 남종화풍南宗畵風에 토대를 두고 그린 풍속화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근래 작자를 모르는 그림으로 일본에서 서울로 온 큰 폭 그림이 하나 있다. 

이 그림에 보이는 집 창문이 조선시대 창문과 비슷해서 일본에서도 조선 그림으로 알려졌는데, 여기에 그려진 나뭇잎이 정세광의 나뭇잎 처리 기풍과 비슷한 점이 있어 정세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다.

 

 

다음은 ≪근역서화징≫에 안견의 그림을 많이 모방했던 화가로 언급되어 있는 이정근李正根(1531~?)이다.

윤두서는 "그가 안견을 따라서 필법이 정교하여 이불해의 선구로 삼을만하다"고 평한 바 있다.

 

<이정근, 설경산수도, 비단에 담채, 19.6×15.8㎝,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이정근의 그림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는 조그마한 그림이다.

그림은 작지만 시대감이 있으며, 산을 둥그렇게 벌려가면서 묘사하고 외곽선을 검은 선으로 하고 태점苔點을 찍은 데서 안견 작으로 전해지는 <사시팔경도四時八景圖>와 비슷한 점이 보여 안견을 모방했음을 알 수 있다.

 

<이정근, 미법산수도, 종이에 수묵, 23.4×119.4㎝,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이정근, 미법산수도, 왼쪽 상세(사진 출처-출처자료)>
<이정근, 미법산수도, 오른쪽 상세(사진 출처-출처자료)>

이정근의 또 다른 작품 <미법산수도米法山水圖>는 종이에 수묵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심수心水라는 아호가 낙관되어 있기 때문에 호가 심수인 이정근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하지만 그림에 나타나는 시대감이 <설경산수도>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과연 이정근의 그림인지 의심을 갖는 전문가도 있다.

 

 

다섯 번째는 윤인걸尹仁傑(?~?)의 <관폭도觀瀑圖(거송관폭도踞松觀瀑圖)>.

 

윤인걸은 그림을 잘 그렸고 함윤덕의 화풍을 따랐다는 정도만이 알려져 있다.

윤두서는 ≪화단≫에서 "함윤덕류에 속하는데 필법은 강하지만 국면이 좁다. 이는 소소밀밀疎疎密蜜의 법[성긴 곳은 성기게, 빽빽한 곳은 빽빽하게 그리기]을 모르는 연유다"라고 평했다. 

 

<윤인걸, 관폭도, 비단에 담채, 18.8×13.1㎝,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윤인걸의 <관폭도>는 시대감이 있는 절파화풍의 그림으로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와 비슷한 화풍이다.

하지만 공간 분할이나 경물의 배치 면에서 다소 답답한 느낌이 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섯 번째는 윤인걸이 따랐던 화풍의 소유자 함윤덕咸允德(?~?)이다.

윤두서가 그의 그림을 평하면서 구도나 채색이 역시 원수院手[화원의 솜씨]라 하였던 점으로 미루어  화원 출신으로 생각된다.

 

<함윤덕, 기려도, 비단에 담채, 15.6×19.2㎝,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유

함윤덕의 <기려도騎驢圖>시대감이 엿보이고 솜씨가 있는 그림인데, 강희안의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와 대체로 비슷한 구성과 필법을 보여주는 절파 계통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일곱 번째는 이숭효李崇孝(?~?).

이숭효는 도화서 화원이 되지 못했지만, 아버지 이상좌李上佐, 동생 이흥효李興孝, 그리고 이 글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아들 이정은 모두 화원을 지낸 화원 집안이었다.

≪동국문헌東國文獻≫ 화가편에 그림을 잘 그렸다고 전하며, 동생인 흥효나 아들인 정에 비해 회화사적 비중은 다소 미약하지만 16세기 조선 화단에서 절파화풍 전파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숭효, 어부도, 모시에 수목, 21.2×15.6㎝,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이숭효의 <어부도漁夫圖>활달한 필치와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이 특징으로서 당시 세력을 누리기 시작하였던 절파화풍의 영향을 엿볼 수 있으며, 중국 화풍이 가미된 그림으로 평가받는다.

 

 

마지막 여덟 번째는 조선 중기의 산수화 대가로 손꼽히는 화가인 나옹懶翁 이정李楨(1578~1607)이다.

이정은 아버지 할아버지 이상좌, 작은아버지 이흥효에 이어 3대째 도화서 화원을 지낸 화원 집안이었다.

일찍이 요절한 아버지 이숭효를 대신하여 작은아버지 흥효 아래서 자라면서 10살 때 이미 화가로서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13살 때인 1589년 장안사 벽화를 그려 천재 화가로 불리웠다.

하지만 지나치게 술을 즐겨 서른 살의 나이로 아버지처럼 요절하였다.

 

이정은 그림뿐 아니라 시와 글씨도 잘하였고, 불교에 심취하여 중이 되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이정, 산수도, 종이에 수묵, 34.5×23.0㎝,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이정의 <산수도山水圖> 전통적인 안견파 화풍과 당시 유행했던 절파 화풍이 절충된 그림으로 평가된다.

이 그림은 이정의 화풍을 대표하는 표본작이자 기준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면서 남종화풍까지 구사한 그림도 그려 전통주의적이면서도 일면 진보적 화가였음을 알 수 있다.  

 

※출처

1. 이용희 지음, '우리 옛 그림의 아름다움 - 동주 이용희 전집 10'(연암서가, 2018)

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인터넷판

 

2021. 2. 1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