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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어쩌면 이뤄져선 안 될 경주 황남대총 발굴 본문
서막
1975년 8월 중순 경주 황남대총皇南大塚 남쪽 무덤(남분南墳).
나무덧널(목곽木槨) 안에서 말띠드리개(행엽杏葉)와 더불어 엎어진 채 땅에 묻힌
안장 뒷가리개가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숭실대 사학과를 갓 졸업하고 조사보조원으로 일하던 최병현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꽃삽과 대나무 칼로 흙을 걷어낸 뒤 안장을 살짝 들춰본 순간 숨이 멎었다.
1600년 동안 깊은 어둠 속에 갇혔던 영롱한 빛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비단벌레 2000마리의 날개를 일일이 뜯어내 붙인 신라시대 최고 사치품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였다.
순간 발굴 현장에 긴장감이 흘렀다.
황남대총 북쪽 무덤에서 비단벌레 장식 파편을 발굴한 경험상 비단벌레 장식이 빛과 습도에 취약하다는 걸
발굴 단원들은 알고 있었다.
즉시 물을 묻힌 커다란 솜을 비단벌레 장식 위에 덮고 발굴을 중단했다.
화학자 김유선이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비단벌레 날개 파편을 서울로 가져가 보존 방법을 알아내기 위한 실험을 서둘렀다.
김유선이 실험실에서 고군분투한 1주일 동안 유물은 물에 젖은 솜을 뒤집어쓴 채 무덤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마침내 "햇볕을 차단한 채 글리세린 용액에 유물을 넣어 보관하라"는 김유선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다.
최병현은 비단벌레 장식을 무덤에서 꺼내 나무상자에 넣고 글리세린을 부었다.
발굴 단원이 유물 보존처리까지 직접 해결해야 하는 열악한 시절이었다.
사치와 문화, 고대 문명 교류의 흔적
경주여행의 단골 코스 중 하나인 대릉원大陵園에 들어서면 연못 옆으로
2개의 커다란 봉분이 마치 표주박처럼 붙어 있는 황남대총을 볼 수 있다.
이 무덤은 길이 120미터, 너비 80미터, 높이 23미터에 이르는
국내 최대 규모의 고대 무덤이자 대표적인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이다.
규모에 걸맞게 5만여 점의 유물이 쏟아져나와 신라사 해석에 엄청난 영향을 끼쳤다.
삼국통일 전 4~6세기 신라 마립간의 왕릉으로, 학계에서는 무덤 주인을 놓고 내물마립간, 눌지마립간 등으로
의견이 엇갈린다.
사실 대릉원 내 신라 무덤 중 주인이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다.
고대 신라인들은 묻힌 사람의 이름을 새긴 지석誌石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부 고고학자들은 신라인들이 지석 대신 비단과 같은 천에 인적 사항을 적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하지만
유기물은 썩기 마련이므로 현재까지 전해질 수는 없다.
무덤 규모나 묻힌 사람의 신분을 짐작건대 이 시대의 진귀한 최고급품들이 황남대총에 묻혔을 것이다.
서기 4~6세기 신라가 통째로 들어가 있는 일종의 타임캡슐인 셈이다.
벌써 40여 년이 흘렀지만 1970년대에 발견된 유구, 유물에 대한 정보가
신라 마립간 시대를 해석하는 기본적인 인식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최고 지배층의 장례에 쓰인 물질 문화뿐만 아니라
고구려와 남조, 페르시아 등 해외에서 수입한 사치품의 실상도 담겨 있다.
고대 문명 교류의 폭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1970년대 황남대총 발굴 조사 당시 20대의 일용직 보조원이던 최병현은 나중에 숭실대 교수가 되어 황남대총을 비롯한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이 4~6세기 마립간의 무덤임을 규명해냈다.
그는 신라 돌무지덧널무덤의 상한 연대를 5세기로 내려본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했다.
4~5세기 경주 일대를 제외한 낙동강 동부 지역이 가야 영토라는 일본 학자들의 견해를 부정하고
신라의 땅이었음을 토기 유물을 통해 고증하기도 했다.
"섣불리 뛰어들 작업이 아니었다"
황남대총 발굴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정희 정권의 국책사업 성격이 짙었다.
박정희는 1971년 경주 시내 여러 유적을 발굴한 뒤
이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내용의 '경주관광종합개발계획'을 세웠다.
계획도 밑그림을 손수 그렸을 정도로 그의 경주 개발에 대한 열정은 대단했다.
여담이지만 과거 선거에서 경주 시민들의 보수 정당 지지율이 높았던 것은
TK(대구 경북) 지역에 속한 영향도 있겠지만 박정희에 대한 향수도 상당 부분 작용했을 것이다.
나는 "박정희가 없었다면 오늘의 경주는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경주 처가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장모 생가가 황룡사지 안에 있었는데,
박정희 정부 때 황룡사지 발굴이 시작되자 제대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집을 옮겨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경주 시민들이 문화재 발굴에 비교적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이런 과거사와도 관련이 깊다.
현직 대통령으로서 경주 발굴 현장을 직접 방문한 인사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박정희와 그의 딸 박근혜뿐이다.
박정희의 신라에 대한 높은 관심을 삼국통일이나 화랑도 정신과 연관짓는 시각도 있다.
1960~1970년대 북한 김일성과 체제 경쟁을 벌이며 남북통일을 지향한 통치 철학을
삼국을 통일한 신라에서 찾으려 했다는 것이다.
더불어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신라 화랑도나 무신武臣 김유신의 충忠 이미지를 활용하려 한 측면도 있다.
약소국의 컴플렉스가 발현되었기 때문일까.
박정희 정부는 고고 발굴에서도 유독 사이즈에 집착했다.
이왕 발굴하는 거라면 돌무지덧널무덤 중 가장 큰 황남대총을 파보라는 게 정권의 요구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일머리를 잘 알았던 발굴단장 김정기는 이런 발상 자체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열악한 발굴 기술과 일천한 경험으로 황남대총을 발굴하는 건 유적 파괴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의 생전 회고 대담집에는 황남대총 남쪽 무덤 발굴에 대해 "겁 없는 짓"이라고 언급한 내용이 나온다.
최병현 등 발굴 단원들에게 "황남대총 발굴은 미친 짓"이라는 격한 표현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실제 당시 문화재위원과 학계 인사들도 황남대총 발굴에 적지 않은 우려를 나타냈다.
고고학계 석학으로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를 지낸 삼불 김원룡조차
경주 황오리의 소형 무덤만 겨우 발굴해봤을 정도로 발굴 경험이 부족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서슬 퍼런 군사독재 시대, 최고 지도자가 직접 챙기는 사업에
감히 '아니오'라고 반박할 수 있는 공무원은 거의 없었다.
김정기는 대신 꾀를 냈다.
본 사업에 착수하기 전 일종의 '시험장(테스트베드) testbed'으로서
황남대총보다 작은 천마총 발굴을 시도해보자고 제안한 것.
천마총 발굴로 시간을 끌면서 황남대총 발굴을 최대한 늦춰보려는 속내였다.
그러나 속도전에 익숙한 박정희 시대의 조급함은 이마저 용납하지 않았다.
천마총에서 신라 금관 등 기대치 않은 성과를 올리자
정부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문화재위원들까지 덩달아 들썩거렸다.
일종의 집단 열기에 휩싸이면서 천마총에 이어 황남대총 발굴도 삽시간에 결정되었다.
당시 발굴 조사 실무자였던 최병현은 "지금이라면 황남대총 발굴에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을 것"이라고 털어놓는다.
황남대총 발굴은 천마총보다 더 급하게 진행되어 토층도조차 그리지 못할 정도였고,
칠기와 금속 등 출토 유물들의 손상도 피하지 못했다.
최병현은 "김정기 선생은 천마총에서 유물이 많이 나오면 황남대총까지 파지 않아도 될 것이라며 내심 기대했다"며
"황남대총은 지금이라면 발굴에만 최소 10~15년이 걸릴 엄청난 현장이었다"고 회고했다.
통섭의 발굴 현장
황남대총 발굴 현장은 한국 고고학계의 산실이라고 할 만하다.
해방 이후 한국 고고 발굴의 태두라 할 수 있는 창산 김정기 박사가 발굴단장을 맡았고
그 아래 김동현 전문위원이 부단장을 맡았다.
두 사람은 한국 고고학계에서 매우 독특한 입지를 점하고 있다.
둘 다 일제강점기에 교육을 받고 일본 대학에서 건축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 출신이다.
역사나 고고학 전공자가 아닌 공학도가 고고 발굴을 주도한 사실이 이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독특한 학문 배경은
한국의 초기 고고 발굴에서 진정한 통섭通涉[여러 학문 분야를 복합적으로 다룸]의 위력을 보여줬다.
숫자에 약한 사학도들과 달리 이들은 발굴에 수數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일례로 이들이 작성한 천마총 발굴 조사 보고서에는
투입된 토사량이나 무덤 축조에 동원된 연인원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치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천마총 발굴 때에는 봉토封土[쌓아 올린 흙] 단면도를 최초로 그려넣기도 했다.
한시라도 빨리 유물을 얻기 위해 봉토를 제거하는 데에만 급급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건축 설계도를 작성하며 사물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훈련을 받은 김정기는
봉토의 단면 구조를 파악해야 신라시대 작업 공정을 재현할 수 있음을 간파했다.
자연과학을 전공한 학자들의 숨은 공로도 있었다.
박정희 정권의 해외 두뇌 유치 프로그램으로 귀국한 화학자로
황남대총 발굴 당시 한국원자력연구소 부소장이었던 김유선은 유물 보존처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보존과학 담당 지도위원으로 현장을 방문한 김유선은
금제金製 유물 표면에 묻은 때를 제거할 때 소다 가루를 사용하라고 조언했다.
비단벌레 장식을 글리세린에 넣어 보관하도록 한 것도 그의 아이디어다.
물리학자로 한양대 교수였던 조종수는 각종 금속 유물 보존에 힘을 보탰다.
김동현과 함께 책임조사원으로 지건길 당시 학예연구사가 있었고,
그 아래 조사보조원으로 윤근일, 최병현, 소성옥, 남시진이 있었다.
김정기와 김동현은 나중에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이 되었고, 지건길은 국립중앙박물관장,
최병현은 숭실대 교수, 윤근일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다.
호암미술관에서 삼성그룹 이병철·이건희 회장의 미술품 컬렉션 수집에 간여한 이종선씨도
황남대총 발굴에 참여했다,
한마디로 황남대총은 한국 고고학계 핵심 인물들을 끌어들인 거대한 학문 연구의 장場이었다.
최병현과 한국 고고학
"누가 이따위로 땅을 팠어!"
1973년 5월 경주 천마총 발굴 현장.
김정기 발굴단장의 불호령에 최병현의 낯빛은 사색이 되었다.
두 달 동안 봉토를 걷어낸 끝에 드러난
내부 석렬石列[길게 줄지어 늘어선 돌 무리]의 성격을 제대로 규명하지 못했다는 호통이었다.
발굴로 손상된 유구는 복원이 불가능하기에 웬만하면 현장에서 흥분하는 법이 없던 김정기도 화를 쏟아냈다.
최병현은 그날 밤 발굴 단원 합숙소로 돌아와 몰래 보던 서양사 원서를 책상에서 치우고
일제강점기부터 당시까지 발간된 신라 돌무지덧널무덤 보고서들을 밤을 새워 통독했다.
마음속 깊이 존경하던 김정기에게 실력으로 인정받고야 말겠다는 오기가 발동한 것이다.
20대 청년의 열정은 곧 두드러졌다.
최병현은 그해 천마총 발굴에 이어 곧바로 황남대총 발굴 현장으로 투입되어
인부들을 감독하고 보도자료를 작성하는 책임을 맡았다.
한때 서양사학자를 꿈꾸던 청년은 이로부터 39년 뒤 대한민국 학술원 회원이 되었다.
경주 발굴 현장과 경기도 안양시의 개인 사무실에서 만난 최병현은
소박하고 투박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해야 직성이 풀리는 딸깍발이[가난한 선비] 학자였다.
고고학계에서 다변으로 이름난 그이기에 한번 이야기가 시작되면 두세 시간을 훌쩍 넘겼지만
쏟아내는 지식의 폭과 깊이에 놀라 지루할 틈도 없었다.
칠순이 넘은 나이에도 끊임없이 현장을 찾고 논문을 쓰는 그의 열정에 놀라는 후학도 많다.
최병현은 나와의 인터뷰에서 천마총과 황남대총 발굴에 참여한 것이
자신의 운명이자 인생 최대의 행운이었다고 술회했다.
그는 황남대총을 함께 답사할 때 "학자의 양심에 따른다면 이뤄져선 안 될 발굴이었지. 그때야 대학 졸업하자마자 현장에 와서 그걸 판단할 위치가 아니었고 그저 꼬박꼬박 월급을 준다고 해서·······"라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대학 등록금을 제때 내지 못해 두 번이나 재적된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예정대로 졸업했다면 경주 발굴의 기회를 놓칠 뻔했다는 것이다.
가난했지만 인정이 있던 1970년대를 겪은 사람들이 그렇듯 최병현도 박정희에 대한 양면적인 기억을 갖고 있다.
독재자이기는 했지만 한국 고고 발굴을 지원한 공을 지우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대통령이 발굴 현장에 내려오면 금일봉을 항상 건네줬는데 당시로서 거금이었어. 한번은 7월에 경주 천마총에 오셨는데 돈 100만 원을 쥐여주더라고. 그때 은행원 월급이 4만 원이던 시절이야. 집 한 채 정도 살 수 있는 큰돈이었는데 경주시 공무원, 경찰들과 나눠 갖고도 그때 월급의 절반쯤 되는 1만 원이 내 손에 들어오더라고. 참 고마웠지·······."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유물들
※출처: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
2021. 2. 15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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