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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기술을 섭렵할 때까지 발굴을 보류했던 광주 신창동 유적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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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 기술을 섭렵할 때까지 발굴을 보류했던 광주 신창동 유적

새샘 2021. 4. 18. 21:20

<광주 신창동 유적의 현재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신창동 유적 발굴 당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2)>
<신창동 유적 발굴 당시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2)>

국도 방향을 바꾼 유적

 

1992년 5월 당시 광주직할시 광산구光山區 신창동新昌洞 국도 1호선 직선화 공사 현장.

도로포장용 중장비가 속속 반입되는 가운데 조현종 당시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전 국립광주박물관장)가 황급히 공사장 흙을 퍼 담았다.

그는 연구실에 돌아오자마자 서둘러 흙을 체질한 뒤 물을 부었다.

물에 뜨거나 가라앉은 물질을 확인하던 중 점토대토기粘土帶土器 조각과 볍씨들이 눈에 들어왔다.

점토대토기는 초기 철기시대의 대표적인 토기양식이다.

 

오랫동안 품어온 의문이 확신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사실 조현종은 오래전부터 농경 유적을 찾고 있었다.

그때까지 농경의 근거로 확인된 자료는 불에 탄 쌀 몇 알이 전부였다.

그는 1989년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에서 국립광주박물관으로 발령이 나자 영산강 유역의 낮은 평야지대에 자리한 퇴적층을 틈틈이 관찰했다.

특히 광주 신창동 일대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연약 지반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그가 요주의 대상으로 꼽은 장소였다.

조현종은 "영산강 유역 어딘가에 농경 유적이 있으리라는 짐작이 현실로 들어맞았다"고 말했다.

 

그해 신창동 도로 공사는 전면 중단되었다.

국도 1호선은 유적을 피해 우회 도로가 만들어졌다.

공사 중 발견된 유적으로 인해 국도의 건설 방향이 바뀐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당시 문화재위원이던 김원룡 서울대 교수와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 김기웅 경희대 교수가 유적의 진가를 알아보고 당국에 문화재 보호를 강력히 요청한 결과였다.

 

김 교수는 한발 더 나아갔다.

지건길 당시 국립광주박물관장에게 "발굴을 중단하고 먼저 해외에서 저습지低濕地[낮고 습한 지대] 발굴 기술부터 배워오는 게 좋겠다"고 조언했다.

한창 발굴 중이던 유적을 중간에 덮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발굴 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유적에 손을 댔다가는 오히려 유물이 훼손될 수도 있었다.

조현종은 "유적을 위해서도 내 개인을 위해서도 김 교수의 판단은 탁월하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해 일본 나라문화재연구소로 가서 저습지 발굴 기술을 배운 뒤 귀국해 1995년 5월 신창동 유적 발굴을 재개했다.

당시 일본 고고학계는 저습지 발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일본 내 저습지 발굴 현장을 돌아다니며 목기 출토 기술 등을 섭렵했다.

1995년 발굴이 재개될 당시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발굴단장을 맡았으며, 조현종은 책임조사원으로 현장을 이끌었다.

그리고 신상효 국립전주박물관 학예연구관 등이 발굴 조사원으로 참여했다.

 

열국시대 한韓의 가장 오래된 수레 발견

 

<신창동 유적에서 1977년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인 바퀴축(위)과 부러진 바큇살(가운데). 가로걸이대(아래)가 보인다.(사진 출처_출처자료1)>

2000년 12월 조현종은 쿠라쿠 요시유키[공락선통工樂善通] 사야마이케[협산지狹山池] 박물관장이 그린 유물 스케치 한 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요시유키 관장은 중국 쓰촨[사천성四川省] 발굴 현장을 둘러보고 나서 한국을 막 방문한 직후였다.

그해 쓰촨성에서 출토된 수레바퀴 유물을 묘사한 요시유키 관장의 그림은 3년 전 신창동에서 발견된 목기木器 형태와 비슷했다.

 

조현종은 해당 유물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조사 결과 쓰촨성과 신창동 유물 모두 수레바퀴 살이 테에 연결될 때 S자로 살짝 꺾이는 형태까지 흡사했다.

바큇살이나 축만 나왔다면 판단이 애매할 수도 있었겠지만 고삐를 고정하는 가로걸이대[거형車衡]까지 확인된 것이 결정적이었다.

 

이에 따라 당초 의례용 기물로 알았던 신창동新昌洞 유물은 바큇살과 바퀴축, 가로걸이대였음이 뒤늦게 밝혀졌다.

발굴된 바큇살과 축의 곡률을 감안할 때 당시 수레바퀴의 지름은 약 165센티미터로 추정된다.

남한 유적에서 처음 확인된, 가장 오래된 열국시대 한韓의 수레바퀴였다.

세종시에서 발견된 열국시대 수레바퀴 흔적도 지름이 165센티미터 정도로 조사되었다.

앞서 북한의 평양 낙랑고분에서 서기전 2세기의 수레 유물이 발견된 적이 있다.

서기전 1세기대로 추정되는 신창동 수레와 100년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 셈이다.

 

학계는 흥분했다.

'마한 사람들은 소나 말을 탈 줄 모른다[부지승우마不知乘牛馬]'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이 맞는다면 당시 첨단 기술이던 수레 제조법을 외부의 특정 집단이 들여왔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중국 동북부에 살던 고조선 유민 집단이 한으로 이주했을 것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다.

고조선古朝鮮의 거수국이었던 기자箕子조선 준왕準王의 망명 기록을 토대로 기자조선 주민들의 이주 가능성도 제시되었다.

한반도 고대사 해석의 큰 흐름을 바꿀 수있는 획기적인 발견이었다.

조현종은 "중국과 멀리 떨어진 변방의 한 지역에는 수레바퀴가 없을 것이라는 게 당시 학계의 공통된 인식이었다"며, "신창동 수레바퀴는 문화적 상상력을 뛰어넘은 일대 사건이었다"고 말했다.

 

신창동 유적에서는 중국과 일본 열도를 비롯해 멀리 동남아시아와의 문화 교류 흔적도 나왔다.

한나라 무기인 철경부동촉鐵莖銅鏃[가운데 부분은 철이고 끝 부분은 구리로 만든 화살촉으로서, 흔히 철경동촉鐵莖銅鏃이라고 함]은 과 낙랑계 토기, 일본 야요이계 토기, 자작나무 껍질 제품 등이 발견된 것이다.

야자수 열매(코코넛)를 묘사한 나무그릇도 눈길을 끈다.

조현종은 "야자수 목기는 한韓이 멀리 동남아시아와 교류한 것을 보여준다. 동북아시아에만 국한하지 말고 시야를 넓혀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해 벼농사나 고인돌(지석묘) 발생 연구에서도 중국 남부와의 접점을 들여다보는 학문적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신창동 유물은 저습지 발굴 특유의 지난한 작업 끝에 나온 값진 결과물이었다.

땅속에서 수천 년 묵은 유기물이 밖으로 나왔을 때 급작스러운 부식을 막으려면 약품 처리와 습기 유지 등 꼼꼼한 준비가 필수다.

특히 땅 밖으로 노출된 목재 유물은 마치 연두부처럼 흐물흐물한 상태여서 바닥에 파일을 박아 통째로 흙을 떠낸 뒤 대나무 칼로 유물을 살살 떼어내는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이처럼 조심스럽게 발굴을 진행하다보니 신창동 유적에서는 가로 25미터, 세로 25미터 넓이의 유구遺構[옛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를 3미터 깊이까지 파내는 데에만 3년이 걸렸다.

저습지가 아닌 일반 발굴 현장에서는 같은 면적을 발굴하는 데 대개 2개월이면 충분하다.

 

유물 수천 점이 좁은 면적에 밀집해 묻혀 있다보니 작업의 긴장도나 몰입감도 높을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1997년 발굴 때 나무 판재 여러 개를 묶는 데 사용된 끈이 나왔지만, 습도 유지를 위해 분무기로 물을 뿌리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2015년에는 나무 팽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살짝 손상이 가는 바람에 조현종이 조사원들과 한동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저습지는 수시로 침수가 이뤄지기 때문에 바가지로 물을 퍼내면서 발굴해야 하는 어려움도 따랐다.

당시엔 전기를 끌어다 쓸 여건이 안돼 양수기를 가동할 수 없었다.

 

신창동 발굴에서 아쉬운 점을 묻자 조현종은 토양 조사를 꼽았다.

발굴할 때 파낸 흙을 체질해서 씨앗과 천 조각 등을 찾아냈지만, 좀더 많은 정보를 확보했어야 했다는 얘기였다.

그는 "신창동 유적을 계속 연구할 후학들은 '토양 자체가 정보의 보고'라는 사실을 명심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고고 유물의 보고寶庫, 저습지

 

저습지 유적은 고고학자들에게 하나의 기회로 통한다.

마치 타임캡슐처럼 저습지에는 수천 년 전 유물이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썩기 쉬운 나무나 풀, 씨앗 등 유기물도 저습지 안에만 있으면 원형을 유지할 수 있다.

연못이나 우물과 같은 습지 위에 흙이 뒤덮이면서 외부 공기를 차단해주기 때문이다.

사적 제375호 광주 신창동 유적 光州 新昌洞 遺蹟은 한국에서 저습지 발굴이 태동한 역사적인 장소다.

이 유적은 인근 극락강極樂江 방향으로 뻗은 완만한 구릉들 사이에 펼쳐진 퇴적층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 지형보다 고도가 낮다보니 자연스레 물이 고여 습지가 형성되었다.

 

<신창동에서 발굴된 독널(사진출처-출처자료1)>
<신창동에서 발굴된 독널(사진출처-출처자료1)>

신창동 유적에서는 1963년 서울대 발굴단이 53기의 독널무덤(옹관묘甕棺墓)[시체를 큰 독이나 항아리 따위의 토기에 넣어 묻는 무덤]을 확인했으며, 1992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어 20년 넘게 이어지고 있다.

특히 1990년대 발굴을 통해 독널무덤 안에 든 서기전 1세기의 열국시대 토기와 철기류 유물이 2000점 넘게 출토되었다.

이 지역 독널무덤은 영산강 유역 삼국시대 독널무덤 계보가 선사시대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가치가 크다.

 

<신창동 유적에서 출토된 베틀 유물. 방추차(아래 동그란 단추 모양)와 바디(위 칼날 모양) 등 부속품들이 한꺼번에 출토되었다.(사진 출처_출처자료1)>

당시 사람들이 먹고 버린 벼 껍질부터 현악기(슬瑟), 베틀, 문짝, 칠기漆器[옻칠한 나무 그릇], 목제 농기구, 비단 조각, 심지어 그들이 배설한 기생충 알까지 다양한 유기물이 한꺼번에 발견되었다.

기생충은 옛사람들의 식생활을 짐작할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실제로 신창동 유적에서는 어류에서 많이 발견되는 편충 알과 더불어 곡물을 섭취할 때 흔히 검출되는 회충 알도 발견되었다.

당시 주민들이 농사를 지어 곡식을 주식으로 삼은 도잇에 어류도 즐겨 먹었음을 알 수 있다.

 

발굴된 벼 껍질은 1.5미터의 두꺼운 층을 이루고 있었는데, 무게로 환산하면 약 500톤의 벼를 수확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벼농사 유적 가운데 이 정도 규모의 껍질층이 발견된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특히 고대 현악기인 슬과 베틀의 한 부분인 바디(위타구)가 발굴을 통해 실물로 확인된 것도 처음이다.

슬은 1999년 경북 경산시 임당동 고분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신창동 유물의 보존 상태가 더 좋다.

음악사 연구자들은 신창동 유적에서 발견된 슬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험께 수습된 바디에는 실의 마찰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이전까지 가락바퀴만 나왔을 뿐 실을 짜는 도구는 처음 확인된 것이어서 학계에서는 국보급 유물이라는 얘기도 오갔다.

이외에 씨뿌리기나 추수와 같은 다양한 농경 의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북도 출토되었다.

 

열국시대 고상高床가옥에 쓰인 참나무 문짝도 희귀 유물이다.

고상가옥은 오두막처럼 구덩이를 파고 나무 기둥을 세운 뒤 땅바닥 위로 띄워서 바닥을 올린 건물로서 전형적인 남방식 가옥이다.

신창동 발굴 이전까지 한반도 고상가옥 유적에서는 땅을 판 구덩이만 확인되었을 뿐 건물 부재가 나온 적은 없었다.

신창동 문짝은 나무 하나를 통째로 깎은 것인데, 빗장걸이가 들어가도록 홈을 판 손잡이가 달려 있다.

조현종은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고대 한반도 고상가옥의 얼개와 나무 가공 방식을 보여준 핵심 자료"라고 평가했다.

 

1997년 발굴 때는 유기물 유물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는 인골이 발견되었다.

전남대 의대 연구팀의 조사 결과 성인 여성의 뼈로 밝혀졌다.

의학 분석에 이어 목재 분류학 전문가인 김윤수 전남대 교수와 환경고고학 분야 대가인 질 톰슨 Jill Thompson 런던대 교수도 유물 분석에 힘을 보냈다.

 

신창동에서 확인된 목검木劍에 대해서는 실제 무기였는지 아니면 의례용품이었는지를 놓고 여전히 의견이 맞서고 있다.

이와 함께 나무로 된 신발 골[신발을 만들 때 일정한 모양을 잡거나, 뒤틀린 모양을 바로잡는 데 쓰는 틀]이 발견되어 서기전 1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사람들이 신발을 신고 다닌 사실도 확인되었다.

경남 창원시 다호리 유적보다 보존 상태가 양호한 부채 자루도 나왔다.

 

칠기와 함께 칠액이 담긴 용기가 발견된 것도 학술적으로 의미가 적지 않다.

특히 칠액 용기와 칠 주걱 등 작업 도구가 함께 발견되어 고대 칠기의 제작 과정을 유추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출토 당시 칠액 용기에서 2000년 전의 옻칠 냄새가 사방에 진동해 발굴자들이 취하는 느낌마저 받았다고 한다.

물론 칠액 대부분은 이미 증발된 상태였지만 마치 젤리처럼 굳어버린 고형분이 바닥에 남아 있었다.

칠은 옻나무 수액으로, 예로부터 동북아시아에서는 목재 용기에 광택을 내고 부식을 막기 위한 도료나 접착용으로 즐겨 사용되었다.

 

고대부터 칠기는 귀한 편이어서 지금도 발굴 현장에서 칠기가 나오면 수장급 주거지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앞서 전북 고창군 아산면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에서 청동기를 감싸는 옻칠 파편이 발견되었는데, 서기전 4세기 유물로 판명났다.

창원 다호리 15호 고분에서도 서기전 2세기의 칠기가 여러 점 발견되었다.

조선시대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에 신창동 유적 근처의 극락강을 칠천漆川으로 소개하고 있어, 이 지역이 고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칠기로 유명한 고장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이처럼 벼 껍질부터 신발 골, 빗, 부채, 나무 뚜껑, 칠기에 이르기까지 온갖 생활 흔적이 확인된 신창동 유적은 미시생활사微視生活史[개인이나 소집단의 삶을 탐색하여 기술한 역사] 복원의 종합 세트나 다름없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2000년 전 목기들이 신창동 유적에서 그대로 나와 당시 생활상을 세밀하게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처럼 신창동 유적은 한반도의 초기 철기시대 생활문화연구와 농경생활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고, 목제 유물을 통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어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신창동 발굴을 계기로 학계는 저습지와 환경이 흡사한 산성山城 해자垓字[성 주위에 둘러판 못]나 우물, 농경 유적 발굴에 적극적으로 나서 나뭇조각에 글씨를 쓴 삼국시대 목간木簡[글을 적은 나뭇조각]을 대거 찾아낼 수 있었다.

조현종은 고속도로와 국도 1호선 사이에 있는 신창동 발굴 현장을 둘러보며 "고고학자로서 운이 참 좋았다"고 말했다.

 

<신창동에서 발굴된 긴목 항아리와 바리(사진출처-출처자료1)>
<신창동에서 발굴된 청동제 칼자루끝장식(사진출처-출처자료1)>

※출처

1.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

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광주 신창동 유적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pageNo=1_1_1_1&ccbaCpno=1332403750000

 

2021. 4. 1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