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3: 이집트 신왕국 본문

글과 그림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3: 이집트 신왕국

새샘 2022. 3. 8. 14:19

서기전 1400년 무렵의 근동: 도시의 확산으로 우리의 지리적 초점을 얼마나 확대시켰는가? 지중해 동부 해안의 도시 증가를 눈여겨보라. 이것은 근동 지역에서 발생한 교역의 흥기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당시 주요 제국들과의 관계는 물론 에게해 해역의 신흥 문명과의 관계에서도 지역이 중심 역할을 했음을 유의하라. 후기 청동기시대 세계에서의 교역이 갖는 중요성은 어느 정도일까?(사진 출처-출처자료1)

 

고대 근동의 변화
셈어 Semitic 사용 민족의 수메르 Sumer 침입 서기전 2000년
인도-유럽어족의 근동 도래 서기전 2000년
아시리아인 Assyrian에 의한 교역 네트워크 조직 서기전 1900년
구바빌로니아 제국 Old Babylonian Empire의 흥기 서기전 1800년
히타이트 제국 Hittite Empire·카시테 왕조 Kassite Dynasty·미탄니 왕국 Mitanni Kingodm 의 성립 서기전 1800~1400년

 

 

1. 신왕국 이집트는 고왕국 및 중왕국과는 어떻게 다른가?

 

이집트 왕조와 시대 구분
왕조 이전 시기 서기전 1만 년경~3100년
초기 왕조 시기 서기전 3100년~2686년경
고왕국 서기전 2686년경~2160년
제1중간기 서기전 2160년~2055년
중왕국 서기전 2055년~1650년경
제2중간기 서기전 1650년경~1550년
신왕국 서기전 1550년~1075년

 

이집트는 서기전 2천년기 초 왕조 교체로 인해 변화를 겪었다.

제1중간기를 거치는 동안 서아시아의 누비아 Nubia 출신 외국인들이 대규모로 '우주의 중심'인 이집트에 밀려들었다.

일부는 이주자로, 또 다른 일부는 용병으로 들어왔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이집트를 대규모 군사적 침공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중왕국 파라오가 서기전 2000년 직후 테베 Thebes에서 중앙정부를 회복했을 무렵에는 과거 고왕국 이집트인이 마아트 Ma'at에 대해 가졌던 확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중왕국 이집트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곳이었다.

그들은 더 이상 국경 밖의 사건을 느긋하게 무시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누비아·시나이 Sinai·중동 Middel East에 적극 개입하는 제국 세력도 될 수 없는 자신들의 위상을 불안하게 느끼고 있었다.

모든 지역과의 상업적 접촉은 점점 확대되면서 그 지역들에 대한 이집트의 영향력은 점점 커졌지만, 그 어느 것도 중왕국 이집트인들에게 안정감을 갖게 만들지는 못했다.

 

중왕국 이집트의 걱정거리는 서기전 1700년 이후에 더욱 커졌다.

그 무렵 이집트는 힉소스인 Hyksos―'외국 땅의 지배자'라는 뜻의 이집트어 '헤카 카수트 heka khaswt'를 그리스어로 옮긴 말이라는 외국 군대에게 정복당했다.

힉소스인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중동에서 온 셈어를 말하는 민족 Semitic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동부 삼각주에 왕국을 건설한 다음 하이집트 지역 대부분을 지배했다.

이런 정복과 더불어 이집트의 중앙 권력은 다시 한 번 무너졌고 이집트는 제2중간기(서기전 1650년경~1550년)에 돌입했다.

 

우리는 힉소소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 않다.

그리고 우리가 갖고 있는 지식 대부분은 후대에 전해진 이집트인의 지극히 과장된 선전에 기반한 것들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들이 파라오의 정부를 접수했고 이집트의 선례를 끌어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했다는 점이다.

일부 힉소스 지배자들은 자기 이름에 이집트의 태양신 '라 Ra'를 붙이기도 했다(반면 후대 이집트인은 그들을 '라 없이 지배한 자들'이라고 불렀다).

힉소스인은 에게해 Aegean Sea 유역, 시리아 Syria, 팔레스타인 Palestine 등과의 긴밀한 경제적·외교적 유대를 이어가면서 많은 부분 외래문화를 이어갔다.

하지만 남부 상이집트에서는 힉소스인의 지배권이 완벽하지 못했다.
이따금 북부의 이방인 힉소스인의 종주권을 인정해야 하는 상황이긴 했지만, 남부의 테베에서는 토착 파라오 체제가 미약하나마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다.

 

힉소스인의 지배권은 1세기가량 지속되었는데, 이것은 후대에 이집트 역사의 크나큰 수치로 여겨졌다.

무르실리스 Mursilis가 암살당한 후 힉소소인이 이집트를 근동 최강국의 위치로 끌어올렸음에 불구하고 말이다.

한편 힉소스인의 이집트 정복으로 인해 남쪽의 누비아인은 이집트 지배에서 벗어나 쿠시 Kush란 독립 왕국을 수립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테베의 토착 파라오 왕조 입장에서 남쪽 상이집트의 쿠시 왕국이 더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이 위협이 오히려 남쪽의 상이집트 테베 파라오들에게 민족주의 감정을 분출시킴으로써 북쪽 하이집트 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가증스런 힉소스인에 맞선 해방 전쟁에 나서게 만든 또 하나의 동기가 되었다.

테베 파라오의 전략은 궁극적으로 성공을 거두었다.

서기전 16세기 말 남부의 파라오 아모세(아흐모세) Ahmose는 침략자를 물리치고 제18왕조를 수립함으로써 이집트 역사의 새 장을 열었다.

 

 

2. 신왕국 

 

이집트 제국 Egyptian Empire으로도 불리는 신왕국 New Kingdom(서기전 1550~서기전 1075) 시기의 이집트 문명은 장엄함과 권력의 절정 이르렀다.

기존의 종교적·경제적·문화적·정치적 삶이 이어지긴 했지만, 신왕국은 이집트 역사와 문화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루었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초점을 맞춘 신왕국의 역동성은 이집트의 모든 부분을 변화시켰다.

 

1) 제18왕조 파라오의 지배

 

미국 뉴욕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아모세 1세 상(사진 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Ahmose_I)

제18왕조 Eighteenth Dynasty(서기전 1550~서기전 1292)는 이집트를 250년 이상 지배했다.

이 시기에는 현저한 변화가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집트 사회에 새로운 형태의 귀족이 생겼다는 점이다.

새로운 귀족계급은 군사령관과 장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의 부는 전쟁을 통해 얻어졌는데, 약탈에 의한 것이거나 봉사의 대가로 파라오에게서 받은 왕실 소유지(노예 포함)도 있었다.

 

제18왕조는 전투를 통해 세워졌다.

아모세 1세 Ahmose I(재위 서기전 1550~1525)는 힉소스인을 물리치고 이집트를 재통합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 뒤 아모세 1세와 그의 계승자들은 남쪽 누비아에 관심을 돌렸다.

그 무렵에는 금이 근동의 상업과 재무의 표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집트가 번영을 도모하려면 누비아의 풍부한 금광을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투트모세 1세 Thutmose I(재위 서기전 1504경~1492) 치세에 이집트인은 동북쪽으로 진출하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 지역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위대한 파라오는 남으로 나일강 상류의 제4폭포에서 북으로 유프라테스강 기슭에 이르는 영토를 지배했다.

과거의 어떤 파라오도 그토록 광대한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의 성공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이집트인은 향후 400년 동안 북쪽의 중동 및 근동에서 군사적 우월성을 유지했다.

남쪽 누비아인의 쿠시 왕국(지금의 수단 Sudan 지역)에서는 투트모세가 사망한 뒤 1세기가 넘도록 파라오들이 거대한 신전 및 조각상 조성 사업을 수행하고 있었다.

 

신왕국 파라오들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단호한 전략을 구사했다.

힉소스의 지배라는 당혹스런 사태를 경험한 그들은, 또 다른 침입에 대비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위험지역에서 적극적으로 이집트의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동일한 사태의 재발을 막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이집트인은 또한 힉소스인이 구사한 전투 전술을 부분적으로 채택했다.

힉소스인이 이집트인을 상대로 사용했던 말이 끄는 전차를 새로운 적에 맞서 싸우는 효과적 수단으로 활용한 것이다.

 

2) 하트셉수트 여왕과 투트모세 3세

 

군사활동은 제18왕조의 위기가 될 수도 있었던 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서기전 15세기에 절정에 달했다.

서기전 1479년 투트모세 2세 Thutmose II가 젊은 나이로 죽고 미래의 투트모세 3세가 후계자가 되었다.

종전 같았으면 이런 사태는 흔히 정치적 불안정이나 왕조 교체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때 제18왕조에서는 가족 정치의 탁월한 개인 역량이 결속력과 연속성을 강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신왕국에서 신의 현현顯現[명백하게 모습을 드러냄]으로 인정받는 파라오는 자격 갖춘 여성을 공식 왕비로 취하는 관습이 있었다.

새로 즉위한 파라오는 선왕의 딸, 즉 자신의 누이나 의붓누이와 결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남매의 결합만이 후계자를 생산하는 통상적 방법은 아니었다.

파라오는 후처와 첩들로 이루어진 대규모의 하렘 harem[거룩한 불가침의 장소라는 뜻을 가진 집안의 공간으로서 아내, 첩, 여성 노예 등 가족의 여성 구성원들이 거주]을 거느리면서 그들을 통해 후손을 보았던 것이다.

투트모세 2세가 그랬다.

그의 왕비는 누이인 하트셉수트였지만,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후계자인 아들을 얻었다.

 

투트모세 2세가 죽자 왕비 하트셉수트 Hatshepsut는 자신의 의붓아들이자 조카인 2살난 아기 후계자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이 되었다.

미망인이 된 왕비가 섭정 노릇을 하는 것은 신왕국에서는 흔한 일이었는데, 이는 이집트 여성이 다른 고대 근동 문화권 여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렸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트셉수트의 경우 주목할 일은, 섭정이 된 지 몇 해 되지 않아 그녀 스스로 파라오(재위 서기전 1479경~1458)임을 선언했고 그림과 조각 등에서 스스로를 파라오의 특징인 남성적 외모와 가짜 수염을 붙인 형상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남자인 체하지도 않았고―조각상과 초상화에 새겨진 비문에는 그녀가 여성임이 항상 명기되어 있다―투트모세 3세의 왕좌를 찬탈하지도 않았다.

투트모세 3세는 계속해서 그녀와 공동 지배자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세 3세가 공동 통치하던 20년 동안 그녀는 정부 내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그녀의 정치적 수완은 제18왕조와 이집트가 유지되는 데 있어 결정적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에 걸친 성공적인 군사 원정이 그녀의 이름으로 기록되었고, 후대의 이집트 장인들이 1천 년 동안 모방하게 될 표준을 만들어낼 정도로 예술이 활짝 꽃을 피웠다.

 

하트셉수트 여왕 시절에 건립된 장제전(사진 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Hatshepsut)

그러나 그녀를 가장 유명하게 만든 것은 장엄한 장제전葬祭殿 mortuary temple이었다.

고대 이집트 건축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히는 이 장제전에는 자신 하트셉수트 여왕과 그녀의 부왕인 투트모세 1세가 묻혀 있다.

하트셉수트 여왕 이후 신왕국에서 이토록 무덤을 드러내놓고 눈에 띄게 조성한 파라오는 거의 없었다.

오히려 파라오들은 테베 부근의 저 유명한 왕들의 계곡 Valley of the Kings에 묻히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었다.

왕들의 계곡은 멀리 떨어져 있어서 파라오들의 무덤을 숨기기에도 좋고 도굴되지 않으리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투트모세 3세 Thutmose III[재위 (공동)서기전 1479~1458, (단독)서기전 1458~1425]는 서기전 1458년 하트셉수트 여왕이 죽을 때까지 그녀의 그늘에 묻혀 살았다.

그 뒤 그는 30년가량을 더 통치하다가 죽었다.

치세 말년에 그는 자신이 언제나 단독으로 지배했다는 인상을 남기기 위해 하트셉수트의 기념물들을 손상시키고 비문에서 그녀의 이름을 지웠다.

이렇듯 배은망덕하기는 했지만 투트모세 3세는 위대한 파라오였다.

그는 모두 17번에 이르는 군사 원정을 감행해 팔레스타인 깊숙한 곳에 있는 메기도 Megiddo를 장악하고 이곳을 전략 거점으로 삼았다.

그는 여세를 몰아 시리아 해안에 있는 주요 항구들을 점령했다.

그의 아들 아멘호테프 2세 Amenhotep II(재위 서기전 1427~1401)는 부왕의 시리아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오론테스강 Orontes River[레바논에서 발원하여 북으로 흘러 시리아를 거쳐 터키 국경을 이룬 다음 서남쪽으로 터키를 거쳐 키프로스 섬 북동쪽 지중해로 유입]을 건너 이집트의 지배권을 시리아 내륙 지방까지 확대했다.

 

이들 원정은 이집트의 세력을 증대시키려는 의도뿐만 아니라 북부 시리아의 미탄니 왕국 Kingdom of Mitanni의 경제적·군사적 세력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 점에서 원정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아이러니한 결과가 초래되었다.

미탄니 왕국의 세력이 너무나 약해짐으로써 히타이트인 Hittite이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야심을 다시 드러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아시리아인 Assyrian 역시 미탄니 왕국의 예속 상태를 벗어남으로써 그후 이집트에 대해 미탄니인보다 훨씬 더 강한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미탄니 왕국 멸망이 미치는 장기적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제18왕조는 군사적 성취의 기쁨만을 마냥 만끽할 뿐이었다.

 

투트모세 3세와 아멘호테프 2세 덕분에 얻은 어마어마한 권력과 부에 대해 제18왕조는 단호함과 잔인성으로도 이름이 높았다.

그러므로 '대왕 The Magnificient'으로 알려진 아멘호테프 3세 Amenhotep III(재위 1390경~1352)는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처럼 군사적 정복활동을 굳이 할 필요가 없었다.

그의 임무는 이집트가 이미 확보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기왕에 획득한 경제적·외교적 이점을 활용하는 것이었다.

아멘호테프 3세는 그 일을 노련하고 차분하게 수행했다.

파라오는 케프티우 Keftiu―흔히 성경에 나오는 '갑돌 Caphtor'인 키프로스인 것으로 말하지만 크레타일 가능성이 크다― 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영역에서 공물을 받았다.

그는 미탄니인과 조약을 체결하고 최소 두 명의 미탄니인 공주를 자신의 하렘에 받아들였다.

아메호테프 3세는 근면함을 계속해서 유지하고 외교적 이익을 관리하면서 선조들이 투입한 노력한 열매를 거두어들이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일이 없었다.

 

 

3. 종교적 변화와 종교적 도전

 

제18왕조의 위대한 정복은 이집트에 막대한 전리품을 가져다 주었다.

이렇게 축적된 부의 상당 부분은 거대한 사원과 무덤, 각종 기념물과 곳곳에 세워진 기념 돌기둥(석주石柱)들―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많은 역사 정보를 제공해준다 을 통해 파라오 개인을 찬양하는 데 쓰였다.

또한 약탈물의 상당 부분은 정복활동을 수행한 군사 귀족계급에게 돌아갔다.

그러고도 남은 상당량의 재화는 이집트의 성공에 대한 감사 제물로 신들을 위해 사용되었다.

이집트 전 지역의 신전은 정복의 혜택을 한껏 누렸고, 신전이 부유하고 강력해지자 사제도 부유하고 강력해졌다.

하지만 그 어떤 신전도 테베 Thebes의 아몬 Amon 신전만큼 대단하지는 않았다.

 

1) 아몬 신전

 

흔히들 카르나크 신전 Karnak Temple이라 불리는 카르나크에 있는 아몬 신전(사진 출처-https://ko.theplanetsworld.com/1959-karnak-temple-complex-of-karnak-egy-qena-karn-ko)

테베는 제18왕조의 수도였다.

그러므로 아몬 Amon은 그 도시의 수호신으로서 왕조의 정체성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아몬은 단순한 지방신 이상의 존재였다.

중왕국 이집트를 거치면서 아몬의 능력과 인기가 증대되면서 점차 태양신 라 Ra와 동일시되거나 통합되었다.
그 결과 신왕국에서 아몬-라 Amon-Ra로 공식화되었다.

서기전 1550년에 이르러 아몬-라는 마치 이집트의 민족신처럼 되었고, 테베에 기반을 둔 제18왕조는 아몬-라를 중심으로 이집트인을 결속시켜 힉소스와 맞서 싸웠다.

그러므로 신왕조는 아몬에게 감사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아몬의 도움이 이집트 재통일에 결정적으로 기여했기 때문이다.

 

테베의 아몬 신전에 베풀어진 각별한 은전과 그곳에 맡겨진 막대한 부 때문에 아몬 사제들은 강력한 정치적·경제적 세력이 되었다.

아멘호테프 3세 치세 말에 아몬 신전 사제계급은 관료계급을 능가하는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고, 사제가 파라오 궁정의 유력 인사가 되었다.

왕조의 명성은 아몬의 명성과 완벽하게 일치했지만, 그런 관계 속에서 주도권이 어느 쪽에 있는가는 불투명해지기 시작했다.

 

2) 아케나텐 치세(서기전 1352~1336)

 

이집트 박물관의 아케나텐 상(사진 출처-Wikipedia https://en.wikipedia.org/wiki/Akhenaten)

이 모든 요인이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한 인물에게서 운명적으로 교차했다.

아멘호테프 3세가 죽자 그의 아들 아멘호테프 4세 Amenhotep IV가 뒤를 이었다.

아멘호테프 4세는 일찍이 아몬 숭배보다 태양신 숭배에 기울어져 있었다.

아멘호테프 4세의 초기 비문에서 태양신 라는 아몬의 일부가 아닌 태양광으로 표현된 별도의 신으로 찬양되었다.

라에게 헌신한 아멘호테프 4세는 라의 상징으로서 전통적인 매(또는 매의 머리를 한 남자)의 형상 대신 아텐 Aten―아텐은 태양 그 자체이며 그 빛은 땅을 향해 비친다―을 내세웠다.

그런데 아멘호테플 4세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훨씬 더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자기 이름을 '아몬이 기뻐한다'란 뜻의 아멘호테프 Amenhotep에서 '아텐에게 이익이 되는 사람'이란 뜻의 아케나텐 Akhenaten으로 바꿨다.

아케나텐이 된 그는 북쪽의 멤피스 Memphis와 남쪽의 테베 중간에 새로운 수도를 세우고 아케타톤 Akhetaton[아텐 신의 효력이 미치는 곳]―지금의 엘-아마르나 el-Amarna이라 명명했다.

그래서 대단히 독특하고도 단명했던 이 아케나텐 치세는 오늘날 아마르나 시대로 불린다.

 

아케나텐은 이집트 종교와 문화에 많은 혁신을 가져왔다.

아텐 숭배는 아몬 숭배에 비해 엄격한 일신교였다.

테베의 아몬 신학이 아몬 이외의 신들을 아몬의 다양한 국면으로 인식했던 반면, 아케나텐은 오로지 아텐에 의해 구현된 빛의 생명력만을 인정했다.

아텐은 고대 이집트의 신들과는 달리 예술적 기법으로 포착하거나 묘사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아텐의 이미지―아마르나 시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는 '빛'에 해당하는 이집트 상형문자를 정교하게 다듬어 표현했다.

아텐 신의 손에 쥔 앙크(사진 출처-http://ankh.kr/product/%EC%95%99%ED%81%AC/559/)

생명에 대한 긍정은 아케나텐 종교개혁의 핵심이었다.

아텐은 태양에서 뻗어나간 광선들 끝에 손이 달린 모습으로, 각각의 손은 '생명'을 의미하는 고대 이집트의 상형문자 앙크 ankh를 쥐고 있었다.

아케나텐은 자신의 초상화를 기이한 모습으로 그리게 했는데, 이런 독특한 표현이 이데올로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 자신의 신체 특성을 반영한 것인지는 불분명하다.

아케나텐의 모습은 선조 파라오들의 확신에 찬 남성적 모습과는 전혀 달리 목과 팔이 길고 코가 과정되었으며 입술은 이례적으로 통통했다.

그의 눈은 고양이 눈 같고 앞으로 나온 배는 임신한 여성의 조각상을 연상시킨다.

전반적인 느낌은 남자와 여자의 생식기를 둘 다 가지고 있는 사람인 양성구유 兩性具有 같지만, 그 의미는 의문이다.

아케나텐은 분명 가정적인 사람이었고 아름다운 왕비 네페르티티 Nefertiti와 함께 자녀들과 놀아주기를 좋아하는 매우 인간적인 파라오로 그 자신을 표현했다.

아마르나 시대에는 지극히 인간적인 분위기가 넘쳤는데, 그것은 초기의 파라오 묘사와 비교하면 다분히 '평민적인' 것이었다.

 

아케나텐이 종교적·문화적 혁명을 단행한 동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아직도 논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그가 전통의 굴레를 벗어던지기 위해 비범한 상상력과 통찰력을 실천에 옮긴 세계 최초의 혁명적 지식인이라고 간주한다.

다른 학자들에 따르면 그는 태양신 라가 아몬에 흡수·통합된 것을 탐탁치 않게 여긴 나머지 전통적 태양신 숭배를 재천명하고자 한 반동적 인물이었다.

또 다른 학자들은 그가 새로운 종교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아몬 신전 사제들의 영향력을 박탈하고자 한 주도면밀한 정치가였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이런 다양한 해석이 상호 배타적인 것은 아니다.

정치와 종교는 고대 근동에서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었고, 그리스와 로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자신의 왕조를 아텐과 동일시했다는 것은 아케나텐의 종교혁명이 정치혁명이기도 했다는 점을 입증한다.

왜냐하면 아케나텐 혁명은 왕조의 정당성을 새로운 토대 위에 재정립할 것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아케나텐은 이런 혁명을 위해 엄청난 노력을 쏟았지만 대부분의 이집트인은 그를 따르지 않았다.

우리 관점에서 볼 때 전통적인 이집트 종교는 지극히 복잡 미묘한 것이었다.

하지만 분명 이집트인은 파라오가 자기들에게 주고자 했던 고매하고 자비롭되 비인격적인 신보다는 전통적 종교를 더 선호했다.

강력한 아몬 사제집단도 아케나텐의 종교혁명에 완강하게 저항했다.

사태를 더욱 꼬이게 만든 것은 아케나텐이 군사 문제에 무관심했다는 사실이다.

새로운 신을 위해 너무나 헌신한 나머지 그는 이집트의 대외적인 이익을 등한시했다.

반란이 뒤따랐고 아케나텐은 군사 귀족의 지지를 잃었다.

결국 아케나텐의 혁명은 실패로 끝났다.

 

아케나텐의 실패는 제18왕조 쇠퇴의 전조였다.

아케나텐가 죽은 다음 잠시 동안 스멘크카레 Smenkhkare가 뒤를 이었지만, 궁극적으로 아케나텐을 계승한 인물은 투탕카텐Tutankhaten(재위 서기전 1333~1323)이었다.

투탕카텐은 이름을 투탕카멘(투탕카) Tutankhamun으로 바꿨는데, 이는 아케나텐의 이단을 거부하고 아몬과 그 사제계급을 복원시켰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아케나텐의 새로운 수도 아케타톤은 버림받았고 그에 대한 기억은 저주받았다.

그 도시가 오늘날에도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까닭은 그 후 아무도 그곳에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케나텐은 단지 '아케나텐 이단'으로만 후대에 기억되었다.

그의 기념물은 전국적으로 파손되었다.

피해가 막심했다.

 

아케나텐 치세가 끝난 뒤 이집트의 국제적 위상은 놀라울 정도로 추락했고, 투탕카멘은 병약한 10대 소년이었다.

소년 왕이 요절하고 난 뒤 혼란기를 거쳐 서기전 1323년 군사령관 호렘헤브 Horemheb가 왕좌에 올랐다.

호렘헤브는 약 30년 동안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지만 아들이 없었다.

그는 또 다른 장군인 람세스 1세 Ramesses I에게 왕위를 넘겼다.

람세스는 제19왕조의 창시자로서 근동 지역에서 이집트의 영광을 되살렸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3. 8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