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7: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6장 결론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6장 그리스도교와 로마 세계의 변화 7: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 6장 결론
새샘 2023. 5. 10. 20:05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한 로마 제국 부흥(527~568년) | |
유스티니아누스 치세 시작 | 527년 |
<로마법 대전> 공표 | 529~534년 |
북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정복 | 533년 |
이탈리아 재정복 | 536년 |
고트족 마지막 전진기지 격파 | 563년 |
지중해 세계 지배 | 563~565년 |
유스티니아누스 사망 | 565년 |
롬바르드족의 북이탈리아 정복 | 568년 |
524년 보이티우스 Boethius가 동고트 왕국의 테오도리쿠스 Theodericus 대왕에게 처형당한 것은 여러 면에서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이었다.
보이티우스는 탁월한 철학자이자 세련된 라틴어 문장가였다.
서유럽은 보이티우스만 한 철학자와 문장가를 향후 몇 백 년 동안 배출하지 못했다.
또한 보이티우스는 평신도였는데, 이는 보이티우스 이후 몇 백 년 동안 서유럽의 거의 모든 저술가가 사제 또는 수도사였다는 점과 대조된다.
보이티우스의 처형은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의 정치적 붕괴를 알리는 시간이었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아리우스파와 가톨릭 그리스도교도가 야만화된 서유럽에서 공존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얼마 후 동고트 왕국은 동로마 제국에 의해 멸망되었다.
한편 동고트 왕국의 멸망은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을 궁극적으로 결별시킨 요인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옛 로마 세계를 결정적으로 해체시킨 중대한 요인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에 의한 로마 제국 부흥 노력
동고트족 정복은 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Iustinianus(재위 527~565)가 기획하고 주도한 거대한 로마 부흥계획의 일환이었다.
수도를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라틴어: 콘스탄티노폴리스 Constantinopolis)에 둔 동로마 제국은 테오도시우스 대제 Theodosius the Great(재위 379~395) 이래로 외부적으로는 야만으로부터의 압력에, 내부적으로는 종교 불화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는 이러한 침략과 분열을 잘 건뎌내고 정치적·경제적 통일성을 유지했다.
동로마 제국―오늘날의 그리스, 터키, 중동 대부분, 이집트―은 그리스어 Greek와 시리아어 Syriac를 사용한 반면, 유스티니아누스는 서부 속주(오늘날의 세르비아 Serbia) 출신이었고 라틴어를 사용했다.
그는 자신을 로마 제국의 상속자라고 생각했고, 로마가 누렸던 권력의 회복과 서로마의 재탈환을 열망했다.
기민하고 결단력 있는 황후 테오도라 Theodora―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 대단히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의 도움으로 유스티니아누스는 서로마를 탈환하고 로마 제국을 회복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했다.
그의 노력은 궁극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의 활동은 지중해 세계 전역에 항구적인 영향을 미쳤다.
○로마법 편찬
유스티니아누스 Iustinianus의 가장 중요하고도 영속적인 업적 가운데 하나는 로마법을 편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옛 로마 제국과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한 시도의 일환이자 자신의 위신과 절대권력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법률의 편찬은 반드시 필요했다.
왜냐하면 3세기와 6세기 사이에 법령의 양이 계속 불어나서 방대한 규모의 법규 중에는 서로 모순되거나 이미 쓸모없게 된 요소가 많아졌고, 더욱이 주변 환경이 급격히 변화되어 옛 법률 중 상당수가 더 이상 적용될 수 없었다.
527년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위에 오르자마자 즉각 법률을 개정하고 체계화해 새로운 환경과 조화를 이루도록 하고, 그것을 확고한 통치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이 작업을 추진하기 위해 그는 법무장관인 트리보니아누스 Tribonianus의 주관 아래 법전편찬위원회를 구성했다.
위원회는 2년 만에 노력의 첫 결과물인 ≪칙법휘찬勅法彙纂 Codex Constitutionum≫(529)을 발표했다.
이 법전은 하드리아누스 Hadrianus 치세(재위 117~138)부터 유스티니아누스 치세에 이르기까지 공표된 모든 법률을 체계적으로 개정했다.
그 후 이 법전의 부록으로 ≪신칙법新勅法 Novellae Constitutiones post Codicum≫(534~565)≫이 편찬되었다.
≪신칙법≫에는 유스티니아누스와 그 직후 계승자들이 제정한 법률이 포함되었다.
532년 위원회는 위대한 법학자들의 저작들을 간추린 ≪학설휘찬學設彙纂 Digesta≫을 완성했다.
위원회의 마지막 결과물인 ≪법학제요法學提要 Institutiones≫는 ≪학설휘찬≫과 ≪칙법휘찬≫에 반영된 법적 원리를 담은 교과서였다.
이들 네 법전―≪법학제요≫, ≪학설휘찬≫, ≪신칙법≫, ≪칙법휘찬≫―을 합쳐서 ≪로마법法 대전大典 Corpus Juris Civilis(영어: Body of Civil Law)≫이라고 부른다.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은 찬란한 업적이었다.
≪학설휘찬≫ 하나만으로도 "당시까지 전 세계에 출간된 모든 법률서 중 가장 뛰어나고 중요한 책"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다.
≪로마법 대전≫은 그 후 동로마에서 모든 법적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반면 서유럽에서는 ≪로마법 대전≫이 처음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중세 초기 법률의 대부분은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450)가 5세기에 편찬한 법률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의 ≪로마법 대전≫은 12세기 이후 서유럽에서도 철저히 연구되었다.
그것은 행정 업무는 물론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 유럽의 법률체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19세기의 ≪나폴레옹 법전≫(프랑스, 에스파냐, 라틴아메리카의 상당 부분, 미국 루이지애나 주 등에서 지금도 통용되고 있다)은 근본적으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학제요≫에 현대적인 옷을 입힌 것에 불과하다.
≪로마법 대전≫은 서양의 정치사상에 지극히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군주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은 법적 강제력을 갖는다"는 격언에서 보듯이 이 법전은 황제에게 무제한의 권능을 허용했고, 그 결과 중세 말기와 근대 초기의 유럽 지배자들은 절대주의의 근거로서 이 법전을 채택했다.
그러나 ≪로마법 대전≫은 입헌주의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했다.
왜냐하면 이 법전은 주권자의 권력이 인민에 의해 위임된 것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통치권이 인민에게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론상으로는 인민에게 통치권을 되돌려주는 것도 가능했다.
또한 ≪로마법 대전≫이 국가를 오늘날의 법인法人처럼 하나의 추상적 실체로 파악했다는 점은 대단히 중요하고 커다란 영향을 남겼다.
중세의 국가관에 따르면, 국가는 지배자의 사유물 또는 죄악 통제를 위한 초자연적 고안물이었다.
국가를 그 나름의 이해관계와 목적을 지닌 공적 실체로 바라보는 현대의 국가 개념은 중세 말기에 ≪로마법 대전≫의 정신이 부활하면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의 군사 정복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제국 재정복 사업은 처음에는 성공적이었다.
533년 유스티니아누스의 유능한 장군 벨리사리우스 Belisarius는 서북 아프리카의 반달 왕국 Vandal Kingdom을 정복했고, 536년에는 이탈리아 동고트 왕국을 정복하는 듯했다.
이탈리아에서 동고트 왕국 Ostrogothic Kingdom 가톨릭 신민의 환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원정의 초기 성공은 허망한 것이었다.
전쟁은 몇 십 년을 질질 끌다가 563년에야 기진맥진한 동로마군이 고트족 Goths의 마지막 전초기지를 항복시켰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이미 서북 아프리카와 에스파냐 해안 지역을 재정복했기 때문에, 565년 그가 사망할 무렵 지중해는 다시 한 번 '로마의 호수'가 되었다.
그러나 재정복에 쏟아 부은 비용이 너무나도 컸으므로 곧 동로마 제국의 존립마저 위태로울 지경에 빠지고 말았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원정은 두 가지 실책을 범했다.
첫째는 엄청난 비용이었다.
벨리사리우스는 작전 수행을 위한 충분한 병력을 거느려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는 고작 8천 명의 병력으로 이탈리아 원정을 시작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장군들이 필요로 하는 병력을 조달하기 위해 강압적으로 세금을 징수했고, 그 조치는 이집트와 시리아 같은 핵심 지역 주민들의 제국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시켰다.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삼위일체 교리를 신봉하는 그리스도교도들마저 해방의 대가로 자신들이 치러야 할 비용에 분노했다.
둘째는, 유스티니아누스가 서로마 원정에 집중하느라 동로마 본국에 다가온 위험―특히 페르시아의 세력 강화―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유스티니아누스의 계승자들은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에 투입된 병력을 빼내야만 했다.
이 조치로 인해 서로마의 두 지역이 모두 야만인의 추가 침공 위험에 노출되었고, 게다가 빼낸 병력은 동로마 제국의 안전을 보장하기에도 충분치 못했다.
610년 이후 동로마 제국은 영웅적인 한 황제의 노력에 의해 제국을 재편함으로써 페르시아에 의한 멸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보게 되듯이, 이런 재편의 결과 지중해 동부 세계와 서부 세계를 재통합하려던 유스티니아누스의 꿈은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제국 재정복의 영향
유스티니아누스가 벌인 정복 전쟁은 이탈리아 북부와 중부 지역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로마 부근의 수로들이 끊겼고 일부 농촌 지역은 늪으로 되돌아갔다.
그 땅 가운데 일부는 20세기에 들어서야 다시 배수가 이루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가 사망하고 3년이 지난 568년에 또 다른 게르만 부족 Germanic tribe인 롬바르드족 Lombards이 혼란을 틈타 이탈리아를 침공해 북부 지역―이탈리아 반도의 3분의 1에 해당―을 정복했다.
그 후 이탈리아는 북부의 롬바르드족, 남부의 동로마, 그리고 이들 둘 사이에 위태롭게 자리 잡은 교황 영지 등으로 나뉘어졌다.
이와 같은 북부·중부·남부 이탈리아의 분열상은 19세기까지 이탈리아 정치사의 특징으로 남게 되었다.
동로마의 북아프리카 지배는 이탈리아 지배보다 불과 몇 세대 더 지속되었을 뿐이다.
종교적 분쟁과 과중한 세금으로 허약해진 이 지역은, 이집트 및 로마 지배하의 다른 아프리카 지역과 더불어 7세기에 이슬람 침략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 후 그리스도교는 북아프리카에서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지중해 북쪽에서 유스티니아누스가 지중해 해안 지역을 정복하긴 했지만, 서고트 왕국 Visigothic kingdom은 여전히 에스파냐 내륙 지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동로마 제국 군대가 떠난 뒤 서고트족 Visigoths은 그들이 예전에 지배했던 해안 지역을 다시 접수했다.
그러나 아리우스파인 서고트족과 그들의 가톨릭 신민 사이의 긴장은 587년 이후에도 계속되었다(서고트 왕 레카레드 Recared는 587년 마침내 정통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
서고트족 왕들, 그들의 가톨릭 주교들, 그리고 지중해 해안 지역의 로마화된 주민들, 이 세 집단 사이의 적대감은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는 날까지 이어졌다.
서고트 왕들은 비잔티움 Byzantium을 모범으로 삼아 지배하려고 노력했지만, 서고트 왕국은 8세기 초에 무슬림 Muslim 군대가 지브롤터 해협 Strait of Gibraltar을 건너오자 급속히 붕괴하고 말았다.
8세기 말에 이르면 그리스도교 지배자들은 이베리아 반도 Iberian Peninsula의 북쪽 끝 지방과 바르셀로나 Barcelona 인근 지역만을 지배하고 있었다.
향후 300년 동안 에스파냐 España는 무슬림 세계의 중요한 부분으로 편입되었다.
6장 결론
건국 초기부터 로마는 정복한 지역의 다른 문화를 흡수하는 데 비상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그 과정에서 로마와 제국은 서서히 변화를 겪었다.
그러나 변화의 속도는 3세기 중반부터 현저히 빨라졌다.
그러므로 오늘날 역사가들은 3세기 중반부터 7세기 초까지를 그 이전의 고전기 로마 세계와 구분해 '고대 말기'라고 부르곤 한다.
이 기간에는 종전보다 훨씬 많은 이주자가 로마 제국으로 밀려들어왔다.
그들은 토지와 기회를 갈망했으며 로마의 물질적·문화적 혜택에 동참하기를 열망했다.
특히 서로마 제국에서는 4세기와 5세기에 새로운 이주자의 수가 급증했고, 그 결과 제국의 변경 지역과 중심 지역 사이에는 더 이상 차이점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같은 시기 국내의 문화적 상황은 로마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그리스와 로마 세계의 교양과 문화는 서서히 더 많은 사람들에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교양과 문화는 점점 더 품격이 떨어졌다.
마침내 제국은 그리스도교화되었다.
그리스도교화의 첫 단계는 설득에 의해 이루어졌다.
콘스탄티누스 Constantinus(재위 306~337)와 그의 후계자들로 인해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로의 개종을 매력적인 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화의 다음 단계는 강제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리스도교는 마침내 전체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 문화와 로마 말기 통치방식 사이의 새로운 융합 움직임이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황궁뿐만 아니라 숙주에서까지 전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대 말기 세계의 지중해 중심적 성격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서로마 제국에 새로운 정치적 단위들이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5세기와 6세기의 로마 문명은 확고하게 지중해에 중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또한 곧 변화를 겪게 되었다.
7세기에 접어들어 지중해 세계의 통일성은 마침내 깨졌고, 그 자리에 지극히 상이한 세 개의 서양 문명―비잔티움 Byzantium, 서유럽 Western Europe, 이슬람 Islam―이 등장했다.
그것은 고전 세계에 종말을 고하고 중세의 출발을 알리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제 중세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차례가 된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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