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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101 - 호두나무

새샘 2026. 7. 18. 22:21

호두나무 잎과 열매(출처-출처자료1)

 

열매 모양이 복숭아처럼 생겼고 오랑캐 나라에서 왔다고 해서 호도胡桃이다.

목재는 재질이 좋아 고급 가구재나 조각재로 쓰인다.

 

중국에서 들여와 주로 중부 이남의 민가 주변에 심어 키우는 가래나무과 가래나무속으로 분류되는 갈잎 넓은잎 큰키나무로 높이 10~20미터 정도로 자라며, 동아시아 East Asia, 유럽 Europe, 북아메리카 North America의 북반구 온대 지역에서 널리 재배한다.

 

학명은 유글란스 레지아 Juglans regia, 영어는 Persian walnut(페르시아호두나무) 또는 English walnut(영국호두나무),  한자는 호도胡挑이다.

 

 

○유래

 

천안 호두는 이름이 나 있다.

천안시 광덕면 일대에서 나오는 것으로, 지금부터 약 700년 전 고려시대 중엽에 광덕면 대덕리 출신의 고관인 류청신柳淸臣이란 사람이 원元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이것을 가지고 와서 광덕사廣德寺 절에 뿌렸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호두나무도 원래는 다른 곳에서 들어온 것이다.

진晉나라 장화張華가 쓴 ≪박물지博物志≫에는 한漢나라 사람 장건張蹇이 중앙아시아에서 호두를 얻어왔다고 되어 있다.

이는 약 2,100년 전의 일로, 당시 유럽과 중국 사이에는 교역로가 있어서 이것을 비단길(실크로드 silk road)이라 불렀다.

 

호두나무가 처음 지구상에 나타난 중심지는 페르시아 Persia(지금의 이란 Iran)이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호두나무의 영어 이름은 페르시아 호두나무 Persian walnut이다.

장건에 의해서 서기전 126년에 호두나무가 중국에 들어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오랜 세월을 두고 인도 India·태국 Thailand을 지나 히말라야산맥 Himalayan mountain range을 넘었을 것이라는 의견도 타당성이 있다.

이처럼 자연 상태에서 호두나무가 중국 땅을 밟을 때, 추위에 견딜 수 있는 것만이 히말라야산맥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데 페르시아의 호두나무는 서쪽으로도 이동해갔고 헝가리 Hungary, 루마니아 Romania,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 프랑스 France, 포르투갈 Portugal의 바닷가까지 펴져나갔다.

길고 긴 여로였고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이 방향으로 이동할 때 기후 조건이 비슷하여 도태 없이 페르시아 것이 그대로 옮겨갈 수 있었다.

유럽 서부에 도달한 호두나무는 미국 USA의 개척 이민자들의 손에 의해서 캘리포니아 California까지 단시일에 건너갔다.

 

일본에 호두나무가 건너간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년 전의 일이고, 먼저 나가노(장야長野) 지방에 심어졌다.

이처럼 히말라야 산맥을 넘은 것을 동양종東洋種 Oriental walnut이라 하며, 추위에 더 견딜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경기도 지방까지 자랄 수 있고, 동해안 양양에도 큰 호두나무가 있다.

 

서양종과 동양종이 일본 시나노(신농信濃) 지방에서 서로 만나게 되었다.

다 같이 페르시아를 출발하여 하나는 유럽을 통과했고, 하나는 동양으로 들어왔다.

이것이 일본에서 서로 만나고 보니 서로 서먹한 사이가 되었다.

말하자면 종種의 분화 비슷한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다.
이 두 종이 일본에서 만나 다시 서로 수정을 하면서 태어난 잡종의 호두가 좋은 성질을 갖게 되었다.
일본에서는 이들 잡종에서 다시 우량한 품종, 예를 들면 만춘晩春, 청옥淸玉, 화광和光 같은 우량 품종이 만들어지고, 이것들이 우리나라에까지 건너오게 되었다.

 

호두나무는 목재가 훌륭하고, 열매는 영양분이 많으며 오래 저장할 수 있어 선호되고 있다.

땅이 깊고 따뜻한 곳이 호두나무 키우기에 알맞다.

호두는 껍질이 단단하나 속은 달고 부드러워서 옛적 성현聖賢(길이 우러러 본받는 성인聖人과 어질고 총명한 현인賢人)의 품성에 견주어지고 있다.

 

 

○고향의 나무

 

충남 천안 광덕사의 호두나무(출처-출처자료1)

 

필자가 살던 마을에서는 우리 집에만 추자나무가 한 그루 있었는데, 줄기 둘레가 두 아름쯤 되는 커다란 노목이었다.

해마다 가을이 되면 우리 집에는 많은 양의 추자가 열리곤 했고, 그래서 우리 집을 모두들 '추자나무 집'이라 불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호두가 열리는 나무를 '호두나무'라 하며 '추자나무'란 말은 거의 알지 못한다.

이 '추자나무'란 말에는 더러 엇갈리는 의견들이 있는데, 경상북도 산골 마을에서는 호두나무란 말은 거의 쓰지 않는다.

 

우리말 사전을 보면, 추자楸子는 가래 또는 가래나무를 말하거나, 강원·충청·전라·경상 지방의 사투리로서 호도 또는 호두나무를 말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호두나무는 '호도나무'라고도 하고, 중국에서 들어왔다고 해서 '당추자唐楸子'라고도 한다.

그러면 추자나무를 대체 무엇으로 볼 것인가?

여기서 가래나무와 호두나무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 보자.

 

 

○추楸와 추秋의 뜻

 

'추秋'가 호두나무를 나타낸 것은 무척 흥미 있는 구상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추楸는 '가래나무 추' '개오동나무 추' '호두나무 추' 따위로 읽을 수 있으며, 그중 '가래나무 추'라고 읽는 것이 가장 타당성이 있는 것 같다.

최세진崔世珍의 ≪훈몽자회訓蒙字會(1527)에도 추楸를 '가래 추, 실일實日 산핵도山核挑'라 해서 핵도核挑라고 불리는 당추자楸子와 구별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라 민정문서民政文書(또는 촌락문서村落文書)에 '추楸'를 '추秋'로 쓴 것은 전자는 목재의 이용가치가 더 많아서 목木자를 추秋자 옆에 붙인 것이고, 추秋는 열매에 비중을 두기 때문에 목木자를 떼버리고 추자나무(호두나무)로 한 것으로 풀이해본다.

 

신라 민정문서를 처음 공개한 노무라(야촌野村)의 1953년도 논문에는 추자목秋子木을 '굴피나무 또는 호두나무'라 해서 단정을 하지 않고 있다.

굴피나무는 도저히 생각될 수 없는 것이고, 그 뒤 1972년의 한 논문에서는 추秋는 호두나무를 뜻한다고 못박고 있다.
이 문제는 이쯤해 두고 '추楸'자에 대한 뜻을 살펴보기로 하자.

 

'추楸'를 가래나무로 해서 쓰여진 예를 찾아보면, ≪만기요람萬機要覽≫ 공상供上 왕대비전축일공상조王大妃殿逐日供上條에 호두 4석의 기록이 있고, 호조공물조戶曹貢物條에 가래나무 목재(추목楸木)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언각비雅言覺非≫를 보면 설명이 복잡하다.

추楸는 가래나무를 말하지만, 단묘壇廟(제사를 올리는 단과 사당)의 제물단자祭物單子(제물의 내용을 적은 종이)에 추자楸子라 한 것은 모두 산핵도 즉 호두를 뜻한다고 했다.

추楸는 '가檟' 또는 '가'라고 했는가 하면, '가래나무 의椅', '가래나무 재梓', '가래나무 추楸', '가래나무 가檟'는 한 가지 나무이면서 네 가지 이름으로 모여진 것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설명은 큰 혼돈을 불러일으키면서 판별이 아리송해질 뿐이다.

 

또한 ≪왜어유해倭語類解≫에서는 호두와 가래(추楸)를 구별하고 있다.

≪훈몽자해≫에서는 더욱 어렵게 설명하면서 '재梓'와 '추楸'자는 모두 가래나무를 뜻하며, 재목이 미끄럽고 반들반들한 것은 재梓이고, 결이 좋지 못하고 흰 것 용백茸白은 추楸라 하지만, 추楸와 재梓는 구별이 잘 안 되는 것이라 하고 있다.

 

한편 ≪명문한한대자전明文漢韓大字典≫에서는 추楸는 가래나무 추 또는 노나무 추(개오동나무를 뜻함)라고 했다.

이처럼 한자는 한 글자가 한 가지 뜻(대상물)으로만 쓰이지 않아 큰 혼돈을 주고 있다.

 

 

○신라 민정문서와 추자나무

 

신라 경덕왕 때(755년 무렵) 기록된 것이라고 여겨지는 문서에 이미 호두나무를 심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우리나라에 호두나무가 들어온 것은 약 1,300년 전쯤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이에 얽힌 자세한 사연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나라(나량奈良)에 있는 도다이지(동대사東大寺) 쇼소인(정창원正倉院)은 절간에 부속된 창고 비슷한 것으로, 국내외 미술 공예품, 고서적, 그리고 호화로운 생활용품 따위가 보관되어 있다.

이 보물창고는 일본 왕실의 각별한 보호 아래 지금까지 남아 있는데, 여기서 신라시대의 뛰어난 모필毛筆(짐승의 털로 만든 붓)의 자취가 엿보이는 문서가 발견되었다.

'민정문서民政文書'라는 이 문서는 1953년 일본인 노무라가 세상에 소개함으로써 일약 비상한 관심을 받게 되었고, 그 뒤 여러 편의 논문들이 발표되었다.

이 문서에 추자나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이 민정문서에는 이미 추자나무 심기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정식으로 장려되었다고 나와 있다.

그러한 기록이 이루어진 장소는 충북 청주 부근으로 해석되고 있으며, 이때 심어진 나무는 뽕나무, 잣나무, 추자나무 세 가지로, 심은 나무의 수와 3년 뒤에 죽은 나무의 수 그리고 새로 보충해서 심은 추자나무의 수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추자나무의 용도가 매우 중요시되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이 문서에 보이는 '추楸'를 호두나무로 볼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지만, 호두나무로 이해하는 것이 어느 정도 타당할 것으로 생각된다. 

 

※출처

1. 임경빈 저, 이경준·박상진 편,  이야기가 있는 나무백과 3(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9).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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