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3장 현대 산업과 대중 정치(1870~1914) 2: 신기술과 전 지구적 변화 1-범위와 규모의 변화, 신용과 소비주의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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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3장 현대 산업과 대중 정치(1870~1914) 2: 신기술과 전 지구적 변화 1-범위와 규모의 변화, 신용과 소비주의

새샘 2026. 7. 23. 09:09

◎신기술과 전 지구적 변화

 

19세기 중후반 및 20세기 초반 유럽의 산업지역(출처-출처자료1)

 

강철의 연간 생산량(단위: 100만 톤)
연도 영국 독일 프랑스 러시아
1875~1879 0.90 - 0.26 0.08
1880~1884 1.82 0.99 0.46 0.25
1885~1889 2.86 1.65 0.54 0.23
1890~1894 3.19 2.89 0.77 0.54
1895~1899 4.33 5.08 1.26 1.32
1900~1904 5.04 7.71 1.70 2.35
1905~1909 6.09 11.30 2.65 2.63
1910~1913 6.93 16.24 4.09 4.20

 

 

1875년 무렵 신기술은 새로운 수준의 경제 성장과 산업, 노동, 중앙 정부 사이의 복잡한 재편성을 이끌면서 유럽 Europe에서 제조업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18세기 말에 시작되었고 석탄, 증기, 철에 집중되었던 유럽의 제1차 산업혁명처럼 유럽의 제2차 산업혁명은 세 가지 핵심 분야, 즉 강철, 전기, 화학에서의 기술혁신에 의존했다.

 

철보다 더 단단하고 한결 강하고 한층 더 전성展性(두드리거나 압착하면 얇게 펴지는 금속의 성질)이 좋은 강철은 오랫동안 건축 자재로 각광을 받아왔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강철을 값싸면서도 대량으로 생산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러한 상황은 1850년대와 1870년대 야금 산업을 혁명적으로 바꾸어놓은 강철 합금을 정련하고 대량 생산하는 세 가지 서로 다른 과정 때문에 변화했다.

한 가지는 영국 UK의 헨리 베서머 Henry Bessemer(1813~1898)가 개발한 과정이었고, 다른 두 가지는 독일 Germany의 지멘스 Siemes 형제와 프랑스 France 기술자 피에르-에밀 마르탱 Pierre-Émile Martin(1824~1915)이 협력해 만들어낸 방식이었다.

철은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았으나, 급증하는 강철 생산으로 인해 곧 사그러졌다.

영국의 조선업자들은 신속하면서도 수지타산이 맞는 강철 구조로의 전환을 꾀했고 그들은 조선산업의 선두를 유지했다.

하지만 독일과 미국 USA은 조선산업 이외의 분야에서 강철 산업을 지배했다.

1901년 독일은 다시금 영국의 절반만큼이나 되는 강철을 생산하고 있었고, 이는 독일이 국가 및 산업의 기반 시설을 대량으로 건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강철처럼 전기도 일찍 발견되었고 그 장점도 잘 알려져 있었다.

열, 빛, 그리고 다른 형태의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 장거리를 쉽게 전송할 수 있는 전기는 일련의 또 다른 19세기의 기술 혁신으로 상업 및 가정에서의 이용이 가능해졌다.

1800년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의 알레산드로 볼타 Alessandro Volta(1745~1827)는 화학 축전지를 발명했다.

1831년 영국의 과학자 마이클 패러데이 Michael Faraday(1791~1867)는 최초의 전자석 발전기의 개발(1861)을 이끌었던 전자 유도를 발견했다.

1880년대에 이르러 공학자(엔지니어 engineer)와 기술자들은 고압 교류 전기를 생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 교류 발전기와 변압기를 개발했다.

19세기 말에 저렴한 수력을 사용하는 거대한 발전소들은 전류를 상당히 먼 거리로 보낼 수 있었다.

1879년 미국의 토머스 에디슨 Thomas Alva Edison(1847~1931)과 그의 조수들은 백열 필라멘트 filament 전구를 발명해 전기를 빛으로 바꾸었다.

전기에 대한 수요는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고 이내 전 대도시 지역에 전기가 들어가게 되었다.

새로운 경제의 주도적 부문으로서 전력화는 지하철, 전자, 그리고 마침내 장거리 철도에 전력을 공급했다.

전기는 화학 및 야금 산업에서 새로운 기술의 발전을 가능케 했으며 점차 일반 가정에서의 생활습관을 극적으로 바꾸어놓았다.

 

화학산업은 중요한 신기술의 세 번째 부문이었다.

알칼리 alkali와 황산의 효율적인 생산은 종이, 비누, 섬유, 비료 따위와 같은 소비재 상품의 제조를 변화시켰다.

영국과 특히 독일은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영국은 세수 비누와 가정용 세제 생산을 선도했다.

가정 위생과 대규모 시장에서의 신기술에 대한 높아진 관심은 영국의 사업가 윌리엄 헤스케스 레버 William Hesketh Lever(1851~1925)가 비누와 세제들을 전 세계에 판매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한편 독일의 생산은 합성 염색과 석유 정제 방법의 개발 같은 산업적 사용에 초점을 맞추었고 전 세계 화학 시장의 약 90퍼센트를 지배했다.

 

그 밖의 기술 혁신도 제2차 산업혁명에 기여했다.

효율적인 동력에 대한 수요 증대는 액체 연료 내연기관의 발명을 자극했다.

개량된 증기 터빈 steam turbine은 엔진들을 기록적인 속도로 작동시켰지만, 내연기관은 두 가지 주요한 이점을 제공했다.

즉, 엔진들은 한층 더 효율적이었고 증기기관처럼 불을 지필 필요가 없었다.

1914년까지 대다수 국가들의 해군은 자국의 증기선 회사들처럼 연료를 석탄에서 석유로 바꾸었다.

원유와 정제된 휘발유에 의존하는 신형 엔진은 처음에 널리 사용될 수 있을까를 걱정했지만 러시아 Russia, 보르네오 Borneo, 페르시아 Persia, 텍사스 Texas 등지에서 유전이 발견되어 이런 걱정이 줄어들었다.

따라서 석유 매장지를 보호하는 것이 나라의 생사가 걸린 특권이 되었다.

석유를 동력으로 한 기계의 채택은 또 다른 결과를 가져왔다.

예컨대 이전에는 동력을 얻기 위해 인근의 강이나 석탄 광산에 의존했던 산업가들은 이제 천연자원이 없는 지역에서도 사업을 자유롭게 벌일 수 있었다.

전 세계적 산업화를 위한 잠재력이 적소에 있었다.

내연기관은 장차 20세기의 운송에 한층 더 급진적인 변화를 가져다주겠지만, 1914년 이전에는 자동차와 비행기 모두 여전히 초기 상태에 있었다.

 

 

○범위와 규모의 변화

 

이런 기술적 변화들은 한층 더 광범위한 과정, 즉 산업의 범위와 규모에서의 인상적인 증대의 일부였다.

기술은 좀 더 크고, 훨씬 더 빠르며, 한층 더 저렴하고, 좀 더 효율적인 세계를 향한 경쟁의 원인이자 결과였다.

19세기 말에는 크기가 중요했다.

중공업과 대량 판매의 등장은 손을 맞잡고 공장과 도시들을 성장시키고 있었고, 매체와 유동성의 발전은 전국적인 대중문화의 발생을 자극했다.

보통 사람은 처음으로 전국적이면서도 전 지구적 차원의 뉴스를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유럽 강대국들이 전문적인 토목공학적 지식의 놀라운 위업, 예컨대 기념비적 비율로 성장한 철도, 댐, 운하, 항만 따위로 자신의 제국을 확장하면서 지구를 분할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러한 과제들은 현대 유럽 산업의 이상을 구현했다.

그것들은 또한 건설업자, 투자가, 은행가, 사업가, 그리고 강철 및 콘크리트 concrete의 생산자에게 엄청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

중부 유럽의 운하들, 안데스 산맥 Andes Mountains의 철도들, 대양의 해저에 뻗어 있는 전신 케이블 cable 따위, 어느 역사가가 명명했듯이 '제국의 촉수 tentacles of empire'는 지구 전체로 뻗어나갔다.

 

주요 국가의 인구 증가(단위: 100만 명, %)
국가 1871년 무렵 1911년 무렵 증가율
독일 41.1 64.9 57.8
프랑스 36.1 39.6 9.7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35.8 49.5 38.3
영국 31.8 45.4 42.8
이탈리아 26.8 34.7 29.5
에스파냐 16.0 19.2 20.0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제외)

 

산업화는 그다지 경이롭지는 않더라도 유럽에 지대한 변화를 초래했다.

인구는 특히 중부 및 동부 유럽에서 꾸준히 증가했다.

러시아의 인구는 거의 4분 1 정도, 그리고 독일은 한 세대 만에 걸의 절반가량 증가했다.

영국의 인구 역시 1881년과 1911년 사이 약 3분의 1 정도 늘어났다.

작물 생산뿐만 아니라 운송에서의 개선에 힘입어 식량 부족은 줄어들었다.

이는 전체 인구가 질병과 높은 유아사망률에 비교적 덜 영향받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의약, 영양, 개인위생의 진전은 콜레라 cholera와 티푸스 typhus 같은 위험한 전염병의 만연을 사라지게 했고, 개선된 주택 및 공중위생 수준은 도시 환경을 변모시켰다.

 

 

○신용과 소비주의

 

범위와 규모에서의 변화들은 생산뿐만 아니라 소비를 바꾸어놓았다.

실제로 소비가 서서히 경제 활동과 이론의 중심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 동안이었다.

경제학자들이 소비자 신용에 대해 염려하고 전문가들이 대중의 구매 습관을 체계적으로 추적할 수 있는 시기는 20세기 중반까지도 시작되지 않았지만, 당대에 일어난 발전들은 그러한 지평을 향한 것이었다.

중간계급에게 실용적인 것과 사치스런 상품 모두를 제공하고 있던 백화점은 당대의 도시화, 경제적 팽창, 판매 촉진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중요성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마찬가지로 광고 또한 각광을 받았다.

음악회, 비누, 자전거, 재봉틀 따위를 선전하는 19세기 말의 그림이 많이 들어간 안내그림(포스터 poster)들은 근원적인 경제적 변화의 단지 한 가지 징표일 뿐이었다.

한층 더 중요한 것은 1880년대에 이르러 새로운 상점들이 외상 판매라는 극히 중요한 기술 혁신을 도입함으로써 노동계급을 소비에 끌어들이고자 했다는 점이다.

노동계급 가정은 예전에는 돈을 빌리기 위해 시계, 침대요(매트리스 mattress) 또는 가구를 전당잡혔다.

하지만 이제 그들은 외상으로 구입할 수 있게 되었고, 이것은 가정뿐만 아니라 국가 경제에 지각변동적인 결과를 가져다주는 변화였다.

 

하지만 새로운 19세기 말의 소비 유형은 주로 도시적인 것이었다.

시골에서 농민은 계속해서 침대 밑에 돈을 모아두고, 여러 세대에 걸쳐 가구를 물려주며, 자신의 옷과 내의류를 만들고 세탁하며 수선하고, 관대한 가정의 선물로서 설탕 1킬로그램을 제공했다.

이런 전통적 관습으로 소매상인들은 서서히 조금씩 줄어들었다.

여전히 크게 계층화된 사회에서 대량 소비는 상상하기 힘든 것으로 남아 있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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