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3장 현대 산업과 대중 정치(1870~1914) 5: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불만: 세기 전환기의 국가 정치 1 - 프랑스: 제3공화정과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시온주의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3장 현대 산업과 대중 정치(1870~1914) 5: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불만: 세기 전환기의 국가 정치 1 - 프랑스: 제3공화정과 파리 코뮌, 드레퓌스 사건, 시온주의
새샘 2026. 8. 2. 17:3919세기 내내 개인적 권리라는 신조를 옹호해온 중간계급의 자유주의자들은 1870년대 이후 수세적 위치에 있음을 인식했다.
이전의 정치권력은 중간계급이 이해관계와 전통적 정예(엘리트 élite)들 사이의 균형에 의존해왔다.
토지 귀족은 산업계의 거물과 권력을 공유했다.
군주의 통치는 헌법적 자유와 공존했다.
19세기 후반 동안에 대중 정치의 등장은 이런 균형을 뒤집어엎었다.
선거권의 확대와 커져가는 기대는 신인들을 정치 무대로 불러들였다.
노동조합, 사회주의자, 남녀동권주의자(페미니스트 feminist)는 다 함께 모든 사람에게 정치 참여를 개방할 것을 요구하면서 유럽 Europe의 지배계급에 도전했다.
각국 정부는 유화책과 억압 조치를 번갈아 섞어가며 대응했다.
20세기가 다가오면서 정치적 투쟁은 점차 격렬해졌고, 제1차 세계대전에 이르러 전통적 의회정치의 토대는 무너지고 있었다.
좌파와 우파 양쪽을 위해, 그리고 내부자와 국외자 양쪽을 위해 익숙하지 않은 영역을 협상하는 일은 새로우면서도 분명히 현대적인 형태의 대중 정치의 탄생을 필요로 했다.
○프랑스: 제3공화정과 파리 코뮌

승전국 독일 Germany의 통일을 완성시킨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Franco-Prussian War(보불전쟁普佛戰爭, 보로사普魯斯-불란서佛蘭西 전쟁)은 프랑스에게는 뼈아픈 패배였다.
프랑스 제2제정 정부는 망하고 말았다.
그 결과 프랑스인 French은 애초부터 정통성이 의문시되는 공화정을 발표했다.
영속성이 있는 공화주의 체제를 정교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로 판명되었다.
1875년 마침내 제정된 제3공화정 Third Republic의 새 헌법은 민주적이고 의회제적인 원리의 승리를 알렸다.
하지만 민주주의를 확립하는 것은 덧없는 과정이었고, 제3공화정은 계급 갈등, 추문, 그리고 앞으로 몇십 년 동안 정치를 망쳐놓을 새로운 형태의 우파 정치의 대두에 직면했다.
제2제정 정부가 항복하자마자 그 계승자들은 급진적 파리 시 Paris와 맞붙는 위기에 직면했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기간 동안 파리 시는 자치 정부인 코뮌 commune을 세웠다.
파리 시는 4개월 동안 프로이센군에 포위된 적이 있었다.
그때 탈출할 수 있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탈출했고, 남은 사람들은 굶주림에 과격해진 나머지 베르사유 Versailles에 앉아 독일 Germany(전쟁의 승리로 프로이센은 독일 제국으로 통일)과 정전 조건을 협상하고 있는 프랑스 정부에 도전했다.
정전에 서명한 프랑스 정부는 파리 시로 눈길을 돌렸다.
지루하고 성과 없는 협상들이 이어진 끝에 1871년 3월 프랑스 정부는 수도 파리를 무장해제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했다.
코뮌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가 파리의 노동자들이었기에 이 충돌은 계급 전쟁이 되었다.
1주일 동안 '파리 코뮌 가담자들'은 침공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방어 울타리(바리케이드 barricade)를 쌓고 인질을 붙잡아 총살하고 파리 시 북쪽에 있는 노동계급 주거 지역으로 매우 천천히 후퇴하면서 정부군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 정부의 진압은 잔인무도했다.
최소한 2만 5,000명의 파리 시민이 처형되거나 사망했거나 아니면 파리 시 도처에서 발생한 화재로 불에 타 숨졌으며, 몇천 명의 사람들이 남태평양의 뉴칼레도니아 유형지 New Caledonia penal colony in the South Pacific로 추방되었다.
파리 코뮌은 단기간에 걸친 일화逸話(에피소드 episode)였으나, 이 사건은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오래된 정치적 상처를 재발시켰다.
코뮌에 관한 글을 쓴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와 다른 사회주의자들에게 파리 코뮌은 좌파의 해묵은 반란 전통이 무익하고 좀 더 대중에 기초한 민주적 정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드레퓌스 사건 Dreyfus affair과 술책으로서의 반유대주의
프랑스의 정치적 범위(스펙트럼 spectrum) 한쪽에서는 다른 곳에서도 발전하게 될 새로운 형태의 급진 우익 정치가 등장했다.
예로부터 보수주의 정치의 토대인 가톨릭교회 Catholic church와 토지 귀족이 쇠퇴하면서 한층 더 급진적인 우익 정치가 형성되었다.
18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패배로 쓰라린 고통을 겪었고 공화정과 그 전제에 비판적인 신우파는 민족주의적이었고 의회제에 반대하며 자유주의(개인적 자유에 헌신한다는 뜻에서)에도 반대했다.
프랑스의 작가이자 정치가인 모리스 바레스 Maurice Barrès(1862~1923)는 의회제 정치가 '무능과 부패'를 퍼뜨려왔고 프랑스를 지키기에는 너무도 허약하다고 선언했다.
19세기 전반기에 민족주의는 좌파와 결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 민족주의는 우파가 한층 더 자주 호소하는 수단이 되었고 전반적으로는 외국인혐오증 xenophobia과 특별하게는 반유대주의와 연결되었다.
에두아르 드뤼몽 Édouard Drumont(1844~1917)의 경력은 적절한 사례였다.
드뤼몽은 이례적으로 성공한 반유대주의 언론인이었다.
그는 19세기 후반 프랑스의 모든 문제를 유대인의 국제적 음모에 따른 악영향 탓으로 돌렸고 모든 우익의 적들을 '유대계 Jewish'라고 칭했다.
드뤼몽은 반유대주의의 세 가지 요소—유대인을 그리스도(예수 Christ) 살해자로 메도하는 그리스도교인 Christians의 오래된 반유대주의, 부유한 은행가 로스차일드 가 The Rothschild family를 모든 유대인의 대표라고 주장하는 겅제적 반유대주의, 아리아인 Arisans이 (열등한) 셈족 Semites에 반대한다는 19세기 말의 급진적 사고—에 몰입했다.
드뤼몽은 이 주제들을 강력한 증오의 관념형태(이데올로기)로 채워 넣었다.
군부의 유대인이 국익을 전복하고, 금융 추문은 국제적 음모의 소산이며, 대중문화, 여성 운동, 무도장, 그리고 프랑스 문화를 타락시키고 있는 온갖 발전은 단지 '세계 공통적이고 국제적인 유대인의 이해관계'의 힘을 보여주며, '부유한 유대인 은행가들'과 '탐욕스런 유대인 사회주의자과 노조원들'이 프랑스의 농민과 소상인을 먹이로 삼는다고 주장했다.
드뤼몽은 1892년에 창간한 자신의 신문 ≪자유 언론 La Libre Parole≫과 반유대인 동맹을 통해 그리고 출간 첫 두 달 만에 10만 부가 팔린 500쪽짜리 인기상품(베스트셀러 best seller) ≪유대인의 프랑스 La France Juive≫(1886)에 이 주제들에 대해 맹공을 가했다.
이처럼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된 반유대주의는 프랑스 공화정 기간 중에서 중추적인 정치적 순간인 드레퓌스 사건 Dreyfus Affair으로 폭발했다.
1894년 프랑스 군대 내 왕당파 장교 집단이 프랑스 총참모부에서 근무하는 유대인 Semite 대위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Alfred Dreyfus(1859~1935)가 독일에 군사 비밀을 팔아넘겼다고 고발했다.
드레퓌스는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유죄 선고를 받고 계급을 박탈당한 채 대서양 Atlantic Ocean에 있는 무시무시한 감옥인 악마의 섬 Devils Island에 종신 유배되었다.
1896년 새로 부임한 정보 참모부장인 조르주 피카르 Marie-Georges Picquart(1854~1914) 대령은 배심원의 평결에 의문을 제기하고 면밀한 조사 끝에 유죄의 증거가 된 문서가 위작이라고 발표했다.
프랑스 전쟁성 戰爭省 Ministry of War이 드레퓌스에 대한 재심을 거부하자 이 '사건'은 프랑스를 양극화시키는 '문제'로 변했다.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 자유주의자, 에밀 졸라 Émile Zola(1840~1902) 같은 인물이 드레퓌스를 지지했다.
드레퓌스 지지자들은 반동과 편견에 반대해 진보와 정의의 편에 섰고 위기에 처한 공화정을 살리고자 했다.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 J'accuse!>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신문 논설에서 프랑스 주류파를 맹공격했다.
이 논설에서 에밀 졸라는 문서를 위조하고 반역죄를 은폐하고 뻔뻔스럽게도 정의의 근본 문제들을 무시하는 정부, 법원, 군부를 고발했다.
한편 그 반대쪽에는 이 사건이 한층 더 중요한 경제적 문제들을 감추려는 소동이라고 의심하는 일부 사회주의자를 비롯해 왕당파, 군국주의자, 그리고 일부 성직자 따위가 있었다.
한 가톨릭계 신문은 문제의 본질이 드레퓌스가 유죄냐 무죄냐가 아니라 유대인과 불신자들이 '프랑스의 숨은 주인'이냐 아니냐에 있다고 주장했다.
6년 동안에 걸친 열띤 논쟁 끝에 1899년의 행정 명령으로 드레퓌스는 석방되었고, 1906년 대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드레퓌스는 군에 복귀해 소령으로 진급했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 Légion d'honneur(영어 Legion of Honor)을 받았다.
드레퓌스 사건으로 인한 결과 중 하나는 프랑스에서의 교회와 국가의 분리였다.
공화주의자들은 교회가 군대가 공화국에 적대적이라고 확신했다.
1901~1905년에 통과된 법들은 프랑스에서 국가가 인정하지 않은 종교 단체들을 금지했고, 학교에서 성직자가 가르치는 것을 금했으며, 마침내 가톨릭교회와 국가 사이의 연합을 해체했다.
제3공화정은 20세기의 첫 10년에 훨씬 더 강해졌다.
동시에 급진 우파와 반유대주의는 명백히 유럽 전역에 걸친 정치 세력이었다.
1897년 빈 Wien(영어 Vienna)의 시장은 반유대주의 강령을 내걸고 당선되었다.
러시아 Russia 비밀경찰은 세계를 지배하려는 한 유대인의 음모를 상상하는 ≪시온 원로 의정서 The Protocols of the Elders of Zion≫(1903, 1905)라는 책을 꾸며서 출간했다.
러시아 정부는 또한 메나헴 멘델 바이리스 Menahem Mendel Beilis라는 우크라이나 Ukraine 출신 유대인 점원의 죄를 날조하는데 일조했다.
바이리스는 1911년에 체포되어 살인죄 판결을 받고 석방되기까지 2년 동안 감옥에 있었다.
드뤼몽이 이론화하고 여러 사람들이 전 유럽에 걸쳐 실천한 정치적 반유대주의는 사회적·정치적 문제를 인종적 문제로 끈질기게 비화시킨 19세기 말의 국가주의(내셔널리즘) Nationalism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시온주의(시오니즘) Zionism

드레퓌스 사건의 전개를 경계의 눈초리로 바라본 많은 사람 가운데는 파리에서 일하던 헝거리 Hungary 태생의 언론인 테오도르 헤르츨 Theodor Herzl(1860~1904)이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나라에서 악의에 찬 반유대주의가 대두했다는 사실은 헤르첼을 크게 실망시켰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을 "한층 더 근본적인 도덕적·사회적 퇴락에 대한 막연한 불안의 극적인 표현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헤르첼은 해방이나 시민권의 부여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이 서구 문화에 결코 동화되지 못할지도 모르고 수용과 관용에 대한 유대인 공동체의 희망을 거는 것은 위험스런 어리석은 행위라고 믿었다.
헤르첼은 시온주의라는 상이한 전략을 지지했다.
이것은 유럽 밖에 (꼭 팔레스타인 Palestine이 아니라도) 별도의 유대인 조국을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주로 러시아 출신의 난민으로 구성된 유대인 정착민의 소규모 운동은 이미 유럽 밖에다 정착지를 세우기 시작하고 있었다.
헤르첼은 이런 목표들을 최초로 외친 인물은 아니지만 정치적 시온주의의 가장 효과적인 옹호자였다.
그는 시온주의가 다른 나라들과 협상할 능력이 있는 현대적 민족주의 운동으로 인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896년 헤르첼은 ≪유대인 국가 Der Judenstaat≫를 출간했고, 1년 뒤 스위스 Switzerland에서 첫 번째 시온주의자 회의 Zionist Congress를 열었다.
그는 영국 UK과 오스만 제국 Ottoman Empire의 국가 수장들과 회합을 가지며 늘 상위 정치 high politics에 주력했다.
유대인 조국에 대한 헤르첼의 전망(비전 vision)은 이상향적理想鄕的(유토피아적 utopian) 요소가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새로운 국가 건설이 불평등을 제거하고 권리를 확립하는 새로우면서도 변화된 사회에 입각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헤르첼의 저작들은 커다란 회의주의에 직면했지만, 반유대주의反猶太主義 anti-Semitism가 특히 폭력적인 양상으로 나타났던 동유럽 Eastern Europe 지역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동안에 특별한 전시 상황에 따른 필요성은 시온주의를 국제 외교에 말려들게 하면서 영국을 이 문제에 휩쓸리게 만들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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