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3장 현대 산업과 대중 정치(1870~1914) 5: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불만: 세기 전환기의 국가 정치 2 - 독일의 제국 통합 모색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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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3장 현대 산업과 대중 정치(1870~1914) 5: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의 불만: 세기 전환기의 국가 정치 2 - 독일의 제국 통합 모색

새샘 2026. 8. 6. 18:36

비스마르크(출처-https://news.bizwatch.co.kr/article/ceo/2014/07/29/0032)

 

독일의 정치적 통일 추구(1871~1890년)
비스마르크의 문화 투쟁
바티칸과의 화해
비스마르크의 반사회주의 입법
비스마르크의 사회 입법 출범
비스마르크 사임
1871~1878
1878년
1878~1884년
1883~1890
1890년

 

 

능란한 대외 정책, 세 차례에 걸친 단기전, 민족주의 감정의 고조 따위를 통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 Otto von Bismarck(1815~1898)는 1864~1871년 동안에 프로이센 Preußen/Preussen(영어 Prussia) 보수주의의 기치 아래 독일을 통일시켰다.

연방정치 체제를 건설하는 데에서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의 주도적 역할을 포함해 독일의 전통적 정예(엘리트 elite)들의 특권을 보장하면서 현대 국민국가의 중앙집권적 제도들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비스마르크의 헌법은 행정·교육·사법의 역할을 지방정부에 할당하고 독일의 국익을 감독하기 위해 양원제 의회를 설립했다.

상원(연방의회) Bundesrat의 임명직 대표들은 성인 남성의 보통선거를 통해 선출된 한층 더 민주적인 하원(제국의회) Reichstag에 대한 보수적인 대항세력으로서 역할을 했다.

행정부에서 권력은 대외 및 군사 문제에 관해 완전한 통제권을 행사한 프로이센의 왕이자 독일 카이저 Kaiser(독일 황제의 칭호)인 빌헬름 1세 Wilhelm I(재위 1861~1888)에 전적으로 달려 있었다.

프랑스 France나 영국 UK와는 달리 독일 Germany의 내각 각료들은 의회에 아무런 책임이 없었고 오로지 황제에게만 책임을 졌다.

 

정말로 연방적이거나 민주적이지도 않은 정부 아래서 공통의 목적의식을 지닌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독일 정부는 은행업, 주화 발행, 연방법원, 철도 따위를 위한 제국의 대행 기관들을 성공적으로 창설해냈고, 이 모든 것은 행정 및 경제 통합을 촉진했다.

그러나 정치적 통합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많은 영방 국가들은 1866년에 오스트리아 Austria 편을 들었고 프랑스의 정복 위협에 처해 독일 통일을 잠자코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독일의 정치적 전망에서 세 가지 잘못된 경향, 즉 가톨릭교 Catholicism(구교舊敎)와 프로테스탄트교 Protestantism(신교新敎) 사이의 분열, 세력이 커져가는 사회민주당, 농업과 산업의 잠재적으로 분열적인 경제적 이해관계가 특히 국가적 뼈대의 균열을 위협했다.

 

1866~1876년 사이의 비스마르크는 자유무역과 경제성장의 촉진에 관심이 있는 자유주의의 당파와 더불어 통치했다.

자유주의 연합과의 연결을 강화하기 위해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에서 반反가톨릭 운동을 전개했다.

이른바 '문명을 위한 투쟁(Kulturkampf, 또는 문화투쟁)'에서 비스마르크는 세속적 공교육과 종교 의식에 따르지 않은 민법상 결혼 같은 문제들을 둘러싼 해묵은 종파적 갈등뿐만 아니라 소문에 따르면 국가와 교황 사이의 충성에서 괴로워한다는 가톨릭교도들의 염려에 호소했다.

그는 다수를 차지하는 프로테스탄트 Protestant(신교도) 자유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아 정치적 설교를 하는 성직자들을 투옥시키고, 프로이센에서 예수회 활동을 금지시켰으며, 교육과 결혼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통제를 구속하는 법들을 통과시켰다.

하지만 이 운동은 역풍을 맞았고 박해받는 성직자에 대한 대중의 동정심은 1874년 가톨릭을 지지하는 중앙당 Zentrumspartei이 제국의회에서 4분의 1의 의석을 차지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새로운 경제 입법을 위해 가톨릭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비스마르크는 1878년 중앙당과 정략적인 동맹을 협상했다.

 

1870년대 말의 경기 침체는 자유무역 정책에 대한 지지를 약화시켰다.

이에 비스마르크는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가톨릭뿐만 아니라 농업 및 산업 이해관계를 포함한 새로운 연합을 형성했다.

이 새로운 연합은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자들과 SPD(독일사회민주당)로 대표되는 독일 노동계급이 찬성하지 않는 보호주의적 입법(곡물 관세, 철과 강철에 부과한 관세)을 통과시켰다.

비스마르크는 자신이 이전에 구축한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반가톨릭 감정을 이용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제국의 새로운 적인 사회민주주의자에 대해 반감을 품고 '그리스도교적 도덕적 질서'를 옹호하는 견지에서 보호주의적이고 반反사회주의적인 입법에 안주했다.

1878년 황제의 목숨을 노린 두 차례의 시도가 있은 뒤 비스마르크는 사회민주주의자가 집회를 갖거나 문헌을 배포하는 것을 금지하는 반사회주의법을 밀어붙이기 위해 국가 위기를 선언했다.

나아가 그는 추가로 법을 제정해 사회주의자들을 주요 도시에서 쫓아냈다.

결과적으로 이 법들 때문에 사회민주당은 어쩔 수 없이 비밀 조직이 되었고 노동자들은 점차 사회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필요에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 보는 하위문화를 형성했다.

 

조직된 노동의 정치에 채찍을 휘두른 뒤 비스마르크는 일련의 사회 개혁으로 독일 노동자에게 당근을 제공했다.

노동자에게 질병 및 사고 보험, 엄격한 공장 검사, 여성 및 아동의 노동시간 제한, 남성을 위한 최대 노동일, 공공 취업 대행 기관, 노령 연금 따위가 보장되었다.

1890년까지 실업보험을 제외하고 다가 올 몇십 년에 대다수의 서양국가들에게 본보기가 되는 다수의 사회보장 입법을 완성했다.

하지만 이 법들이 노동자의 충성심 확보라는 비스마르크의 단기적인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온갖 법적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SPD(독일사회민주당)의 지지표는 1881년과 비스마르크가 물러난 1890년 사이에 4배 이상 늘어났다.

 

비스마르크의 국내정치로 야기된 한층 더 악화된 환경은 새 황제 빌헬름 2세 Wilhelm II(재위 1888~1918)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만들었다.

그는 1890년에 SPD를 합법화시키면서 반사회주의 입법을 극적으로 중지시켰다.

1912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전체 투표수의 3분의 1을 얻었고 제국의회에서 가장 큰 단일 의원단을 선출했지만, 황제는 강력하게 결속한 정예 집단 이외에는 어떤 의미있는 정치 참여를 허용하지 않았다.

그사이 상업, 산업, 농업 따위의 이해관계들은 관세를 둘러싸고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

이 폭발 직전의 교착상태는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그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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