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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연담 김명국 "달마도"

새샘 2009. 5. 27. 20:32

"호쾌한 선들을 관통하는 고매한 기상"

김명국, 달마도, 17세기 중엽, 중이에 수묵, 83x57cm, 국립중앙박물관(사진 출처-출처자료)

 

김명국, 달마도강도 또는 노엽달마蘆葉達磨, 종이에 수묵, 97.6×48.2㎝, 국립중앙박물관.

 

다음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40년 만에 재개된 조선 인조때인 1636년 일본으로 가는 조선통신사의 수행화원으로 김명국이 처음으로 동행하면서 자신이 쓴 일기의 일부분이다.

 

병자년(1636년) 12월22일, 맑음, 저녁에 바람이 불고 눈이 내렸다.

 

"(중략)

이들이 왜 내가 그린 달마도에 열광하는지를 이제 알 것 같다. 선종이 무엇인가? 경전이나 문자에 의지하기보다는 직관적인 정신적 체험을 중요시하는 것이 선종이 아닌가? 자신이 세운 화두를 깨닫기 위해 일생을 거는 종교가 선종이 아닌가? 그래서 얻게 된 깨달음의 순간을 일필휘지로 그려 내는 것이 바로 선종화. 그렇기 때문에 종화에서는 다소 거칠고 부족하더라도 세세하게 꾸미거나 채색을 칠하는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비록 왜인들의 요구에 의해 선화를 그려주기는 했지만, 잠을 줄여가면서까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은 선화가 나의 기질에 잘 맞았기 때문이다.(중략)

이틀전에 왔던 어떤 중은 내가 준 달마도를 보더니 갈 생각을 않고 내게 절을 해 대는 통에 민망하기까지 했다. 꿈속에서 보았던 달마대사의 모습을 친견하게 되었다나 뭐라나 하면서...

 

며칠 있으면 이곳도 떠나게 된다. 그동안 고생도 많았지만 가는 곳마다 선물꾸러미를 바치는 왜인들의 정성을 거절하기도 벅찼다. 내가 통신사의 일원인 탓도 있지마, 화원이면 무조건 멸시하는 조선과는 달리 극진히 대접하는 왜인들의 모습을 보고 조선과는 다른 느낌을 갖게 되었다. 그림만 잘 그려도 사람 대접을 받다니......"

 

이상의 글은 조정육 지음, 이야기 조선시대 회화사2, "가을 풀잎에서 메뚜기가 떨고 있구나"(2002, 고래실)에 실린 글을 발췌정리한 것이다.

 

 

지금부터는 고 오주석 지음,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주)월간미술, 2009)에 <달마도>에 대한 감상글을 발췌 정리해 본다.

 

오주석은 <달마도> '호쾌한 선들을 관통하는 고매한 기상'이라는 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

억센 매부리코에 부리부리한 눈, 풍성한 눈썹과 콧수염, 그리고 한일자로 꽉 다문 입. 화가는 턱선 따라 억세게 뻗쳐 나간 구레나룻을 마치 달아오른 장단에 신들린 고수처럼, 점점 길게 점점 더 여리게 연속적으로 퉁겨내듯 그렸다.

옷 부분은 진한 먹물을 붓에 듬뿍 먹여 더 굵고 빠른 선으로 호방하게 쳤다.

꾹 눌러 홱 잡아채는가 하면 그대로 날렵하게 삐쳐 내고, 느닷없이 벼락같이 꺾어 내서는 이리 찍고 저리 뽑아냈다.

열번 남짓 질풍처럼 여기저기 붓대를 휘갈기고 나자 달마(?~534년 추정)의 몸이 화면 위로 솟아올랐다.

두 손은 마주 잡고 가슴 앞에 모았다.

윗몸만 그려졌지만 그는 분명 앞을 향해 성큼 발을 내딛고 있다.

 

지그시 화면을 바라본다.

구레나룻 오른편 끝이 두포의 굵은 획과 마주친 지점에 먹물이 아직 다 마르지 않았다.

슬쩍 붓을 대어 위로 스쳐준다. 훨씬 좋아졌다.

다시 구레나룻 아래 목 부분에 날카롭게 붓을 세워 가느다란 주름을 세 줄 그려넣었다.

이제 달마의 얼굴과 몸은 하나가 되었다.

작품이 완성된 것이다.

그림 속의 필선은 각각 서로 떨어져 있다.

그렇지만 보이지 않는가?

선線과 선線 사이로 하나의 매서운 기운이 거침없이 달리고 있다.

이른바 획은 끊어져도 뜻은 이어진다는 '필단의연筆斷意連' 그것이다.

호쾌한 선線들을 관통하는 기氣의 주인은 연담인가 달마인가?

 

 

달마는 인도스님이다.

석가모니께서 꽃 한 송이를 들어올렸을 때 스승 뒤편에서 조용한 미소로 답하여 그 심법心法을 전수받았다는 가섭 이래 제28대 조사祖師다. 

그는 중국으로 건너와서 '마음으로 마음을 전한다'는 선종의 가르침을 최초로 펼친 중국 선禪의 제1대 조사가 되었다.

그러므로 달마는 선禪의 대명사다.

그는 9년 동안이나 벽을 마주하고 수련했다고 전해진다.

달마는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진정한 대장부였던 것이다.

그 무서운 집중력은 어떠한 원력願力을 가졌기에 가능한 것일까?

그토록 용맹정진할 수 있었던 심지는 대체 어떠한 것이었을까?

 

<달마도>를 보면 달마를 알 수 있다.

거침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다.

본질이 아닌, 바탕이 아닌 온갖 부차적인 껍데기들은 모조리 떨구어낸 순수형상이다.

그러므로 몇 줄의 짙고 옅은 먹선으로부터 강력한 의지와 고매한 기상이 곧바로 터져 나온다.

아무도 곁눈질할 수 없게 하는 이 맹렬함, 이것은 바로 선禪이 아닌가?

그러나 저 눈빛을 보라.

달마는 한편 이 모두가 허상이라는 듯 진정 거짓말처럼 깊고 고요한 눈매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아니,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달마도>는 결국은 달마가 아니다.

그냥 약동하는 선禪일 뿐인다.

 

 

※연담蓮潭 김명국金明國 또는 鳴國(1600~1662년 이후)은 조선중기를 대표하는 도화서 화원. 1636년과 1643년 2차례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술에 취하여 붓을 든다고 해서 취옹醉翁이란 호도 있다. 연담은 선종화禪宗畵 특히 사진에서 보는 달마도達磨圖를 잘 그렸다. 당시 왜인들이 연담의 선종화에 푹 빠져 돈과 술을 준비하여 줄서서 받았다는 말이 전해진다.

 

2009. 5. 2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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