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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그림

탄은 이정 "풍죽도"

새샘 2009. 8. 9. 10:32

"거친 바람 속, 끝까지 남는 건 대나무의 정신이어라"

 

이정, 풍죽도, 조선 17세기 초반, 비단에 수묵, 127.8×71.4㎝, 간송미술관(출처-출처자료)

 

바람이 분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화폭 가득 세차게 부는 바람.

어린 대나무는 그 바람에 밀려 줄기가 활처럼 휜다.

매몰차게 부딪치는 바람은 댓이파리들을 일제히 파르르 떨게 한다.

이파리는 곧 끊어질 듯 끝이 파닥이며 뒤집힌다.

화폭 한중간 유난히 길고 가는 잔가지 하나, 이제라도 곧 찢겨 나갈 듯 위태롭다.

 

하지만 저 기세를 보라!

쭉쭉 뻗어 올라간 줄기는 아래서 위로 갈수록 먹색은 흐려지지만 기백은 더욱 장하다.

잎은 위로 갈수록 더 짙고 무성하며, 낭창낭창한 잔가지는 탄력 속에 숨은 생명의 의욕으로 넘실댄다.

그렇다 첫눈에 가득했던 것은 거친 바람이었지만 끝까지 남는 것은 끈질긴 대나무의 정신이다.

 

대나무는 풀도 아니요 나무도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대나무는 사람이다. 

그것도 대단히 어진 사람이다.

식물을 어째서 사람, 그것도 어진 사람이라고 하는가?

다섯 가지 훌륭한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첫째, 대나무는 뿌리가 굳건하다. 어진 이는 그 뿌리를 본받아 덕을 깊이 심어 뽑히지 않을 것을 생각한다.

둘째, 줄기가 곧다. 몸을 바르게 세워 어느 한 편으로 기울지 않는다.

셋째, 속이 비었다. 텅 빈 마음으로 도를 체득하며 빈 마음 즉 허심虛心으로 남을 받아 들인다.

넷째, 마디가 반듯하고 절도가 있다. 그 반듯함으로 행실을 닦는다. 그리고

다섯째, 사계절 푸르러 시들지 않는다. 편할 때나 어려울 때나 한결같은 마음을 지녔다.

 

대나무는 대인군자의 상징이다.

그래서 대개 점잖은 먹빛으로 그린다.

어떤 이가 빨간 대를 그렸다.

사람들이 '세상에 빨간 대가 어디 있느냐?'고 힐난하자, 그는 '그럼 새까만 대나무는 어디에 있소!'라고 대꾸하였다.

대 그림에서 중요한 것은 색과 모양을 넘어선 정신이다.

낙백落魄한 선비처럼 비를 맞고 축 처진 대나무, 미소년처럼 환해 보이는 아지랑이 속의 대나무, 역경을 이겨 내는 지조인 양 차가운 백설에 잎새가 눌려 있는 대나무, 그렇게 대 그림에서는 마음이 느껴져야 한다.

통 굵은 늙은 대나무가 중동(중간이 되는 부분)에서 퍽 소리를 내고 터져서 분질러진 것을 보면 비장함에 눈물을 흘릴 수 있어야 한다.

 

대나무는 군자다.

죽순은 음식이 되고 죽공예품은 우리 삶을 돕는다.

쪼개면 책(죽간竹簡)이 되고, 잘라 구멍을 내면 오묘한 율려律呂의 악기가 되어 우주의 조화에 응한다.

대나무의 조형은 너무나 단순하다.

줄기와 마디와 잔가지와 이파리, 그것이 대나무의 모든 것이다.

그런 대를 옛 사람들은 가장 그리기 어렵다고 일러 왔다.

줄기 하나, 이파리 하나를 이루는 일 획을 잘 긋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획 하나를 잘 그으면 열 획, 백 획이 다 뛰어나다.

그 일 획 속에 바람이 있고 계절이 있고 말로는 다 못 할 사람의 진정이 있다.

 

 

오만원 권 지폐 뒷면에 인쇄된 이정의 풍죽도와 어몽룡의 월매도(출처-새샘이 찍은 오만 원권 지폐)


탄은灘隱 이정李霆(1554~1626)
은 세종의 현손(玄孫; 손자의 손자)이다.

시서화에 능했는데 특히 대나무 그림을 잘 그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묵죽墨竹 화로 꼽힌다.

그는 바람에 흩날리는 풍죽風竹, 눈이 내렸을 때의 설죽雪竹, 비를 맞은 우죽雨竹 등 다양한 대나무를 화폭에 옮겼다.

그의 묵죽화는 절제 속에서 긴장과 생동감이 조화를 이루고 명암의 대비가 두드러지며 마치 서예의 획을 보여 주는 듯 힘이 넘치고 아름답다.

대나무에 담겨 있는 유교적 정신세계를 잘 구현하고 조선시대 묵죽화의 새로운 전형을 개척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정은 임진왜란 때 오른팔에 칼을 맞는 부상을 당했는데, 그의 나이 40대였으니 한창 묵죽을 그려 나가기 시작할 때였다.

화가로서는 매우 위태로운 일이었지만 이를 잘 극복하고 왼팔로 그림을 그려 오히려 더 높은 화격畵格을 성취했다.

탄은 이정<풍죽도>는 어몽룡의 월매도와 함께 올해 처음으로 발행된 오만 원권 지폐의 뒷면 배경그림으로 채택되었다.

  

※이 글은 고故 외우畏友 오주석이 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이다.

 

2009. 8.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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