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표암 강세황 "영통동구도'" 본문

글과 그림

표암 강세황 "영통동구도'"

새샘 2013. 5. 24. 15:54

<경치는 경치대로 대단했어도 나는 여전히 나일 뿐>

 

영통동구도, 강세황, 조선 1757년, 종이에 수묵담채, 32.8 ×53.4㎝ , 국립중앙박물관

 

대자연의 기이한경관을 밝고 화가 특유의 유머러스하고 신선한 감각으로 작품화한 그림이 바로 <영통동구도靈通洞口圖>다.

 

먼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쓴 화제를 읽어보자.

"영통사 계곡 가에 어지럽게 흩어진 바위들은 정말 굉장해서 크기가 집채만큼씩하며 시퍼런 이끼로 덮여 있다. 처음 대했을 때 눈이 다 휘둥그레졌으니, 전하는 말로는 저 아래 연못에서 용이 나왔다고 하지만 믿을 만한 말은 못된다. 그러나 그 주변 웅장한 구경거리는 참으로 보기 드문 것이다."

 

화가는 놀랄 것 다 놀라면서도 제 정신만은 끝내 놓치지 않았다.

그렇게 맑고 낙천적인 기분이 편안하게 작품 전체에 녹아 있다.

구성은 단순하며 바위의 세부 표현 역시 아주 간결하다.

특히 이 그림은 유별나게 개성적이고 이채로워서 비슷한 예를 다른 그림에서 찾아낼 수 없다.

 

강세황그림엔 당시 들어와 있던 서양화법이 응용되어서 먹과 담채가 수채화인 양 묘하게 겹쳐졌다.

화폭은 언뜻 위대한 자연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듯하지만 보는 이는 자꾸만 오른편 아래 쪼그맣게 그려진 주인공에 시선이 끌린다.

빈약한 나귀에 올라탄 저 퉁퉁한 선비를 보라!

주위 경관에 넋이 나갔는지 말구종 아이는 아예 제쳐놓고 저 혼자 좋아라고 터벅터벅 산길을 간다.

자연에 감동했어도 끝내 여유를 잃지 않는 모습이다.

 

황해도 개풍군 오관산 기슭을 거니는 옛 선비 강세황은 여행 중 퍽이나 유쾌했던 것 같다.

윤곽선만 남은 듯한 하얀 능선을 보라!

대충 그린 게 어찌 보면 아주 끼끗하다(활기차고 깨끗하다).

바위는 더더욱 얼추 그려 냈다.

그래서 서양화의 입체감이 나기는커녕 오히려 허공중에 붕 떠 있는 우주선 같다.

장난기 넘치는 익살맞은 문인화의 세계.

경치는 경치대로 대단했어도 나는 여전히 나일 이라는 의식이 슴슴하다(심심하다). 

가장 한국적인 옛그림이 그렇게 탄생했다.

 

강세황(1713~1791)의 호는 표암豹菴, 표옹豹翁 등이다. 강세황 을 두고 흔히들 예원藝苑의 총수라고 부른다. 이 말에 어울리게 그는 문인이자 화가, 평론가로 두루 활동하면서 많은 흔적을 남겼다. 어려서부터 시서화에 재능을 보였던 강세황은 노년에 한성판윤, 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기도 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예원에 머물며 오직 학문과 서화에 매진했다. 강세황은 한국적인 남종 문인화풍을 정착시키고 동시에 진경산수화와 풍속화, 인물화를 발전시켰다. 그는 시종 문인 선비로서 탈속의 경지를 드러내는 삶과 작품을 보여 주었다. 강세황5점의 자화상을 남겼는데 조선시대 화가로는 매우 보기드물게 자화상을 많이 남긴 것이다. 이는 화가 또는 예인으로서의 내면 탐구 욕구, 자의식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또한 그가 송도松都(지금의 개성)를 여행하고 난 후 그곳의 모습을 화폭에 옮긴 <송도기행첩>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도 기여해 18세기 조선미술에 변화와 생동감을 부여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단윈의 위대한 예술을 탄생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했다.

 

이 글은 외우 오주석이 지은 <오주석이 사랑한 우리 그림>(2009, 월간미술)에 실린 글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2013. 5. 24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