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나무상식, 진실게임1-사찰의 구시는 싸리나무? 본문
순천 송광사 비사리 구시
안내문에 조선 영조 이후 국제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이라고 되어 있다.
유명한 승보사찰 순천 송광사의 3가지 명물 중 하나는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비사리 구시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구시란 구유의 방언으로서 소나 말 따위의 가축들에게 먹이를 담아주는 그릇을 말하며, 비사리란 벗겨 놓은 싸리의 껍질이라고 되어 있다.
즉 비사리 구시란 절에서 행사를 치를 때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싸리나무로 만든 나무밥통이다.
구시의 크기는 대체로 절의 세력과 비례한다.
클수록 부처님을 찾는 신자가 많다는 뜻이다.
송광사의 구시는 1724년 전북 남원시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해 만들었다고 한다.
자그마치 쌀 일곱 가마로 지은 밥을 저장할 수 있을 정도로 크며, 한꺼번에 중생 4천명의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는 뜻이다.
2개의 구시 가운데 큰 구시는 얼핏 보아도 폭이 2m나 되고 길이도 4m나 된다.
나이도 150살이 넘는 거대한 나무다.
그런데 싸리나무가 이렇게 굵게 자라기도 한단 말인가?
그런데 싸리나무 구시뿐만 아니라 전국의 이름난 절의 건물 기둥, 목불木佛까지 싸리나무로 만들었다는 문화재가 상당수다.
문화재 싸리나무를 만날 때마다 나무학 상식과는 엄청 거리가 멀어 혼란스럽다.
만약 아름드리 싸리가 있다면 현대 식물학의 학설은 뒤집어질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오늘날의 식물학의 상식으로는 이런 싸리는 전혀 가능하지도 않고 있을 수도 없다.
수목도감에 의하면 싸리는 콩과 싸리속이라는 무리에 들어가는 갈잎떨기나무로서 아무리 크게 자라도 높이 2~3m, 굵기 2~3cm에 불과한 작은 나무라고 적혀 있다.
따라서 무엇인가 잘못 알려진 동명이목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혹시 옛사람들 아름드리로 자라는 다른 나무를 싸리나무란 이름으로 불렀는지 문헌을 뒤져보았다.
싸리는 광주리, 바구니를 비롯한 생활용품에서 서당 훈장님의 회초리, 나아가서는 명궁으로 유명한 이태조의 화살대로 애용되는 등 지금의 싸리나무 모습으로 짐작할 수 있는 쓰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송광사 비사리 구시를 비롯하여 싸리나무로 알려진 이 나무는 실제로는 무엇인가?
이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현미경으로 세포 모양을 조사하고 나무의 종류를 추적한 결과 밝혀진 나무는 다름아닌 흔히 괴목槐木이라 불리는 느티나무였다.
느티나무라면 구시로는 물론 절의 기둥, 나무불상 조각도 가능할 만큼 크게 자란다.
아름다운 무늬가 있고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면서 가공이 쉬운 최상의 재질을 가진 나무다.
천마총의 목관, 화엄사 및 통도사 대웅전, 해인사 수다라장과 법보전의 기둥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가구까지 수많은 나무 유물이 느티나무로 만들어져 있다.
그렇다면 실제의 느티나무가 왜 싸리나무로 알려지게 되었을까?
첫 번째 이유는 옛 선비들의 기록 잘못이다.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궁궐을 설명하는 내용 중, "종루의 기둥은 싸리나무(뉴목杻木=감탕나무)으로 만들었는데, 대개 싸리나무도 역시 큰 것이 있다"라는 말이 있다.
이 글에 대하여 정약용은 '아언각비'에서 뉴목은 싸리나무가 아니라 형목荊木의 잘못일 거라고 지적하고 있다.
형목은 흔히 광대싸리라고 번역하나, 조선 후기 어휘사전인 '물명고'에는 싸리나무라고 되어 있다.
싸리나무든 광대싸리든 두 나무는 모두 기둥으로 쓰이는 나무가 아니다.
실제 무슨 나무인지 잘 알지 못한 채 같은 글자를 두고 해석을 달리한 탓이다.
싸리나무의 형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싸리나무 기둥'이란 표현을 씀으로써 후세에 혼란이 생긴 것이다.
실제 느티나무가 싸리나무로 불인 이유는 이렇게 짐작된다.
느티나무의 재질이 불구佛具의 재료로 매우 적합하여 절에서 흔히 사용한 것에서도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느티나무는 절에서 가장 귀중하게 생각하는 사리舍利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래 사리함은 주로 금동으로 만드나, 사리함을 만드는 과정이나 일시 보관 등에 느티나무가 쓰일 수 있다.
즉 처음에는 '사리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로 변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기둥을 찾아가 보면 엉뚱하게 소나무인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곳이 충남 공주에 있는 보물 801호 마곡사 대웅보전을 들 수 있다.
본존불 앞의 기둥 4개가 싸리나무라고 알려졌으나 실제는 소나무다.
아마 싸리기둥이란 반드시 느티나무가 아니라도 좋은 나무로 만든 기둥이란 의미도 포함하는 것 같다.
순천 선암사 구시
괴목(회화나무)로 만든 대중공양을 위한 길이 3.3m 폭 80cm 높이 50 cm의 밥 보관 그릇으로서 2천인분의 밥을 보관하였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또 하나, 선암사의 구시 역시 길이 3.3m 폭 0..8m에 이르는 대형 밥 보관 그릇이다.
전하는 말로 칡으로 만들었다고 하나, 그 재질은 괴목 즉 회화나무로 판단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그런데 괴목이란 말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 회화나무 2. 느티나무라고 되어 있다.
선암사 구시에 관한 기록에서 괴목이란 한자를 지금의 사전에서 첫 번째 나오는 회화나무라고 본 듯하다.
물론 회화나무는 싸리나무보다 훨씬 크게 자라는 갈잎큰키나무로서 높이 15~25m, 굵기 2m까지 자란다고 되어 있다.
회화나무라는 이름 자체가 괴화槐花나무라고 표기하며 발음은 중국발음을 따서 회화나무라고 부르게 되었다.
회화나무는 잡귀를 물리치는 나무로서 조선시대 궁궐의 마당이나 출입구에 많이 심었으며, 서원이나 향교 등 학당에도 심어 학자수學者樹로서 악귀를 물리치는 염원을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회화나무는 발육속도가 느티나무보다 훨씬 느려 구시를 만들 정도로 크게 자랄려면 육칠십년 이상 되어야 하므로 궁궐이나 학당 주변의 크게 자란 회화나무를 잘라서 사찰의 구시로 만들 가능성이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것 역시 느티나무 괴목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은 박상진 지음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김영사, 2004)에 실린 글을 발췌하고 추가한 것이다.
2015. 8. 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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