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문자와 잉여 생산물과 국가 탄생을 알려주는 창원 다호리 고분군 본문
처참했던 도굴 실습장
"이 연구관, 창원 다호리茶戶里 유적에 도굴이 심하다던데 직접 가서 조사해 보시오."
1988년 1월 정양모 당시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실장(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이 이건무 학예연구관(전 국립중앙박물관장·현 도광문화포럼 대표)에게 현장 조사를 지시했다.
당시 경남 창원시 다호리 고분군은 도굴꾼들 사이에서 '실습장'으로 통할 정도로 유물 도난이 빈번했다.
1980년대 국가 사적 발굴을 주도한 박물관이 묵과할 수 없는 지역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건무는 이영훈(전 국립중앙박물관장), 신대곤(전 국립중앙박물관 유물관리부장), 윤광진(전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한영희(전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 김정완(전 국립대구박물관장) 당시 학예연구사와 함께 다호리로 향했다.
그달 21일에 도착해서 본 현장은 처참했다.
야트막한 구릉 곳곳에 열국시대 고분을 파헤친 도굴갱 40~50개가 줄지어 있었다.
생각보다 극심한 도굴 피해에 이건무는 다급해졌다.
한겨울 바깥 공기에 노출된 유구遺構[옛 토목건축물 자취]는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급격한 손상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팀원들과 온종일 전체 고분에 대한 현황을 대략 파악한 뒤 이 중 구덩이가 제법 큰 1호분 발굴에 곧 착수했다.
도굴꾼이 깔아놓은 볏단을 치우자 약 2미터 깊이의 도굴갱 아래로 너비 0.8미터, 길이 2.4미터 통나무 나무널(목관木棺) 상판이 드러나 있었다.
나무널 안 유물을 빼내기 위해 도굴꾼들이 상판 일부를 깨뜨려놓았지만 거의 원형에 가까운 상태였다.
나무널이 워낙 무겁다보니 통째로 가져가지 못하고 도끼로 낸 구멍에 손을 넣어 짚이는 대로 유물만 훑어간 모양새였다.
발굴팀은 서둘러 나무널을 수습하기로 하고 주변의 흙을 파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구덩이 안 동북쪽 모서리에서 물이 샘처럼 솟구쳐 나무널 윗부분까지 침수된 상태였다.
덕분에 발굴단은 진흙탕 속에서 바가지로 쉴 새 없이 물을 퍼내야만 했다.
나무널을 매장하고 나서 일정 시간이 흐른 뒤 지하수가 터져나온 것으로 추정되었다.
추운 겨울, 꽁꽁 언 손을로 물을 퍼내는 일이 여간 곤욕스러운 게 아니었지만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기록에 없는 역사의 발굴
"어어, 목관 밑에 뭔가가 있다!"
나무널에 체인을 감아 도르래로 들어올리자 바닥에 박혀 있던 구리거울(동경銅鏡) 조각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거렸다.
거기엔 대나무 바구니가 박힌 조그마한 구덩이가 나 있었다.
부장품을 따로 묻은 구덩이 '요갱腰坑'[무덤 속 나무관의 허리춤 부근 아래 땅을 파서 만든 둥근 구덩이]이었다.
요갱 안에는 철검·꺾창[긴 자루에 날을 직각으로 매달아서 찍거나 베는 데 쓰는 무기]·쇠도끼·낫 등 철기와 칼집·활·두豆[나무 제기의 일종]·부채·붓 등 칠기가 있었고, 동검·동경 등 청동기 등이 거의 온전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더욱이 칠기에는 감 3개가 담겨 있었고 하관할 때 사용되는 동아줄 주변으로 밤이 흩뿌려져 있었다.
서기전 1세기 무렵 열국시대 변한의 나무널과 칠기, 과일이 부식되지 않고 2000년 넘게 고스란히 보존될 수 있었던 것은 발굴단을 지독히도 괴롭힌 지하수 덕분이었다.
매장 직후 물이 뒤섞인 진흙이 나무널을 뒤덮어 외부 공기를 차단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무덤을 조성한 열굴시대 사람들은 죽은 이가 내세에 가져가 사용할 만한 물건을 요갱 안에 정성스레 묻어둔 것으로 보인다.
출토 양상으로 볼 때, 부장품을 묻은 직후 이들은 제기로 쓰인 칠기에 감을 얹어놓고 제사를 지냈던 듯하다.
이어 나무널을 동아줄에 묶어 내리면서 밤을 뿌렸을 것이다.
나무널이 안치된 구덩이에 흙을 채울 때에는 활이나 도끼 등 조문객들이 사용하던 물건을 묻고 다시 한번 제사를 지냈을 것이다.
생전에 고인과 교류한 인근 지역의 수장들이 찾아와 평소 자신들이 아끼던 물건을 노잣돈처럼 무덤에 넣어준 게 아니었을까.
다호리 유적은 우리 역사 기록이 극히 드문 열국시대 생활상에 접근해 들어갈 수 있는 통로라는 점에서 의미가 적지 않다.
사실 ≪삼국사기≫나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대한 신뢰성에 많은 학자가 의문을 품는 상황에서 학계는 열국시대 등 한반도 초기 역사의 빈틈을 중국이나 일본 역사 기록을 통해 메우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다호리 유적 발굴은 3세기 전반 한반도를 다룬 거의 유일한 동시대 기록인 ≪삼국지≫ 「동이전」을 유물을 통해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상당하다.
통상 고고학자들은 유물이 출토되면 현존하는 역사 기록과 맞춰 보는 작업부터 시작하기 마련이다.
온전한 형태의 통나무 나무널
당시 발굴단이 무덤에서 꺼낸 나무널은 발굴 역사상 처음으로 온전한 형태가 확인된 통나무형 나무널이었다.
이건무는 "판재식板材式(나무판) 목관인 줄 알았는데 막상 파보니 출토 사례가 극히 드문 통나무형 목관이 나와서 놀랐다"며 "이것만 수습해도 굉장한 성과라고 봤다"고 회고했다.
앞서 1971년 전남 화순 대곡리 고분 발굴에서 밑이 둥근 약 50센티미터 길이의 나뭇조각이 발견된 적이 있다.
당시 학계에서는 이것을 통나무형 나무널의 일부로 추정했는데, 다호리 유적에서 비로소 완형의 통나무형 나무널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각에서는 통나무형 나무널이 중국 남부 지역 장례 문화의 영향일 수 있다고 본다.
베트남이 원산지인 율무 씨앗이 함께 출토되었고 무엇보다 중국 남부에서 주로 나오는 각형동기角形銅器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발굴 현장에서는 나무널무덤[목관묘木棺墓: 주검을 넣은 널(관棺)을 묻은 무덤]을 종종 움무덤[널무덤 또는 토광묘土壙墓: 널이나 덧널(곽槨) 없이 주검을 묻은 무덤]이나 돌무지무덤[적석묘積石墓: 주검, 널, 덧널을 돌로 쌓은 무덤]으로 오인하곤 한다.
나무가 썩어 흔적을 찾기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전남 함평 초포리 유적도 초기에는 돌널무덤(석관묘石棺墓)인 줄로 알았지만 나중에 나무널무덤으로 밝혀졌다.
나무널이 부식되자 밖을 채우고 있던 돌들이 무너져 내려 돌널무덤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나무관 수습 또한 어려운 문제였다.
그때까지 나무관을 들어올린 경험이 없었던 이건무의 고민이 깊었다.
결국 예산 부족으로 지금처럼 포클레인을 동원하지 못하지 도르래를 사용했다.
장정 세 명이 달라붙어 나무관에 쇠사슬을 감은 뒤 일제히 잡아당겨 끌어올렸다.
고인돌 발굴 때에도 돌판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도르래를 사용해 상판을 들어올리곤 한다.
2000년 넘게 땅속에 묻혔다가 급작스레 바깥 공기에 노출된 나무관의 훼손을 막는 것도 시급했다.
이건무와 친구처럼 지낸 고 이상수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실장이 현장에 급파되어 보존처리를 맡았다.
고대 국가의 기원을 풀 실마리
요갱 안에는 쇠망치로 두들겨 만드는 '단조鍛造 철기'와 쇳물을 부어 만드는 '주조鑄造 철기'가 모두 들어 있었다.
특히 다호리 17호분에서 단조에 사용된 쇠망치가 출토되었다.
그때까지 단조용 쇠망치는 평양 정백동 유적에서 나온 것이 유일했다.
단조 철기는 주조보다 강도가 센 편인데 무기나 농공구류를 단조 철기로 제작한 것은 고대 국가로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흔적이다.
그러나 이건무가 꼽는 다호리 유적 최고의 유물은 따로 있다.
그는 무덤에 부장된 붓과 삭도削刀[목간에 잘못 쓴 글자를 깎아내는 지우개]를 첫손에 꼽았다.
학계는 다호리 유적의 붓과 삭도를 서기전 1세기 한반도에서 문자가 쓰였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본다.
다호리 발굴 초기에 일본 학계는 이것이 글씨를 쓰는 용도가 아닌 옻칠용 붓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이 시기 한반도에서 문자생활을 영위했을 가능성을 낮게 본 것이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다호리와 마찬가지로 붓과 삭도, 천평天枰(저울)이 한 세트로 출토된 사실이 이건무에 의해 확인되었다.
마치 지금의 영수증처럼 천평으로 상품의 무게를 달아본 뒤 붓과 삭도로 매매 내용을 죽간竹簡[종이가 발명되기 전 글자를 기록하던 대나무 조각이나 조각을 엮어서 만든 책]에 기록한 것으로 추정된다.
다호리에서 출토된 붓의 길이가 23센티미터인 점도 의미가 있다.
3세기 동아시아의 도량형 질서에서 한 척尺은 23센티미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무게를 재는 저울추인 겁마砝碼가 무덤에서 발견된 것도 이 시기에 도량형이 일반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역사고고학계는 물건의 가치를 비교하는 도량형의 존재 자체가 농업 생산력 증대에 따른 잉여 생산물과 국가의 탄생을 시사하는 강력한 증거라고 해석한다.
다호리 1호분에서는 무덤 주인의 사회적 신분을 과시하는 위세품인 한나라 오수전五銖錢도 나왔다.
서기전 1세기 변한이 풍부한 철기를 매개로 중국, 왜와 교역을 벌인 정황을 보여주는 자료다.
이는 ≪삼국지≫ 「동이전」에 기록된 내용을 증명해주는 실물 자료이기도 하다.
아마도 1호분에 묻힌 이 지역의 수장은 자신에게 부를 안겨준 철기와 더불어 오수전을 묻음으로써 생전의 호사를 내세에서도 누리고 싶었는지 모른다.
28년 만에 다호리 발굴 현장을 함께 답사한 이건무에게 아쉬움으로 남는 것이 있는지를 물어봤다.
그는 푯말 하나 없이 잡초만 무성한 1호분 자리를 한참 바라보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당시는 겨울이었던 데다 추가 도굴이 걱정되어서 좀 서두른 감이 있어요. 경찰에 유구 보호를 요청하고 날이 풀리기를 기다렸다가 발굴에 들어갔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때는 발굴 단원들이 돌아가면서 밤새 고분 주변을 순찰할 정도로 도굴 우려가 컸지요. 지금이라면 가설덧집을 세우고 실측도 꼼꼼히 하면서 진행했을 겁니다."
천생 고고학자 이건무
이건무는 박물관 임시 고용원으로 출발해 국립중앙박물관장(차관급)과 문화재청장(차관급)에 연달아 오른 인물이다.
문화재 행정에서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문화재청장을 모두 역임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두 기관은 고고학이나 미술사를 전공한 학예직 공무원들이 포진한 양대 국가 기관인데, 내부적으로는 서로 앙숙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물관이 자체 발굴단을 활발히 운영하던 시절, 발굴 허가권을 쥔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과 알력을 빚는 일이 종종 있었다.
누구와도 화합하는 그의 원만한 성품이 관복으로 이어졌다는 평가도 있다.
이건무의 할아버지는 국사학계의 거두인 고 이병도 서울대 교수이고, 형은 이장무 전 서울대 총장이다.
집안 형제나 친척 상당수가 학자여서 어렸을 때부터 학문적인 분위기에 익숙했다.
그렇지만 그는 서울대 졸업 이후 교수가 아닌 1973년 당시 월급 1만2000원인 박물관 임시 고용직을 택했다.
이건무는 "그때 박물관에 들어간 것은 나로서는 행운이었다"며 "고고학 공부와 현장 조사를 병행하는 데 박물관은 최적의 직장이었다"고 말했다.
1970~1980년대까지만 해도 발굴 조사 전문 기관이 출범하기 전이라 국립박물관이 주요 발굴 현장을 이끌었다.
따라서 박물관 학예연구직은 자신의 관심 분야를 찾아 유적을 손수 발굴해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직접 기안해 고고 현장을 조사할 수 있다는 것이 참 좋았다"고 한다.
초대 국립박물관장을 지낸 김재원 박사(박근혜 정부 때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김영나 서울대 명예교수의 부친)나 삼불 김원룡 서울대 교수는 박물관장인 동시에 발굴 현장을 누빈 고고학자이기도 했다.
이건무는 자신의 박물관 인생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선학으로 고 한병삼 국립중앙박물관장을 들었다.
두 사람은 고인돌을 비롯해 동산동 패총, 암사동 선사유적 등 여러 발굴 현장을 함께 다녔다.
그는 한병삼이 생전 발굴 현장에서 사용하던 꽃삽을 고이 간직했다가 퇴직할 때 박물관에 이를 기증할 정도로 고인을 존경했다.
사실 그가 청동기 고고학자로 자리매김하는 데에도 고인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박물관을 이끌던 한병삼의 관심이 선사고고학에 쏠린 덕에 이건무는 입사하자마자 선사유적 발굴에 투입되었다.
이건무는 암사동 유적(신석기)을 비롯해 경기 연천군 전곡리 유적(구석기), 부여 송국리·춘천 중도 유적(청동기), 창원 다호리·광주 신창동 유적(열국) 발굴에 잇달아 참여했다.
이 중 송국리 유적은 '송국리형 문화' '송국리형 주거지'라는 학술 용어가 생길 정도로 한국의 대표적인 청동기 문화로 분류되는데,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가 일본으로 전파되었음을 생생히 보여준다.
춘천 중도를 제외하고 이건무가 당시 발굴한 선사유적 대부분을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학술적으로 중요한 유적을 손수 발굴하는 행운을 누린 것이다.
이건무는 "박물관 초년 시절부터 선사고고학이 역사고고학보다 더 재미있었다. 기록이 아닌 사람들의 자취를 통해 역사를 복원하는 일이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출처: 김상운 지음, '발굴로 캐는 역사, 국보를 캐는 사람들'(글항아리, 2019).
2021. 2. 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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