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6: 초기 철기시대의 소국들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6: 초기 철기시대의 소국들
새샘 2022. 3. 29. 21:29<철기시대 고대 근동 제국의 발전>
페니키아인이 이집트로부터의 독립 | 서기전 1200년 |
팔레스타인인의 군사적 지배 | 서기전 1100~1000년 |
이스라엘 왕국의 통합 | 서기전 1000~973년 |
아시리아 세력의 부활 | 서기전 883년 |
페르시아의 바빌론 정복 및 병합 | 서기전 539년 |
후기 청동기시대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면서 근동의 지정학적 판도는 크게 변했다.
아나톨리아 Anatolia에서는 히타이트 제국 Hittite Empire이 붕괴한 폐허 속에서 인도-유럽어족으로 이루어진 소왕국들이 마치 조각그림판처럼 자리를 잡았다.
동부 지중해 해안의 레반트 Levant—오늘날 이스라엘·레바논·시리아 등이 자리 잡은 지역—도 비슷한 양상이었다.
몇 백 년 동안 이 지역은 이집트 Egypt와 히타이트의 지배를 받았다.
이들 두 제국[히타이트와 이집트]의 쇠퇴와 더불어 생긴 힘의 진공으로 말미암아 이 지역에는 새로운 국가들이 출현했다.
정치적·군사적인 면에서 초기 철기시대의 소국들은 기껏해야 이류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서양문명의 지적·종교적 발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다.
1. 페니키아인
페니키아인 Phoenician은 우가리트어 Ugaritic, 히브리어 Hebrew, 아모리어 Amorite 및 그 밖의 서부 셈어계 방언과 긴밀하게 연관된 셈어 Semitic를 사용한 가나안인 Canaanite이었다.
그들은 문화적·정치적으로 고대 근동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페니키아 Phoenicia 도시들은 제각기 독립되어 있었다.
수메르인 Sumerian이 그랬던 것처럼, 페니키아인의 첫 번째 충성 대상 역시 페니키아인이라고 하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각자의 '도시'였다.
레반트 본토에 자리 잡은 개개의 페니키아 도시들은 제각기 세습 왕가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페니키아인이 개척한 해외 식민지에서는 새로운 정부 형태가 등장했다.
소수의 엘리트 가문이 권력을 공유한 것이다.
이 귀족적 정부 형태는 로마를 포함한 많은 서부 지중해 도시의 모델이 되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대부분의 페니키아 도시들은 이집트의 지배를 받았다.
서기전 1200년 이후 이집트 제국의 영향력이 없어지자 페니키아 도시들은 기왕에 갖고 있던 상업적 장점을 활용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페니키아 도시 구블라 Gubla는 이집트 지배 아래서 번성하는 상업 중심지였고, 그 당시 높이 평가받던 이집트의 필기용구인 파피루스 papyrus[갈대 줄기를 압착한 다음 얇게 발라내어 만든 종이 이전의 대용품] 의 중계무역항이었다.
파피루스 무역은 철기시대 내내 이어졌고, 그리스인이 이 도시에 붙인 비블로스 Byblos란 이름은 '책'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블리온 biblion의 어원이 되었다.
페니키아 근해의 뿔고동에서 채취한 값비싼 자줏빛 염료 때문에 페니키아인 Phoenician이라는 그리스어는 '자줏빛 민족 purple people'을 뜻하게 되었다.
페니키아 직물은 상인들이 가는 곳마다 높은 값을 받았다.
안티레바논 Antilebanon 산맥의 목재—특히 삼나무—와 유명한 가나안 유리도 비싼 값을 받았다.
또한 페니키아인은 전문적인 금속 세공인, 상아 조각가, 선박제조공 등으로도 활약했다.
○페니키아 도시들
깊은 계곡으로 갈라진 해안 산맥을 따라 자리 잡은 페니키아의 도시들은 바다에 면해 있었다.
페니키아인은 상인이자 뱃사람으로 유명했다.
그들은 또한 공격적인 식민지 개척자들로서, 페니키아 사회 내부의 상업적 경쟁과 환경의 제약이라는 이중의 압박에 직면해 있었다.
서기전 10세기 말에 이르러 페니키아 상인은 지중해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를 누볐으며, 아마도 대서양을 향한 모험도 시작했을 것이다.
우리는 페니키아인이 프랑스 북서부의 브루타뉴 Bretagne와 잉글랜드의 콘월 Cornwall—유명한 주석 산지—까지 모험을 감행했다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 Herodotus는 페니키아의 상인 모험가들이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 항해했다고 주장했다.
서기전 9세기 말 티레 Tyre 출신의 식민지 개척자들은 오늘날 튀니지 Tunisia에 카르타고 Carthago를 건설했다.
카르타고는 궁극적으로 서부 지중해를 제패했고 몇 백 년 뒤에는 로마와 충돌하게 되었다.
○문화적 영향
페니키아인의 광범위한 식민 활동과 상업적 노력은 지중해 전 지역의 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페니키아인의 초기 해외 무역 파트너 중에는 그리스인이 있었다.
페니키아인은 미케네 Mycenae 요새들이 붕괴된 뒤 그리스 세계에서 도시생활이 재탄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근동의 예술적·문학적 감수성도 전해 주었다.
그러나 그리스인의 삶에 대한 페니키아인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두말할 나위 없이 알파벳이다.
<알파벳의 발전(사진 출처-출처자료1)>
앞에서 보았듯이 바로 앞 글[1부 고대 근동 - 2장 고대 근동의 신과 제국(서기전 1700~500년) 4: 후기 청동기시대의 국제체제]에서 보았듯이, 30개의 알파벳이 청동기시대 말기에 우가리트에서 발전되었다.
서기전 1100년 무렵 페니키아인은 이 문자체계를 위 표에서 보는 것처럼 22개로 정리했다.
이 간단하고 유연한 문자체계는 상업과 회계를 편리하게 해주었을 것이다.
그들이 문자를 몰랐던 그리스인에게 자신의 발명품을 나누어준 이유는 알 길이 없다.
페니키아인은 자신에게 익숙한 상업 관행과 기록 보존 습관을 그리스인에게도 장려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설명하든 그리스인은 자신이 페니키아인에게 진 빚이 크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후대 그리스 전설은 그들의 알파벳 발명을 그리스에 정착했던 페니키아인 카드모스 Kadmos의 공으로 돌렸다.
그 흔적은 그리스 문자(알파 alpha, 베타 beta, 감마 gamma, 델타 delta)와 페니키아 문자(알렙 alef, 베트 bet, 기멜 gimel, 달렛 dalet)의 흡사한 명칭에서, 그리고 문자 형태의 현저한 유사성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2. 팔레스타인인
페니키아에서 레반트 Levant 해안을 따라 남으로 내려가면 팔레스타인인 Palestinian의 영토가 있다.
아마도 팔레스타인인의 문화만큼 역사적으로 좋지 않은 평판를 얻은 문화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팔레스타인인은 히브리 민족 Hebrew의 성경 전승傳承에서 악당으로 묘사되었다.
오늘날에도 영어의 '필리스킨 philistine'은 촌스럽고, 교양 없고, 무지한 사람을 일컫는 형용사로 계속 사용되고 있다.
그들의 오명은 초기 철기시대 레반트에서 그들이 누린 독특한 지위에서 비롯되었다.
람세스 3세 Ramses(Ramsses, Rameses) III에게 패배한 바다 민족 중 하나인 펠레세트 Peleset의 후예인 그들은 레반트에 정착한 뒤 도시화했으며, 빠른 시일 안에 그 지역의 다른 목축민들에 비해 우월한 지위에 올랐다.
그들의 이웃 목축민 중 하나가 히브리인이었다.
히브리인들에게 팔레스타인인은 최대의 적이었다.
팔레스타인인은 여러 세대에 걸쳐 주변 민족들과 다른 별개의 정체성을 유지했다.
새로운 고고학 발굴을 통해 이 정체성이 에게해에서 활동한 그들의 과거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있음이 밝혀졌다.
우리는 팔레스타인인의 언어—남아 있는 기록이 거의 없는데다 그들은 점차 가나안 방언을 사용했다—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들은 물질문화, 행동, 조직 등 모든 면에서 미케네 세계와 긴밀한 유사성을 보여준다.
팔레스타인인은 에게해 본거지에서 레반트로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를 전해주었다.
신종 작물의 재배를 통해 얻은 이익으로 그들은 강력한 군대를 양성했고, 서기전 12세기와 11세기에 이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은 남부 레반트에서 금속 가공의 독점권을 확실히 장악했고, 이 때문에 그들의 적대 세력들은 사실상 무기 제조가 불가능했다.
팔레스타인인은 5개의 요새—이른바 펜타폴리스 pentapolis—에 세력 기반을 두고 있었다.[아래 그림 참조]
해안의 가자 Gaza, 아슈켈론 Ashkelon, 아슈도드 Ashdod, 내륙의 에크론 Ekron, 가트 Gath 등이었다.
도시라기보다는 요새에 가까웠던 팔레스타인 중심지들은 후기 미케네 세계의 요새화된 궁정과 놀랍도록 닮았으며, 실제로 동일한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무장한 요새들을 거점으로 하여 팔레스타인인은 농업 생산의 조직화 및 주요 교역로 통제를 통해 주변 지역을 지배하고자 했다.
독립적인 영주들이 각각의 팔레스타인 요새를 지배했고 그들 사이에는 당연히 긴장과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은 그리스 서사시의 영웅들이 그랬듯이, 전쟁이라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그들 사이의 차이점을 접고 단결할 수 있었다.
팔레스타인인을 그들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사실상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차적으로 그들의 적이었던 히브리인을 통해 팔레스타인인을 알고 있다.
히브리인은 처음에는 그들을 두려워했다가 나중에는 경멸했다.
다른 근동 문화와 마찬가지로 히브리인의 역사적 전통은 적들을 비방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그들은 모압인 Moabite과 암몬인 Ammonite이 롯 Lot과 그의 딸들이 사이에 근친상간으로 태어난 자손이라고 선언했는가 하면, 팔레스타인인과 페니키아인의 문화 관행을 "주께서 보시기에 사악하다"고 깎아내렸다.
우리는 그와 같은 악담에 오도되어서는 안 된다.
잔인하고 오만한 골리앗 Goliath, 배신한 요부 들릴라(데릴라, 딜라일라) Delilah, 이 두 사람은 ≪히브리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악명 높은 팔레스타인인이지만, 팔레스타인 사회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아무런 근거도 제공하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우리는 판단의 근거로 삼을 만한 다른 자료를 갖고 잊지 못하다.
히브리인이 팔레스타인인을 두려워할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후기 청동기시대에 이들 에게해 전사들은 대단히 유능한 용병이었다.
레반트에 근거를 확보하자마자 그들은 즉각 이 지역의 취약하고 조직화가 덜 된 이웃 민족을 정복하고 착취하기 시작했다.
히브리인이 거주하던 구릉지에 대한 팔레스타인인의 압박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팔레스타인인은 거룩한 언약궤가 보관된 실로 Shiloh의 성전을 위협했다.
언약궤란 히브리인의 신 야훼(여호와) Yahweh가 시나이 Sinai 산에서 모세 Moses에게 준 최초의 율법 서판이었다.
히브리 전승에 따르면 이스라엘 Israel 지파들은 언약궤를 앞세워 팔레스타인인에 맞서 싸웠지만 전투에 패했고 실로의 성전도 파괴되고 말았다.
그 후 팔레스타인인은 히브리 땅 곳곳엣 수비대를 주둔시키고 히브리인이 금속 가공 기술을 배우지 못하도록 막았다.
또한 그들은 조공을 거뒀고, 성경에 따르면 정복 민족 특유의 학정을 저질렸다.
3. 히브리인
<히브리 사회의 변화>
민족국가 형성을 위한 초기 노력 | 서기전 1025년 |
다윗이 이스라엘 왕으로 즉위 | 서기전 1000년 |
이스라엘과 유다로 분열 | 서기전 924년 |
유다의 멸망과 바빌론 포수捕囚[유다를 멸망시킨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유다 왕을 비롯한 상류층을 포로로 잡아 바빌론으로 압송]의 시작 | 서기전 586년 |
우리는 2장 끝부분에서 히브리인의 문화 경험과 그들의 일신교적 신개념을 다룰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철기시대 레반트에서 히브리 사회가 이룩한 정치 발전에 주목하고자 한다.
그러나 히브리 사회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 논의하든 건에 종교 개념 및 관행은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고대 문화가 그러하듯이 히브리인은 처음에는 정치와 종교를 분리하지 않았다.
후대에 정치와 종교가 분리된 것은 그들의 남다른 신학, 그리고 그 신학이 한 민족으로서 그들의 발전에 미친 영향 때문이었다.
히브리 종교 전통의 탄력성과 그것이 후대의 서양문명 발달에 미친 중대한 영향력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초기 히브리인에 관해 장황하게 논의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히브리인은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따라서 히브리 문화는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문화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기원
역사가들은 히브리인의 독특한 업적 가운데 하나인 ≪히브리 성경≫—그리스도교의 ≪구약성서≫— 덕분에 커다란 축복을 누리고 있다.
성경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귀중한 역사 자료로서 그 안에는 문화 관행과 역사 사건에 관한 놀라우리만큼 상세한 이야기가 가득 차 있으며, 동시에 서양세계의 가장 중요한 종교 전통의 발전 과정에 대한 안내자 역할을 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이 알고 있는 의미의 역사서는 아니다.
성경聖經(성서聖書) Bible은 신원 미상의 작가와 편찬자들이 몇 백 년 동안 쌓아올린 모자이크식 저작이다.
일부 역사적 설명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초월적 창조주와 그의 특별한 민족으로 선택된 히브리인과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둘 사이에 맺어진 계약에 관한 이야기이며, 둘 사이의 관계를 거듭해서 시험하고 또 재확인하는 시련의 이야기이다.
성경의 첫 다섯 책(모세 5경)에 수록된 역사 이야기는 특히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믿을 수 없을리만큼 장수한 일련의 족장들(예로서 므두셀라 Methuselah는 900살 이상을 산 것으로 되어 있다)로 인해 초래된 연대기적인 난관은 차치하고서라도, 이 다섯 책에 실린 이야기의 많은 부분은 근동의 다른 문화에서 차용한 것으로 보인다.
창조와 홍수 이야기는 수메르인에게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다.
족장들의 율법과 관행은 분명 그들 이전의 후르리인 Hurrian[서기전 2천년기에 중동 문화와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민족]의 것이다.
모세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사실상 사르곤 Sargon 전설의 복사판이다.
이집트 탈출 이야기는 역사적 관점에서 문제가 있다.
「여호수아서」는 이집트에서 돌아온 히브리인이 토착 가나안인을 정복하고 추방했다고 설명했지만, 고고학 및 언어학의 증거에 따르면 히브리인은 본질적으로 내륙 거주 가나안인이었다.
바다 민족의 침략이 있은 뒤 이집트를 떠난 히브리 난민과 한데 뒤섞이긴 했지만, 그들 대부분은 몇 세기 동안 계속해서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었다.
중대한 종교적·문화적 발전이 서기전 2천년기에 일어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성경의 처음 다섯 책들은 정확한 역사 기록이라기보다는 회고하는 추정이나 정당화인 것으로 보인다.
성경 가운데서도 이른바 역사서로 분류되는 문헌들은 정보 신뢰성이 좀 더 높긴 하지만 그중 어느 것도 고고학 증거로서 확증하기는 매우 곤란하다.
예를 들면「판관기」에서 히브리인은 메마르고 거친 환경을 떠돌다가 식량 생산이 가능한 샘물과 계곡 언저리에서 이제 막 영구 정착을 하기 시작한 유랑 목자 무리로 나타난다.
히브리인은 12개 지파로 이루어졌는데, 지파란 전쟁, 가축 약탈, 사법 분쟁 등에서 서로 돕고 보호하는, 확장된 씨족 단위다.
각 지파는 한 명의 판관이 지배했는데, 그는 전쟁 사령관, 대제사장, 분쟁 중재자 등 씨족 기반 사회에서 권력자가 떠맡는 전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서기전 12세기 중반에 이르러 이들 지파는 대략적이나마 각자의 거주 지역을 구분했다.
남쪽 거주자들은 스스로를 유다 Judah라고 불렀고, 북쪽 거주자들은 이스라엘 Isarel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인과 팔레스타인인
하지만 이런 집단 호칭 때문에 인시의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
히브리 지파는 일치된 행동을 하기 위한 효율적 메커니즘을 거의 갖지 못했다.
그 사실은 팔레스타인인이 서기전 1050년 무렵 레반트 해안 지역을 정복했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절멸 위험에 직면한 히브리인은 내륙 구릉 지역을 기반으로 필사적인 저항을 펼쳤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인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좀 더 빈틈없는 '민족적' 형태의 정부가 필요했다.
그러므로 서기전 1025년 무렵 한 지파의 경건한 판관인 사무엘 Samuel이 사울 Saul을 왕으로 선택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히브리인의 저항 운동을 이끌도록 했다.
그러나 사울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무엘의 불만을 샀다.
사무엘은 한창 전투을 수행하고 있는 사울 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사울은 장수로서도 유능하지 못했다.
그는 팔레스타인인의 구릉지 침공을 막아내긴 했지만 계곡과 해안 평야에서는 그들을 물리치지 못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젊은 전사 다윗 David을 지지하게 되었다.
다윗은 원래 사울의 보좌관이었지만 사울을 떠나 대중적 지지를 얻고자 했다.]
독자적인 군사 원정을 수행하면서 다윗은 연거푸 팔레스타인인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반면 사울의 군대는 빈번히 실패했는데, 성경은 이를 사울의 부적합성에 대한 신의 징벌로 표현했다.
하지만 다윗은 엄밀한 의미에서 민족 영웅은 아니었다.
사울이 그를 궁정에서 쫓아낸 직후 다윗은 히브리인과 팔레스타인인 사회의 접경 지역에서 도망자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나중에는 팔레스타인을 섬기는 용병 노릇을 했다.
사울이 죽음을 맞이한 결정적 전투에서 다윗은 팔레스타인 용병으로서 사울과 맞서 싸웠다.
사울이 죽은 직후 다윗은 왕이 되었다.
다윗은 처음에는 고향인 유다의 왕이었다가 나중에는 사울의 고향인 이스라엘의 왕도 겸하게 되었다.
○히브리 왕국의 결속
서기전 1000년경 다윗이 왕위에 오르면서 고대 히브리 정치사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가 열렸다.
다윗은 때마침 다가온 새로운 기회들을 활용해 왕국을 강화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집트가 서기전 11세기 말에 급속히 쇠퇴하면서 팔레스타인 경제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팔레스타인 사회를 분열시켰다는 점이다.
교활하고 기회주의적인, 그러면서도 탁월한 리더십으로 다윗은 팔레스타인인을 남쪽의 좁은 해안 지역으로 바짝 밀어붙였다.
그는 인근의 모압인과 암몬인을 물리치면서 요르단강(요단강) Jordan River 동안 및 사해 Dead Sea 동쪽으로 지배권을 확대시켰다.
서기전 973년 다윗이 사망할 무렵 그의 왕국은 북쪽 유프라테스강 Euphrates River 중류에서 남쪽의 아카바만 Gulf of Aqaba까지, 그리고 서쪽의 지중해 Mediterranean Sea 해안에서부터 동쪽의 요르단강 건너 시리아사막 Syrian Desert까지 뻗었다.
이제 이스라엘은 근동 정치의 주요 세력이었다.
인접 제국인 이집트와 아시리아의 일시적 쇠퇴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위상은 드높아졌다.
권력과 위신이 커나가면서 다윗은 대단히 인기 없는 과세 제도와 강제 노역을 신민에게 부과했다.
그의 목표는 예루살렘 Jerusalem에 영광스러운 정치적·종교적 수도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예루살렘은 원래 가나안 사람의 정착지였다.
새로 정복한 도시인 예루살렘은 이스라엘 12개 지파 중 어느 지파와도 연고가 없었고 그들 사이에 있었던 해묵은 갈등의 범주 밖에 위치하고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예루살렘은 유다의 남부 지파들(다윗은 그 일원이었다)과 이스라엘의 북부 지파들(사울은 그곳 출신이었다) 사이에 놓여 있었다.
다윗은 이 도시를 종교 중심지로 신성화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예루살렘을 언약궤의 보관장소로 정하고 히브리 신 야훼의 사제들을 재조직했다.
이런 조치를 통해 다윗은 새로운 민족 정체성을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는 다윗 가문을 구심점으로 삼고, 다윗 가문과 야훼와의 관계를 중점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이스라엘과 유다 사이의 해묵은 분열을 극복하고자 했다.
○솔로몬 왕 치세(서기진 973~937년)
다윗의 아들 솔로몬 Solomon은 부왕의 정책을 계승하되 이들 대대적으로 확장시켰다.
그는 언약궤를 보관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거대한 성전을 건축했다.
야훼 숭배에 대한 솔로몬의 가시적 후원은 히브리 성서 기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들은 솔로몬 치세를 히브리 황금시대로 묘사했다.
그러나「잠언」의 지혜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은 무자비하고 때로 잔인한 지배자였다.
그의 야훼 숭배 장려는 전제적 지배와 국왕 권력 확대를 수반한 것이었다.
솔로몬은 300명의 부인과 700명의 첩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하렘 harem을 갖고 있었는데, 그들 상당수는 백성이나 동맹국 신민 가운데서 충원되었다.
그는 자신의 궁전—성전은 궁전의 일부였다—에서 고대 근동의 유력자들처럼 지배했다.
사치스러운 취미와 통치 계획의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솔로몬은 수많은 억압적인 과세 및 행정 제도를 시행했다.
그는 자국을 통과하는 대상(카라반 caravan)에게 관세를 부과했다.
티레의 페니키아 왕 히람 Hiram의 도움을 받아 솔로몬은 아카바만 상류를 거점으로 한 상선단을 구축했다.
이 선박들은 홍해 Red Sea와 그 너머 해역을 왕래하면서 남부 네게브 Negev에서 솔로몬의 노예가 채굴한 황금과 구리 등을 거래했다.
일찍이 이스라엘에 이토록 많은 재화가 쏟아져 들어온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솔로몬은 백성을 징집해 대규모 상비군을 갖추었다.
그들은 전차 및 기병 부대 장비를 갖추었고, 외국에서 구입한 말을 활용했다.
야심찬 건축 계획을 수행하기 위해 솔로몬은 백성, 특히 북부 농업 지역의 백성에게 해마다 4개월씩 강제 노역을 부과했다.
이런 억압을 이스라엘 백성은 감당할 수 없었다.
북부 주민은 왕이 거주하는 수도에 대한 반항심으로 들끓었고, 솔로몬이 사망한 뒤 후계자인 아들은 반란에 직면했다.
오래지 않아 연합 왕국은 둘로 갈라졌다.
다윗 가문은 수도를 예루살렘으로 한 남왕국 유다를 지배했고, 북부의 10개 지파는 동맹을 맺고 수도를 세겜 Shechem으로 한 북왕국 이스라엘을 세웠다.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
이런 분열은 히브리인을 정치적으로 약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심각한 결과를 초래했다.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왕 여로보암 1세 Jeroboam I는 이스라엘 주민의 예루살렘 성전 순례와 헌신이 이스라엘의 재원을 고갈시킨다고 보고 이를 중단시키려 했다.
따라서 그는 단 Dan과 베델 Bathel에 옛 성소 두 개를 부활시켜, 대중성은 있되 신학적으로 금기시되었던 가나안 종교에 호소했다.
그 결과 여로보암과 그 후계자들은 성전 중심적이고 친유대적인 히브리 성서 편찬자들의 분노를 샀다.
성서 편찬자들은 그들을 우상숭배자로 규탄했다.
그러나 이는 회고적인 관점일 뿐이다.
고고학과 성서 기록은 야훼 숭배가 남과 북을 막론하고 일신교와는 거리가 멀었음을 입증한다.
이방적인 의전과 제례, 특히 가나안 신인 바알 Baal및 아세라 Asherah 숭배는 몇 백 년 동안 히브리 종교가 지녔던 현저한 특징이었다.
두 히브리 왕국은 몇 백 년 동안 독립을 유지—북왕국 이스라엘은 서기전 722년까지, 남왕국 유다는 서기전 583년까지—했지만 근동의 급변하는 정치 상황은 두 분단국가를 점점 더 허약하게 만들었다.
다윗과 솔로몬이 창출한 히브리 연합 왕국이 흥기한 것은, 때마침 그 지역의 전통적 제국 세력이 일시적으로 약화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죽은 뒤 몇 세대 지나지 않아서 히브리인을 비롯한 근동·중동의 약소 민족들은 메소포타미아에 세력 기반을 둔 아시리아 제국 Assyrian Empire의 위협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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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3. 29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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