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9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9: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신축부지, 암사동 유적, 신정동 토성, 대모산 유적 본문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 신축부지 유적
지금 자리한 국립중앙박물관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 연표에 따르면 1997년 12월 9일부터 발굴을 시작했지만 완료 시점은 알 수 없다.
발굴기관은 국립중앙박물관이다.
발굴보고서를 확보하지 못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을 뿐 아니라, 발굴보고서가 발간되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유적 성격이 미상未詳[확실하거나 분명하지 않음]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문화층을 확인하지 못했거나 파괴 내지 교란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다른 자료에도 전혀 언급이 없어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가 없다.
암사동 유적
암사동岩寺洞 유적은 전체 면적 2만 5,122평의 암사동 선사유적공원先史遺蹟公園으로 1988년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공원은 유적 관람 공간, 원시생활전시관, 휴식 공간, 주차장, 편의시설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유적 관람 공간 야외에 9동의 신석기시대 주거지를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고, 원시생활전시관에는 197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조사하여 확인한 유구가 원형 그대로 전시되어 있어 서울 시민들의 안식처로 활용되고 있다.
기존시설로는 교육홍보 효과가 부족하다 인식한 강동구청은 기존 원시생활전시관 북동쪽에 새로운 전시관 신축계획을 수립하고 전시관 건립공사로 인하 사적지 안 유적 파괴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국립중앙박물관에 발굴조사를 의뢰함으로써 시작되었다.
발굴기간은 1998년 4월 15일부터 6월 14일까지였다.
조사대상 지역은 기존 원시생활전시관의 북동쪽인 250여 평의 땅이다.
이번 조사대상 지역은 이전에 이미 대부분 교란되었거나 유실되었을 뿐 아니라 북동쪽 끝 부분은 경사가 급한 골짜기를 이루고 있어 유구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조사 결과 신석기시대 생활 흔적이 있는 주거지 3기, 불분명한 유구 1기, 그리고 불분명한 구덩이 3기를 확인하였다.
불분명한 유구는 제2호 주거지에서 남동쪽으로 2미터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확인되었다.
발굴단은 이 유구를 조리를 위한 공동 야외 노지爐址[선사 시대의 집터에서 난방과 음식 마련을 위하여 불을 피우던 자리] 시설로 추측해지만,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신정동 토성
양천구 신정동 산 106번지 일대에 위치한 신정동 토성新亭洞 土城(또는 신기토성新機土城)은 자연 분지를 이용하여 판축법板築法[판자와 판자 사이에 흙을 넣고 공이로 다지는 방법]과 삭토법削土法[흙을 깎아내는 방법], 그리고 나무울타리인 울짱(목책木柵)을 사용하여 축조된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 주변에서 상당량의 유물이 채집되었다고 한다.
이에 서울시에서는 신정동 토성의 대체적인 성격과 규모, 축조방법 및 축조시기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1998년 9월 17일부터 11월 8일까지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A~E 지구로 나누어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발굴단은 좀더 광범위한 조사와 정밀한 조사가 필요하다고 했지만, 조사 결과만 보면 백제 초기의 토성으로 알려진 이른바 신정동 토성은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었다.
그밖에 성벽에 대한 조사 외에 고인돌의 덮개돌로 보이는 바위가 능선 바깥 아래쪽에서 발견되어 이 지역에 대한 조사도 병행되었다.
발굴된 돌덧널(석곽石槨)이 고인돌의 하부구조일 가능성은 있지만, 덮개돌이 돌덧널보다 크지 않으며 발굴 당시 다른 고인돌은 없었기 때문에 고인돌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고 발굴단은 보았다.
1990년대 발굴조사는 거의 대부분 복원이나 사업을 위한 목적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신정동 토성에 대한 순수한 발굴조사는 매우 이채롭다.
비록 토성의 실체를 확인할 수 없어 더 이상 진척된 내용은 없었지만, 이 시기에 이렇게 순수한 학술발굴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특이한 점이라 할 수 있다.
대모산 유적
강남구 일원동逸院洞 일대에 위치한 대모산은 한강에서 남쪽으로 약 5킬로미터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탄천과 양재천을 끼고 있고, 인접한 구룡산과 함께 동서로 길게 뻗어 있어 한강 유역 일대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대모산성大母山城[경기도 양주에도 대모산성이 있으며, 사적으로 지정]은 해발 293미터의 대모산 정상 부분에 동서 방향으로 길쭉하게 축성된 테뫼식[산 정상부에 띠(테)를 두르듯이 축조된 산성] 석축 산성이다.
발굴 당시까지 대모산성에 대한 학술조사는 전혀 없었으며, 기록 또한 조선시대까지도 전혀 없었다.
1942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에 "헌인릉의 주산인 대모산의 정상부에 소형의 토루土壘[주거지 방어나 곡식 보관을 위해 외부와 분리하기 위해 흙으로 쌓아 만든 시설물로서 군사용이면 토성土城이다] 터가 있다"라는 기록이 대모산성에 대한 첫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광복 이후에도 대모산성에 관련된 기록은 없다.
대모산성이 주목받게 된 계기는 한 방송매체 때문이다.
1999년 3월 7일 방송매체를 통해 "삼국시대의 석성이 있다"고 방영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이다.
이에 1999년 3월 9일 국립문화재연구소 유적조사실에서 현장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대모산성은 해발 270~280미터의 능선을 따라 자연 지세를 이용하여 돌을 쌓았고, 산성의 최대 너비는 100미터 이하, 평균 너비는 50미터 이내이며, 총 둘레는 600~700미터 정도였다.
당시 지표조사를 통해 대모산성은 통일신라 말에 축성되었으며, 삼국시대 특히 백제와는 직접적인 관련을 찾을 수 없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루어진 이번 발굴조사는 서울시 소방방재본부의 무선통신망 기지국 설치사업으로 파괴될지 모르는 대모산 정상의 석성 및 석성과 관련된 내부 시설물의 존재 여부를 파악하는 게 목적이었다.
발굴기간은 1999년 6월 24일부터 7월 1일까지이고, 조사대상 지역은 38.5제곱미터로 동쪽은 급경사의 낭떠러지, 서쪽은 등산로, 남쪽 바로 옆은 서울경찰청에서 세운 철탑이 서 있었다.
발굴단은 대모산성의 전체 둘레는 567미터 정도이며, 전체적으로 성벽이 무너지고 토사에 덮혀 있어 성벽의 몸체인 체성體城이 노출된 곳은 전혀 없지만, 무너진 성벽의 흔적은 곳곳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그중 남쪽 벽의 길이는 258미터, 동쪽 벽은 5미터, 북쪽 벽은 299미터, 서쪽 벽은 5미터로 북쪽 벽의 길이가 가장 길다.
산성의 전체적인 형태는 긴 타원형이라 할 수 있지만, 엄밀히 말하면 지형을 따라 굴곡이 이루어진 모습은 마치 길쭉한 고구마를 연상시킨다.
정확한 축성 방법은 나중에 발굴조사를 해봐야 알겠지만, 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장기간 치밀하게 쌓은 성이라기보다는 급조된 산성으로 발굴단은 이해했다.
현재 대모산성에는 아주 크지는 않지만 무선기지국 시설이 들어서 있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2. 4. 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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