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3: 카르타고와의 숙명적인 전쟁 본문
로마와 카르타고와의 전쟁 | |
제1차 포에니 전쟁 | 서기전 264~241년 |
제2차 포에니 전쟁 | 서기전 218~201년 |
제3차 포에니 전쟁 | 서기전 149~146년 |
카르타고 시 파괴 | 서기전 146년 |
서기전 265년에 이르러 로마가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자 로마인은 해외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로마인이 계획적으로 정책을 수립해 해외 지배권 확대를 추진했는지, 아니면 현상 변화 status quo—로마인은 현상 변화를 로마의 안정에 대한 위협이라고 간주했다—에 대한 반응으로 우연히 정복활동이 확대되었는지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아마도 진실은 두 극단 사이의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사정이야 어찌되었건, 에트루리아인 Etruscan에 대한 최종 승리를 거둔 지 1년 뒤인 서기전 264년을 기점으로 로마는 해외 국가들을 상대로 한 전쟁을 벌였고, 이 전쟁들로 말미암아 로마 역사는 그때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포에니 전쟁
가장 중요했던 전쟁으로 카르타고 Carthago와의 전쟁을 꼽을 수 있다.
카르타고는 오늘날 튀니지 Tunisia에서 북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지브롤터 해협 Strait of Gibraltar까지 뻗어 있었고, 여기에 에스파냐España(스페인 Spain) 일부, 시칠리아 Sicilia(영어 Sicily), 사르디니아 Sardinia, 코르시카 Corsica까지 포함하고 있던 거대한 해상 제국이었다.
카르타고는 서기전 800년 무렵 페니키아인 Phoenician의 식민지로 건설되었지만 그 후 부유하고 강력한 독립국가로 발전했다.
해군력, 상업적 활력, 주요 지하자원 관리 따위에서 서기전 3세기의 카르타고는 로마보다 훨씬 우월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기나긴 투쟁을 포에니 전쟁 Punic Wars이라고 한다.
로마인 Roman은 카르타고인 Carthaginian을 포에니 Poeni—즉 페니키아인—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제1차 포에니 전쟁은 서기전 264년에 시작되었다.
전쟁 원인은, 이탈리아 본토 건너편 시칠리아 섬 항구인 메시나 Messina에 대한 지배권을 카르타고인이 장악할까봐 로마인이 대단히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23년 동안 치열하게 전쟁이 이어졌다.
마침내 서기전 241년의 평화협상에 의해 카르타고는 시칠리아를 로마에 내주고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결과 시칠리아는 로마 최초의 해외 속주가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몇 년 후 로마 원로원의 한 파벌은 협상을 재조정해 코르시카와 사르디니아를 로마 영토에 편입시켰다.
카르타고의 분노를 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로마인은 카르타고를 물리치기 위해 대단히 힘겹게 싸웠으므로, 그들의 적이 지중해 다른 해역으로 지배권을 확대하려는 시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서기전 218년 로마는 카르타고가 에스파냐에서 지배권 확대를 기도하자 이를 로마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고 선전포고로 응수했다.
다시 전개된 투쟁을 제2차 포에니 전쟁이라고 하는데, 이 전쟁은 12년 동안 치러졌다.
초기에 로마는 카르타고 명장 한니발 Hannibal의 현란한 전술 때문에 수세에 몰렸다.
한니발은 전투 코끼리를 포함한 에스파냐 군대를 거느리고 남프랑스를 거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카르타고군을 이탈리아 영토에 맞이한 로마는 가까스로 패배를 모면했다.
오직 지연전술만이 로마를 구할 수 있었다.
시간은 상대편을 보급물자 부족과 각종 문제에 시달리도록 붙잡아둘 수 있는 자의 편이었다.
한니발이 로마의 라틴 동맹세력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실패했다는 것도 전세를 결정지은 중대 요인이었다.
라틴 동맹 Latin League은 로마의 관대한 처우에 힘입어 끝까지 로마의 흔들림 없는 지지자로 남았던 것이다.
로마의 풍부한 인적 자원과 규율, 그리고 긴밀한 동맹은 궁극적으로 카르타고의 한니발이라는 군사 천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서기전 212년부터 로마인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물론이고, 에스파냐에서도 카르타고인을 수세로 밀어붙였다.
에스파냐 공격 책임자였던 로마의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Publius Cornelius Scipio는 그 후 북아프리카를 침공했고, 서기전 201년 카르타고 근처의 자마 Zama에서 한니발을 물리쳤다.
그의 승리로 제2차 포에니 전쟁은 종식되었고, 스키피오는 '아프리카의 정복자'라는 뜻의 '아프리카누스 Africanus'라는 별명을 얻었다.
카르타고는 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시와 인근 지역을 제외한 모든 영토를 포기해야 했으며,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났을 때보다 세 배나 많은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러나 로마의 카르타고에 대한 의심은 강박적인 수준이었다.
서기전 2세기 중반에 이르러 카르타고는 예전의 번영을 부분적으로 회복했는데, 이것은 로마인의 불쾌감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켄소르 censor(감찰관)였던 카토 Cato와 같은 영향력 있는 원로원 의원들은 카르타고 국가의 완전 멸망을 봐야만 만족할 수 있었다.
카토는 원로원에서 행한 자신의 모든 연설을 "카르타고는 멸망되어야 한다"는 말로 마무리하면서 끊임없이 경고했다.
원로원은 이에 동의했고, 서기전 149년 사소한 일을 트집 잡아 카르타고인에게 카르타고 시를 포기하고 적어도 16km 떨어진 내륙 지방으로 이주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사실상 상업국가에게 사형선고에 해당하는 요구였으므로 카르타고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아마도 로마는 카르타고가 거부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서기전 149~146년에 제3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졌다.
로마인이 마침내 카르타고 성벽을 파괴했을 때 가공할 규모의 학살 사태가 벌어졌다.
승리를 거둔 로마의 장군—아프리카누스의 손자인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Scipio Aemilianus—은 화염에 휩싸인 카르타고를 바라보면서 '영광스런 순간이지만, 같은 운명이 언젠가 나의 조국에도 닥칠 것만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되뇌었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5만 5천 명의 카르타고인은 노예로 팔려갔으며, 한때 위용을 뽐내던 이 도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그 땅에 소금을 뿌렸다는 로마 전설은 명백한 과장이다. 왜냐면 한 세대가 지난 뒤 로마의 한 정치인이 그 자리에 로마 식민지를 건설할 것을 제안했기 때문이다).
○영토 팽창
카르타고와의 전쟁으로 로마 영토는 엄청나게 늘어났고, 시칠리아,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등지에 새로운 해외 속주가 만들어졌다.
이것은 로마에 막대한 부—특히 시칠리아·아프리카의 곡물과 에스파냐의 은—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유럽 역사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끼친 요인 중 하나인 서부 팽창정책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로마의 해외 팽창은 동부 지중해 세력들과 충돌을 일으켜 또 다른 정복으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 Philippos V of Macedonia(영어 Philip V of Macedon)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었다.
곧바로 그는 그리스에 대한 공격 태세를 취했고, 그가 이집트에 대해 모종의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로마는 군대를 보내 필리포스 5세를 그리스에서 쫓아냈다.
10여 년 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3세 Antiochus III of the Seleucid Dynasty도 그리스를 상대로 비슷한 계획을 시도했으나 로마 군대에 의해 좌절되었다.
애당초 로마는 그 두 원정에서 그리스를 군사적으로 정복할 계획이 없었다.
그러나 서기전 146년 그리스와 마케도니아는 모두 로마의 속주가 되고 말았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아시아는 영토 대부분을 잃었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이집트 Ptolemaic Dynasty of Egypt는 로마의 제해권과 상업적 이익의 제물이 되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2. 12. 6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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