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3장 현대 산업과 대중 정치(1870~1914) 3: 노동 정치와 대중 운동 본문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7부 세계의 중심에 선 서양 - 23장 현대 산업과 대중 정치(1870~1914) 3: 노동 정치와 대중 운동
새샘 2026. 7. 29. 05:5219세기 말 급속한 산업 팽창은 유럽 Europe 노동계급의 규모, 응집력, 행동주의 따위에서 그에 필적하는 성장을 가져왔다.
임금노동자로 일하는 남성과 여성은 기업의 권세에 분개했다.
이러한 분개는 일터에서 자신들이 경험한 착취와 불평등뿐만 아니라 유럽의 팽창하는 도시들에서 '동떨어진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 때문에 촉진되었다.
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보호하고 촉진하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고, 노동자도 똑같이 했다.
전통적으로 소규모 사업에서 숙련 남성 노동자들로 한정되었던 노동조합 labor union은 19세기 말 동안에 대중적·중앙집권적·전국적 조직으로 성장했다.
'새로운 노조주의'는 전체 산업을 아우르는 조직을 강조했고 최초로 미숙련 노동자를 노조원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임금과 노동조건의 협상력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한층 더 중요한 것은 전국적 노조의 창건이 새로운 형태의 정치 운동, 즉 사회주의 대중정당을 위한 하부구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이다.
1870년 이후 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발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국가적 정치구조의 변화가 그에 대한 대답의 일부가 된다.
입헌 의회제 정부들은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한 새로운 참여자들에게 정치적 과정을 개방했다.
이제 입법 과정의 일부가 된 의회 내 사회주의자들은 1860년대와 1870년대에 투표권을 확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의 성공은 노동계급 남성으로 이루어진 새로운 유권자들을 창출했다.
그와 동시에 노동자와 경영진 사이의 전통적인 투쟁은 국가적 차원으로 상향 이동했다.
정부는 사업가의 이해관계와 같은 태도를 취했고, 입법자들은 반反노동법과 반反사회주의법으로 노동계급의 선동에 맞섰다.
급진적 지도자들에게 전국적인 대중정치 운동 조직은 산업가들의 정치적 역량에 맞서는 유일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다.
따라서 이 시기 동안에 사회주의 운동은 유럽의 의회제 안에서 합법적이고 공적인 경쟁에 찬성하며 초기의 혁명 전통들(방어 울타리를 친 거리에 대한 낭만적인 심상으로 대표된다)을 포기했다.

인기 있는 대중 정치로의 전환과 이에 따른 노동 운동의 성공은 사회적 변화만큼이나 사상에 기인한다.
가장 영향력 있는 급진 사상가는 카를 마르크스 Karl Marx(1818~1883)였다.
1840년대 이래로 마르크스와 그의 협력자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1820~1895)는 소책자(팸플릿 pamphlet)를 쓰고 초보적 사회주의 운동 조직에 참여한 지식인이자 활동가였다.
1867년 마르크스는 세 권짜리 ≪자본론 Das Kapital(영어 The Capital)≫의 첫 권을 출간했다.
이것은 그가 인간 해방을 위한 투쟁에 대한 자신의 가장 큰 기여라고 믿었던 작품이었다.
그 책은 역사적 유물론에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주었고, 경제학의 전쟁터에서 자본주의를 공격했다.
19세기의 과학 정신 속에서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어떻게 생산수단의 소유자들이 부와 권력 모두를 축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면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생계 임금을 위해 자신의 노동을 교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에 관한 체계적 분석을 제공한다고 주장했다.
경제학에 관한 학문적 연구를 혁명적 정치에 대한 요구와 함께 겹쳐 이으면서 이 책은 자본주의에 대한 탁월한 사회주의적 비판이 되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마르크스주의 Marxism의 폭발적인 사고와 행동의 종합은 서양 전역에서 노동자와 지식인에게 호소력을 지녔다.
우선 마르크스주의는 민주주의와 정치적 포섭에 관한 당대의 가장 급진적이고 뚜렷한 주장을 제기했다.
유럽 전체에 걸쳐 특히 서방 국가에 국한되긴 했지만 사회주의는 민주적 대중 정치 건설을 위한 결정적 토대를 제공해주었다.
시민적 자유를 보장하고 시민권의 개념을 확대하거나 복지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그렇게 강력하게 밀고나간 집단은 거의 없었다.
실제에서는 여성 참정권이 계급 정치 뒷전으로 밀리기는 했지만 마르크스주의는 이론적으로 성性(젠더 gender) 평등에 대한 강력한 주장을 내세웠다.
마르크스주의의 유토피아주의 Utopianism 역시 결정적인 요소였다.
왜냐하면 노동자들을 위한 더 나은 획득 가능한 미래에 대해 마르크스주의의 당찬 약속은 수많은 노동자들로 하여금 그것의 대의大義에 모이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노동계급의 운동이 마르크스주의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다양한 정치 및 노동 조직이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채택할 때에도 다양한 좌익 집단들의 철학, 목적, 방법의 차이는 컸다.
그러한 차이들은 산업, 직업, 지역, 국가 전역에서 확대되었다.
따라서 동질적인 노동자 운동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가장 불화를 일으키는 문제들은 폭력의 역할, 사회주의자가 자유주의자나 부르주아 bourgeois(중산 계급 시민) 정부와 협력해야 하는가의 문제, 그리고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해야 하는가의 문제였다.
특히 영국 UK에서는 한층 더 급진적인 사회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전복을 재촉하기 위한 방법으로 의회의 권력을 모색하는 동안에 일부 '점진주의자'는 점진적 개혁을 위해 자유주의자들과 기꺼이 일하고자 했다.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 anarchist)와 생디칼리스트 syndicaliste(무정부주의적인 노동조합 지상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는 이구동성으로 의회 정치를 거부했다.
이 문제를 둘러싼 최초의 중추적 논쟁은 유럽 전역에 걸쳐 통합된 노동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해 1864년에 창설된 국제노동자협회 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 또는 제1인터내셔널 First International에서 발생했다.
마르크스와 그의 지지자들은 정치적 대중운동을 열렬히 지지하는 주장을 했고, 미하일 바쿠닌 Mikhail Alexandrovich Bakunin(1814~1876) 같은 무정부주의자는 어떤 종류(국민국가이든 사회주의 정당이든)의 중앙집권적인 조직을 거부하고 대신에 테러와 폭력을 부르짖었다.
○사회주의 정당들과 대안의 확산
마르크스주의는 1875년과 1905년 사이에 독일 Germany, 벨기에 Belgium, 프랑스 France, 오스트리아 Austria, 러시아 Russia에서 창설된 수많은 사회주의 및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통해 확산되었다.
이 정당들은 혁명적 변화를 위해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장악하는 것을 목적으로 훈련되고 정치화된 노동자의 조직이었다.
이 정당들 중 본보기는 SPD, 즉 독일사회민주당 Sozialdemokratische Partei Deutschlands(영어 Social Democratic Party of Germany)이었다.
1875년에 결성된 SPD는 처음에 독일 의회정치 체제 안의 정치적 변화를 목적으로 했다.
그러나 억압적인 반사회주의법들의 시대 이후에 SPD는 노골적으로 마르크스주의 강령을 채택했다.
그것은 임박한 자본주의의 붕괴를 위해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프롤레타리아 Proletarier(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력 이외에는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한 노동자)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무렵에 사회민주당들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잘 조직된 노동자들의 정당이었다.
독일이 특히 사회민주주의를 수용하게 된 데에는 몇 가지 결정적 요인들이 있었다.
그것은 급속하게 광범위한 산업화, 대규모 도시 노동계급, 새로운 의회제 헌법, 노동자 조직에 적대적인 중앙 정부, 자유주의적 개혁 전통의 부재 따위였다.
마지막 요인의 중요성은 세계 최초의 그리고 가장 산업화된 나라였지만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한층 더 소규모이고 더 온건한 사회주의가 현존한 영국을 생각하면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19세기 말 동안 줄곧 독립적 사회주의 정당의 성장을 앞질러 방해한 영국의 급진적 자유주의자들은 많은 사회주의적 의제를 진척시켰다.
심지어 1901년 별도의 노동당이 결성되었을 때에도 급진 자유주의자들은 눈에 띄게 온건파로 남아 있었고 완벽한 정비라기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개혁과 공공 주택, 복지 수당, 향상된 임금 따위와 같은 조치에 전념했다.
노동당에 속해 있는 정치 활동가들의 활동 범위를 위해 그리고 영국의 많은 노동조합들을 위해 의회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매력을 제한하면서 효과적인 사회 변화의 적법한 수단으로 남았다.
의회 주도의 개혁은 마르크스주의 프로그램에 대한 한 가지 인기 있는 대안을 마련했고, 무정부주의(아나키즘 anarchism)는 또 다른 대안을 제시했다.
무정부주의자는 중앙집권적으로 조직된 경제와 정치에 반대했고 나아가 국가 권위에 존재 자체에 반대했으며, 개인 주권과 소규모의 지방분권적 민주주의를 옹호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중요한 가치들을 공유했지만 그것들을 어떻게 발전시킬 것인가에 대해서는 상당히 달랐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정당, 노조, 그리고 어떤 형태의 현대적 대중 조직도 비난하면서 마르크스가 그토록 강력하게 반대했던 음모론에 입각한 폭력의 전통에 의존했다.
결과적으로 무정부주의의 뚜렷한 특징 중 하나는 테러리즘 terrorism(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에 의존하거나 이탈리아 Italia의 어느 무정부주의자가 말한 "본때를 보여주는 선전 활동"이었다.
모든 무정부주의자가 그런 방법을 채택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1881년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Alexander II(재위 1855~1881)와 다음 해 5명의 다른 국가 우두머리들을 암살함으로써 악명을 떨쳤다.
표트르 크로포트킨 Pyotr Alexeyevich Kropotkin(1842~1921)과 미하일 바쿠닌 같은 영향력 있는 무정부주의자들은 '본보기로 보여주는 테러 terror as an example'가 민중 봉기를 촉발시킬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막강한 정치 지도자들의 취약성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혼돈을 불러오고 민중에게 용기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정부주의는 (아마도 본질적으로) 운동으로서 아무런 실질적 이득을 얻지 못했지만 의회 정치를 강조하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급진적이고 폭력적인 대안을 존속시켰다.
생디칼리즘 Syndicalism으로 알려진 또 다른 형태의 사회주의 운동은 20세기로의 전환기에 특히 프랑스 France, 이탈리아 Italia(영어 Italy), 에스파냐 España 농업노동자 사이에서 인기를 끌었다.
생디칼리즘은 사회주의 원리를 따르면서 노동자들이 생산수단의 소유와 통제를 공유하고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시켜 노동자들의 생디카 syndicate(직종별 조합)로 대체할 것을 요구했다.
생디칼리즘은 종종 무정부주의을 생략하지만 (아나코-생디칼리즘이라는 용어에서 알 수 있듯이) 테러는 아니지만 파업과 태업을 포함한 직접적인 행동을 요구한 또 다른 신조였다.
가장 널리 읽힌 생디칼리즘 이론가인 프랑스 지식인 조르주 소렐 Georges Eugène Sorel(1847~1922)은 모든 산업노동자의 총파업이 선거 정치보다도 국가를 전복시키는데 더 많은 역할을 할 것리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소렐이 극우로 돌아섰을 때 한층 더 대중적이고 실질적인 지도자들이 프랑스에서 등장했는데, 1895년 그들은 다른 프랑스 노조 지도자들과 제휴해 노동총동맹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CGT)(영어 General Confederation of Labour)을 결성했다.
노동총동맹과 그 밖의 생디칼리스트 Syndicalist 조직은 합법적으로 구성된 프랑스 정치의 체제 밖에서 활동하는데 주력하면서 특히 1905년 러시아에서 미수로 끝난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 급진주의를 자극하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유럽 정치에서 지속적인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성공의 한계
20세기로의 전환기에 대중적 사회주의 운동들은 유럽 전역에 걸쳐 인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1895년에 7개의 사회주의 정당들이 각국에서 4분의 1에서 3분의 1 사이의 표를 얻었다.
그러나 사회주의자들이 전국적 정치에서 영구적인 발판을 확보하자마자 그들은 애초부터 자신들의 정당에 장애물이 되어왔던 한계와 내부적 갈등으로 삐걱거렸다.
사실 노동계급의 운동들은 어떤 곳에서도 거의 완전하게 노동자의 지지를 결코 확보한 적이 없었다.
일부 노동자들은 예전의 자유주의적 전통이나 종교적 정당에 충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많은 노동자들은 어떤 사람들이 노동계급을 구성하는가, 즉 오로지 남성 산업노동자만이 노동계급이라는 협소한 정의로 말미암아 사회주의 정치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사회주의 정당들은 최소한 선거와 관련해서 자신들이 스스로 쌓아놓은 벽에 부딪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혁명가와 개혁가 사이에, 그리고 표를 던지는 사람들과 돌을 던지는 사람들 사이의 지속적인 갈등은 1900년 이후에 새로워진 강도로 분출하고 말았다.
한편에서는 헌신적인 사회주의자들이 노동자의 빈곤화와 부르주아 질서의 붕괴가 불가피할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핵심적 가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Eduard Bernstein(1850~1932)이 이끈 독일의 수정주의 집단은 마르크스주의 신조에 도전해 온건한 개혁으로의 전환을 요구했다.
베른슈타인의 파당은 국내에서건 국제적으로건 어떤 회의에서도 다수표를 얻는데 실패했지만, 그의 실용주의는 유럽 대륙 전역에 걸쳐 사회주의자들과 노동자들에게 매력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극단에 있는 사회주의자들은 급진주의와 직접 행동의 확대를 옹호했다.
1905년 러시아에서 예기치 않은 (그리고 실패로 끝난) 혁명적 봉기에 영감을 받아 로자 룩셈부르크 Rosa Luxemburg(1871~1919) 같은 독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 순간을 포착해 광범위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불을 붙이기를 소망하면서 대규모 파업을 요구했다.
온건파, 개혁파,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국제적 갈등의 위협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하면서 전략을 둘러싼 갈등은 제1차 세계대전 바로 직전에 절정에 달했다.
하지만 이런 분열은 세기 전환기의 사회주의가 지닌 힘과 매력을 사라지게 하지는 않았다.
길제로 제1차 세계대전 직전에 각국 정부들은 일반 조합원 노동자들이 징집되어 싸울 용의가 있는지에 관해 노동 지도자들에게 신중하게 자문을 구했다.
1870년대 이래로 인상적인 조직 역량과 정치력을 키우면서 노동계급 정당들은 이제 국민국가의 전쟁 수행 능력에 영향을 끼쳤다.
한마디로 그들 정당은 성년이 되었던 것이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손세호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하): 근대 유럽에서 지구화에 이르기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2. 구글 관련 자료
2026. 7. 29 새샘
'글과 그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한반도 선사시대 미술사의 여명과 한민족의 뿌리 8-신석기시대 토기의 추상성 (0) | 2026.07.30 |
|---|---|
| 나폴레옹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었나 (0) | 2026.07.29 |
| 타고난 면역, 선천면역 3: 사망한 뒤 노벨상을 받은 유일한 학자 랠프 스타인먼 (0) | 2026.07.28 |
| 한반도 선사시대 미술사의 여명과 한민족의 뿌리 7-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0) | 2026.07.28 |
| 전설의 도시 엘도라도는 실존하는가 (0) | 2026.07.27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