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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조선시대에는 단짝으로 어울린 화가와 시인이 몇 쌍 있었다.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과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1671~1751),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과 단릉丹陵 이윤영李胤永(1714~1759),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과 연객烟客 허필烟客(1709~1768)은 서로에게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이들은 한평생을 같이 살며 시와 그림으로 어울렸다. 사천 이병연은 겸재보다 다섯 살 연상으로 가문으로 보나 지위로 보나 겸재보다 위에 있었지만 평생을 벗으로 지내며 서로의 예술에 대해 깊은 신뢰와 존경을 보냈다. 한산이씨 명문가 출신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여 정3품 삼척부사까지 올랐지만 그에게 관직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천은 당대 최고의 시인으로 무려 1만 3천여..
일본이 한국을 다른 나라와 다르게 대해온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같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지만 주변국에 대한 태도에 변함이 없는 독일과 비교해보면 일본의 태도는 더욱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일본은 미국과 서구 국가에는 지나치게 저자세로 일관하면서, 피해 당사지인 한국과 중국에게는 극도의 반감과 혐오감을 표시한다. 일본의 모순적인 태도 뒤에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일본의 동아시아 침략과 문화재 침탈 사업이 있다. 일본은 자신들을 대륙에서 온 천손天孫민족으로 자처해왔다. 한국을 식민지로 만든 건 자신들의 '고향'을 식민지로 만든 것이라는 논리를 내세운다. 한국을 넘어 만주를 거쳐 중국까지 침략하면서 일본 민족의 북방기원설로 이를 정당화하려 했다. 일본은 한반도를 자기들의 고향인 동시에 열등한 식민통..
왕과 귀족계급 사이의 앙시앵 레짐 Ancien Régime(영어 Old Regime, 구제도舊制度) 동맹은 부분적으로는 흑사병으로 조성된 새로운 사회적·경제적 환경에 대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전쟁의 산물이자, 전쟁이 중세 말기 국가 발전에 미친 영향력의 산물이었다. 14·15세기에는 유럽 사회의 모든 수준에서 거의 끊임없이 전쟁이 지속되었다. 그리고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각국 정부는 신민에게 세금을 부과할 권력과 신민의 삶을 통제하기 위한 권력을 새롭게 주장했다. 군대 규모는 한층 커졌고 군사 기술은 더욱 치명적인 것이 되었다. 전쟁은 더욱 파괴적으로 되었고 사회는 점점 군사화되었다. 이러한 사태 전개의 결과 1500년에 이르러 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성공적인 국가—특히 포르투갈, 에스파냐..
벨기에 출신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1514~1564)는 어릴 때부터 해부를 좋아해 개, 고양이, 쥐 등 주변에 있는 동물들을 가리지 않고 해부하곤 했다. 해부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로 결정한 그는 파리 의대에 들어갔지만 크게 실망했다. 의대 교수들이 직접 해부하지 않고 갈레노스 Galenos(영어: 갈렌 Galen)의 책만 구구절절 읽어 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들은 갈레노스라는 안경을 끼고 인체를 바라보았다. 간혹 해부 과정에서 갈레노스 이론과 맞지 않는 소견이 발견되어도 그것은 해부 사체만의 특징이라고 무시했다. 답답한 파리 의대 생활은 해부학에 대한 갈증을 더욱 키우기만 하여 베살리우스는 공동묘지에서 사체를 가져다 홀로 해부학을 연구하기도 했다.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 U..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진경산수眞景山水(조선 후기에 유행한 우리나라에 실재하는 산천 경관의 사생寫生에 주력하는 화풍)라는 한국적인 산수화 양식을 확립한 대가이다. 만약 겸재가 없었다면 한국회화사가 어찌 되었을까 상상할 수도 없다. 그러나 겸재는 화가의 천분을 타고나지는 않은 듯, 그의 작품에는 천재적 기질이 보이지 않는다. 현재까지 알려진 겸재의 기년작紀年作(제작연도를 알 수 있는 작품) 가운데 진실로 겸재다운 첫 작품은 59세인 1743년 청하현감 시절에 그린 이다. 이후 모친상을 당하여 서울로 올라온 뒤에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원숙한 경지의 진경산수를 그린다. 63세 때의 , 65세 때의 에 이르면 겸재는 한 차원 높은 진경산수의 명작으로 보여준다. 그는 참으로 대기만성의 화가였다. ..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고고학자의 이름을 하나만 대보라고 하면 누가 가장 먼저 떠오르는가? 주저 없이 '인디애나 존스 Indiana Jones?'라고 답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대답에 '인디애나 존스가 진짜 고고학자였어?'하며 놀라지 마시길. 그는 영화 속 주인공일 뿐이다. 그렇다고 실제 고고학자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 이유는 차근차근 설명하기로 하자. 영화의 대중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고고학계에서 평가하는 인디애나 존스는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인데다가 제국주의 국가의 약탈을 합리화하는 캐릭터 character(특징물)이기 때문이다. 인디애나 존스에는 제국주의가 발흥하던 20세기 중반까지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고고학자의 이미지가 압축적으로 표..
국내 생명공학 관련 주요 연구기관 세 곳인 한국생명공학연구원 Korea Research Institute for Bioscience and Biotechnology(KRIBB), 국가생명공학정책연구센터 Biotech Policy Research Center(BPRC),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Korea Institute of Science and Technoolgy Information(KISTI)은 공동으로 매년 초마다 ≪○○○○ 바이오 미래유망기술≫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통해 을 선정·발표하고 있다. 은 4개의 기술 분야 즉 기초생명과학 및 공통기반기술 분야인 플랫폼 바이오 Platform Bio, 의약품 및 보건의료 분야인 레드 바이오 Red Biod, 농림수축산·식품 및 바이오농업 분야인 그린 바이오..
굶주림, 흑사병, 전쟁 등은 중세 말기 유럽의 사회 질서에 엄청난 압박을 가했다.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놀라울 정도였다. 그렇지만 1500년의 유럽은 200년 전에 비해 크게 달라져 있다. 물론 이 모든 변화가 흑사병의 직접적인 결과로 나타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의 모든 변화의 배후에서 흑사병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반란과 폭동 흑사병의 경제적 결과는 궁극적으로 살아남은 자들에게 유리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 사회는 흑사병의 여파로 조성된 새로운 세계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1350~1425년에는 몇백 건의 대중 반란이 일어나 중세 말기 유럽을 뒤흔들었다. 1358년 프랑스 파리 Paris 부근의 농민들은 방화, 살인, 강간 등을 저지르며 영주에게 반기를 들었다. '자크리 ..
한 시대 미술의 수준은 그 시대 비평의 수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창작은 뛰어난데 볼 만한 비평이 없다거나, 비평의 수준은 높은데 창작이 따르지 못한 시절은 없다. 어느 시대든 다소 그 질에 차이가 있을 수는 있어도 창작과 비평은 함께했다. 조선시대 회화사에서 비평다운 비평이 나오는 것은 영조 대에 들어와서다. 그 대표적인 업적이 남태응南泰膺(1687~1740)의 ≪청죽화사聽竹畫史≫이다. 청죽은 남태응의 아호다. 남태응의 관직은 미미하고 행적은 별로 알려진 것이 없지만 미발간 육필 문집인 ≪청죽만록聽竹漫錄≫(전 8권)의 별책으로 실려 있는 ≪청죽화사≫는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도 가장 수준 높은 회화 비평이라고 할 만하며, 영조 이전 회화에 대하여 가장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연담연 김명국,..
1453년 이슬람 세력이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을 점령하면서 동로마 제국이 멸망했다. 이때 동로마의 수많은 학자들이 서유럽을 피신했다. 그 과정에 동로마에 보존되어 있던 그리스 로마의 문화유산이 서유럽에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서유럽에 돌아다니던 그리스 로마 문헌도 새롭게 번역되었다. 이것은 마치 엉망으로 번역된 자막으로 본 영화를 전문가의 번역으로 다시 보았더니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내용의 영화가 된 것과 비슷했다. 제대로 번역된 그리스 로마 문헌을 마주하게 된 서유럽인들은 고대 철학과 과학의 깊이에 큰 감동을 받았으며, 그리스 로마의 철학자와 과학자들의 업적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서유럽 학자들은 인간을 사랑하는, 인간 중심의 그리스 문화에 매료되었다. 인간을 사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