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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샘(淸泉)
유라시아 반대쪽 아나톨리아 반도 Anatolia peninsula의 강대국 튀르키예 Türkiye는 우리에게 무척 친숙하다.튀르키예는 유럽과 근동 사이에서 강력한 군대로 주변을 호령한 오스만튀르크제국(또는 오스만투르크제국) Ottoman Turkish Empire의 후손이지만, 우리에게는 피를 나눈 형제국이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다.사실 튀르키예가 한국에 느끼는 형제애는 자신들이 유럽 동쪽 깊숙한 유라시아의 중심에서 기원했다는 역사인식에서 시작되었다.실제로 현대 튀르키예의 역사책 첫머리에는 알타이 Altai와 몽골 Mongolia에 있었던 유목제국 흉노匈奴가 등장한다.지금의 튀르키예는 유럽과 근동을 잇는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지만, 자신들을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튀르키예는..
제도 교회가 겪고 있던 곤란에도 불구하고 중세 말기 평신도의 종교적 헌신은 과거 어느 때보나도 광범하고 진지했다.중세 전성기 설교의 근본 주제는 구하고자 애쓰는 모든 그리스도교도에게는 구원이 열려 있다는 것이었다.이것은 중세 말기에 접어들자 신자 개개인이 신에게 나아가는 경로를 급격히 다양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그 경로들 중 일부는 교회가 이단이라고 선언한 방향으로 신자를 이끌었다.그러나 중세 말기의 그리스도교도 대부분에게 이단은 호소력을 갖지 못했다.교회와 지방 교구 사제가 거행하는 성사가 그들의 종교적 삶의 중심이었다.그러므로 중세 말기 그리스도교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교구에서 시작할 필요가 있다. ○성사, 의식, 설교 1300년에 이르러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 지방 교구 교회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조선 후기 회화의 특징은 진경산수, 속화, 문인화의 유행이다.여기서 문인화란 새로 전래된 명나라 문인화풍의 담담한 그림을 말한다.그러나 문인화풍이 도입될 때는 화풍만 들여온 것이 아니라 문인들이 자신의 예술적 서정을 그림으로 표현한다는 문인화의 기본 자세도 받아들이게 되었다.영조 시대에 문인화의 형식적 화풍을 가장 잘 소화한 화가가 현재 심사정이라면, 문인화가답게 살아가며 직업 화가의 예술과는 전혀 다른 문인화의 세계를 보여준 이는 능호관凌壺觀 이인상李麟祥(1710~1760) 이었다. 능호관의 그림은 주로 벗, 즉 문인들과의 교류 속에서 제작되었다.때문에 그의 그림에는 화제畵題와 관기觀記(감상문)가 쓰여 있는 것이 많다.그림에 시를 붙였고, 언제 누구를 위하여 그린다는 제작 동기를 밝혔다.부채에 그린 선..
최근 삼국 중심의 역사 때문에 소외되었던 신비의 나라 가야伽倻/伽耶/加耶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가야 역사는 우리에게 생소하지만, 가야의 유물은 동시대의 삼국 못지않게 풍부하다.그럼에도 우리가 가야를 낯설게 느끼는 배경에는 20세기 초부터 가야를 일본 침략의 합리화 도구로 사용했던 식민지 역사 연구가 있다.가야의 의미를 부풀려 강조하는 경향은 일본 학계에서 시작되었다.이런 분위기가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 논쟁이 일조한 것도 사실이다.원래 임나任那는 가야의 별칭이다.일제는 ≪일본서기日本書紀≫에 가공되어 기록된 임나일본부를 들어, 모든 가야는 곧 일본의 식민지였다고 왜곡했다.그리고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의 한국 지배를 합리화하기 위해 임나일본부를 이용했다.지금도 일본에서는 표현만 약간 바뀌었을 뿐 ..
가톨릭교회의 입장에서 중세 말기는 힘든 시련의 나날이었다.여느 대토지 소유자들과 마찬가지로 수도원은 흑사병이 초래한 경제적 변화로 어려움을 겪었다.주교들도 세속 귀족계급처럼 협상가격차鋏狀價格差 price scissors(농산물 가격지수와 공산품 가격지수의 간격이 마치 가위의 양날을 벌린 듯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에 직면했다.그러나 중세 말기에 교황청만큼 심각한 시련을 겪은 교회 조직은 찾아볼 수 없었다.교황은 거의 70년 동안이나 로마에서 추방되어 있었고 그 후 40년에 걸쳐 교황 분열이 있었다.그러고 나서 교회의 교회 지배권을 축소하려는 개혁가들의 지루한 싸움이 이어졌다. ○중세 말기 교황과 공의회주의 프랑스의 필리프 4세 Philippe IV(재위 1285~1314)에게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 Bo..
르네상스기에는 외과의에 대한 인기가 높았는데 이는 당시 많았던 전쟁 때문이다.'대 이탈리아 전쟁'이라 부르는 1400년대 말부터 약 60년 동안 지속된 유럽의 전쟁터에 화약과 총이 등장해 화상에 의한 외상과 총상을 처치할 외과의가 많이 필요했다.덕분에 외과의들은 외상을 치료하면서 실전 경험을 쌓아 외과술이 발달했다.이 시기에 등장한 위대한 외과의는 프랑스의 앙브루아즈 파레 Ambroise Paré (1510?~1590)였다. 파레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 형편에 도움이 되고자 어릴 때부터 이발사나 외과의 밑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어깨너머로 외상 처치에 대한 의술을 배웠다.집안 형편상 제2외국어인 라틴어를 배우기가 불가능해 의학 서적을 읽을 수는 없었지만, 파레는 눈썰미가 뛰어나고 손기술이 ..
관아재觀我齋 조영석趙榮祏(1686~1761)은 영조 시대 대표적인 문인화가다.그가 조선 후기 회화사에 남긴 업적은 겸재 정선에 필적할 만하여, 겸재가 진경산수화라는 조선적인 산수화를 창출했다면 관아재는 조선적인 인물화를 개척했다고 평할 수 있다.그럼에도 관아재의 명성이 그동안 널리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의 행적과 명작들이 근래에 와서야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 등 관아재의 명작들이 속속 소개되고, 손으로 직접 쓴 육필肉筆(정필正筆) 문집인 ≪관아재고觀我齋稿≫와 스케치북인 ≪사재첩麝臍帖≫이 발굴되면서 이제는 회화사상 확고부동한 위치를 갖게 되었다. 관아재는 특히 인물화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어 이름이 높았고 이에 대한 자부심도 컸다.심재沈鋅의 ≪송천필담松泉筆譚≫은 다음과 같이 전..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만주의 신석기시대를 대표하는 훙산(홍산紅山)문화를 들어보았을 것이다. 훙산문화는 중국 고고학계의 뜨거운 감자다. 중국이 훙산문화에 열광하는 이유는 뭘까? 1990년대 이후 중국은 다원일체론에 따라 훙산문화가 중화 문명이 북방 만주 지역으로 확장된 대표적인 증거라며 널리 홍보하고 있다. 그 이전에는 몽골과 만주를 침략한 일본의 제국주의 고고학자들이 훙산 유적을 조사했다.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전문가들은 훙산문화가 고구려와 밀접한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며 한국 고대사와 연결시키기도 한다. 우리에게는 훙산문화가 선사시대를 둘러싼 국가 간 역사분쟁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훙산문화는 국가가 성립되기 전 옥기玉器 제작과 제사로 문명을 열었다는 세계사적 의의를 지니고 ..
14세기와 15세기는 장차 동유럽의 지배 세력이 될 러시아 Russia가 등장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러시아는 서유럽의 국민적 군주국가와는 매우 다르게 발전했다. 에스파냐, 프랑스, 독일 등과 달리 러시아는 1500년 무렵에 이르러 유라시아 최대의 다민족 제국으로 향하는 결정적 발걸음을 내디뎠다. 이런 발전이 불가피했던 것은 아니다. 중세 말기의 몇몇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더라면, 서유럽의 국민적 군주국가들과 나란히,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동유럽 슬라브 Slav(슬라브어 언어를 쓰는 인도유럽인 민족) 국가들이 발달했을 것이다. 제8장에서 보았듯이, 스웨덴의 바이킹 Viking(루스족 Rus으로 알려져 있다)은 지금의 우크라이나 Ukraine에서 키예프 공국Principality of Kiev..
동로마가 멸망하면서 그곳에 있던 학자들이 주로 옮겨온 곳은 상대적으로 정치와 종교로부터 독립되어 있던 이탈리아 북부의 상업도시였다. 뛰어난 학자들이 모여들자 그곳으로 다른 학자들과 학생들도 몰려들었다. 이렇게 지식의 파도(?)가 이탈리아 파도바 대학 Università degli studi di Padova(UNIPD)으로 밀려들었다. 근대 해부학의 문을 열었던 벨기에 출신 베살리우스 Andreas Vesalius(1514~1564)가 교수로 있었던 곳도 바로 파도바 대학이었다. 베살리우스가 파도바 대학에서 의대 교수가 되기 약 30년 전, 대학 의학부에 두 명의 의대생이 있었다. 그중 하나가 코페르니쿠스 Nicolaus Copernicus(1473~1543)였다. 그가 지동설을 주장한 책 ≪천체의 회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