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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2 - 신라의 건국과 주체1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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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2 - 신라의 건국과 주체1

새샘 2020. 2. 1. 17:43

<6세기 후반 신라의 강역>


1. 들어가며


신라新羅에 관한 연구는 열국시대의 다른 나라보다 비교적 많다. 그런데도 그 건국 시기에 대해서는 통일된 견해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다만 신라 건국 시기에 대한 한 가지 공통점은 건국 연대를『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기록된 연대보다 낮게 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견해들은 신라 초기에 관한『삼국사기』나『삼국유사』기록은 믿을 수 없다는 인식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신라 초기에 관한『삼국사기』나『삼국유사』기록을 불신하게 된 데는 다음 3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삼국사기』기록에 따르면 신라 건국 연대는 서기전 57년, 고구려 건국 연대는 서기전 37년으로 고구려가 신라보다 늦게 건국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고대에 한민족은 북쪽 대륙에서 선진문화를 수입하여 발전했던 것으로 믿어왔다. 따라서 건국 연대도 북쪽 고구려가 당연히 남쪽 신라보다 빨라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둘째는 신라 초기에 해당하는 기록인『후한서』「동이열전」과『삼국지』「동이전」에 신라(당시 이름은 사로국)가 진한 지역에 있었던 여러 작은 나라 가운데 하나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런 상황은『삼국지』의 시대인 3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을 것이므로 신라 건국 연대가 이보다 앞설 수 없을 것으로 본 것이다.


셋째는 신라가 있던 오늘날 경주 지역에서는 신라가 처음 출현한 국가이며 그 이전에는 국가가 존재하지 않았다보았다. 따라서『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건국 연대는 근대 역사학에서 말하는 국가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원시적인 정치집단의 출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 건국을 그보다 늦게 잡을 수밖에 없었다.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본다면『삼국사기』나『삼국유사』의 신라 초기에 관한 기록 가운데 믿을 수 없는 부분이 있을 수 있다. 예컨대 원시적인 정치집단으로 보기에는 너무 수준 높은 내용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런 내용은 신라가 초기부터 국가 단계의 사회였다는 관점에서 보면 무리가 없다. 따라서 신라 초기에 관한 사료의 불신은 신라 지역의 사회 발전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에 따른 것은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고대의 기록에는 불확실한 내용이 있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하여 그 시대에 관한 기록 모두를 부인할 수는 없다. 그 가운데 믿을 수 있는 사료를 찾아내 역사 연구에 활용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이다. 그런데도 지금까지는『삼국사기』나『삼국유사』의 신라 초기에 관한 기록이 믿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이유를 들어 그것들을 모두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 초기는 아직 국가 단계의 사회가 아니었을 것이라는 선입관이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풍조는 신라사 전공자들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며 지난날의 학문 수준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라보다 앞서 있었던 고조선이나 한에 대한 연구가 충분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기 때문에 신라 초기의 사회를 이들과 연결하여 설명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고조선이나 한에 대한 연구도 증진되었으므로 그런 연구 기반 위에서 신라 건국과 그 주체 및 초기 사회 성격에 대해 재검토하려는 것이다.


2. 신라 건국기 사료의 인식 문제


『삼국사기』「신라본기」<혁거제 거서간>조에는 신라는 서기전 57년(전한前漢 선제宣帝 오봉五鳳 원년)에 박혁거세朴赫居世가 13세로 즉위하여 건국되었는데, 처음에는 나라 이름이 서나벌徐那伐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삼국유사』<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는 박혁거세가 서기전 69년(전한 선제 지절地節 원년)에 출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의 두 사료에서 박혁거세가 알에서 출생했다는 것은 비과학적이기는 하지만 세계 어느 지역에서나 고대의 시조나 건국시조 전설에는 그들 조상의 출현을 신성화하기 위해 수식된 비과학적 요소가 있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따라서 박혁거세의 출생에 비과학적인 요소가 있다 하여 다른 내용까지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두 사료에서 각각 나온 박혁거세의 즉위 연대인 서기전 57년과 출생 연대인 서기전 69년을 비교해보면 13세로 즉위했다는 것이므로 두 기록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신라의 건국시조 박혁거세가 즉위한 연대는 서기전 57년으로 보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여기서 첫 번째로 등장하는 문제는 박혁거세가 즉위하던 당시의 신라 사회가 역사학에서 말하는 국가사회 수준에 도달했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은 당시의 신라 사회는 국가 수준의 사회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것으로 보았다.


당시 신라가 국가사회 단계에 이르지 못했을 것으로 보는 견해는 주로『후한서』「동이열전」,『삼국지』「동이전」 기록에 근거하고 있다.『후한서』「동이열전」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에는 한韓이라는 나라가 있어 그 안에는 마한·진한·변한(또는 변진)이라 불리는 지역이 있었는데 마한에는 54국, 진한과 변한에는 각각 12국이 있어 모두 78국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삼국지』「동이전」에는 이들 78국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날 경상남북도 지역이었던 진한과 변한의 24국 가운데 사로국斯盧國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러므로 한과 진한 지역의 나라 이름 가운데 보이는 사로국은 위치나 나라 이름으로 보아 신라 또는 그 전신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한 지역에 있었던 78개 국의 성격에 관해 지금까지 일부 학자들은 그들 하나하나를 아직 국가사회 단계에 이르지 못한 독립된 작은 정치집단(학자에 따라 이를 군장사회라고 부르기도 하고 소국이라 부르기도 한다)으로 보았다. 그리고『후한서』는 중국 동한시대(23~220년),『삼국지』는 중국 삼국시대(220~265년)의 상황을 기록한 역사서이므로 사로국은『삼국지』의 시대인 3세기 후반까지는 아직 국가 단계의 사회에 진입하지 못한 작은 정치집단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이렇게 본다면 박혁거세는 작은 정치집단의 지도자로서 추장 같은 존재였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따라서 신라는 아직 국가사회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박혁거세의 즉위를 신라의 건국으로 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를 적용한다면 신라는 물론 백제와 가야의 건국에 관한 기록이 모두 불합리한 것이 된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의 초에 관한『삼국사기』기록들, 예컨대 영토 확장에 관한 기록들도 모두 불합리한 것이 되고 만다.『삼국지』「동이전」에는 한韓 지역에 78개의 국이 3세기 후반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데, 백제나 신라 또는 가야가 이보다 앞서 주변의 나라들을 공략하여 영토를 확장했다는 것은『삼국지』기록과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삼국사기』기록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삼국지』기록을 따를 것인가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지금까지는『삼국지』가『삼국사기』보다 먼저 편찬되었다는 이유 때문에『삼국사기』를 불신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두 기록 모두 그럴 만한 근거를 가지고 있다.『삼국사기』편찬자들은 이미 출간되어 있는『후한서』「동이열전」,『삼국지』「동이전」내용을 알고 있었을 텐데 그것과 상충되는 내용을『삼국사기』에 실었을 리 없다.


여기서『후한서』「동이열전」과『삼국지』「동이전」의 서序에 기록된 다음 내용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후한서』「동이열전」서에 중국인들이 이민족의 문물에 대한 지식을 갖게 된 것은 한漢 나라가 중흥한 뒤부터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로 보아 고대에 중국인들의 이민족에 관한 지식은 불확실했을 수도 있고 상황이 변화된 뒤 늦게야 그 사실을 알았을 수도 있다.


『삼국지』「오환선비동이전」<동이전>의 서는 그러한 사실을 분명하게 해준다. 즉 고대 중국인들은 동쪽으로는 중국 동해, 서쪽으로는 사막에 이르는 오늘날 중국 중심부의 풍속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밖의 지역은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에야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후한서』「동이열전」이나『삼국지』「동이전」의 내용도 이러한 시각에서 분석해보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후한서』「동이열전」이나『삼국지』「동이전」의 동이에 관한 기록은 기본적으로는 중국 동한시대와 삼국시대의 동이 상황을 기록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이전에 있었던 사실도 많이 포함되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쉽게 알 수 있다.『후한서』「동이열전」과『삼국지』「동이전」의 동이에 관한 기록 가운데 종교나 언어 등을 포함한 사회풍속은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이전부터 당시까지 그대로 존속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영토나 정치적인 상황은 당시에는 이미 변화된 그 이전의 상황일 수가 있다.


『후한서』「동이열전」과『삼국지』「동이전」기록 가운데 다음 내용은 그러한 변화된 상황과 신라의 건국 연대를 논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즉『후한서』「동이열전」에는 한韓에 78개의 국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한의 진왕辰王(대왕大王, 큰 왕)이 78개 국을 모두 다스렸다고 했다. 그러나『삼국지』「동이전」에서는 한에 78개의 국이 있었다고 말하고 그 이름을 일일이 열거하면서도 한의 진왕은 그 가운데 변한과 진한 지역에 있었던 12개의 국만을 다스렸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진왕의 다스림을 받지 않았던 나머지 66개 국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에 대한 설명은 찾아볼 수 없다.


『후한서』「동이열전」,『삼국지』「동이전」의 위 내용을 종합해볼 때 다음과 같은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원래 한에는 78개의 국이 있어 그들은 모두 진왕의 통치를 받았는데, 그 후 정치적 상황 변화에 따라 12개 국만이 진왕의 영역으로 남고 나머지 66개 국은 진왕의 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이 되었거나 다른 나라의 영역에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렇게 보면『삼국사기』기록을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다.『삼국사기』에 따르면『삼국지』가 편찬되기 전에 한 지역에서는 이미 신라·백제·가야가 건국되어 영토를 확장하고 있었다. 한의 영토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중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 영토가 크게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후한서』「동이열전」과『삼국지』「동이전」의 내용 차이는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원래 한에는 78개의 국이 있었는데 중국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이르러서는 그 가운데 12개 국만이 한의 진왕 통치 아래 있었고 나머지 66개 국은 신라와 백제·가야의 영토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삼국지』「동이전」에는 한의 78개 국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만,『삼국지』가 편찬될 당시에는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신라나 백제·가야의 영토에 편입되어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신라의 건국 연대를『삼국지』의 시대인 3세기 후반 이후로 내려보는 것은 옳지 않다. 신라 지역은 원래 한의 78개 거수국 가운데 하나인 사로국으로서 진왕의 통치를 받았으나 오래지 않아 독립국으로 출발하여 그 영역을 확장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보면 다음 2가지가 문제로 남는다. 하나는『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연대인 서기전 57년은 고구려의 건국 연대인 서기전 37년보다 앞서는데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 하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건국기의 신라 사회가 역사학에서 말하는 국가사회 단계에 진입해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3. 신라 건국의 핵심세력


우선 신라의 건국 연대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건국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지를 살펴보자.『삼국사기』에 삼국 가운데 신라의 건국이 가장 앞선 것으로 되어 있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의문을 품어왔다. 삼국 가운데 가장 남쪽에 있었던 신라가 가장 북쪽에 있었던 고구려보다 앞서 건국되었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민족이나 한민족의 고대문화는 북쪽의 대륙에서 들어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성장도 북쪽의 고구려 지역이 남쪽의 신라 지역보다는 당연히 앞섰을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신라가 고구려보다 먼저 건국되었다는 것은 문화 흐름의 대세로 보아 타당하지 않다고 보았다. 그러한 생각은 일반론의 시각에서 볼 경우 부분적으로 타당성이 있다.


왜냐하면 한민족의 활동 무대 가운데 남부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외부와의 접촉이 자유롭지 못했고, 북부는 육지로 대륙과 연접되어 있어 다른 지역과 접촉이 빈번했다. 따라서 북부지역이 남부지역보다 외부 자극과 영향을 많이 받아 문화 발전이나 정치 성장이 빨랐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당연히 북쪽에서 먼저 국가가 출현했어야 한다. 그러나 신라의 경우는 좀 다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고구려나 신라는 한반도와 만주에 등장했던 가장 이른 국가가 아니라는 점이다. 한반도와 만주에는 고구려나 신라에 앞서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는 고조선에 대한 연구가 부족하여 고조선이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통치한 국가였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구려나 신라를 그들이 자리한 지역에 처음 등장한 나라였다고 믿은 것이다. 그런 시각에서 고구려의 건국이 신라보다 앞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나 신라는 그 지역에 처음 등장했던 나라가 아니라 고조선이 분열되면서 일어난 나라들이었다. 이미 밝혀진 바와 같이 고조선시대에 고구려는 고조선의 거수국으로서 오늘날 요서 서부인 난하 유역에 있었다. 그런데 고조선 말기에 오늘날 요서 지역에 서한의 망명객인 위만이 위만조선을 건국하여 영토를 확장함에 따라 고구려 주민들은 거주지를 잃고 동쪽으로 이동했는데, 고조선이 붕괴되자 오늘날 요동에서 고구려라는 독립국을 세웠다. 고구려인들은 이동 과정에서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고구려를 건국한 핵심세력은 상당한 기간 동안 북부여에 의탁해 있다가 오늘날 요동으로 이동했다. 따라서 고구려가 건국된 시기는 고구려인들이 이동을 시작한 때부터 상당한 세월이 지난 뒤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편 신라가 건국된 경주 지역은 고조선시대에는 고조선의 거수국인 한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서기전 1세기 무렵에 고조선이 붕괴되자 한은 독립국이 되었고, 진왕이 독립국의 국왕으로서 한의 전 지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조선의 붕괴로 갑자기 독립국으로 출발하게 된 한은 강력한 통치제제를 갖추고 있지 못했다. 사회가 혼란할 수밖에 없었고, 이런 상황에서 신라가 건국되었다. 따라서 신라의 건국이 고구려보다 뒤져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건국 배경을, "우리들은 위에 백성을 다스릴 군주가 없어 백성들이 모두 멋대로 행동하며 제맘대로 하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아니하랴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고조선의 붕괴된 뒤 한이 독립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지만 통치 조직과 통치 능력이 부족하여 사회가 혼란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가 건국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신라 초기의 성격을 분명하게 알려면 신라를 건국한 핵심세력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알 필요가 있을 것이다.『삼국사기』<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에 따르면 신라 건국 세력은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으로 이들은 원래 진한의 여섯 부였다고 했다. 이 내용은 신라가 여섯 마을이 모여 이루어진 것으로 오해하기 쉽게 만든다. 그렇게 본다면 신라는 몇 개의 마을이 모인 작은 집단일 뿐 국가 규모의 사회였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내용은 여섯 마을이 신라가 건국되기 전에 이미 진한의 여섯 부였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주민들은 원래 고조선 백성들이었다는 것이다.『삼국유사』에도 이들이 진한의 여섯 부였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우리는 2개의 중요한 정보를 얻게 된다. 신라를 건국한 사람들은 원래 고조선 백성들이었다는 것과, 신라가 건국되기 전 이들은 진한의 여섯 부를 이루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난날 일부 학자들은 고조선을 한반도 북부에 있었던 작은 정치집단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라를 건국한 사람들이 원래 고조선 백성들이었다면 그들은 당연히 북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삼국사기』에는 그들이 '조선유민朝鮮遺民', 즉 '조선의 남은 백성'이라고 표현했을 뿐 이주민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근래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조선은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통치했던 나라로 신라가 건국된 경주 지역도 고조선의 영토였다. 그러므로 신라를 건국했던 사람들은 북쪽에서 이주한 사람들이라기보다는 고조선시대부터 그 지역에 거주했던 토착인들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이들은 원래 6개의 마을을 이루고 살았는데 진한의 여섯 부가 되었다는 것이다.『삼국사기』에 따르면 부部는 고구려·백제·신라에 모두 설치되어 있었는데, 규모의 차이는 있었겠지만 많은 마을들로 구성된 상당히 큰 행정구역이었다. 그러므로 진한의 부도 각각 여러 개의 마을들로 구성되어 있었을 것이다. 위에 언급된 6개의 마을은 각 부의 중심을 이루고 이를 대표하는 마을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여섯 마을 촌장 가문은 고조선 이래 그 지역에 정치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토착 명문거족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진한은 백제나 신라가 건국되기 전 한의 일부로서 그 지역에는 12개의 거수국이 있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 신라 전신인 사로국이었다. 여기서 거수국과 부는 어느 쪽이 더 규모가 큰 단위였는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당연히 한에서는 거수국이 부보다 규모가 큰 단위였을 것이다. 고조선이나 한에서 거수국은 지방정권으로서 중앙정권 바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는 거수국 안에 설치되어 있었던 행정구역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고구려나 사로(신라) 등과 같은 거수국들이 독립하여 영토가 확장되면서 부도 이전보다 큰 행정구역으로 변모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신라를 건국한 여섯 부는 진한의 거수국들에 설치되어 있었던 많은 부 가운데 일부였는데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지역에 있었을 것이다. 이들 여섯 부 모두가 사로국에 속해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거수국의 부도 일부 포함되어 있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길이 없지만, 신라는 진한의 여섯 부 면적의 영토를 가지고 출발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 건국의 핵심세력은 고조선시대에도 오늘날 경주 지역에 살고 있었던 토착인들이었다. 그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뒤에는 한에 속해 있었던 진한의 여섯 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들 각 부의 중심세력이었던 여섯 마을 씨족은 고조선 이래 그 지역의 명문거족이었다. 고조선이 붕괴된 뒤 한이 독립국이 되었으나 사회 혼란이 계속되므로 이들은 새로운 통치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고 신라를 건국했던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20. 2. 1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