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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3 - 신라의 건국과 주체2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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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고대사의 열국시대13 - 신라의 건국과 주체2

새샘 2020. 2. 10. 17:15

<6세기 후반 신라의 강역>



4. 신라 초기의 사회 수준


박혁거세 거서간이 즉위한 서기전 57년 무렵의 신라 사회는 어느 단계의 사회였을까?

국가사회 수준에 이르렀을까, 그렇지 못했을까?

여기서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신라가 건국되기에 앞서 이 지역은 한의 영토였고, 

그 이전에는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점이다.

고조선은 2,300여 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의 광대한 영토를 통치한 국가로서 존속했고

고조선이 붕괴된 뒤에는 한이 한반도 남부에서 그 뒤를 이었다.


따라서 신라는 그 지역에 처음 등장한 국가가 아니었다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 처음 등장한 국가는 고조선이었다.

신라의 출현은 정확하게 말한다는 왕조의 교체였다.

단지 영토가 이전의 고조선이나 한보다 줄어들었을 뿐이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것은 영토의 면적은 국가사회를 규정하는 요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에도 영토가 아주 작은 국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역사 발전의 순리로 볼 때 이미 존재했던 국가의 뒤를 이은 나라가 국가 단계의 사회가 아니었다는 것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불합리하다.


그렇지만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우선 신라의 나라 이름부터 검토해보자

앞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라는 한의 진한 지역에서 사로국을 전신으로 하여 건국되었다.

그렇다면 신라는 어느 시기까지 한의 거수국이었고 어느 시기에 독립국이 되었을까?

이 변화의 시점은 바로 신라의 건국 연대, 즉 신라왕조의 시작 연대가 될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신라의 나라 이름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지증 마립간 4년>조에


"시조가 창업한 이래로 나라 이름이 일정하지 아니하여 혹은 사라斯羅라 하고 혹은 사로라 하며 

혹은 신라라 말하는데, '신新'은 덕업이 날로 새롭다는 뜻이요, '라羅'는 사방을 망라한다는 뜻인즉

그것으로 국호를 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위 인용문에 따르면 지증 마립간 4년인 503년 '신라'라는 나라 이름이 처음으로 확정된 듯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이보다 앞서 307년(기림 이사금 10년)에 "나라 이름을 다시 신라라 했다."고 적혀 있다.

이로 보아 신라는 307년 이전에도 나라 이름을 신라라 한 적이 있었으며 

여러 번에 걸쳐 나라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나라 이름이 사라·사로·신라 등으로 혼용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후대에 이러한 이름들이 신라의 나라 이름으로 혼용되었다 해서 

이들이 처음부터 동시에 혼용되었다고 볼 수는 없으며, 그러한 이름이 나온 순서가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박혁거세 거서간이 즉위하면서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신라 초기의 나라 이름은 서나벌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신라가 독립국이 되기 전 한의 상황을 전하는『삼국지』「동이전」에는 

신라의 전신으로 사로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신라가 독립하기 전에는 한의 거수국인 사로국이 있었는데 

박혁거세 거서간이 독립국을 세우고 나라 이름을 서나벌이라 함으로써 신라가 출범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라의 건국 연대를 박혁거세 거서관이 즉위하여 서나벌이란 나라 이름을 사용하 

서기전 57년으로 잡는 데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까지는 신라 초기사회를 국가 단계의 사회로 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개 원시사회·부족국가·추방사회·성읍국가 등으로 보아왔다.

이런 견해들은 모두 신라 초기사회를 국가 단계의 사회로 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일치한다.

이 가운데 성읍국가는 고대국가의 이름으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역사학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국가 단계의 사회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다.


위 견해들은 대개 내물 마립간(356~401년)시대나 그 이후에 신라가 국가 단계의 사회에 도달했을 것으로 보고

그 이전은 국가보다 낮은 사회 단계에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신라 초기사회가 다소 수준 높은 사회였던 것처럼 기술된 

4세기 중엽 이전의『삼국사기기록은 믿을 수 없는 것으로 취급했다.


지난날에는 고조선을 국가 단계의 사회로 보지 않았고 그 영역도 한반도 북부의 일부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따라서 한반도 남부에 인류사회가 형성된 것은 한(삼한)시대나 그보다 조금 앞선 시기였을 것으로 보았는데,

그렇다면 초기의 인류사회인 한은 당연히 낮은 단계의 사회였을 수밖에 없고,

한의 일부였던 진한에서 출발한 신라의 초기사회도 

낮은 단계의 사회일 수밖에 없다는 선입관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신라 초기사회 성격을 밝히는 데 어떤 선입관이 작용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일체의 선입관을 배제하고 신라 초기사회를 검증하여 

인류사회 발전 과정에서 각 단계의 사회가 갖는 특징 가운데 

어느 것이 신라 초기와 합치하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옳은 연구 방법일 것이다.

그런 작업을 진행하기 위해 우선 인류사회의 발전 과정에서 각 단계의 사회가 갖는 특징을 알 필요가 있다.


인류사회 발전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무리사회로서 

이 단계의 사회에서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떠돌이 생활을 하는데, 구성원들이 완전히 평등한 사회였다.

사냥·고기잡이·그러모으기를 하며 생활하던 구석기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계는 부족사회로서 

이 단계의 사회에서는 혈연집단인 씨족이 붙박이 생활에 들어가 마을을 이루게 되는데,

구성원들은 서열이 있는 평등한 사회였다.

농경과 목축을 하면 생활했던 전기 신석기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부족이라는 말은 인디언 사회에 대한 용어로서 

그것과 개념이 일치한 용어가 한국사회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 고대사회에는 부족사회라는 말보다는 마을사회(또는 씨족마을사회)라는 말이 더 적합할 것이다.


세 번째 단계는 추방사회로서 

이 단계의 사회는 여러 마을들이 연맹체(또는 집합체)를 형성하고

구성원 사이에 신분과 빈부가 차이가 일어난 계층사회로서 추장과 같은 지배자가 출현한다.

농경과 목축이 발달한 후기 신석기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네 번째 단계는 국가사회 단계로서 

이 단계 사회는 권력이 법으로 뒷받침되는 합법적 권력이 출현한 사회로서 

대체로 청동기시대가 이에 해당한다.


위의 사회 발전 과정에서 뒷시대는 앞시대 사회에 존재했던 요소들이 그대로 계승되어 양적으로 팽창하면서

위에 언급한 새로운 요소들이 추가되는 것이다.

그리고 각 사회 단계에서는 위에 언급되지 않은 다른 요소들도 보이지만 

그것들은 주된 요소가 아니며 부수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다.

따라서 위에 언급된 주된 요소가 확인되면 그 사회를 어느 한 단계의 사회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초기사회는 어느 단계였을까?

『삼국사기』「신라본기」<시조 혁거세 거서간>조에 따르면 신라를 건국한 중심세력인 

여섯 마을은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의 여섯 부였다고 했다.


부는 하나의 마을이 아니라 여러 개의 마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각 마을에는 촌장이 있었고 그들은 박혁거세를 받들어 거서간으로 삼았는데 거서간은 왕이란 뜻이었다.

이로 보아 신라 초기는 이미 마을연맹체 여러 개가 모여 형성된 사회였고 

회신분에 차이가 있는 계층사회였던 것이다.

따라서 신라 초기사회는 추방사회보다 낮은 사회 단계일 수는 없다.


그러면 신라 초기사회가 추방사회였는가, 그보다 발전된 국가사회였는가?

국가사회에는 추방사회의 요소가 대부분 존속되고 있다. 그것들이 양적으로 팽창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라 초기사회에 추방사회 요소들이 보인다는 이유만으로 

신라 초기사회를 추방사회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


신라 초기사회가 추방사회였는지 국가사회였는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국가사회의 특징인 법이 존재했는지 그렇지 않았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법의 존재 유무는 추방사회와 국가사회를 구분짓는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라 초기사회에 법이 존재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렇다고 법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한 사실이 반드시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후한서』「동이열전」과『삼국지』「동이전」<한전>에는 

신라가 건국되기 전 진한과 변한에 형벌과 법이 있었는데 매우 준엄했다고 적혀 있다.


진한과 변한은 한의 일부였으므로 

한 사회는 이미 준엄한 법에 따라 통치되는 국가사회였음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법이 준엄했다는 것은 상당히 발달한 법이 존재했다는 것으로서

그 사회는 초기 국가사회가 아니라 상당히 발달한 국가사회였음을 말해준다.


그런데 고조선이 붕괴되기 전에 한은 고조선의 거수국이었다.

고조선에 범금 8조의 법이 있었던 것처럼 고조선은 법에 따라 통치되는 국가사회였다.

그러므로 신라가 건국된 지역은 고조선시대에 비록 그 중심부는 아니었지만 

이미 법에 따라 통치되는 국가 단계의 사회였고,

고조선이 붕괴되어 한이 독립국이 된 뒤에는 법이 한층 준엄해진 발달한 국가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뒤를 이은 신라는 당연히 법에 따라 통치되는 국가사회였다고 보아야 한다.

신라는 건국 초부터 국가사회였기 때문에『삼국사기』에 기록된 건국 연대를 부인할 이유가 없다.

신라의 건국 연대는 정확하게 말하면 왕조의 교체 연대인 것이다.


여기서 고조선이 한반도 남부의 한 지역까지 통치했다는 점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가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라가 초기부터 국가사회였다는 논리는 변함이 없다.

왜냐면 신라의 전신인 진한에 준엄한 법이 존재했다는

『후한서』와『삼국지』기록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신라 초기를 수준 높은 사회로 기록한『삼국사기』내용을 의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국가사회는 대체로 세게 어느 지역에서나 청동기시대에 출현했는데,

신라가 건국된 서기전 1세기의 한반도와 만주는 이미 청동기시대를 지나 매우 발달한 철기시대에 이르러 있었다.

따라서 발달한 국가사회 단계에 이르렀을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고고학적인 결과가 문헌 기록을 통해 검토한 결과를 뒷받침해 준다.


끝으로 일부 학자들이 왕호의 사용, 왕실의 구성, 왕명의 특징, 통치 조직 들을 근거로 

신라의 국가사회 진입 시기를 밝혀보려는 노력을 하기도 했는데,

런 것들은 국가사회를 특징짓는 주요소가 아니라는 점이다.


예컨대 중국에서는 진제국 이전에는 통치자를 왕이라 했고 

진제국시대부터는 황제라 하여 통치자의 칭호가 달랐으며,

전국시대 초기에는 독립한 여러 나라가 아직 왕호를 사용하지 않고 

이전에 사용하던 제후의 작위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이들을 모두 국가로 보는 데 이의가 없다.


그리고 상나라나 주나라의 경우 
통치 조직의 중요한 요소인 정부 조직이나 관료 제도가 

아직 자세하게 밝혀지지 않은 상태이지만 국가사회로 인정받고 있다.



5. 마치며


신라의 건국과 관계된『삼국사기』『삼국유사』『후한서』『삼국지등의 기록을 분석하여

신라 건국의 핵심세력과 건국 연대 및 신라 초기의 사회 성격 등을 밝혀보았다.

그 결과 얻어진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기존 연구는 신라를 건국한 핵심세력을 북쪽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로 보았으며,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연대에 대해서도 

고구려보다 앞선다는 이유 때문에 그 신빙성에 의문을 품는 학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신라 초기사회를 

역사학이나 인류학이 말하는 국가사회 단계에 이르지 못한 낮은 사회 단계였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들은 잘못된 것임이 밝혀졌.

신라를 건국한 핵심세력은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이 아니라 고조선시대부터 

이미 경주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지역에 살고 있었던 토착인들로서 그 지역의 명문거족이었다.

그들은 고조선이 붕괴된 뒤 한의 일부인 진한의 여섯 부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조선이 붕괴하여 사회 혼란이 계속되자 

자신들의 지역에서나마 이를 바로잡을 필요성을 느끼고 신라를 건국했던 것이다.


신라와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보면 두 나라는 모두 고조선의 붕괴가 가져온 혼란 속에서 건국되었지만

신라는 그 지역 토착인들이 건국한 반면, 

고구려는 오늘날 요서 서부 난하 유역에서 이주해 온 고구려족이 오늘날 요동 지역에서 건국했다.


따라서 고구려는 신라보다 오랜 건국 준비 과정이 필요했다.

이런 당시 상황으로 보아 신라 건국이 고구려보다 앞서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신라의 건국 연대인 서기전 57년은 그대로 믿어도 좋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기전 57년에 출발한 신라 사회가 

처음부터 역사학이나 인류학에서 말하는 국가 단계의 사회였느냐 하는 점이다.


지금까지는 한반도와 만주를 지배했던 고조선이나 

고조선의 뒤를 이어 한반도의 남부를 지배했던 한에 대한 연구가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라 이전의 한반도 사회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고, 그 결과 신라 이전의 사회는 미개했을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라 신라 초기는 인류사회 진화 과정의 초기 단계에 해당했을 것으로 상정했기 때문에 

국가 단계의 사회로 볼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반도와 만주 전 지역을 통치했던 고조선은 이미 국가 단계의 사회였고

한반도 남부에서 그 뒤를 이었던 한은 준엄한 법으로 통치되었던 발달된 국가사회였다.

그렇다면 그 뒤를 이어 한의 진한 지역에서 건국되었던 신라가 국가 단계의 사회가 아닐 수 없다.


신라는 한반도에 처음 출현했던 국가가 아니라 

앞서 출현했던 고조선과 한 등의 국가들의 뒤를 이은 나라로서 

엄격하게 말하면 신라의 건국은 왕조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글은 윤내현 지음, '한국 열국사 연구(만권당, 2016)'에 실린 글을 발췌하여 옮긴 것이다.


2020. 2. 10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