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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개시 '지상 최대의 작전'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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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 노르망디 상륙 개시 '지상 최대의 작전'

새샘 2020. 9. 24. 21:52

<아이젠하워. 1944년 6월 5일 아이젠하위(왼쪽)가 노르망디 강하를 앞둔 공수부대원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펼쳐졌다.

이 작전에서 함선 1,200척, 항공기 1만 대, 상륙주정 4,126척, 수송선 804척과 수백 대의 수륙양용 특수장갑차로 편성된 대부대가 15만 6,000명의 병력(미군 7만 3,000명, 영국-캐다나 합동군 8만 3,000명)을 노르망디에 상륙시켰다.

그 중 13만 2,500명은 배로 영국해협을 건넜고 2만 3,500명은 공중 수송되었다.

 

1944년 5월 말, 주말마다 런던 도심을 떠들썩하게 하던 미국군, 영국군, 캐나다군 병사들, 그리고 프랑스와 폴란드의 병사들까지 싹 자취를 감췄다.

마침내 유럽 대륙에 대한 공격이 임박한 것이다.

1944년 6월 6일의 '오버로드 Overload 작전', 즉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D데이는 애초에는 6월 5일이었다.

하지만 당일 영국해협의 날씨는 25년 만에 최악의 상태였다.

 

6월 1일부터 나빠지기 시작한 날씨는 6월 4일 밤부터 심한 폭풍으로 변했다.

원래 6월에서 8월 사이 영불해협의 날씨는 변덕이 심했다.

연합군 최고사령관 아이젠하워는 고민했다.

작전을 취소하고 한참 뒤로 연기할 것인가, 아니면 그대로 강행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다.

하지만 6월 6일 아침에 잠시 하늘이 맑아질 거라는 일기예보를 믿고, 그날을 D데이로 정하고 공격명령을 내렸다.

작전이 성공한다면 동부전선의 소련군과 더불어 독일을 샌드위치 신세로 만들 수 있었다.

 

이 결정은 엄청난 행운을 불러왔다.

1944년 봄 롬멜 원수가 이끄는 서부전선의 독일군은 대서양 방벽 건설 공사에 매진하고 있었다.

연합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장악한 시점에서 전면적인 지상군 상륙이 있으리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만한 사실이었다.

따라서 롬멜은 대서양방벽, 즉 견고한 해안 방어체계를 완성해 연합군의 상륙을 첫 24시간 내에 해안에서 저지해야만 상륙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영화 '지상최대의 작전' 중 존 웨인 John Wayne.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지상최대의 작전 The Longest Day'(1962)으로 영화화되었다. 존 웨인, 로버트 미첨, 숀 코네리 등이 출연했다. 이 작품은 '극영화'의 간판을 걸고 있지만 실제로는 다큐멘터리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 주인공들 간의 갈등이나 대립보다는 실제 역사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인 영화라 할 수 있다.>

 

연합군 상륙이 임박했다는 증거는 도처에서 나타났다.

독일군 정보기관은 연합군이 유럽 내 레지스탕스에게 전하는 암호문을 탐지, 24시간 이내에 연합군의 상륙이 있을 것이라고 상부에 보고했다.

하지만 반복해서 전해지던 그런 류의 암호와 시속 50킬로미터의 강풍이 불던 당시의 날씨 때문에 독일군 사령부는 그 정보를 무시해버렸다.

열정적으로 대서양방벽 건설공사를 지휘하던 롬멜 원수조차도 아내의 생일을 축하한다면 선물을 사들고 6월 5일 독일 본토로 휴가를 떠나버릴 정도였다.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에서 상륙작전을 감행할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사상 최대 규모의 함대가 노르망디 해안을 5곳으로 나눠 상륙을 개시했다.

미군은 서쪽의 '유타', '오마하' 해변에, 영국-캐나다군은 '골드', '주노', '소드' 해변에 상륙했다.

연합군의 전황은 명암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영국-캐나다군은 3개 해변에 성공적으로 상륙을 마쳤다.

미군은 '유타'에서 12명만이 목숨을 잃고 신속하게 교두보를 확보했지만, '오마하'에서는 독일군의 무자비한 포화 속에 1,100명이 목숨을 잃는 큰 피해를 당했다.

6월 6일 하루에 숨진 연합군 병력이 모두 2,500명이었던 점은 오마하 전투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결국 미군은 압도적인 수적 우세와 끈질긴 공격, 일부 병사의 영웅적 행동과 해군함정의 함포 지원으로 마침내 독일군을 제압하고 해안선에 거점을 확보했다.

 

노르망디 해안에 상륙한 보병이 그날 프랑스 땅을 밟은 최초의 연합군은 아니었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함대가 동원된 이 작전에서 가장 먼저 프랑스에 들이닥친 연합군은 하늘에서 떨어졌다.

6월 5일 밤 캉 운하와 오른 강을 잇는 다리를 글라이더에 탑승한 영국군 기습부대가 강하·점령한 것을 시작으로, 2개의 미군 공수사단(제82/101공수사단)과 1개의 영국군 공수사단(제6공수사단)이 적 후방을 교란하기 위해 노르망디 해안 뒤쪽의 내륙에 강하한 것이다.

내륙의 교통 요충지를 미리 점령해 상륙한 아군의 진격로를 확보하는 한편, 독일군 수비대가 해안으로 향하지 못하도록 발목을 잡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었다.

 

미군 공수부대의 작전은 자칫 실패로 돌아갈 뻔했다.

미군 공수부대는 공수작전의 어려움이란 어려움은 다 겪었다.

공수부대원을 태운 항공기 조종사들은 경험 부족으로 강하지점을 놓치기 일쑤였고, 고사포를 무서워하는 바람에 병사들을 마구잡이로 강하시켰다.

많은 병사가 목표지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강하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이렇게 넓은 범위에 공수부대원들이 분산됨으로써 독일군이 정확한 상륙 지점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뜻밖의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미군 공수부대원들은 넓은 지역에 분산된 상황에서도 독일군의 통신선을 절단하고 후방 지역에 혼란을 일으킴으로써 상륙 당일 독일군이 유타 해변에서 대규모 반격에 나서는 것을 성공적으로 저지했고, 미군이 유타 해변에 확고한 발판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인간지사 새옹지마 人間之事 塞翁之馬'라는 말 그대로였다.

 

실수도 좋은 결과를 맺는 국운이 '대한민국호'의 앞날에도 펼쳐졌으면 좋겠다.

 

※이 글은 박상익 지음, <나의 서양사 편력 2>(푸른역사, 2014)에 실린 글을 옮긴 것이다.

 

2020. 9. 9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