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단원 김홍도 "공원춘효도" 본문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의 풍속화인데, 문자 그대로 난장판이다.
일산日傘[햇볕을 가리기 위하여 세우는 우산보다 큰 양산]이 마당을 뒤덮었고, 일산마다 아래에 5~7명이 옹기종기 모여앉아 뭔가를 작당하고 있다.
그 사이 어떤 이는 행담行擔(책가방)에 기대어 쪽잠을 자고 있다.
그림 윗부분에 있는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1713~1791)의 화제畵題의 글이 흥미롭다.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 많은 사람들이 과거 치르는 열기가 무르익어·····
공원춘효만의전 貢院春曉萬蟻戰·····"
표암의 화제 때문에 이 그림에 '공원춘효도貢院春曉圖'란 제목이 붙었다.
공원貢源은 과거시험장이고, 춘효春曉는 봄날 새벽이다.
그러니까 '봄날 새벽의 과거시험장을 그린 그림'이라는 소리인데, 만 마리의 개미(만의萬蟻)가 싸움을 벌인다고 풍자했다.
이 무슨 말인가?
만 마리의 개미가 사움을 벌이는 이 난장판 같은 단원 그림이 과거시험장이었단 말인가?
그런데 둘 다 맞는 얘기다.
조선 후기 과거시험장을 바로 난장판이라 했기 때문이다.
○'공원춘효도'의 전격귀환작전
한 미국인이 소장하고 있던 단원의 이 '공원춘효도'가 68년 만에 구입·환수되어 2020년 9월 22일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된다.
경매 예정가는 4억~6억 원 수준.
이 그림의 구입·환수 일화가 흥미롭다.
이 그림은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미국 해군 유진 쿡이 가져갔다가, 2005년 패트릭 패터슨이란 골동품상의 수중에 넘어간 작품이다.
특히 이 작품과 관련해서 미 해군의 손에 들어갈 무렵 당시 부산에 피난 중이던 국립박물관의 김원룡 학예사(훗날 서울대 교수)가 써준 영문감정서(확인서)가 눈길을 끈다.
당시 31살이던 김원룡 학예사는 영문감정서에 "이 그림은 단원의 30세 이전 그림으로 추정된다"고 썼다.
아무튼 패터슨의 수중에 들어가 있던 이 그림을 처음 본 이는 미술사학자인 정병모 경주대 교수였다.
패터슨 측으로부터 "감정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정 교수는 2007년 2월 미국 프레스노로 건너가 이 그림을 보았고, 그해 4월 국립국악원이 발행하는 전문학술지인 ≪국악누리≫에 이 그림을 소개했다.
이후 이 그림은 조선의 과거시험장을 설명할 때마다 빠지지않고 인용된 자료가 되었다.
그러던 지난해 2019년 정병모 교수의 강연을 들은 '사랑의 종신기부운동본부' 서진호 대표가 저 그림을 가져오자고 제안했다.
서대표는 단원의 고향인 안산시와 함께 '공원춘효도'의 환수 작업을 추진했다.
하지만 코로나19 대유행으로 미국 현지에서 작품을 최종 확인할 수가 없었다.
코로나19가 종식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2020년 8월말 소장장인 패터슨의 부인에게서 "남편이 암 판정을 받아서 위독하다"면서 "매매절차를 서두르자"라는 긴급 기별이 왔다.
하지만 공공기관인 안산시로서는 작품을 실견할 수 없었던데가 행정처리가 복잡했기 때문에 신속한 귀환작업은 불가능했다.
결국 서울옥션이 나서 단 일주일 만에 절차를 마무리지었고, 지난 9월 15일 구입·환수되었다.
대금을 보내고 그림이 공수되는 전격작전이었다고 한다.
9월 29일 안산시는 지난 22일 서울옥션에서 경매된 '공원춘효도'를 4억 9천만 원에 낙찰받았으며, 하루 빨리 시민들에게 공개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새벽의 과거시험장은 어떤 모습일까
이제 구입환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정병모 교수를 통해 이 그림을 뜯어보자.
정교수는 이 그림은 과거장에 가득 찬 일산들이 장관을 이뤘고, 사이사이 힐끗 보이는 수험생의 긴장된 모습을 그린 작품이라고 평했다.
과거장의 모습을 서양화식의 대기원근법大氣遠近法으로 성대하고 드라마틱하게 표현했으며, 단원의 풍속화 전성기인 30대 작품으로 보인다고 했다.
대기원근법은 선線이 아니라 공기층이나 빛의 변화로 거리감을 표현한는 원근법으로서,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완성한 기법이다.
그림 기법은 그렇다치고, 이런 과거시험장이 있었다는 말인가?
강세황의 화제를 더 읽어보자.
"어떤 이는 붓을 멈추고 골똘히 생각하며, 어떤 이는 책을 펴서 살펴보며, 어떤 이는 종이를 펼쳐 붓을 휘두르며, 어떤 이는 서로 만나 짝을 지어 이야기하며, 어떤 이는 행담에 기대어 졸고 있는데...등촉은 휘황찬란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하다."
바로 그랬다.
당대의 과거시험장은 단원의 그림과 표암의 글처럼 난장판, 바로 그 자체였다.
여기서 다산 정약용이 언급한 과거시험장의 한심한 작태를 소개해보자.
"문장에 능숙한 자를 거벽巨擘, 글씨에 능한 자를 사수寫手, 자리와 우산 같은 기구를 나르는 자를 수종隨從, 수종 중 천한 자를 노유奴儒, 노유 중 선봉이 된 자를 선접先接이라 이른다."
무슨 말인가 하면 과거시험을 보는 유생 1명에 최소 5명이 붙어 역할 분담을 하여 도와준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6인 1조의 입시비리단이다.
각자가 맡은 역할은 다음과 같다.
우선 과거장에 먼저 들어가야 유리했다.
왜냐면 지금처럼 수험번호에 따라 지정좌석에 앉는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조건 먼저 들어가서 현제판懸題板(과거 때 시험문제를 내거는 널판지)에 게시되는 문제를 잘 볼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차지해야 했다.
○과거시험장에 왠 우산행렬이?
이때 필요한 자들이 바로 선접과, 수종, 노유였다.
이들은 과거시험장인 창경궁 춘당대 밖에서 등불을 밝히며 밤새워 기다렸다가 새벽에 궐문이 열리면 좋은 자리 확보를 위해 몸싸움을 벌였다.
우산대와 말뚝, 막대기 등을 휘두르면 달려가 일산을 펴고는 '내 자리요!'하고 맡아놓았다.
물론 이들이 머리에 고양이 귀같은 유건儒巾(유생들이 쓰는 관모)을 쓰고 수험생으로 위장했음은 물론이다.
이들은 어깨에 대나무창을 메고, 손에 쇠몽둥이와 짚자리, 평상을 들고 있다.
노한 눈깔이 겉으로 불거지고, 주먹을 어지럽게 옆으로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면서 현제판 밑으로 달려들어 자리를 잡는 것이다.
19세기 한양 거리를 노래한 '한양가'는 새벽에 문을 열자 쏟아져 들어오는 인파를 두고 "마치 줄불을 펼친 듯 새벽별이 흐른 듯 전투를 벌일 기세"라고 표현했다.
초정 박제가 역시 과거난장판이 된 세태를 ≪북학의≫에서 이렇게 적나라하게 고발한다.
"마당이 뒤죽박죽 되고...심한 경우에는 망치로 막대기로 상대를 때리고 찌르고 싸우며...문에서 횡액을 당하고...심지어는 남을 죽이거나 압사하는 일까지 일어난다."
허튼 소리가 아니다.
숙종 12년인 1686년 4월 3일 숙종이 명륜당에서 과거시험을 본다는 소식을 들은 전국의 선비들이 먼저 들어오려고 아귀다툼을 벌이다가 8명이나 압사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숙종실록>은 "죽은 자들뿐 아니라 위독한 사람들도 많아서 성균과 주변에서 울부짖는 소리가 그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단원의 '공원춘효도'를 다시 한번 보라.
초롱불을 켠 새벽인데도 시험장에는 자리를 맡아놓은 일산이 덮여있다.
파라솔 같은 우산인 일산과 말뚝, 쇠몽둥이, 평상, 짚자리, 책가방 등을 들고 밀고 들어온 선접, 수종, 노유 등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게 몸싸움을 해서 좋은 자리를 확보했다고 치자.
답안은 어찌 작성하는가.
자리를 잡은 응시자인 거자① 곁에서 뭔가를 하고 있는 문장 전문 거벽②과 글씨 전문 사수③를 주목하라.
문장이 뛰어난 거벽은 출제자의 의도에 따라 답안의 내용을 전문으로 지어주는 역할이다.
또 사수는 글씨를 빨리 잘 대신 써주는 사람이다.
거벽이 지금의 책가방 격인 행담에 숨겨온 예상답안지나 참고서들을 꺼내 바람처럼 답안을 지어내면 사수는 촌각의 지체 없이 글씨를 써서 제출했다.
그렇다면 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인 거자는 무엇을 했을까?
그림에서 보다시피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나고 아직 고무래 정丁 자도 몰라도 거벽의 글과 사수의 글씨를 빌려 시권試卷(답안지)을 제출한다."고 다산은 경세유표에 적었다.
결국 다산의 말처럼 돈 있고 행세깨나 하는 집안의 자제는 고무래 정丁 자도 모르는 일자무식이라도 거벽과 사수, 수종, 노유, 선접 같은 부정시험단의 도움으로 합격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시험의 나라, 조선
그럼 조선의 과거시험장이 왜 이렇게 난장판이 됐을까?
따지고보면 조선은 시험의 나라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보통 5살 때 과거공부를 시작한다면 무려 30년 이상 머리를 싸매고 공부해서 시험을 치러야 겨우 대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국가시험만 4차례 거쳐야 했다.
과거시험은 원칙적으로 3년마다 실시됐다.
수험생들은 한번 떨어지면 최소 3년을 기다려야 했으니 합격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다.
우선 예비시험인 소과의 경우 초시(1,400명 선발)를 거쳐 복시를 통과한 200명이 생원(100명)·진사(100명)가 됐다.
생원·진사가 돼야 본시험인 대과(문과)를 치를 수 있었다.
대과 역시 1차 시험격인 초시에서 240명을 선발했고, 다시 이 240명이 2차 시험인 복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렇게 4차례의 시험에서 뽑힌 33명의 과거급제자가 꿈에 그리던 문관의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행정고시 최종합격자이다.
3년에 한 번씩 불과 33명을 뽑는 행정고시였던 셈이다.
○과거장 안팎을 노끈으로 연결한 이유
그랬으니 합격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른바 입시부정이 심심치않게 일어났다.
기상천외한 사건이 숙종 31년 1705년 2월 18일 터졌다.
성균관 인근 동네에 살고 있던 여인이 나물을 캐다가 땅속에 묻힌 노끈을 발견하고는 잡아당겨 보았다.
그랬더니 이 노끈은 명륜당 뒤 산쪽에서 성균관 담장 밑을 통과해서 과거시험장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누군가 대나무 통을 묻고 그 속에 노끈을 연결한 것이다.
그 날짜 <숙종실록>은 "이것은 과거장에 들어간 유생이 노끈을 이용해서 외부인이 작성한 답안을 받았다는 얘기"라고 단정했다.
뒤 이어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됐는데, 이와 같은 노끈이 여러 개 발견된 사실만 추가확인했고 범인색출에는 끝내 실패했다.
이것은 단적인 예에 불과하다.
커닝페이퍼를 콧구멍에 넣거나 종이로 만든 속옷에 글을 써서 입거나 아주 작은 책을 만들어 옷속에 숨겨 들어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조직적인 입시비리 때문에 이미 치른 과거 자체가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1699년(숙종 25년) 기묘과옥科獄(조선 시대에, 과거시험의 부정으로 일어나던 형사 사건)과 1712년(숙종 38년)의 임진과옥이다.
기묘과옥은 1699년 실시된 과거에서 34명이 합격했지만 과거 자체를 취소한 사건이다.
과거 시험을 실무를 담당하는 이들 중에 등록관과 봉미관 등이 있었다.
등록관은 과거 때 필적 부정을 막으려고 응시자의 답안을 베껴 채점관에게 넘기는 관원이고, 봉미관은 응시자들의 답안지 서명란에 봉인을 붙이거나 떼는 일을 담당한 관원이다.
그런데 이들이 청탁을 받고 다른 응시자의 봉투를 붙였거나 답안을 베껴 제출할 때 고쳐 써주거나 하여 부정합격시킨 사례가 고구마 줄기처럼 엮여나왔다.
결국 관련자 수 십명이 절도에 유배되고, 시험 자체가 무효처리됐다.
13년 뒤에 일어난 임진과옥은 더 지독했다.
시험관이 친구의 아들과 지인에게 문제를 3건이나 알려주는가 하면, 답안지에 앵鶯 자를 암호로 쓰게 했다.
실제로 일부 답안에서 '천앵출유遷鶯出幽'와 '곡앵谷鶯' 등의 앵 자가 들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시험기간이 지난 뒤 답지를 제출하도록 해서 부정 합격시킨 것도 적발됐다.
특히 시험관이 시험 전에 응시생의 집을 두루 찾아다녔던 사실이 들어났다.
결국 전원의 합격이 취소되고 관련자 중 3명은 끝내 처형당했다.
○공자님도 통과해야 했을 문
68년 만에 구입·환수되는 단원의 '공원춘효도'는 바로 18~19세기 부정과 비리가 판쳤던, 그래서 난장판이라 했던 과거시험장의 적나라한 풍속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과거제도는 1894년(고종 31년) 갑오개혁으로 폐지되었다.
고려 광종 9년인 958년에 시작되어 936년 동안이나 미우나 고우나 인재등용의 산실이 되었던 과거제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새삼 정약용과 박제가 등의 한탄이 귓전을 때린다.
"천거없이 오로지 과거시험만으로 인재를 뽑음으로써 1,000가지 병통과 100가지 폐단이 일어난다"는 다산의 한탄과 "모든 길을 막아놓고 문을 하나[과거]만 만들어놓으면 공자님이라해도 그 문을 거쳐야 할 것"이란 초정의 한탄이 그것이다.
어느덧 난장판으로 전락학고만 과거제의 폐단을 비판한 것이다.
하지만 다른 생각도 든다.
정약용과 박제가의 말처럼 천거와 같은 다른 문을 더 만들었다면 모든 폐단이 일소되고 인재들이 차고 넘쳤을까?
그 또한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제도와 법령은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죄지, 제도가 죄는 아니다.
※이 글은 경향신문 2020. 09. 22. 06:00 입력 기사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68년 만에 돌아 단원의 '봄날 새벽 과거시험장'..'사마천·소동파도 낙방할 난장판'"(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2009220600001&code=960100)을
발췌한 것이다.
2020. 9. 2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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