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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서울에서 유적 발굴을 시작하다 1 - 명일동 주거지, 가락동 주거지, 풍납토성, 역삼동 주거지, 면목동 주거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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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서울에서 유적 발굴을 시작하다 1 - 명일동 주거지, 가락동 주거지, 풍납토성, 역삼동 주거지, 면목동 주거지

새샘 2021. 5. 26. 22:20

1960년대 발굴된 서울의 유적지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 지역에서 발굴이 처음으로 이루어진 유적은 명일동明逸洞 주거지 유적이다.

엄격히 말하면 당시는 경기 광주군 소속 지역이었지만 현재 서울 강동구 명일동이기 때문에 명일동 주거지를 서울 지역 최초의 발굴 유적으로 보았다.

이후 1960년대에는 가락동 주거지, 풍납토성, 역삼동 주거지, 면목동 유적, 암사동 유적, 가락동 고분을 발굴하였으며, 이 중 1960년대에 발굴을 시작한 풍납토성과 암사동 유적은 이후에도 발굴이 지속적으로 추진되어 지금은 서울의 대표적인 유적이 되었다.

 

 

서울 명일동 주거지

 

1960년대 서울 명일동 주거지 유적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 명일동 주거지는 우연히 발굴된 유적이다.

당시 고려대 인류·고고회를 이끌던 고려대 교수인 김정학은 한강 유역 선사유적을 답사하던 중 1961년 6월 11일에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명일리의 낮은 야산에서 토기 파편과 석기를 발견하였다.

 

김정학의 발굴보고서에 따르면 문교부로부터 허가가 나오기까지 유적을 지키고자 그곳에 텐트를 치고 인류·고고회 학생들로 하여금 교대로 지키게 하였다고 한다.

6월 21일에 허가가 나왔으니 거의 열흘 가까이 학생들이 현장을 지킨 것이다.

계획된 국가 차원의 발굴도 아니었고 적절한 지원도 없는 상태였으니 당시 학생들의 고생이 눈에 선학다.

 

유적 위치는 발굴 보고서에서 확인할 수 없다.

발굴자는 단지 해발 42미터의 야산으로 어린 소나무가 모든 산에 덮혀 있고, 유적 서쪽에는 근래에 매장된 개인 분묘가 있다고 그 위치를 설명하였다.

 

집터는 한쪽이 약 6미터 가량의 사각형에 가까우며, 서쪽 둘레에서 약 9개의 기둥자리가 발견되었다.

기둥 자리는 가로 10센티미터, 세로 14센티미터, 깊이는 약 29센티미터 정도를 약 50도 기울기로 팠다.

 

출토 유물로 석기 종류로는 간돌검(마제석검磨製石劍) 2점, 돌화살촉 7점, 숫돌 4점, 판돌(판석板石) 1점이 나왔으며, 그밖에 토기 파편 약간이 출토되었다.

유물 중 간돌검은 이 유적의 연대를 보여주는 표지 유물이다.

발굴자는 그 모양이나 제작수법으로 보아 청동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발굴 기간은 단 3일이었다.

물론 집터 유적이 한 곳이라 오래 걸리지 않았겠지만  그럼에도 발굴 기간이 상대적으로 너무 짧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발굴의 기본인 유적 위치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어 지금 그 흔적조차 확인할 수 없어 아쉬운 마음이 크다.

 

상대적으로 선사시대 집터가 부족한 서울 지역에서 명일동 집터 유적은 신석기시대 집터 유적인 암사동 유적과 함께 오래 전부터 서울 지역이 사람들이 살기에 좋은 지역임을 보여주는 적절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서울 가락동 주거지

 

가락동 주거지 출토 토기(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 가락동可樂洞 주거지는 1961년 명일동 주거지를 발견한 고려된 인류·고고회의 답사 도중 발견하였다.

김정학은 1963년 6월 2일 고려대 인류·고고회 학생들과 함께 경기 광주군 중대면 가락리 일대의 야산을 조사하던 중 약 40미터 높이의 안산安山에서 토기 파편이 모여 있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주변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형태를 알 수 있는 토기를 발견하였고, 시굴 트렌치 test trench[본격 발굴에 앞서 이루어지는 시굴법의 하나로서, 좁고 긴 구획을 시굴함으로써 수직 단면층을 쉽게 알 수 있음]를 여러 곳에 넣어 동서 10미터, 남북 7미터의 긴 사각형 집터 흔적을 확인하고 발굴하였다.

 

출토 유물로는 토기와 함께 반달형 돌칼, 돌화살촉,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섬유에서 실을 뽑는 도구인 가락(방추紡錘) spindle에 회전을 돕기 위해 끼우는 부속품으로서, 이 가락에서 발전된 기구가 물레] 2점, 숫돌 등이며,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유물은 토기다.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김정학은 복원이 가능한 3개의 토기 속에 흙을 가득 채우고 곁을 볏짚으로 싸고 새끼로 얽어매어 박물관까지 운반한 뒤 석고로 골을 떠서 토기 원형을 복원하였다.

발굴자는 출토된 토기 중 4점을 완전한 형태로, 2점을 일부 복원하였는데, 좁은 납작바닥 위로 벌어지는 동체를 가진 새로운 형태의 무늬없는토기가 가락리에서 창조되었다고 보고, 이것을 '가락식토기可樂式土器'로 명명하였다.

지금도 '가락식토기' 또는 '가락동식토기'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되고 있다.

 

발굴자는 일본의 야요이문화(미생彌生문화)와 연계하여 이 유적의 연대를 정착생활과 농경이 이루어진 청동기시대로 보았다.

출토 석기와 토기의 제조 기술과 형태 등을 보아도 청동기시대의 것임을 증명한다고 하였다.

 

경찰병원역 북동쪽에 위치한 지금의 가락2동 안산골어린이공원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가락동 주거지는 명일동 주거지와 마찬가지로 정확한 위치는 알 수가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발굴 보고서에는 한강에서부터 최단거리가 약 2킬로미터, 삼전도 나루까지 2.5킬로미터라 하였고, 집터는 안산이라는 야산에 위치한다 하였다.

 

그러나 현재 가락동 일대에서 안산이라는 지명은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송파구 가락동 152-3에 위치한 어린이공원의 이름이 '안산골어린이공원'이어서 이 부근에 안산이라는 야트막한 야산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그 위치는 명확하지 않지만 명일동 주거지에 이어 가락동 주거지의 발견으로 이 지역 일대가 선사시대부터 사람들의 거주지로 널리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 풍납토성

 

1970년대 풍납동 토성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1)

 

2015년 풍납동 토성 모습(사진 출처-출처자료2)

지금의 송파구 풍납동에 있는 사적 제11호 서울 풍납동 토성風納洞 土城은 이미 일제강점기부터 그 존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토성에 대한 정식 발굴은 1964년 김원룡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고고인류학과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특히 1961년 우리나라에서 서울대에 처음으로 고고인류학과가 설치되었는데, 이는 학문적으로 고고학을 독립 영역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음을 뜻하며, 아울러 우리나라 고고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발굴 보고서에 따르면 김원룡은 발굴을 통해 당시 지표면을 찾아내어 유물을 통해 토성의 연대를 고찰하고, 역사지리적 문제 해명을 위해 고고학에서 자료를 찾아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또한 유물 포함층에서 나오는 토기를 자세히 고찰하여 열국列國시대부터 삼국시대 초기까지의 토기 모습을 살펴보고자 하는 욕심으로 이 발굴을 계획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발굴을 하려니 토성의 긴 변은 거의 2킬로미터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고, 이미 전부가 경작지이며, 민가가 급격히 늘어나는 상황이라 결국 8개의 탐측갱探測坑 sounding pit[조사를 위해 판 구덩이]을 파서 주로 북반부 지역에서 나온 토기 파편을 수집하는 데에 그쳤다.

 

발굴 보고서의 내용을 보면 이미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당시 광주 풍납리 토성에는 많은 집들이 빠르게 늘어나고 있었고, 경작지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지금은 물론 매우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것은 당시 문화재 관리 수준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실이었다.

1963년 1월 21일 당시 광주 풍납리 토성은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지만 정작 사적으로 지정된 것은 토성 내부가 아닌 토성의 벽뿐이었다.

말 그대로 성 안은 사적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다.

당시 민가들이 성 안으로 빠르게 늘어난 것은 허술한 사적 지정 범주 때문일 것이다.

이것이 2000년 이후 풍납토성을 발굴하는 데에 발목을 잡게 될 줄은 이때까지 아마 전혀 몰랐을 것이다.

 

김원룡은 1964년 당시 풍납동 토성의 현황을 보고서에 상세히 서술하였다.

토성은 대체로 남북으로 긴 네모형으로 성벽은 직선이 아니고 동쪽 벽은 중앙부가 눈에 띄게 밖으로 튀어나왔다.

북쪽 벽이 약 300미터, 동쪽 벽이 1,500미터, 남쪽 벽이 200여미터이고, 유실되고 남은 서북쪽 벽 250미터를 더하면 발굴 당시 길이는 2,250미터쯤 된다.

 

성 안은 대체로 동에서 서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현지 표면의 최고면은 해발 21미터, 최저면은 15.5미터, 그리고 성벽 최고 높은 곳은 북벽의 26미터 지점이다.

아마 성벽은 축성 당시보다 훨씬 줄어든 것이며, 반대로 성 안 지면은 당시보다 최고 2~3미터 정도 높아졌다고 보았다.

이어 김원룡은 남아 있는 동서남북의 벽에 대해 자세히 서술해 놓아 당시 성벽과 성 안 모습을 파악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발굴자 김원룡은 아직 서쪽은 민가가 없고 모두 야채밭이지만 곧 주택이 들어서 토성의 전반적인 발굴은 점차 어려워질 것으로 생각하였다.

이미 1963년에 사적으로 지정되었지만 성 내부는 점점 파괴되어 가고 있었으며, 풍납동 토성의 발굴이 더욱 어려워질 것이라는 1960년대 발굴자의 비관적인 예언은 이후 그대로 맞아 들어갔다.

서울의 도시화와 함께 천호동 지역은 점점 더 밀집된 주택가로 변모해 간 것이다.

 

한편 김원룡은 풍납동 토성을 이병도와 같이 사성蛇城으로 추정하였는데,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삼국사기≫의 개로왕 21년인 475년, 고구려의 백제 공격 기사에 보이는 북성北城을 왕도의 북성인 풍납동 토성으로 보았던 것이다.

지금은 많은 연구자들이 이때의 북성을 풍납동 토성으로 보는 것과 일치한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김원룡은 북성은 풍납동 토성으로 ≪삼국사기≫의 사성蛇城이고, 남성南城은 읍성이자 수도라고 보는 것이지만, 그만큼 풍납동 토성을 크고 중요했던 토성으로 인식한 것이다.

 

풍납동 토성이 이후 1990년대 중반에 이를 때까지 이렇다 할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안다면 이때의 발굴을 기록한 이 보고서의 가치는 오래된 고서만큼 큰 가치를 가지고 있다 할 수 있다.

김원룡은 발굴 보고서 머리말에서 풍납동 토성의 본격적인 발굴은 장차 더 큰 규모와 계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지만, 이후 30년이 지난 1990년대 중반 이후에야 이르러 다시 발굴이 시작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고고학자인 김원룡은 1993년에 작고하였으니 살아 생전 풍납동 토성 내부의 발굴을 보지 못한 것이다.

 

 

서울 역삼동 주거지

 

지금의 도곡근린공원 정상부 모습. 이곳에 역삼동 주거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사진 출처-출처자료1)

서울 역삼동驛三洞 주거지 유적의 위치는 당시 서울 성동구 역삼동 산21-1로 90미터 야산 위에 있었다.

서울에 편입되기 이전까지 경기 광주군 언주면이었다.

용산구 한남동 맞은편 신사리 한강 나루터에서 약 3킬로미터 남쪽에 위치하며, 남쪽 약 10킬로미터에는 청계산, 동남쪽으로 약 2.3킬로미터에는 구룡산, 서남쪽으로는 우면산이 있다고 하였다.

 

다행히 주소가 남아 있어 역추적해보면 지금의 강남구 도곡동에 있는 도곡근린공원이 이 유적지가 있었던 곳이다.

매봉산이라 불리던 곳인데, 야산 바로 옆에 매봉터널이 지나고 있으며, 산 주변에 '매봉'이란 이름을 가진 아파트가 있어 이곳이 매봉산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주변 주민들의 쾌적한 산책로이자 가볍게 운동할 수 있는 장소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이 청동기시대 유적지임을 알 수 있는 표지는 전혀 없다.

 

역삼동 주거지 유적은 1966년 5월 초(당시 달력을 찾아보니 5월 7일), 숭실대 사학과의 한강 유역 답사의 일환으로 이 일대를 조사하다 군인들이 파놓은 참호 안에서 무늬가 전혀 없는 민무늬토기(무문無文토기) 파편을 채집하였다.

이에 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생각하고 그 다음날인 5월 8일에 다시 와서 주변지역을 조사한 결과 민무늬토기 파편을 비롯하여 숫돌이나 재와 숯 등이 보여 선사시대 주거지로 확신하고 잘 묻어둔 후 8월 22일부터 8일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출토 유물을 살펴보면 석기 종류로는 돌도끼(석부石斧) 3점, 돌끌(석착石鑿)[나무에 구멍을 뚫거나 다듬는 데 사용하는 도구] 2점, 돌화살촉(석촉石) 3점, 반달돌칼(반월형 석도半月形 石刀), 숫돌 6점, 갈돌, 맷돌, 망치돌 3점, 쓰임새를 알 수 없는 강돌(천석川石) 2점, 석기, 석재 등이 나왔다.

 

발굴자는 이 역삼동 유적을 서기전 7~서기전 4세기 무렵의 청동기시대 집터 유적으로 보았다.

당시 표토층에서 약 50~60센티미터 정도까지 팠고, 집의 벽에 붙어서 1~2미터 간격으로 지름 10~15센티미터 크기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 역삼동 주거지 유적은 현재 정확히 그 위치를 알 수는 없다.

발굴 보고서에 산 정상 부근 150평 정도의 평지라고 되어 있어 산 정상 부근에 위치하고 있지 않을까 추측할 따름이다.

아마도 근린공원으로 정비되어 가는 도중에 원형이 많이 변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서울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도곡동의 한 가운데 청동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물론 지금도 많은 주민들의 사랑을 받는 곳이기도 하지만 오래전 청동기시대부터 이곳에서 사람들이 살았다는 정도의 안내문은 필요하지 않을까?

 

 

서울 면목동 주거지

 

서울 면목동面牧洞 주거지 유적은 발굴자인 황용훈이 1967년 면목지구 주택 건립을 위한 택지조성 작업을 위해 불도저가 갈아버린 산기슭 일부와 그 근처 산기슭에서 발견하였는데, 정리된 주택 조성지를 지나가다가 상당히 마모된 돌망치를 채집하면서 조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면목지구 택지조성지라고만 나와 있어 그 정확한 위치를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단지 발굴 보고서에서 유적의 입지 조건을 살펴보았는데, 아차산이 뒤에 있고 앞은 트여 있으며, 앞에 펼쳐진 들을 두고 그 가운데에 중랑천이 흐르고 있어 구석기시대인들이 즐겨 사용하는 장소라고 보았다.

 

면목동 주거지 유적에서 출토된 몸돌석기인 뾰족개(사진 출처-출처자료1)

채집된 몸돌석기격지석기 flake(석편石片석기 또는 박편剝片석기)[몸돌에서 떼어 낸 돌조각을 말하는 순우리말; 종류는 긁개, 톱니, 등칼 등; 구석기시대의 표지 석기]의 수는 1차 조사에서 30점, 2차 68점, 3차 46점, 4차 13점, 5차 52점 등 모두 327점이었다.

채집된 석기 가운데 완전한 형태는 39점으로, 발굴자는 이것들을 통해 이 유적의 문화적 성격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발굴자인 황용훈은 석기의 형태 조사를 통해 공주 석장리 제6문화층 석기와 같은 형식의 석기로 보고, 아시아 찍개문화 전통을 이어 받은 찍개문화의 하나로 보았다.

특히 격지석기인 끝날긁개와 오목날긁개는 후기 구석기시대의 유물로 보았다.

 

하지만 학계 일각에서는 이 면목동 주거지 유적의 조사 과정과 그 내용, 토양층의 성격, 석기의 출토 위치 등 유적의 선명도가 매우 낮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3. 구글 관련 자료

 

2021. 5. 26 새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