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1970년대 서울에서 발굴된 유적들 3: 잠실지구 유적 본문
서울 잠실지구 유적
서울 잠실蠶室지구[누에를 사육하던 지역]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는 이른바 '강남 개발'의 결과물이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전체적인 강남 개발의 내용을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963년 지금의 강남구·서초구·송파구·강동구·중랑구·노원구·도봉구·관악구·금천구·구로구·양천구·강서구 등 당시 경기도에 속해 있던 한적한 교외 농촌지역이 서울에 편입되었다.
서울의 도시개발 역사는 이처럼 확대된 시가지를 어떻게 채워나갔는가에 대한 역사이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시가지 확대와 형성을 주도한 것은 토지구획정리사업이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란 기존의 교외 농촌지역의 토지분할을 새롭게 구획하여 도로·공원·학교 등 공공시설 용지를 마련하고, 개인이 소유한 농지나 임야를 개발가능한 택지로 조성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토지구획정리사업에 대한 시가지 개발에서 강남 개발은 서울의 도시개발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현재의 강남구와 서초구에 해당되는 영동1·2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은 다른 지역과는 달리 '강남 개발'로 인식되었는데, 그 이유는 강남 개발이 '새서울건설'이란 정책목표 아래 추진된 가장 규모가 큰 토지구획정리사업이었을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서울을 강남과 강북이라는 이분법적 공간구조로 인식하게 만드는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1966년 12월에 영동1지구와 영동2지구로 구분되어 토지구획정리지구로 지정되었다.
오늘의 서초구에 해당하는 영동1지구가 먼저 시작되었고, 오늘날 강남구 대부분에 해당되는 영동2지구는 1971년 양택식 서울시장이 부임한 이후 시작되었다.
영동지구에서 탄천 건너편에 있는 잠실지구에 대한 토지구획정리사업도 정부의 강북 인구 분산책에 따라 추진된 강남 개발의 일부였다.
서울시는 1971년 잠실섬을 육지로 만든 공유수면 매립지 100만 평과 주변 미개발지 340만 평을 하나로 통합하여 잠실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작하였다.
잠실섬(저자도楮子島 )을 둘러싸면서 현재의 석촌호수까지 내려왔던 한강의 물길이 메워지고 송파지역으로 육지가 되는 거대한 변화였다.
이와 관련하여 매립용 토사가 부족하자 당시 시공회사는 지금의 올림픽공원 몽촌토성을 굴착하여 사용하고자 하였는데, 몽촌토성의 역사적 가치를 알고 있던 서울시 공무원의 주장으로 다행히(?) 무산되었던 일화도 있었다.
잠실지역이 오늘의 모습처럼 신시가지가 된 것은 1973년 국제 규모의 체육장 시설을 마련하고 미래를 지향하는 국제 대도시로 개발하라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잠실뉴타운계획을 수립한데 따른 것이다.
330만 평을 대상으로 25만 명의 인구를 수용한다는 계획이었다.
영동지구와는 달리 잠실지구는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것은 이 지역이 백제와 선사 관련 유적들이 산재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발굴조사는 총 3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제1차 발굴은 1974년 12월부터 1975년 1월까지 이루어졌으며, 발굴 범위는 강남구 방이동 118번지 일대 약 4만 평으로 열국시대 초기 유적 등 8개의 유적을 발굴하였다.
발굴 시기가 겨울임을 감안하면 국가 차원의 개발 사업을 위해 급하게 구제발굴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제2차 발굴은 1차 발굴 이후 다시 1975년 8월 19일부터 9월 13일까지 이루어졌으며, 발굴 범위가 방이동과 가락동 일대 5만여 평이었다.
겉으로 봉분이 뚜렷한 고분들은 야산 정상과 북서쪽 민가가 있던 방이동 366번지 일대에 집중되어 있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보고서에서 방이동과 가락동은 "서울의 동부에 위치한다"라고 서술한 점이다.
당시 이 지역은 '강남'이 아닌 동쪽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에서 1963년 서울시 성동구로 편입되었고, 이후 강남구, 강동구, 그리고 최종적으로 지금의 송파구가 된 것이다.
강남구가 신설된 것이 1975년이니, 당시 강남이라는 말은 매우 낯선 용어였던 것이다.
2차 발굴조사는 제Ⅰ지구부터 제Ⅶ지구까지 총 7개 구역으로 나누어 조사하였으며, 각 구역은 문화재관리국 문화재연구소와 각 대학교별로 하거나 몇 개 대학들이 연합하여 발굴을 하였다.
발굴조사단장은 김원룡 서울대 교수가 맡았고, 각 대학 고대사학자와 고고학자가 많이 참여했다.
서울대가 담당한 제Ⅰ지구는 가락동 제3호분, 가락동 제1호 주거지 유적이 확인되었고, 단국대가 조사한 제Ⅱ지구에서는 뚜렷한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제Ⅲ지구는 숭전대가 가락동 제2·3·4호 주거지를, 제Ⅳ지구는 고려대가 가락동 제5호 주거지 유적을 확인하였다.
제Ⅴ지구에서 이화여대가 조사를 시작하다가 나중에 단국대가 합류하였으며, 이화여대는 가락동 제4호분을, 그리고 단국대는 가락동 제6호분과 냇돌유구(천석유구川石遺構: 냇가의 자갈돌을 깐 집터 자취)를 확인하였다.
제Ⅵ지구는 문화재관리국이 직접 발굴하여 방이동 제1호분 유적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제Ⅶ지구는 고려대·서울대·이화여대·단국대·숭전대의 대학연합발굴단이 발굴하였지만 특별한 성과는 없었다.
확인된 유적 가운데 가락동 제4호분은 도굴한 흔적이 뚜렷하였으며, 방이동 제1호분은 몇년 전 폭우로 널길이 드러나 있었다.
먼저, 서울대가 발굴조사한 제Ⅰ지구의 가락동 제3호분부터 살펴보자.
가락동 제3호분은 겉으론 많이 파괴되었지만 생각보다 남아 있는 현실玄室[고분 안에 있는, 관을 안치하는 방]의 상태는 괜찮았으며, 유물과 주검 일부도 남아 있었기 때문에 고분의 규모와 구조, 성격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돌방(석실石室)으로 된 현실은 남북 3.7미터, 동서 3.65미터의 거의 정사각형이고, 널길은 남벽과 동벽을 따라 길이 2.9미터, 폭 1.3미터의 긴 네모 형태로 정남 방향으로 나 있어 평면구조의 'ㄱ'자 형 고구려계통의 돌방무덤[석실분石室墳]으로 보았다.
현실 안에서 주검받침(시상대屍床臺: 주검을 올려놓는 널), 돌베개(석침石枕), 발받침(족좌足座) 등의 유물과 널못(관정棺釘), 완전한 형태의 토기뚜껑(토기개土器蓋) 4점, 그리고 토기 파편을 여러 개 수집하였다.
또한 널길에 가까운 현실 남벽과 북벽 가운데서 머리뼈 2구를 발견하였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이 고분의 연대를 묘 자체로만 보면 열국시대인 5~6세기가 될 수 있으나, 토기 양식이 새롭고 돌방 네 모서리에 작은주발(완盌)을 1개씩 배치한 것은 경주 충효리 삼국통일기 돌방무덤에서도 나온 것으로 보아 연대가 7세기 전반이나 더 내려갈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측하였다.
다음은 가락동 제1호 주거지를 살펴보자.
긴 네모 형태의 움집터(수혈주거지竪穴住居址: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올린 집터)로 긴축인 남동-북서 방향이 3.4미터의 축이며, 남쪽과 북쪽 벽선은 1미터가지만 확인할 수 있어 전체 규모는 파악할 수 없었다.
출토유물은 토기로 납작바닥(평저발형平底鉢形: 바닥이 판판하면서 얇고 넓은 모양) 민무늬토기, 구멍무늬토기의 윗부분(유공토기구연부有孔土器口緣部: 토기 아가리 아래쪽에 작은 구멍무늬를 일정한 간격으로 새긴 토기의 아가리 부분), 민무늬토기의 아랫부분 등 민무늬토기가 많이 출토되었다.
석기로는 돌화살촉, 반달형돌칼과 용도를 알 수 없는 석기 등이 확인되었다.
제Ⅱ지구 위치는 유적 동남쪽 경사면 일대로서, 크게 주목할만한 유구遺構[집터 자취]는 발견되지 않았다.
일부 시굴트렌치 구역에서 석렬石列[길게 늘어선 돌무리]이 확인되었을 뿐 더 이상의 유구나 유물은 없었다.
제Ⅲ지구에서는 주거지 3곳을 확인하였다
가락동 제2호 주거지는 폭 60센터미터 정도의 정사각형으로, 부석렬敷石列[잔돌 등을 줄지어 깔아놓은 곳]로서 네 모퉁이를 둥글게 만들었는데, 여기서는 아무런 유구를 발견하지 못했다.
발굴단은 이곳 부석렬을 일반 집과 구별되는 특별한 건물 표시가 아닌지, 아니면 강돌 자체가 어떤 신앙의식과 관계된 건물이나 장소의 표시가 아닌가 추측하였다.
보고서에는 '특별집회소', '특수도구제작소', '신앙의식과 관계된 신망소神望所' 등을 생각할 수 있다고 기록하였다.
가락동 제2호 주거지는 그 형태나 층위는 물론 그 성격 등에서 제3·4호 주거지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그럼에도 발굴단에서 한꺼번에 가락동 제2·3·4호 주거지라 이름 붙인 것은 적절한 명칭은 아닌 듯하다.
특히 발굴단이 그 집터 성격을 주거지와 다른 의미를 부여하였다면 명칭도 다르게 부름이 마땅한 것이었다.
조금 어려운 이름이긴 하지만 '부석유구' 내지 '부석 유적' 정도로 함이 더 적절한 것으로 생각된다.
가락동 제3호 주거지는 긴 네모형으로 약 2×5미터 크기의 비교적 작은 주거지로서 당시 지표에서 15~20센티미터 깊이로 구덩이를 판 집터였다.
주거지 안의 긴축 중앙에 일직선으로 4개의 주 기둥을 세운 것이 기둥구멍으로 확인되었고, 두 기둥 사이가 조금 더 먼 제2기둥과 제3기둥 사이에 화덕자리가 있었다.
가락동 제4호 주거지는 지름 약 6미터의 원형 집터로서 남쪽의 반은 훼손되었고, 그 후에 매몰되어 잡석이 덮여 있었다.
움집 구덩이 깊이는 10센티미터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제2호 주거지보다 낮은 곳이며, 경사면 가까이 있어 유실되고 훼손되었다.
발굴단은 제Ⅲ지구를 민무늬토기인들의 마을유적으로 보았다.
전체적으로 훼손이 심해서 완전한 집터 구조를 밝힐 수 있는 것은 매우 적었지만 상당히 여러 곳의 집터가 밀집되어 있던 지역으로 보았다.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약 1,500제곱미터 면적의 언덕땅(구릉지邱陵地) 평지를 인공적으로 만든 것을 보면 10여 집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제Ⅳ지구에서 가락동 제5호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크기는 동서 3미터, 남북 4.5미터의 타원형으로 동벽과 북벽은 확실한 반면 서벽과 남벽은 이미 유실되어 확실한 선을 찾지 못했다.
기둥구멍을 찾지는 못했지만 이 지역 청동기시대 주거지처럼 기둥을 세우고 반지상半地上에 간단한 지붕을 덮은 것으로 추측하였다.
민무늬토기로 주황색토기 파편 12점, 황색토기 파편 200여 점, 흑색토기 파편 약 120점이, 그리고 석기로는 돌화살촉 4점, 돌끌 2점, 간돌도끼, 숫돌 등이 출토되었다.
이 주거지의 확실한 연대는 알 수 없다.
제Ⅴ지구의 유적은 야산 정상에 가까운 표고 약 50미터 지역에 위치한다.
가락동 제4호분은 봉토 높이가 발굴 당시 3.5미터, 봉토 아래 지름은 18미터로 원형이다.
봉토 정상은 중심에서 북쪽으로 치우쳐 있으며, 봉토 남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룬다.
봉토 중앙부에 5×2.5미터 넓이의 도굴갱으로 추정되는 웅덩이가 파여져 있다.
돌방은 완전 파괴되었지만 바닥면에 깬돌(할석割石)의 석축벽이 일부 남아있어 그 윤곽을 밝힐 수 있었다.
남북 2.3미터, 동서 2.6미터 크기의 네모꼴 현실에 널길이 현실 남동 모서리에 치우쳐 남동 방향으로 연결된 일종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墳: 현실의 한 벽면에 출입문이 있는 내부 구조를 가진 고분을 말하며, 출입문이 없는 내부 구조의 고분을 구덩식돌방무덤(수혈식석실분橫穴式石室)이라 부른다] 구조이다.
출토유물은 이미 도굴이 되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리 많지는 않다.
가락바퀴(방추차紡錘車)[섬유에서 실을 뽑는 도구인 가락(방추紡錘) spindle에 회전을 돕기 위해 끼우는 부속품으로서, 이 가락에서 발전된 기구가 물레] 1점, 찍개(착형鑿形: 조약돌의 한쪽을 깨뜨려 날을 만들고 반대쪽은 손잡이로 삼는뗀석기) 1점, 민무늬토기 파편 2점이 출토되었다.
가락동 제5호분은 4호분의 봉토 정상에서 남동 방향으로 22미터 떨어져 6호분을 북동쪽에 두고 있으며, 3기 중 가장 낮은 산비탈에 위치한다.
봉토 높이는 2.2미터, 바닥 지름은 17미터이고, 봉토 남쪽의 유실이 심한 편이다.
현실은 남북 2.8미터, 동서 2.25미터의 거의 네모난 돌방이다.
돌벽은 긴 네모형의 깬돌로 축조하였으며, 간혹 깬돌 틈에 자갈을 넣기도 하였다.
벽면에 회를 바르거나 점토 다짐의 흔적은 없었다.
출토유물은 금동고리 4점, 철칼, 기와 파편 16점, 토기 파편 등이었다.
가락동 제5호분의 형식은 인근 지역의 백제 초기 고분인 깬돌로 만든 네모돌방무덤(할석축조방형석실분割石築造方形石室墳)과 상통하는 것이라 볼 수 있으며, 축조 시기는 양식 등을 볼 때 4세기로 추정하였다.
발굴보고서를 보면 가락동 5호분은 매우 정성들여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거기에다 금동목걸이 등도 나온 것으로 보아 상당한 권력을 가진 귀족지배층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가락동 제6호분은 제4·5호분과 삼각형을 이루면서 북쪽에 자리잡고 있다.
사람 머리 크기의 돌(인두석人頭石)로 축조된 원형석렬이 먼저 확인되었는데, 지름이 10.5미터이고, 그 중앙에는 냇돌(천석川石)과 20×25×15센티미터 크기의 돌이 그 형태를 알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었다.
돌을 드러내어 보니 바닥만이 일부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발굴단은 완전히 파괴된 고분으로 보았다.
제Ⅵ지구에서는 방이동 제1호분만 조사하였다.
1971년 4월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연구실이 합동으로 당시 성동구 방이동·송파동·가락동에 산재해 있는 백제시대 유적의 지표예비조사를 실시한 결과 방이동 366번지 일대에 백제시대 고분으로 추정되는 고분 6기를 확인한 바 있다.
방이동 제1호분은 이 6기의 고분 중 하나였다.
이후 1973년 5월 5일에 이곳 토지 주인이 뒷산 언덕이 산사태로 돌방무덤의 널길 입구가 노출되어 백제토기 3점을 수습하여 문화재관리국에 신고함으로써 이 일대 고분들이 백제시대 돌방무덤으로 밝혀졌으며, 유적의 중요성이 다시 인정되었다.
이에 1975년 잠실지구 개발에 따라 이 지역의 언덕이 매립에 필요한 토취장으로 되자 문화재관리국이 발굴을 하게 된 것이다.
널길이 노출된 방이동 제1호분의 당시 모습은 뒷산 언덕의 절벽으로서 민가 뒷벽을 대신하고 있었으며, 널길 입구 2미터 아래에에는 한국전쟁 당시 방공호였던 인공 굴이 있었으나 당시 굴은 막혀 있었다.
현실은 동서 2.5미터, 남북 3.1미터의 긴 네모꼴의 돌방 바닥으로 되어 있었다.
1973년 5월 5일 발견 당시에는 현실 안에 토기 3점과 함께 주검받침이 마련되어 있었다고 하나, 그후 인위적으로 현실 내부 바닥이 심하게 훼손되어 발견 당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발굴팀은 이 고분의 성격이나 축조 연대에 대해서는 뚜렷한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제Ⅶ지구는 유적의 서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특별하거나 의미 있는 유구나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2차 발굴조사는 1975년 9월 13일 끝났고, 서울시와 문화재관리국에 10월 8일 발굴결과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하니 채 한 달도 안되어 결과보고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발굴에 참여한 각 대학, 기관별로 보고서 작성 작업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빨리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신속한 사업을 위한 신속한 결과가 필요해서는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개발을 위한 문화유적의 전적인 희생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일부 유적에 대해서는 원상 보존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는 1976년 3차 발굴로 이어졌다.
먼저 방이동 고분군에 대해 살펴보자.
이미 1975년에 조사를 하여 5기의 고분을 확인하였으며, 이번 조사에서는 새로 1기를 발견하였고, 산 366번의 동쪽 즉 옛 도로 바로 건너에 새로 2기의 고분을 확인하여 모두 8기가 이 지역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방이동 제4호분은 봉토가 남아 있었고, 봉토 정상에서 약간 남으로 치우친 부분에 깊이 70센티미터 가량 파여진 구멍자리가 있었다.
조사 결과 돌방 중심부는 남아있는 봉토 정상에서 남동쪽으로 6.5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데, 이것은 지금의 봉토 형상이 원형과 많이 달라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돌방 형태는 남북 234센티미터, 동서 257미터의 거의 정사각형(정방형正方形)이고, 방향은 남북선이 약간 북서-남동으로 기울어져서 정확하게는 343도를 나타내고 있다.
출토유물로는 굽다리접시(고배高杯: 굽은 다리 즉 굽다리가 달린 접시)와 뚜껑, 쇠못, 철판이 있고, 사람뼈 8점이 수습되었다.
사람뼈는 팔뼈 좌우, 왼쪽 손목뼈, 발목뼈, 발가락뼈 2점, 아래턱 어금니가 나왔는데, 모두 합하면 한 사람 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이동 제5호분은 4호분과 같은 능선상에서 북으로 능선을 따라 약 20미터 지점에 있는데, 방이동 고분군 중 제일 높은 위치에 있다.
따라서 위치로 보아 방이동 고분군 중 가장 중심이 되는 지점에 자리잡았다고 할 수 있다.
봉토는 지름 9미터의 원형으로 남아 있고, 발굴 당시 봉토 높이는 나중에 확인된 돌덧널(석곽石槨)의 바닥에서부터 85센티미터밖에 되지 않는데, 원래 높이는 아니고 아마도 세월이 지나면서 봉토 높이가 낮아졌을 것으로 보았다.
돌덧널은 긴축 방향이 70도로 약간 정동남에서 북동동-남서서로 기울어져 있다.
크기는 긴축이 201센티미터, 짧은 축이 142센티미터의 긴 네모꼴로, 돌덧널 깊이는 윗부분이 파괴되어 원래 깊이는 알 수 없으나 발굴 당시 가장 많이 남아 있던 벽의 높이는 42센티미터였다.
발굴단은 방이동 5호분이 가장 높은 지점에 있고, 돌방이 아닌 작은돌덧널임을 고려하여 방이동 고분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방이동 제6호분은 4호분과 5호분이 있는 능선에서 남서쪽으로 140미터 떨어진 지점에 방이동 제1·2·3호분과 함게 하나의 무리를 이루고 있고, 방이동 고분군 중 가장 낮은 위치인 표고 40미터 지점이다.
돌방은 남북이 긴축으로 288센티미터, 동서가 228센티미터의 긴 네모꼴로서, 한가운데 남북으로 중간벽을 쌓아서 서으뜸덧널(서주각西主槨 또는 서주실西主室: 주검을 안치하는 덧널)과 동딸린덧널(동부곽東副槨: 껴묻거리나 순자자를 넣는 덧널)로 나누었다.
전체적으로 돌방은 터널식 구조였던 것으로 보인다.
출토유물로는 발굴 이전에 이미 파괴, 도굴되었기 때문에 사람뼈와 굽다리접시 1점만이 나왔다.
사람뼈는 주덧널의 북서쪽 모서리 자갈 바닥에서 발견되었는데, 파손된 상태의 팔뼈 2점이었다.
굽다리접시는 백제와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토기의 간판 토기로서, 한강 하류 지역의 돌방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은 신라 진흥왕대인 6세기 중엽부터 신라가 한강 지역을 장악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고고학 자료로서 크게 주목된다고 하였다.
즉 보고서에서는 한강변의 돌방무덤들의 연대도 무조건 백제초기 고분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발굴결과로 입증되었다고 보았다.
보고서에서는 마지막으로 방이동 고분군의 축조 시기를 추측하였다.
이번에 조사한 방이동 고분군 중 최하한시대를 보여주는 것은 신라식 굽다리접시가 출토되고 딸린덧널이 딸린 6호분의 축조연대는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장악한 6세기 중엽부터 7세기까지로 추정하였다.
이에 방이동 4호분과 5호분은 상대적으로 6세기보다 올라가게 되는데, 방이동 제4호분은 머리 방향이 남북이고 토기도 검은색이 짙은 경질토기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6호분과 비슷한 연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았다.
반면 방이동 제5호분은 돌덧널무덤의 구조와 출토 토기 등을 보아 3세기 이후 4~5세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하였고, 신라나 고구려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발굴이 끝난 뒤 방이동 발굴단은 발굴한 고분들을 매몰하면서 후세 고고학자들을 위해 흰색플라스틱에 '1976년 발굴'이라는 7자를 국문으로 음각한 것을 3개 고분에다 하나씩 넣었다.
석촌동 일대의 고분 중에 석촌동 제3·4호분은 이미 1974년에 서울대에서 발굴하였다.
이번 발굴에서는 현재 거의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석촌동 제5호분 일부와 여기서 거의 정남 방향으로 약 200미터 떨어져 위치한 석촌동 파괴분을 조사대상으로 하였다.
석촌동 제5호분은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지대라 할 수 있지만 이미 조사된 1·2·3호분과 같이 평지에 만들어졌다.
고분의 외형은 남북이 약간 긴 타원형을 나타낸다.
군데군데 돌덩어리들이 노출되어 있기는 하지만 봉분 자체는 완만한 경사를 지닌 채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남북으로 가장 긴 지름이 14.2미터, 동서로 짧은 지름이 11.0미터로 봉토 정상부까지 높이는 2.0~2.6미터다.
등고선상 높이로 보아 정상부는 22.8~23.0미터의 표고를 나타내고 있지만, 원래 표고는 이보다 조금 높았을 것으로 보고서에서는 추측하고 있다.
석촌동 제5호분은 조사되지 않은 것 중 원형이 양호가게 보존되어 있는 유일한 예이기 때문에 발굴단에서는 조사 착수 이전부터 어떤 방식으로 발굴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계속되었다.
결론은 고분의 성격을 확인하는 것으로 일단락하고 보다 기술이 발전된 때에 완전한 조사를 하자는 것이었다.
즉 이번에는 예비조사만 하고 나중에 정밀조사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결론은 고고학자들의 고뇌가 여실히 느껴지는 대목이다.
개발사업을 위한 긴급 구제발굴임을 고려하여 섣불리 발굴을 하느니 차라리 그대로 보존하고 나중에 발굴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고고학자들의 노력이 지금의 석촌동 고분군의 보존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성백제박물관에서는 2015년 5월 28일부터 6월 10일까지 석촌동 고분군 내 지반이 내려앉아 발생한 동공洞空(공동空洞:텅 빈 굴) 주위에 대한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이후 현재까지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여러 가지 여건상 어느 정도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40년 전 선배 고고학자들이 남겨 놓은 석촌동 제5호분에 대한 의미 있는 재발굴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석촌동 파괴분은 이미 파괴되어 정확한 무덤의 분구墳丘(거대한 흙무덤 언덕)의 크기는 알 수 없으나, 발굴과정에서 나타난 지하부의 잔존 유구 상태로 그것을 복원할 수 있고, 또한 축조 과정과 구조를 밝혀낼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여러 개의 움무덤(널무덤 또는 토광묘)을 하나의 거대한 봉토로 덮은 무덤(봉토다광묘封土多壙墓)의 집단묘 성격을 띠고 있다.
이 무덤은 본래의 평지 위에 약간 높은 점토대지를 흙다짐(판축板築)한 다음 그 위에 여러 개의 움무덤을 만든 다음 작은 봉토로 덮고, 이것을 하나의 큰 봉토로 씌우는 것이다.
즉 남북으로 연이어 2개의 작은 봉토분과 여기서 동쪽으로 후세에 만든 작은 봉토분을 합한 거대한 타원형 분묘로서, 네 모서리에는 이 분묘를 견고히 하면서 유실을 방지하기 위한 이음돌(즙석葺石: 봉토의 위쪽에 한두 겹만으로 얇게 펴서 깐 돌)을 약 30센티미터 크기의 깬돌과 이보다 작은 냇돌로 덮고 있는 것이다.
작은 분구의 지름은 1.5미터 내외지만 전체적인 남북 지름은 38미터로 거대한 봉토분인 것이다.
발굴보고서에서는 움무덤 Ⅰ·Ⅱ·Ⅲ·Ⅳ·Ⅴ로 나누어 세부구조를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제3차 발굴보고서에서는 3년간에 걸친 잠실지구 유적조사사업을 마무리하면서 종합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인상적인 내용은 마지막 종합의견에서 '이 불행스러운 조사작업을 통해서'라는 표현이다.
즉 "우리들의 조사는 자발적인 연구 위주의 사업이 아니라 서울시 확장에 따른 강요된 탐색 및 정리 사업이었으며, 그중에는 앞으로 없어질 것을 전제로 한 유언·유물 받아두기식 구제조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였다"는 서술을 통해서도 알 수 있었다.
이번 구제발굴에 참여한 고고학자들은 이번 조사가 유용하고 가치가 있는 조사였지만 한편으론 중요한 유적이 많이 없어지는 불행한 조사로 기억하고 있어 학자들의 안타까운 학문적 고뇌를 종합의견에서 엿볼 수 있었다.
이에 발굴단은 크게 두 가지 의견을 제시하였다.
먼저 학술적으로는 이 지역의 고분 조사를 통해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하면서, 이 지역의 고분들은 돌무지무덤(적석총), 여러움무덤(다광묘), 석실분(돌방무덤) 등 다양한 형식을 망라하고 있으며, 같은 돌방무덤 중에서도 이른바 'ㄱ자식' 'T자식' 평면 이외에도 현실의 모서리에 통로인 널길(연도羨道)가 달린 것, 현실 안에 경계벽을 만들어 2개의 방으로 나눈 형식 등 그 형식이 다양하고, 구조로 보나 출토유물로 보아 이들 돌방무덤 전부를 백제의 것으로 보기에는 힘든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서, 이 지역 고분들 중에 신라인의 고분들이 섞여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1970년대 발굴단의 이런 견해는 206년 현재까지도 연구자들 사이에 논쟁거리를 주는 계기가 되었다.
즉 방이동 고분군이 한성백제의 무덤인지, 아니면 6세기 중반 이후 신라인들의 무덤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마다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방이동 고분군은 이후 다시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2017년 3월 30일부터 8월 20일까지 방이동 3호분에 대한 발굴이 한성백제박물관에 의해 실시될 예정이라 방이동 고분군에 대한 논쟁에 좋은 자료를 제시하기를 기대한다.
그리고 발굴단은 마지막으로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에 대해 원형 보존을 건의하였다.
즉 아파트 건설에 의한 역사 파괴를 방지하고, 아파트 단지 안에 역사의 정서가 흐르는 녹지대를 만들어 역사 학습장이자 우리 문화와 역사의 전통을 보여주는 명소로 만들고, 나아가 사적공원으로 발전시킬것을 문화공보부와 서울시에 건의한 것이다.
이 건의는 받아들여졌다.
현재 금싸라기 땅인 송파구에 남아있는 석촌동 고분군과 방이동 고분군은 이런 고고학자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지금 생각하면 많은 의미 있는 유적들이 아파트에 묻혀 있어 아쉬움이 크다.
특히 가락동 지역 고분들은 방이동과 석촌동 지역 고분들과의 비교 검토를 통해 이 지역의 문화 양상을 이해하는 좋은 자료임이 틀림없어 더욱더 아쉬움이 큰 것이다.
그러나 석촌동과 방이동 고분군이 40년만에 발굴을 재개하는 것처럼, 이 지역의 나머지 유적들도 언젠가는 다시 빛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실낱같은 희망을 가져본다.
※출처
1. 서울역사편찬원, '서울의 발굴현장'(역사공간, 2017)
2. 구글 관련 자료
2021. 7. 17 새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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