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샘(淸泉)
코핀과 스테이시의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 2부 그리스•로마 세계 - 5장 로마 문명 1: 초기 이탈리아와 로마 왕국 본문
그리스인이 페르시아와 맞서 싸우고 뒤이어 내전 상태에 휘말리는 사이에 새로운 문명이 중부 이탈리아 Italia의 테베레 Tevere 강가에 등장하고 있었다.
서기전 4세기 말 로마 Roma(영어 Rome)는 이미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 세력이 되어 있었고, 그 후 500년 동안 로마 세력은 착실히 성장했다.
서기 1세기에 이르러 로마는 서유럽 대부분 대부분과 헬레니즘 세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로마는 지중해 세계를 최초로 통일했고 지중해를 '로마의 호수'로 만들었다.
로마 제국 Roman Empire(라틴어 Imperium Romanum)은 그리스의 제도와 사상을 지중해 세계 서부뿐만 아니라 브리튼, 프랑스, 에스파냐, 루마니아 등에도 전했다.
그 결과 로마는 유럽을 고대 근동의 문화적·정치적 유산과 연결하는 거대한 역사적 교량 역할을 담당했다.
로마가 없었다면 오늘날 유럽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엄청나게 많이 받았지만 로마 그 자체로도 하나의 독특한 문명이었다.
로마인은 그리스인보다 전통적 가치에 한층 더 집착했다.
로마는 오랜 전통의 농업, 가정을 지키는 신들, 엄격한 군사적 가치 따위를 존중했다.
그러나 제국이 성장하면서 로마인은 세계를 문명화할 신성한 사명—로마인 특유의 천재적 재능인 법률과 정치 기법을 가르침으로써—을 갖고 있다고 자부하게 되었다.
로마의 위대한 서사시인 베르길리우스 Vergilius(영어 Virgil)(서기전 70~서기전 19)는 로마의 역사적 사명에 대한 자긍심을 ≪아이네이스 Aeneis(영어 Aeneid)≫에서 표현했다.
이 서사시는 도시국가 로마 건국에 관련하여 로마인이 소중히 간직했던 전설 하나를 들려주고 있다.
여기에서 트로이 Troy의 안키세스 Anchises는 그의 아들 아이네아스 Aeneas에게 예언적인 말을 들려준다.
베르길리우스의 설명에 따르면 아이네아스는 로마 시의 건설자가 될 인물이었다.
로마인에 대해 언급하면서 안키세스는 아들에게 그의 백성인 로마인의 미래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다른 자들은 청동을 두들겨 살아 숨 쉬는 것 같은 형상들을 만들어내고(나는 그렇게 믿는다)
대리석에서 살아 있는 얼굴을 이끌어낼 것이며,
다른 자들은 탁월한 웅변으로 변론할 것이며,
또 다른 자들은 하늘의 운동을 막대기로 추적하며 언제 별들이 뜰 것인지 예언해 줄 것이다.
로마인이여, 너는 명심하라. (이것이 네 예술이 될 것이다.)
권위로써 여러 민족들을 다스리고, 평화를 관습화하고, 패배한 자들에게는 관대하고,
교만한 자들은 전쟁으로 분쇄하도록 하라."
로마에 정복당한 모든 민족이 그런 경험을 반긴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모든 민족이 로마의 정복으로 변화되었다.
초기 이탈리아와 로마 왕국
이탈리아 반도의 지세는 로마 발전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고대 이탈이아에는 상당한 면적의 숲과 그리스보다 훨씬 비옥한 땅이 있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다.
이탈리아에는 엄청난 매장량의 대리석과 소량의 납·주석·구리·철(엘바 Elba 섬)·은 등이 있었지만, 그 밖의 광물자원은 거의 없었다.
이탈리아의 긴 해안선에 좋은 항구는 단지 몇 개뿐이었고, 그나마 대부분 그리스와 근동의 반대편인 서해안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안심해도 될 만한 자연적 방어물도 없었다.
알프스 Alps는 유럽에서 유입되는 인구에 대한 장애물 구실을 사실상 하지 못했고, 이탈리아의 낮은 해안지대는 바다를 통한 정복에 취약했다.
간단히 말해서 이탈리아는 매력적일 만큼 풍로웠지만 방어가 취약한 곳이었다.
로마인은 이탈리아 땅에 정착하는 순간부터 엄격한 군대 사회였다.
다른 침략자들에 맞서 그들의 정복지를 지속적으로 지켜내야만 했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인
이탈리아 반도의 초기 주요 거주자는 에트루리아인 Etruscan으로 알려진 비非인도-유럽어 민족이었다.
이 민족에 대한 우리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들 언어가 그리스어 알파벳으로 기록되긴 했으나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트루리아인의 정착은 후기 청동기시대가지 거슬러 올라가며, 그들은 일찍이 그리스 및 아시리아와 빈번히 접촉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6세기에 에트루리아인은 북부 와 중부 이탈리아에 독립적 도시국가들의 연맹체를 수립했다.
그들은 세련된 금속 세공인이자 예술가·건축가였으며, 나중에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에게서 아치 arch(곡선 구조물)와 볼트 vault(아치에 씌운 지붕)에 대한 건축 지식을 포함해 많은 것을 배웠다.
에트루리아인은 그리스인과 알파벳을 공유했고, 또한 (동물 형상이 아닌) 인간 형상의 신들을 숭배하는 종교를 공유했다.
그리스의 관습과는 달리 에트루리아 여성은 비교적 높은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에트루리아 여성은 공공생활에 참가했고, 연극 공연과 운동 시합(둘 다 그리스 여성에게는 금지된 일이었다)에 참여했다.
에트루리아 여성이 춤을 춘다는 사실은 그리스인과 로마인에게 충격적인 일이었다.
에트루리아인 아내는 남편과 함께 식사를 했고, 공식 연회에서 남편과 같은 소파에서 함께 기댔으며, 죽은 뒤에는 묘지에 함께 묻혔다.
일부 에트루리아 가문에서는 모계로 혈통을 따졌다.
서기전 5세기와 4세기의 로마 여성은 그리스 여성보다는 사회적으로 덜 격리되어 있었지만 에트루리아 여성만큼 자유를 누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로마 사회는 에트루리아에게서 엄청난 영향을 받았다.
로마의 아치와 볼트뿐만 아니라 잔인한 검투 경기, 동물 내장이나 새가 나는 모습으로 장래를 점치는 관습 등은 에트루리아인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거대한 석조 신전과 거기서 치러지는 의식을 중심으로 도시생활을 하는 로마니인의 관습 또한 에트루리아인들에게서 받아들인 것이다.
로마 건국에 관한 로마인의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전설—트로이의 아이네아스 Trojan Aeneas 이야기와 부모에게 버림받은 뒤 늑대에 의해 양육된 로물루스 Romulus와 레무스 Remus 쌍둥이 형제 이야기—도 에트루리아인에게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로마인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거주자들에게서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그리스 본토에서 온 이주민은 서기전 8세기에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대대적인 규모로 정착하기 시작했고, 서기전 7세기 말 이탈이의 그리스 문명은 그리스 본토와 맞먹을 정도로 발전했다.
피타고라스와 아르키메데스, 플라톤 등은 한동안 그리스인 거주 이탈리아 지역에서 살았는데, 그곳은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에 벌어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주요 전장이 되었다.
로마인은 그리스인에게서 알파벳, 여러 가지 종교 관념(그리스의 영향과 에트루리아인의 영향을 분리하기 어렵지만), 예술과 신화의 상당 부분을 받아들였다.
로마의 고급문화는 광범하고도 철저하게 그리스적인 것에서 영감을 얻었고 또 그것을 모방했다.
○로마의 흥기
로마인은 서기전 2천년기에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들어온 인도-유럽어 사용 민족 집단의 후손이다.
최근 고고학 연구는 로마 시의 기원을 늦어도 서기전 10세기로 소급하고 있는데, 이는 로마인의 전승에서 도시 건설 연대로 간주한 서기전 753년보다 몇 백 년 앞선 것이다.
테베레 강가에서 자리 잡은 로마는 많은 전략적 이점을 갖고 있었다.
상선—대형 전함은 불가능했다—이 테베레 강을 거슬러 로마까지는 항해할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올라가지 못했다.
그러므로 도시는 바다로부터의 공격 위험 없이 항구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었다.
로마의 유명한 언덕들이 방어를 더욱 쉽게 만들었다.
로마는 또한 테베레 강을 가로지르는 가장 좋은 여울목에 위치했으므로 자연스럽게 육지와 강의 교차로가 되었다.
라티움 Latium(라틴인 즉 로마인의 땅)과 에트루리아(에트루리아인의 본거지) 사이의 국경 지대에 위치했다는 점도 이 도시의 상업적·전략적 중요성을 높였다.
라티움의 지형—자연 장애물이 거의 없는 넓고 탁 트인 평원—은 로마가 이웃 공동체를 다루는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일찍이 로마인은 다른 라틴 공동체들과 통상권 commercium(라틴인 사이에 체결된 모든 계약은 라티움 전역에서 강제력을 갖는다), 통혼권 conubium(라틴인은 남편과 아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서 법적 승인을 얻어 결혼할 수 있다), 이주권 migratio(한 도시에 거주하는 라틴인은 다른 도시로 이주할 수 있으며 그곳에서 여러 해 머물 경우 이주 도시의 시민권을 획득했다)과 같은 일련의 공동권을 확립했다.
'라틴권 Latin Right'으로 알려진 이 특전은 수메르나 그리스의 도시들을 분열시켰던 완고한 지역주의 및 질시·의심과 크게 대비된다.
라틴권을 라티움 밖으로 기꺼이 확대하려 했던 로마인의 의지야말로 나중에 로마인이 이탈리아 반도 전역으로 팽창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었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의 정치체제는 처음에는 왕정이었다.
부족장인 왕은 마치 한 집안의 가장이 가솔에게 하듯이 신민에게 사법권을 행사했다.
원로원 senatus—또는 장로회의(라틴어 senex는 '노인'이란 뜻)—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여러 씨족의 우두머리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이 원로원의 초기 기능은 불분명하다.
아마도 로마 왕에 대한 자문기구였을 것이다.
그러나 왕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설에 따르면 서기전 534년 에트루리아 참주 타르퀴니우스 오만왕 Tarquinius Superbus(영어 Tarquin the Proud)이 로마 왕권을 장악했다.
에트루리아의 권력 장악은 로마를 번영하는 촌락에서 진정한 의미의 중심 도시로 변화시켰다.
타르퀴니우스가 로마의 전략적 이점을 이용해 라티움 및 남쪽의 풍요한 농업 지역 캄파냐 Campagna를 지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로마인을 매우 잔인하게 지배했다.
결정적인 모욕 사건은 서기전 510년에 있었다.
그해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섹스투스 Sextus는 로마 귀부인 루크레티아 Lucretia를 성폭행했다.
루크레티아가 자신의 치욕스러운 삶을 포기하고 자살을 결행하자 로마인은 반란을 일으켰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인의 전제정치뿐만 아니라 왕정 자체를 완전히 철폐해버렸다.
루크레티아 이야기는 아마도 애국적 전설일 것이다.
그러나 서기전 500년 무렵 로마 정치체제에서 왕정이 종식되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변화(그 변화가 갑작스런 것인지 점진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 후 로마인은 마치 그리스인이 참주에 대해 가졌던 것과 동일한 두려움과 경멸로 왕권을 바라보게 되었다.
루크레티아의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초기 로마인이 정부와 가족에 대해 갖고 있던 태도의 많은 부분을 말해주고 있다.
※출처
1. 주디스 코핀 Judith G. Coffin·로버트 스테이시 Robert C. Stacey 지음, 박상익 옮김, 새로운 서양문명의 역사 (상): 문명의 기원에서 종교개혁까지, Western Civilizations 16th ed., 소나무,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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